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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죽비 ! ! !)
참선 및 입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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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관 공부하기
(청연거사님 발표자료)
第三則 俱胝竪指
俱胝和尙 凡有詰問, 唯擧一指. 後有童子, 因外人問, 和尙說何法要. 童子亦竪指頭.
구지화상 범유힐문, 유거일지. 후유동자, 인외인문, 화상설하법요. 동자역수지두.
胝聞, 遂以刃斷其指. 童子負痛號哭而去, 胝復召之, 童子廻首, 胝却竪起指, 童子忽然
領悟.
지문, 수이도단기지. 동자부통호곡이거, 지부소지, 동자회수, 지각수기지, 동자홀연영오.
胝將順世, 謂衆曰, 吾得天龍一指頭禪, 一生受用不盡, 言訖示滅.
지장순세, 위중왈, 오득천룡일지두선, 일생수용부진, 언흘시멸.
無門曰, 俱胝幷童子, 悟處不在指頭上. 若向者裏見得, 天龍同俱胝幷童子, 與自己一串穿却.
무문왈, 구지병동자, 오처부재지두상. 약향자리견득, 천룡동구지병동자, 여자기일관천각.
頌曰, 俱胝鈍置老天龍, 利刃單提勘小童, 巨靈擡手無多子, 分破華山千萬重.
송왈, 구지둔치노천룡, 이인단제감소동, 거령대수무다자, 분파화산천만중.
본 칙
구지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 오던지 오직 손가락 하나만을 들어 보였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와서 선사의 제자인 한 동자에게 물었다. “스승께서 어떤 법을 중요시하여 설하시는가?” 이에 동자 역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후에 구지 선사가 이 말을 듣고 칼로 동자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가 아파 통곡하며 달아나는데 구지 선사가 동자를 불렀다. 동자가 머리를 돌린 순간 구지 선사가 손가락을 들어 보이니 동자가 곧 깨우쳤다.
구지 선사가 세상을 떠나려 할 때 대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천룡의 한 손가락 선禪을 배워 일평생 쓰고도 다 쓰지 못했느니라.” 하시고는 돌아가셨다.
평창: 구지와 동자의 깨달음 모두 손가락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바로) 꿰뚫을 수 있다면 천룡과 구지와 동자 및 여러분 자신을 모두 한 꼬치로 꿸 수 있으리라!
송: 송하여 가로되,
구지는 늙은 천룡을 바보로 만들었으며
예리한 칼로 (즉시) 동자를 감정했네.
거령신巨靈神이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손을 들어
천만千萬겹의 화산華山을 두 동강이를 낸 것처럼.
* 俱胝는 婺州무주의 금화산에 살았다. 평상시에 항상 七俱胝佛母心多羅尼를 읽었기 때문에 俱胝라는 별명이 붙었다. 傳燈錄 卷十一, 五燈會元 卷四에 전기가 있다.
天龍은 五燈會元 卷四에 전기가 있다.
한문 찾아보기
구俱 함께, 갖출 지胝 틀, 못박일
수竪=豎 설, 세울, 곧을, 짧을, 세로, 아이, 내시
지指 가리킬, 손 발가락 婺 별이름 무
항抗 들, 막을, 겨룰, 높을 앙仰 우러를
미彌 두루 륵勒 굴레
범유凡有 언제나 ...이 있다. 힐詰 꾸짖을, 물을 힐
힐문詰問 묻다. 유唯 오직
거擧 들 동童 어린아이 동.
