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복음 강해(80)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2022.08.16 화)
본문 : 누가복음12:4-7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바리새인과 논쟁을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경고하셨습니다. 이유는 종교적, 사회적 지도자인
그들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전체 공동체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위선적인
행동은 유대인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합니다.
사람들은 힘 있는, 권위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속담 중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
‘낙동강 잉어가 뛰니 사랑방 목침도 뛴다’,
‘남이 장에 가니 거름 지고 장에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이 하는 것을 줏대 없이 따라 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일이 드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남이 한다고 무조건 따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진리를 따르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 모든 사람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이 바리새인처럼 ‘초심’, 즉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을 생각 없이 무조건
추종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외식’이 단순히 외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경고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 앞에 그 외식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겉치레로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상당히 놀랐을 것입니다.
제자들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당시 권력자들인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교사를
이렇게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직설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이유를 대답해 주십니다.
4절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여기서 잠깐 예수님이 제자들을 ‘내 친구’라고
부르신 것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른 곳은
공관복음서에서는 여기가 유일하지만...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이 ‘친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친구’란 서로 비밀이 없는 사이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친구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들은 모든 것을
제자들에게 다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이 아주 특별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말씀하실 때에....
‘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우리도 친구되신 예수님께 우리의
속마음을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왜 예수님은 두려움 없이
당시 권력자들인 서기관, 바리새인, 율법교사를
직설적으로 비판할 수 있었을까요?
4절b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의 권력자들은 몸을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세상의 권세 잡은 자들을 두려워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인정하십니다.
실제로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육체의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몸을 죽일 수는 있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몸을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책망...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죽음으로 모든 것이
안고 간다”는 유서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덮여지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심판이 있고 진짜 멸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예수님은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이 있는데....
그는 몸을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육신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혼의 심판입니다.
육신은 잠깐이지만, 영혼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애굽 왕 바로는 히브리 노예들을 학대하지만,
학대를 받을수록 그들은 더욱 번성하여 갔습니다.
그러자 급기야 바로는 히브리 산파(십브라와 부아)에게
은밀히 명령을 내립니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의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출1:17) ...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려두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도 목숨을 건졌습니다.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고 묻자
산파들은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참 지혜로운 산파들입니다.
성경은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산파들은 서슬 퍼런 왕의 말 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의 시위대 장관
보디발의 집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신임을 얻어 그 집의 총책임을
지고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큰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때에 요셉이 자기를 유혹하는 그 여자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그것 때문에 오해를 받아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죄의 유혹은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의 감옥행은 그가 애굽의
국무총리로 발탁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요셉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코람데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눈 앞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보여주듯이,.....
우리가 진정으로(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분은
세상의 권력자가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우리의 삶 전체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세상 권력자들이나 종교적 위선자들의 허세나
위협에 굴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인들 앞에서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이(우리가) 세상 권력자들의
협박에 굴복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이유를 설명해 주십니다. <6-7절>
6절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비교하기 위하여 주님은....
‘참새 다섯 마리’의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는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앗사리온 -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의
16분의 1, 두 앗사리온이면 8분의 1 데나리온).
마 10장에서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린다”(마10:29)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계산해 본다면, 두 앗사리온에 살 수 있는
참새는 본래 네 마리입니다.
한 마리는 덤으로 끼워준 것입니다.
그만큼 저렴한 가격입니다. 붕어빵 가격에 같은 것입니다.
몇 마리 사면 한 마리 더 끼워줄 수 있을 정도로
값어치가 나가지 않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덤으로 여겨지는 그런
참새 한 마리의 목숨도.....
하나님은 결코 잊어버리는 법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물며’ 덤으로 끼워주는 참새 한 마리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은 어떻게 여기시겠습니까?
(7절b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대신 죄를 사하여
주실 정도로 귀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분이십니다.
그만큼 관심 있게 지켜보고 계시다는 뜻이고,
정확하다는 뜻입니다.
또 그만큼 실수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욥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욥 11:11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성을 표현하기 위해....
‘생명책’에 그 사람의 모든 행실이 기록되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계 20:12-14).
사람의 모든 행위가 그 책에 기록되고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는다는 증언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우리아의 아내(밧세바)를 범하고,....
그녀가 임신을 하자 자신의 범죄를 감추려고,
전쟁터에 있던 우리야를 귀환시킵니다.
그러나 충성스럽고 의리 있는 우리야는
자신의 전우들이 전쟁터에 있는데......
자신 혼자 집에 돌아온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와 동침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요압을 시켜서 우리아를
최전선에 내어 보내고.....
후퇴하여 적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윗과 요압 둘만 아는 일입니다.
요압은 이 일을 감쪽같이 숨겨주었습니다.
다윗의 계략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다윗은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왔습니다(삼하12:1-7).
하나님이 잠잠히 보신 일을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자고,
다른 한 사람은 가난합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자는 아무것도 없고 작은 암양 새끼 하나를
딸처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왔는데......
부자가 자기의 양과 소를 잡기가 아까워서,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아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크게 노하여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에게
“당신이 그 사람이라”이라고 책망합니다.
완전범죄를 꾸몄고, 성공적으로 마친 듯했으나,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나의 실상입니다.
그것이 현재 나의 모습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나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세상에 매여있는 ‘육신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한다면
‘영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로 유명한 존 녹스 목사의
무덤 앞 묘비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누워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초대교회와 같은 그런
극심한 박해 상황에 놓여있지는 않지만.....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어 고백하는 일을 주저하게 만드는 ....
여러 가지 압력들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지금 성도님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시선이나 평가를 두려워합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들이나 친구들의
조롱과 박해를 두려워합니까?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직장 상사들에게
받을지도 모를 불이익을 두려워합니까?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십시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면
그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참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바라기는 저와 성도님들이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참 자유를 누리는 ....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