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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독생하신 하나님이 아버지를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 분이 바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요 그 아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은 하나님의 첫 열매입니다(고전15:20)
그 다음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으면 우리는 다생자들이 됩니다.
그의 형제들이 됩니다. 우리는 그 분의 형제들이며 그 분은 맏아들입니다.
맏아들이면 첫째요 첫 열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고,
누구든지 이 부활의 첫 열매를 받으면 그 부활의 첫 열매에 붙은 자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붙은 자가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
마지막이니(고전15:23-24)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강림 곧 파루시아의 때입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항상 계시는 분임을 모른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야 합니다.
좁은 문이며 골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율법 아래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하시고, 성령과 더불어 계실 때도 동일하시고,
장래에도 다 동일하십니다. 다만 우리 모습에 따라 달리 보일 뿐입니다.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고 장성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다음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맏아들이 되셨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아들의 영으로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그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요12:24)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심을 믿고 계시는가요?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당 간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모시고 나면 누가 더 바쁠까요? 제게 아들이 있는데
그가 제 아들이라는 친권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아들보다 사실 제가 더 바쁩니다.
이 관계를 아는 것이 친권적인 믿음입니다. 알곡이 되면 농부가 더 아낍니다.
알곡을 버릴 농부는 아무도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만 확실히 모신 믿음만 있으면
우리가 하늘 끝 간 데 도망가더라도 하나님이 다시 찾으십니다.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다 모으리라(마24:31)하십니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영광을 빼앗기지 않아요. 이 믿음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반드시 성령으로 보증되어야 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사시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열매로 나타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아들의 영을 받았으면 우리도 하나님 종자(씨)입니다.
지금은 독생하신 그 분만 하나님 보좌 우편에 대표로 가신 것입니다.
그 첫 열매를 가졌으면 우리도 갈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항상 진행형입니다.
그러나 편의상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구원을 이루고 있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좋습니다. 언어가 부적당하기 때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수많은 예수님의 모습이 된 무리들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다만 아직까지 하늘 천국에 들어간 사람은 없어요. 신학적으로 낙원에 대기 중,
바로 영적인 락카룸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해서 이삭 그리고 야곱
이런 식으로 믿음의 선진들이 릴레이로 뛰었습니다. 그 다음 우리가 뛰어야 합니다.
마지막 주자가 골인할 때 그 동안의 믿음의 주자들이 함께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이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백 보좌 심판을 끝내고 영원무궁 세계에 열릴 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 열매입니다. 한 알의 종자라고 했습니다.
씨 한 알 속에 나무의 형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예수님이란 생명의 씨앗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다 들어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씨앗으로 받았으면 장래의 우리의 모양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다만 형성되어가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웠다
그리고 맏아들로 세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아버지와 관계로 설명하는 겁니다.
그리고 난 다음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세계란 말은 현존의 세계와 영존의 세계를 다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들로 말미암아 세계를 존재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지금 천국의 세계는 어떤 곳이냐? 존재와 차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이 세상의 세계에 포함돼 있지만 우리 영은 그 존재와
차원 속에서 주님과 교제 합니다. 다만 사람의 모양은 만들어져 가지만
본질은 항상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세계를
존재케 하심으로 만유의 후사라 하고 만유의 주재 곧 왕이라 표현합니다.
창세기 1장의 6일째를 보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남자와 여자가 나옵니다. 이것이 창조의 마지막인데
지금 하나님의 자녀들을 재창조하고 있는 날이 마지막 날입니다.
6일째 한 쌍을 만들고 그 다음 안식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한 쌍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와서 나와 함께 멍에를 매자 그리하면 네가 쉼을
얻으리라(마11:28-29)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 와서 짐을 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므로 말미암아 그 수고가 쉼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무게에서 쉼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이게 바로 예배소서 5장의 그리스도와 교회는 남편과 아내의 비유로 설명을 합니다.
이것이 되는 것이 짝을 찾는 것이고 안식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이라 이 말입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본체의 형상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감히 만질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영광을 본 자들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영광의 광채를 모신 세상의 빛이 됩니다.
본체의 형상은 도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직접 가지 않아도 인감도장이
그 사람 대신 일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똑 같은 영광이십니다.
창세기 1장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모양을 만들자'라는 말씀이 있는데
자녀들이 부모의 형상을 닮는 것이 아닌 곧 인격을 닮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본체를 닮습니다. 본체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형상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본심을 드러내는 것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원래
본체는 영광인데 이걸 드러내는 것이 그 본체의 형상이라는 말입니다.
이 본체의 형상이 우리에게 올 때엔 사랑이 되어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 속성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요1:14)고 하십니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이 말은 공기와 산소가 분리가 될
수 없듯이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신 것처럼 말씀 안에 만물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말씀은 성경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모든 뜻과
의지가 말씀입니다. 창조의 지성입니다.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말씀은 천지를 창조해
놓고 그 다음엔 인간들이 마음대로 할 줄 압니다. 아닙니다. 지금도 천지 만물은
말씀이 그 속에 스며들어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집니다. 그 말씀을 사람들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의 구원에 필요하도록 적어 놓은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여 모든 선한 일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딤후3:16-17) 성경이 필요한 것입니다. 모든 만물에 관한
원리가 성경 속에 다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하면
성경이 전부인줄 압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씀을 어긴다면 성경만 어기는 것이 줄 알아요.
우리의 영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은 반드시 자연 계시를 따라야 합니다. 예컨대 잘 때는 자고 피곤하면
쉬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항상 영육이 조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도 하나님의 입으로 기운으로
나오는 그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있습니다. 말씀이 만물 가운데 살아 움직입니다.
그 다음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하시고’ 무엇으로? 말씀으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속죄와 화목제물입니다. 물론 마귀에게 지불한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불 하셨지만 마귀가 사망을 붙잡고 왕 노릇 하고 있기 때문에
사망아래 있는 우리를 건져내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버리신 속죄제물이
되셨어요. 그리고 난 다음 말씀으로 불러 우리를 깨끗케 하셨습니다.(요15:2-3)
그레서 주님은 지상사역으로 속죄의 제사장이 되시고 지금도 살아계셔서
천상사역으로 중보의 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피로 깨끗해 지지 않고 말씀으로 깨끗해 졌을까요?
이는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구속하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오신 그 말씀에 의해 우리가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피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속전으로 지불된 것입니다. 다만 그 피가 여전히
말씀에 의해 우리 마음속에서 죄 사함의 증거가 됩니다. 피 흘려 죽으신 후 다시
사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그리고 '만물을 붙드시고 죄를 정결케 하시고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하십니다.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계속 일을 하십니다. 원수가 발등상이
될 때까지 다스리시다가 세상에 다시 오심으로 심판하시고 나라를
아버지께 다 바치십니다. 그리고 영원무궁한 세계가 이루어집니다.
4절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특성이 나옵니다. 우리가 깍쟁이 장돌뱅이 하면 그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이름입니다.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도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데
인간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가질 수 있으나 그리스도란 이름은 절대로 가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리스도의 속성과 천양지차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5절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천사보다 나은 이름이란 바로 아들입니다. 아들이신 그리스도와 천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천사도 부러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이름을
갖는 것입니다. 천사는 부리는 영입니다. 천사는 섬길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아들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며
그 아버지의 상속을 받을 자들입니다. 우리가 아들의 영으로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천사가 부러워하는 직분을 가졌다는 것도 맞지만 우리 자신의 존재 자체를
천사들이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고백 속에 엄청난 자부심과 프라이드가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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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사도 부러워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들의 기업을 주신 아버지께 영광!
감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