동자童子 어린아이. 설說 설명할
요要 중요할, 요점 법요法要 법의 요점
지두指頭 손가락 끝 문聞 들을
단斷 끊을 부負 질, 업을, 입을, 짐
통通 아플 호號 부를, 부르짖을
곡哭 곡할 호곡號哭 부르짖다
부復 ① 다시 복復 ② 회복할
소召 부를 회廻 돌릴
수首 머리
각却=卻 물러날, 물리칠, 어조사, 뒤집을, 도리어
기起 일으킬, 일어날 수기竪起 세우다
홀忽 갑자기 홀연忽然 갑자기
령領 목, 옷깃, 깨달을 오悟 깨달을
령오領悟 깨달음 장將 장차
순順 쫓을,순할 / 순세順世=시멸示滅=시적示寂=천화遷化 높은 사람의 죽음
일생一生 일생, 한평생 수용受用 받아 씀
부진不盡 다하지 못함
글訖 ① 마칠, 다할, 마침내 글 흘訖 ② 이를 흘.
병幷 아우를, ...과동同 같을
여與 더불어. ...幷... = ...同... = ...與... ...과...는
경득見得 알다 천串 ① 어음, 꿰미
관串 ③ 익을 곶串 ④ 곶
찬丳 꼬챙이 일찬一丳 일찬, 한꼬챙이
천穿 뚫을, 구멍 각却 ...해버리다
둔鈍 둔할 치置 놓을
둔치鈍置=鈍致 둔하게 만들다 리利 날카로울
인刃 칼날 단單 ① 홀, 다할, 다만
선單 ② 성 제提 ① 끌, 들, 걸, 던질, 끊을
시提 ② 떼지어날 시. 단제單提 가벼운 죄 또는 한 번 들어서
감勘 살필, 국문할
거령巨靈 거령, 중국 건국신화에 나오는 신의 이름, 화산과 수양산은 본래 하나의 산이었는데 거령신이 둘로 갈랐다.
대擡 들 무다자無多子 손쉽게
파破 깨뜨릴, ...해버릴 분파分破 나누어 버리다(깨뜨리다).
화華 꽃 화산華山 산이름
중重 무게, 거듭
구지수지(俱胝竪指) 제창提唱
그런데 구지의 전기에는 ‘천룡 선사는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이것에 의하여 구지는 크게 깨달았다’라고 적혀 있을 뿐으로 그 깨달음을 얻기까지 그의 내적內的인 고뇌에 대해서 상세한 기술記述은 없다. 그러나 스스로 엄격한 구도, 수행의 길을 간 사람들은 이 짧은 한 줄의 기술 뒤에 이 큰 깨달음의 시기가 올 때까지 구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참구의 길을 걸어간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손가락을 세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고 구지가 내적으로 겪은 격렬한 고뇌인 것이다. 선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우리들은 모든 이원적 분별의식을 타파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정진하며 연마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작은 기연奇緣에도 하늘이 놀라고 땅이 갈라지는 ‘경천동지驚天動地’와 같은 근본적인 인격의 일대 전환이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극한상태로까지 자기를 내몰지 않으면 안 된다. 옛 사람의 표현을 빌린다면 ‘대지흑만만大地黑滿滿’인 상황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천룡 선사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을 때 구지는 꼭 그와 같은 극한極限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산속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수행은 이원적 분별을 뛰어넘는 경지까지 가지 못했다. 이때 마침 한 비구니와의 만남은 그로 하여금 그의 수행이 아직 미숙하다는 것을 통감하게 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관문을 투과해야겠다는 강한 참구심을 불태우게 했던 것이다. 드디어 그는 극한 상태로까지 내몰렸다. 다시 말하면 일촉즉발一觸卽發의 내적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천룡 선사의 손가락 하나는 이 좋은 기회에 활 떠난 화살처럼 정말 멋지게 구지의 마음의 눈을 열게 한 전기轉機를 가져왔다. 마치 알 속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시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어미 닭이 밖에서 껍질을 쪼아 병아리가 나오는 것을 돕는 것처럼. 구지의 큰 깨달음은 그의 참구심의 극한화極限化와 천룡 선사의 직시直視 등이 정말 멋지게 호기好機를 잡은 결과였다. 구지가 실제로 겪은 내적 고뇌를 빼놓고, 손가락을 세우는 것에 무슨 다른 뜻이 있는지 헤아려 보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선의 문외한門外漢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내적 참구심이 극한까지 격화하여 종교적 대의大疑가 발화점까지 응결凝結해 있다면 새의 울음소리에도, 대나무에 부딪히는 돌 소리에도, 스승이 후려치는 죽비 소리에도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어느 것이나 일대 전환을 가져온 기연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영하산방 法境 無門關 提唱에서)
개인적 견해
모든 화두가 그렇듯이 이 화두 또한 자기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보면 구지선사의 뜻과는 천리만리 떨어져 버릴 것이다.
