어느 죽산안씨 카페 주인은 농서이씨설과 아무 관계없는 광주안씨 역대 시조 기록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
---------------------------------------------------
반론글
광주 시조가 고려사에 나오지 않으니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대다수 성씨들의 시조가 역사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 문중에 예로부터 그렇게 전해 왔을 경우 그대로 믿고 인정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리고, 광주안씨 시조가 고려사에 나오든, 아니든 왜 아무 관계없는 죽산안씨가 인정한다 만다하며 예의에도 벗어난 월권 행위를 하는지 모르겠다. 광주안씨는 처음부터 시조를 고려 대장군 휘 방걸로 기록해 왔는데, 왜 이제와서 관계없는 죽산안씨가 나서서 당신들 시조 기록은 틀렸고, 우리가 새로운 시조를 가르쳐 주겠다며 황당한 주장을 하는지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광주 시조만 고려사에 안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흥시조 자미공이나, 죽산이 종전까지 시조로 해왔던 소감공(준)이나 복야공(영의) 모두 고려사에 안 나오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그 분들을 시조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은 남아 있는 최초의 시조 기록(대개 1500년대 것임)에서부터 그렇게 나오기 때문이고, 최초 기록이 만들어질 당시에는 그 분들에 대한 기록이 최소한 그렇게 전해왔다고 볼만한 근거도 어느 정도 있다. 또 특별히 선대로부터 전해온 것이 아니라 후대에 조작한 것이라고 볼만한 내용도 없다.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광주안씨는 사간공(安省, 1344-1421)이 3권의 족보를 만들었다고 하니, 거기에 뭔가 시조에 대한 기록이 들어 있었을 것이고, 그 내용이 최소한 증손자대까지는 전해졌을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아니다. 1500년대 초 사간공 증손자(안윤손) 묘비에 시조가 고려 대장군 방걸이라고 나온다. 이후의 광주 시조 기록은 내용상 약간의 출입은 있어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역대 광주안씨 시조 기록은 한결같이 고려 대장군 휘 방걸로 해 왔기 때문에 여기에 신라말 807년 중국서 왔다는 이원의 아들 3형제 중 한 사람이라는 죽산안씨 측 주장이 끼어들 여지는 없는 것이다.
족보를 연구한 학자들의 의견도 1600년 이전의 기록은 조작이 별로 없고, 비교적 고증에 충실했으나, 1700년 이후에는 조작이 난무하고, 위보가 성행했다고 하고 있다. 바로 농서이씨설이 그러한 무렵인 1700년대 말에 처음 나타난 것이다. 농서이씨설이 문제되는 것은 안씨 3문중 어디에도 그런 설이 전해오지 않았고, 신라 때 일이라는게 1700년대 말에 아무 근거문헌도 없이 느닷없이 나타나 유포되었음에도, 20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도록 안씨 3문중 어디에서도 그 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 제일의 역사학자로 평가받는 순암 안정복(1712-1791)선생이 당시 이러한 설이 나돌아 다니자 후대에 전해져 믿게 될 것을 염려하여 1790년에 이미 그것이 허구임을 밝히는 글까지 남겨 놓았다. 오늘날 죽산 시조라는 방준이 처음 등장하는 기록에서 조선조 제일의 역사학자가 그런 사람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죽산 측이 1909-1924년 경에 위보의 혐의가 짙은 안윤채 고려말 족보(?)를 죽산안씨 족보에 싣고, 1976년에는 이를 그대로 인정하여 시조를 방준으로 바꾸고, 광주안씨들이 동생 집안인 것처럼 황당한 계보를 싣고, 마치 사실인 것처럼 주장을 펼치고 다니니 광주안씨들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신라말 조상이 고려말 관직인 판도판서를 지냈다고 나오는 족보를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 드는가?
죽산안씨들이 주장하는 농서이씨설은 죽산 문중에 전해오는 전통적인 기록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그 근거를 남의 문중기록에서 찾아내야 하는 딱한 처지이지만, 해당 문중에서는 그러한 기록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도대체 1976년에 와서 시조를 자신들 문중 기록에 전해오지도 않은 새로운 사람으로 바꾸어 내세우는 황당한 성씨가 어디에 있는가? 자신들 선조들도 몰랐고, 기록으로 남긴바도 없으며,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 중국 사람을 무엇을 근거로 느닷없이 조상이라고 내세우는가?
그것도 자신들 조상만 그렇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관심 가질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왜 남의 집안인 광주안씨까지 끌고 들어가 자기들과 같이 조작된 허구 인물의 후손이라고 강변 하는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
모 죽산 안씨가 광주 시조 기록은 고려사에 나오지 않아 못 믿겠다고 하니, 고려사에 나오는 것만 믿겠다면 고성이씨 시조 이황에 대한 기사가 고려사에 1033년과 1063년 두 번 나오는데, 이것은 왜 믿지 않고, 엉뚱하게 807년에 당나라에서 왔다고 주장하는지도 이해 불가능하다. 이황이 807년에 당나라서 왔다는 것은 어느 사서에 나오는가?
#高麗史5卷-世家5-德宗-02-08- (1033 년) 좌우위(左右衛)의 맹교위(猛校尉) 오행(吳幸), 이황(李璜), 신선립(申先立) 등이 거란 군대 7명을 생포하여 왔으므로 그들에게 벼슬을 한 등급씩 높여 주었다. 左右衛猛校尉吳幸[李璜]申先立等抄掠丹兵七人賜職一級.
#高麗史8卷-世家8-文宗2-17-09- (1063 년) 신축일에 이황(李璜)을 호부상서로, 박희중(朴希仲)을 섭(攝) 공부 상서로 각각 임명하였다. 辛丑以[李璜]爲戶部尙書; 朴希仲攝工部尙書.
광주안씨 시조 기록은 사서에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사서가 당시 있었던 모든 일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으므로, 그 때문에 틀린 것이라고 판단할 근거가 되지는 못 한다. 물론 사서와 명백히 어긋나는 내용이 있다면 틀린 것이라 말할 수는 있을 것이나, 전통적인 광주 시조 기록에 그런 내용은 없다.
반면에 죽산안씨 측이 주장하는 농서이씨설은 사서에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그 내용이 사서에 나오는 기록들과 상충하기 때문에 도저히 역사적 사실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위 고성이씨 관련 기록도 그러하지만, 신라말에 이원의 아들 3형제를 당시 없던 지명을 따서 죽산군, 광주군, 죽성군에 봉했다는 것도 사서의 기록과 어긋난다. 농서이씨설은 사서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틀렸다기 보다, 사서와 어긋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틀린 것이다. 이 설은 죽산 문중에 예로부터 전해오던 것이 아니며, 죽산 문중 내에 이 설을 뒷받침할만한 옛 기록도 없고, 그렇다고 믿을만한 외부 근거 문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신라말 당시부터 전해오던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지어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