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05.
굼벵이
君子行大路(군자행대로)라고 했던가. 퇴직하고 나니 아침에 일어나 시간 맞춰 나갈 직장이 없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건물 임대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매달 통장에 쌓이는 금융소득이나 주식 배당조차도 전혀 없다. 평생을 국가에 봉사한 공무원으로서 가진 것이라고는 보잘것없는 명예뿐이다. 마지막 남은 그 명예라도 반듯하게 지키고 사는 군자가 되고 싶다.
자꾸만 소인이 되려고 한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이 상하고 질투가 꼬물거린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 2017년 5월 10일 12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나온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 일부이다. 나에게 기회는 평등했고 과정도 공정했다. 단지 결과만 정의롭지 못하다.
조건은 모두에게 같았다. 지정 육묘장에서 대량으로 고구마 모종을 구매하여 골고루 나누어 주었고 고구마실습장은 퇴비를 충분히 공급하고 토양 살충제와 살균제를 골고루 뿌려 흙덩이를 뒤집고 부수어 관리한 땅이었다. 30개의 구역으로 동등하게 나누어 교육생이 개인별로 파종 실습을 했다. 물을 뿌리고 줄기 따서 먹는 것이야 다들 비슷했고 수확시기만 약간 달랐다.
수확시기가 문제일 수는 없다. 5월 14일 하루에 몇몇 교육생을 제외하고 모두가 모종을 심었다. 지식과 경험이 없어 90여 일 만에 몇 뿌리를 일찍 수확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없었다. 생육 기간 120일에서 150일을 지켜서 수확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10월 초순에서 수확한 셈이다. 큰 차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한두 주일 빠르고 늦었다고 이렇게 다를 수는 없다.
모든 건 굼벵이 때문이다. 굼벵이는 딱정벌레나 매미의 애벌레를 통칭하는 말이다. 통상적으로 흙 속에서 기어다니는 통통하고 흰 애벌레는 다 굼벵이로 불린다. 이놈이 내 고구마 괴경을 핥아버렸다. 뭐 몇 개만 그런 게 아니라 고구마 괴경 대부분을 조금씩 상처를 내버렸다. 상품이 될 만한 게 거의 없다는 문제다. 아들과 딸을 포함해서 누나와 동생들에게도 골고루 나누어 먹으려 했는데, 내가 몽땅 다 먹어야 할 판이다. 달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맛도 별로다.
속상하다. 나를 포함한 몇몇을 제외하면 고구마 모양이 그럴싸하다. 수확량과 굵기와 상처 여부를 따져보면 나쁘지 않다. 유독 내 고구마만 심하게 상처를 입은 모양이 나를 아프게 한다. 내 것에 비하면 멀쩡한 괴경을 쓰레기 버리듯 고구마밭에 팽개친 걸 봤을 때는 아픔을 넘어 분노가 치민다. 적어도 대인 정도의 흉내를 내려면 훌륭한 괴경을 축하해야 하는 데 진심 어린 한마디가 목구멍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 소인이다.
소인이라 넓은 아스팔트 길보다 숲속 오솔길을 더 좋아하는지 모를 일이다마는 이런 일에는 군자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