최근에 아이들에게 게임기를 사 주었는데 너무 게임에만 몰두하다보니 공부에 많은 지장을 초래해서 아이들 엄마가 게임을 못하게 하고 몰래 숨겨버렸다. 그랬더니 꾀가 많은 큰 아이가 엄마가 없는 틈을 타서 온방을 뒤지더니 금방 찾아내서는 다시 게임을 하곤 했는데, 엄마가 올 때쯤 밖에 인기척이 느껴지면 얼른 게임기를 제자리에 갖다 놓고는 태연한척 하는 것이었다.
평소 모른척하던 나도 오히려 이런 방식이 되면 아이에게 어두운 그림자만 생길 것 같아 주말에만 시간을 정해서 하기로 약속을 정하고 게임기를 아주 단순한 곳에다 숨겨 놓았다. 그랬더니 큰 아이가 게임기 찾아내는 것을 무슨 보물찾기처럼 생각했는지 찾아내도 되겠느냐고 하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온 방안을 샅샅이 뒤지더니 결국은 제풀에 지쳐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다음날 공휴일이어서 늦게까지 자고 있는 나의 방으로 들어온 막내 녀석이 이불속에 들어와 잘 놀더니 갑자기 “게임기 찾았다.”하며 혼자 싱글벙글 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막내 녀석은 매우 단순하여 그게 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우리들은 보통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서 괜히 어렵게 세상을 살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살아오면서 교육 받고 커온 환경이 그러했기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이렇게 소중하게 만난 공부인연을 통해 그런 관념의 틀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미 습관화 되어있는 이원론적이며 직선적 사고방식으로 보면, 나와 네가 있으며 모든 것을 개별적인 존재로 대하는 분별적 사고방식이 무의식속에 자리를 잡고 있기에 머리로 이치를 안다 하더라도 쉽지가 않다하겠다.
불교의 핵심사상중에 하나가 바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인데 우리들은 자기 생각에 빠져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도 꿈속에 살고 있다는 표현을 자주 듣곤 한다. 살아가면서 일에 잘 풀리지 않거나 힘든 일이 생길 때면 잠시 일을 멈추고 숨을 크게 한번 내쉬면서 無 ~하고 모든 것을 내려 놔보자.
그러면 자명해질 것이다.
전원법사님 법문
第三則 俱胝竪指
俱胝和尙, 凡有詰問, 唯擧一指.
後有童子, 因外人問, “和尙說何法要”, 童子亦竪指頭.
胝聞, 遂以刃斷其指. 童子負痛號哭而去. 胝復召之. 童子廻首, 胝却竪起指. 童子忽然領悟.
胝將順世, 謂衆曰, “吾得天龍一指頭禪, 一生受用不盡.” 言訖示滅.
無門曰, 俱胝幷童子, 悟處不在指頭上. 若向者裏見得, 天龍同俱胝幷童子, 與自己一串穿却.
頌曰, 俱胝鈍置老天龍, 利刃單提勘小童, 巨靈擡手無多子, 分破華山千萬重.
본칙
구지 화상은 누가 무엇을 묻던 오직 손가락 하나만을 들었다.
절에 한 동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화상께서는 어떤 법을 설하시는가?” 라고 물을 때면 동자 역시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구지 화상이 이 일을 듣고 칼로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렸다. 동자가 너무 아파 큰 소리로 울며 나갈 때 구지 화상이 동자를 불렀다. 부르는 소리에 동자가 뒤돌아보자, 구지 화상이 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이에 동자가 홀연히 깨쳤다.
