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 소설을 언제 읽었던가.
가물거리는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중학교 때, 백일장 대회에서 입상하여
상품으로 받았던 <삼중당 문고>에
실려 있는 걸 읽었던 것 같다.
현진건의 작품으로는
빈처
B사감과 러브레터
운수 좋은 날
세 편이 기억난다.
다시 읽어볼 엄두는 나지 않고
희미한 기억을 따라
내용을 떠올려 보자면
대충 줄거리가 이렇다.
시대 배경: 1920년 대
공간 배경: 서울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는
가난한 인력거꾼으로
며칠째 전혀 돈을 벌지 못했다.
나라를 빼앗긴 시대적 암울함과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고달픔의
무게가 어떠했을지...
나라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하는 가운데
도시 하층민들의 처지가 어떠할지는
말해 무엇하랴.
일방적으로 불리한 코너로 몰린 채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는 일조차
심각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김첨지도 그런 위기에 놓여있었다.
그러니 아기를 낳고서도
섭생을 제대로 하지 못한
그의 아내는 만성 영양실조에 허덕였고
더군다나 요즘은 기력이 다해
자리에 누워 꼼짝을 못 하고 있었다.
얼마 전 김첨지가 사 왔던
좁쌀로 밥을 지으면서
채 익기도 전에 허겁지겁
손으로 퍼먹다가 그만
단단히 체하고 말았는데
의원은커녕 약도 사 먹을
형편이 안 되는지라
아내는 그저 드러누워
끙끙 앓기만 했다.
김첨지가 막 집을 나서려는데
그의 아내가 기운이 다 빠진 소리로
"오늘은 안 나가면 안 돼요?"
한다.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신음 같은 그 말에 김첨지는
잠시 어딘가 불길한 생각이 스치며
발걸음이 주춤했지만 이내
고개를 휘젓고 나가버린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부슬부슬
처량맞은 비가 내리는 날.
그날은 기가 막히게
운수가 대통한 날이었다.
연신 손님이 끊이지 않아
김첨지는 큰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꿈인지 생시인지 오락가락할
행운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첨지는 한편으로
아까부터 계속 묵직한 무언가에
짓눌리는 심정이었다.
음산한 비와 뜻밖의 행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은
행운을 뒤따르는 불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설렁탕 한 그릇 먹어봤으면...'
하던 아내의 읊조림이 계속
김첨지의 마음에 울리고 있었다.
마지막 손님을 태워다 주고
일을 마친 김첨지는
전대에 가득한 돈을 만지작거리며
단골 선술집에 들렀다.
이곳은 그늘진 그의 삶에서
유일하게 도피처가 되는
힐링의 장소였다.
아까부터 무언가가 김첨지의
마음을 집요하게 잡아끌었지만
그는 애써 외면하면서 술을 들이켰다.
살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마음을 잡아끌 때는
우리는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감에 더해 육감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그렇다.
술에 잔뜩 취한 김첨지는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가 울다가 하며
친구를 향해
아내가 죽을 거라는 술주정을 한다.
이거였다.
불행한 예감은..
아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걸 그는
마음의 눈을 질끈 감고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렁탕.
가난한 아내가 그토록 먹고싶다던
뜨끈한 국물.
그것도 사줄 형편이 안 되었던
자신의 무능함에 화가 나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짜여진 사회 구조의 굳건한 틀에
자신은 한낱 바위를 향해 던지는
나약한 계란 한 알에 불과한 것이라는
관념이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그는 울컥했다.
어지간히 취한 김첨지는
이제야 귀가를 서두르며
취해서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설렁탕 집으로 발걸음을 서두른다.
진작부터 얼마나 마음에 사무쳤던가.
마른 나뭇잎처럼 바싹 마른
아내가 그토록 먹고싶어하던
설렁탕 한 그릇 사주는 일이.
너무나 간절했던 소망이었기에
그는 일부러 더
뜸을 들였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도착한 김첨지는
이상한 고요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괴이한 적막을 뚫고
아기의 울음 소리가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다.
일부러 쌍욕을 해가며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힌
김첨지의 눈앞에 축 늘어진 채
누워있는 아내의 모습이 들어온다.
"이년아, 말을 해라."
라고 아내의 머리를 흔들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보지만
아내는 반응이 없다.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그의 아내는 죽어있었다.
흰 창이 검은 창을 덮은
아내의 눈을 보면서
김첨지는 그제서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김첨지는 미친 듯이 제 얼굴을
죽은 아내의 얼굴에 비비대며
이렇게 중얼거린다.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아내를 향해 다정한 말 한 마디,
띠뜻한 손길 한 번 주지 않았던
투박하고 거칠기만 한 김첨지는
그 나름대로의 아내 사랑이 있었다.
고단한 하루하루를 견디게 하는
원동력이 아내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밖에 아내를
사랑할 수 없었고
떠나보내게 되었다.
운수 좋은 날은 김첨지에게는
역으로 가장 비통하고
비극적인 날이었다.
현진건 <운수 좋은 날>
애니메이션
https://youtu.be/nR0E8aIzoU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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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띠들동행
운수 좋은 날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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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6
24.04.27 14:20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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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눈물 떨어지게 만드는 김첨지.
잘 보았습니다.
흐흐흑
엔딩 장면에 마음이 먹먹해지죠
@무비 그때나 지금이나.
살아가는 환경만 바뀌었을뿐.
슬픈 스토리입니다.
돈이 없어서 약도 못사다주고,
애기는 어뜩하나.
아프지말구 건강하게 삽시다요.
@아~우루사
저도 그 생각했어요
아기는 어찌될 것인가..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모여 만든 사회공동체도 불완전한 거고
그 틈바구니에서 비롯되는
고통과 비극은 역사 이래로 늘 계속되는 거죠.
눈물도 꽃이 될 수 있어요^^
왜~?
그 시대에 자화상이겄지만
내 할배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지런한놈 입에는 거미줄
안 친다 했는디요~~
비빌 언덕이 없어
부지런할 기회조차 없는 경우도
생각해 봐야죠~
@무비 별로 할일없으시면
여기와서 상추좀 심어유
호박에 가지에
이밭 네 고랑이
내 농사터인데
일손 모질라유
고구마도 심어야하고
당근 알바비도 드리고
참 제공두 합니다~ㅋㅋ
@민스 일손 도우면
수확물은 반띵인가요? ㅋㅋ
@무비 당근이지유~~
무비님
어린시절부터 글을 잘 쓰셨군요
감상문이 단편소설 읽는것 보다도 더 재밌네요
현진건 나도향 김유정...등등
그시절 배깔고 엎드려 보던 생각이 나네요..ㅎ
그냥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원래는 시를 썼었지만
중간에 내팽겨쳤어요 ㅎㅎ
읽으면서
아릿했던 기억이
무비님의 글 솜씨에 다시 또 울컥해 집니다
마지막이 너무 슬프죠
소원하던 설렁탕 한 그릇이라도 먹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늘 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