구지 화상이 세상을 떠날 때 대중들에게 “나는 천룡의 한 손가락 선禪을 배워 평생을 쓰고도 다 쓰지 못했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고는 돌아가셨다.
무문 화상이 평하여 말씀하시기를,
구지 화상과 동자의 깨달은 바는 손가락 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것을 안다면, 천룡과 구지 그리고 동자, 거기에 자기 자신까지 한 꼬치에 꿰는 것과 같다.
게송으로 말씀하시기를,
구지는 천룡 화상을 바보 취급해 예리한 칼로 동자를 시험하였으니,거령신은 손을 들어 손쉽게 화산華山을 천 갈래 만 갈래 쪼개버렸느니라.
* 『벽암록碧巖錄』 32칙 설두중현(雪竇重顯, 980 ~ 1052) 화상의 게송을 무문 화상이 인용하였다. 화산과 수양산은 원래 한 개의 산이었는데 거령신이 이를 두 동강이로 잘랐다고 한다. 거령신은 전설 속의 신으로, 황하의 물길이 동명산에 막히자 산으로 올라가 손으로 산을 밀치니 한 쪽은 손자국이 있는 화산이 되고 다른 쪽은 발자국이 있는 수양산이 되었다고 한다.
I. 사설
이 공안은 『전등록』, 『종용록』등에 전하는데, 조사들의 행장을 모아놓은 『조당집』 제19권 「구지화상전」에 금화산 구지금화俱指金華 화상의 설화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구지 화상은 천룡天龍의 법을 이었고 경안주敬安州에 살았다. 그 밖의 행적은 알 수가 없어 기록하지 못한다. 선사가 암자에 살고 있을 때에 실제實際라는 비구니가 와서 삿갓을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선사의 선상을 세 바퀴 돌고는 주장자를 우뚝 선사 앞에 세우고 서서 말했다. ‘화상께서 나의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삿갓을 벗겠습니다.’
선사가 대답을 하지 못하니 비구니는 그냥 떠나려고 했다. 이에 선사는 말했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하루 저녁 묵어가도록 하시오.’
비구니가 말했다. ‘제 질문에 대답을 하시면 묵어가겠지만 대답을 못하셨으니 이대로 떠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떠나 가버렸다.
이때 선사는 혼자 탄식 하였다. ‘나는 명색이 사문이라고 하면서 비구니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외람되이 장부의 형상은 갖추었으나 장부의 작용이 없구나! 이 산을 떠나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리라.’ 그리고 조용히 선정에 드니 갑자기 어떤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삼三, 오五일 안에 큰 보살이 오셔서 화상께 설법해 드릴 것이요’ 그런지 열흘이 지나지 않아 천룡 화상이 왔거늘 선사는 뛰어나가 말에 절을 하고 맞아들여 모시고 서서 앞에 일을 자세히 이야기 한 즉, 천룡 화상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니 즉시에 환히 불법을 깨달았다.
선사는 그 뒤로 대중에게 말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천룡 화상에게 일지선(一指禪)을 얻은 뒤로 평생 동안 사용해도 다 사용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구지 화상은 항상 구지관음다라니(俱觀音陀羅尼 『七俱佛母心陀羅尼經』)를 외우고 다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그는 마조도일의 제자 법상(法常: 752~839)의 법을 이는 천룡 화상의 제자이다. 천룡 화상의 전기도 잘 알 수가 없다.
(정성본 역해, 『碧巖錄』 「제19칙 俱胝只堅一指」 pp. 123~124.)
통상적으로 선불교에서 하나는 불법의 근본인 진리를 표현하는 불립문자의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고, 둘은 진리를 체득하는 방편인 언어 문자를 말한다. 손가락 하나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풀이를 덧붙이고 있다.
선문답에서 행동으로 제시한 불법의 근본은 만법의 근원인 일심一心의 법문이다. 불법은 마음으로 만법의 진실을 깨닫고 지혜를 체득하는 심법心法이다. 달마가 일심의 불법을 전했다고 주장하는 것도 일심의 법문인 심지법문心地法門을 말한다.
선에서 제시한 일심의 법문은『화엄경』에서 설하는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이 만드는 것(一切唯心造)’이나 ‘만법은 오직 마음(萬法唯心)’ 그리고 ‘하나가 곧 많음(一卽多)’ ‘하나가 곧 일체(一卽一切)’라는 법계의 연기를 사상적인 토대로 하고 있는데, 선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의 모든 법은 하나(一心)로 되돌아간다고 주장하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의 법문으로 귀결시키고 있다.
(정성본 역해, 『碧巖錄』 「제19칙 俱胝只堅一指」 p. 125.)
손가락을 드는 <俱胝竪指>, 꽃을 드는 <世尊拈花>, 소리 지르는 할, 두들겨 패는 방 등은 모두 불법의 근본을 나타내는 것으로, 글이나 말이 아닌 불립문자의 경지로 표현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법은 마음에서 비롯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또한 다양할 것이다.
마음이 하는 모든 것이 경계 아닌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벽암록』평창에는 이와 같이 단도직입적으로 근본으로 들어가는 간단명료한 화두의 예를 몇 개 더 소개하고 있다. 석지현 스님은 ‘수행에 있어 많은 지식이나 학문은 단 하나의 직접 체험이나 깨달음을 능가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비마(秘魔 : 817~888)스님은 일생 동안 나무집게 하나만 사용하였고 타지打地스님은 묻기만 하면 한 차례 땅을 내리쳤을 뿐이다. 그 후 다른 사람이 그의 몸뚱이를 숨겨버리고 “무엇이 부처이냐?”고 묻자, 그는 입을 쩍 벌렸는데, 이 역시 일생토록 실컷 쓰더라도 모두 다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무업(無業 : 759~820)스님은 일생 동안 혹 누가 묻기만 하면 “막망상莫妄想, 망상을 피우지 말라”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르기를 “한 곳을 꿰뚫으면 천 곳 만 곳을 일시에 뚫고, 한 기연을 밝히면 천 기연 만 기연이 일시에 밝혀진다.”고 하였다. 요즈음 사람은 모두 이와 같이 못하고 그저 멋대로 알음알이를 지을 뿐, 저 옛사람들이 깨쳤던 요긴한 곳을 알지 못한다.
숭산 노사님은 종종 탁자를 탁! 하고 쳐서 경계를 나타내셨다. 탁하고 치는 소리는 절대적이다. 모든 사람에게 같은 경계이다.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 본래면목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번뇌 망념이 일어나기 이전, 언어 문자의 방편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불법의 근본, 본래면목을 숭산 노사님은 탁자를 탁! 쳐서 나타냈고, 구지 화상은 한 손가락을 세워서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구지 화상이 손가락을 세우는 법문은 참구하기는 쉽지만 깨닫기는 어렵다. 요즘 사람들은 질문을 하면 손가락을 세우고 주먹을 불끈 드는데, 이것은 망상 분별일 뿐 반드시 뼛속에 사무친 투철한 견해가 있어야 한다.”고 원오극근 선사는 말씀하시고 계시다.
본래면목
대승불교에서는 불성이나 여래장으로 이해하였고, 선종에서는 한 물건, 본래면목, 본래심이라고 한 인간의 본성을 인경스님은 현대적 서구의 심리학적 측면에서 재조명하였다. 간화선의 목적이 견성성불에 있듯 심리학적 접근방법을 기초로 인간 본성을 보려고 한 것이다.
화두참구를 ‘자기 본성에 대한 의심과 탐색, 사량 분별의 배제, 지금 여기에의 직면과 접촉, 깨달음과 초월’로 보고, 화두참구법에 따라 심리학적 명상치료법을 개발한 것이다. 선종의 견성성불을 ‘자아초월’의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한 것이다. 그 방법 또한 선문답의 질문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는데, 다소 길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한다.
선문답과 간화선의 지향점은 바로 불교적 영성개념과 초기불교 이래로 전승된 무아심리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분석보다는 통합, 부분보다는 전체, 개별적인 접근보다는 총체적인 접근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화두의 본질을 의심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아비담마에 기초한 위빠사나처럼 심리적인 마음현상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본성에 대한 전체적인 접근방식으로 이것은 질문과 의심을 통해서 성취한다. 마음현상은 관찰에 의한 통찰이 중요하지만, 본래면목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을 타파함에서 오는 전체적인 깨달음에 의해서 체득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선문답이나 간화선에서 사용하는 질문의 방식을 유사하게 사용하는 서구에서 개발된 치료 프로그램에는 수용전념 명상치료(ACT)가 있다. 이것은 행동치료와 인지치료의 전개과정에 발생된 제3세대에 해당된다. 수용전념 명상치료는 행동과 인지의 영역을 포괄하지만, 심리현상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명상적 요소와 개념자아와는 다른 근본적인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한 점에서 자아초월적 성격을 가진다. 특히 여기서는 선종에서 사용되는 은유와 질문법이 자주 사용된다. 구체적인 문답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T: 여기에 체스보드가 있다. 체스는 하얀색이 있고 검정색이 있다. 이들 체스는 왕이 있고 여왕이 있고 귀족도 있고, 성주도 있고, 병사들도 있다. 하얀색의 체스는 당신의 긍정적인 생각이나 긍정적 느낌이나 좋은 기억들이다. 반면에 검정색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인 느낌들이나 기억들이다. 이들은 보드에서 싸우고 있다. 당신은 이런 상황을 당신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가 있습니까?
C: 그래요. 마치 나 자신과 같아요. 나는 지금 내부에서 늘 전쟁 중입니다.
T: 검정색 기사가 공격합니다. “당신은 나쁜 엄마입니다.” 그러자 하얀색 여왕이 “나는 나의 아이들을 잘 돌볼 것입니다.” 또한 다른 검정색 귀족이 “실제로 당신의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러자 하얀색의 기사가 “나는 떠날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검정색의 여왕은 “아니, 너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 결국은 다시 돌아올 걸.”라고 전쟁은 계속됩니다.
C: 그래요. 맞아요. 정확하게 나의 이야기예요. 나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이 전쟁은 계속될 것만 같아요.
T: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너무 오랫동안 당신은 자신과 싸워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체스가 아닐 가능성을 찾아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전쟁을 멈출 수가 있잖아요. 이 비유에서 당신의 생각이나 느낌은 보드 위의 체스와 같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C: 체스?
T: 어떻게 당신과 당신의 생각과 느낌이 동시에 체스일 수가 있죠? 당신은 당신의 차를 가졌지만, 차가 당신이 아닌 것처럼, 당신은 당신의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처럼 당신은 누구이죠?
C: 게임하는 사람?
T: 우리는 지금 당신이 어떻게 게임하는 사람이 되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언제 당신이 체스를 움직이려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당신은 게임하는 사람 이외에 당신은 무엇일 수가 있죠?
C: 보드?
T: 네, 맞아요. 바로 그렇습니다. 보드가 없이는 체스들은 체스로서 기능할 수가 없습니다. 보드는 체스를 가지고 있고, 체스가 체스일 수 있도록 그 문맥을 제공합니다. 이상한 질문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생각은 당신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있습니까?
C: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T: 그래요. 만약 당신이 보드가 된다면, 당신은 전쟁을 관찰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체스가 된다면 그 전쟁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체스는 마음현상에 해당되고, 체스 판 자체는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을 상징한다. 마음현상들은 서로 양 편으로 나누어서 전쟁을 치른다. 체스들은 개념적 자아이고 감정과 생각들, 이러고 저러는 갈망과 행동들을 포함한다. 반면에 이들로부터 초월한 그렇지만 그들의 배경되고, 바탕 되는 판 자체는 변함없는 본래면목이 된다.
여기서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든지 혹은 ‘무엇이 나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것은 생각이나 느낌의 내용을 묻는 질문이 아니고, 그런 생각과 느낌의 근거가 되는 바탕 자체[體]로서의 판을 염두에 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간화선의 창시자로 알려진 대혜종고의 문답에서도 발견되는 내용이다. 이때는 체스게임이 아니고 바둑이 등장한다. 이참정과 조대제는 자주 만나 바둑을 하는데, 대혜가 이 사실을 알고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바둑이 흑백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나아가, 바둑판을 다 흐트러뜨리고, 한수를 놓는다면 어디에 놓을 것인지를 묻는다.
이것은 체스게임의 비유와 너무나 닮은꼴이다. 바둑알은 느낌이나 생각 혹은 기억들이다. 이것들은 서로 엉키어서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참으로 나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나인가? 이런 생각과 감정을 일시에 쓸어버리고 한 점을 놓는다면 어디에 놓을 것인가?
(인경스님, 「화두참구의 심리학적 접근」, 제87차 월례학술대회: 간화선의 원리와 심리학적 고찰)
체스 판을 인간의 본성인 본래면목으로 보고, 체스나 바둑알을 마음현상, 느낌이나 생각 혹은 기억들이라고 비유하면서 명상치료를 근본적인 자아를 깨닫는 데에서 찾고 있다. 즉, 심리학적 치료를 불교의 깨달음의 관점에 두고 새롭게 이해하고 접근한 것이다. 인간 내면의 문제는 근본인 자기 자신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인 마음을 아는 것으로 문제해결에 직결한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보통 나는 어떤 사람이고, 내 성정이 어떻고, 내 체질이 어떻다고 하는데, 실은 이 모든 것은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어떤 상황과 만나기 전 마음의 상태는 후천적인 훈습으로 길들여진 것이고, 상황에 대한 생각이나 대처 방법 또한 그런 훈습에서 나온다. 이는 모두 진실한 나는 아니다. 선적으로 말하면 살아온 환경의 부산물이지 나의 본래면목은 아닌 것이다.
불교는 이것을 깨닫는 것이고 선종에서는 이를 견성성불이라고 한다. 견성성불을 다른 말로하면 이런 아집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자아초월을 실현하는 것이다. 선종의 선문답 방식을 차용하여 진실한 자기를 알게 하고 나아가서는 그 자기로 부터의 초월을 유도하고 있다.
한편, 인경스님은 대혜종고 선사의 「서장」에 나오는 ‘바둑판을 다 흐트러뜨리고, 한수를 놓는다면 어디에 놓을 것인가’를 ‘이런 생각과 감정을 일시에 쓸어버리고 한 점을 놓는다면 어디에 놓을 것인가? 라고 해설하고 있는데, 대혜는 이 말에 앞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늘 이 길을 믿는 사람에게 역설하지만, 평소에 밤낮없이 군힘이 빠지는 것(省力)이 점점 느껴질 때가 그대로 부처님을 공부하여 힘이 나는 것(得力)이 됩니다. (중략)
일단 번뇌에 사안에 찌들려 있다고 느껴질 때는, 힘이 부치도록 애써 밀어내지 말고, 다만 그 사안에 따라, 가벼운 화두로써 이끌어 가시오. 그러면 한 없이 힘을 덜게 되고, 또 한없이 힘을 얻게 됩니다. (『大慧語錄』 大正藏47, 924)
하고 다음 바둑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둑판을 다 흐트러뜨리고는 한 점을 놓는다면 어디에 놓을 것인가는 한 생각 ‘화두에 집중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 ‘성력省力이 득력得力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득력 곧, 힘을 얻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성력 곧, 힘을 덜었다는 말과 같다는 말이다. 간단히 말해, 힘이 덜 드는 것은 힘을 얻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전에는 정말 애써서 힘들게 해왔던 것들을, 득력하고 나면 그렇게 힘을 기울일 필요가 적어지거나 혹은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들여야 할 힘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득력한 다음부터는 공부가 저절로 되어간다. 무공용無功用의 공부가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즉, 화두를 들지 않아도 들리고 염불하지 않아도 자나 깨나 염불이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刃斷其指, 손가락을 자르다
벽암록에는 본칙 앞부분(擧. 俱胝和尙, 凡有所問, 只竪一指)만 있는데, 무문관에는 벽암록 평창에 있는 동자부분을 본칙에 덧붙였다. 뒷부분을 본칙에 붙인 것은 이 화두의 핵심인 ‘손가락’에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손가락을 올리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손가락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손가락을 자르는 극단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데, 실상은 어땠을까? 손가락을 잘랐을 리 만무하다. 그건 단지 연극의 대본에 불과하다. 어떤 물음이든 손가락을 들어 생각을 쉬게 하였다면, 그 다음 친절하게 물음에 대해 답을 해주셨을 것이라는 것이다.
잘 아는 한 스님에게 선도회의 입실점검에 대해 설명하니, 그런 것은 “나도 할 수 있다!”고 단언하였다. 즉 어떤 답을 하던 무조건 “아니다!”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생각을 놓게 되고 견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선기가 번득인다. 여기서 “아니다!”는 바로 손가락을 드는 경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럼 그 다음은? “아니다!”라고 하면 일단 생각을 버리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손가락을 드는 것은 절대의 경지다. 그러나 한편으로 세상은 차별로 이루어져 있다. 철저히 하나가 되었으면 다음 그 하나는 다시 만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물론 그것은 일귀만법一歸萬法, 다시 만법으로 돌아가야 한다. 일생만법一生萬法, 모든 것이 그 하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철저히 부정했으면 긍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부정과 긍정에 철저하면, 부정도 긍정도 아닌, 부정과 긍정을 초월한 중도의 경계에 이르러야 한다. (1칙 해설 참조) 생각을 없애는 것은 한편으로 올바른 생각을 내기 위함이다. 문제는 다음 마음을 어떻게 내느냐에 달린 것이다. 선도회가 다른 화두들을 참구하는 이유이다.
II. 참구
해설을 모두 버리면 명확하다.
III. 재독
1. 구지 선사가 손가락을 든 일에 무슨 뜻이 있나?
2. 구지 선사 출타 중에 방문객이 동자에게 구지 선사의 가르침에 대해 물었다. 만일 당신이 그 동자였다면 어떻게 응대했겠는가?
3. 여러분이 동자라면 구지선사가 돌아왔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4. 누가 무엇을 물어 왔을 때 당신이 구지화상이라면 어떻게 답하시겠는가? 여러분은 손가락이 없다.
IV. 감상
간밤에 내린 눈에 가은산 바위는 하얗고, 한낮 밝은 해는 소나무 끝에 푸른데,
우지끈! 소리에 고개 들어보니, 사푼한 눈에 소나무 허리 부러지는 소리!
* 소나무는 사시사철 잎이 푸르다. 그러나 그 잎에 눈이 쌓여 눈이 많이 오면 부러지기도 쉽다.
스승의 날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작은 정성을 모았습니다.
전원법사님, 건허법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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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자기소개) 및 취침
첫댓글 제 머리가 저리 많이 없는줄 처음 봤습니다!ㅋㅋ
사진기는 사물을 그대로 보겠지요!^^
청연님! 게임 잘하면 께임기도 잘 만든다던데......!
ㅎㅎ 득로님, 그래서 요즈음은 숙제 끝나면, 시간 정해서 하게 합니다.
우와, 이렇게 다시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요..!!
그냥 내버려 두면 게임만 하고 숙제는 안 하는지요?
숙제 안하고 학교가서 얻어 터지면 그 다음부터는 지가 알아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