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법명사 회주 선일 스님
전법 불모지 33년 개척한 부루나…“홍제사, 내 생애 마지막 불사!”
유신독재 반대 4년 운기 스님 은사로 출가
전기세 못 내 스티로폼 깔고 잠 청하며 기도
대형트럭·티코 충돌에도 온전한 건 부처님 가피
명법사 창건·포교매진 청년·복지·환경 전방위
어머니 집 개조해 ‘쉼터’ 인천불교회관 건립 원력
코로나19· 기후위기 재앙, 명상 속 지혜로 극복
3군 총본산 호국 홍제사, 불교의 긍지이자 자부심
“과거·미래 집착이유 없어, 오늘 땀 흘려 노력하라”
‘꼭 해내고 싶은 불사’ 질문에 선일 스님은
“계룡대 영외 법당인 호국 홍제사 원만회향”이라고 전했다.
‘유신헌법·긴급조치’가 관통한 1970년대는 암울한 시대였다.
‘…보이지 않는 공포와 가장 강력한 경멸의 뒤범벅을 우리는 오늘날 삶이라고 부른다.
게다가 그 공포와 경멸을 더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하하. 그러니 그 삶이라는 것에 손이 닿자마자 손은 썩기 시작하고
그 삶이라는 것 속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발은 썩어 버린다. …
그리고 더 많은 거짓을 차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싸우고 있다. //
술보다 더 지독한 痲藥이 필요하다.’
(정현종 시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노트 1975’)
동국대 인도철학과에 다니던 청년은 낮에는 길 위에서 “유신독재 반대”를 외쳤고,
저녁에는 철학·정치·사회학도들과 시국을 논했다.
강압·고문·폭력·독재·민주화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던 가을 무렵.
대학 4학년의 청년은 기차에 몸을 실었다. 철로 끊어지면 버스를 잡았고,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걷고 또 걸었다. 그 걸음은 땅끝 해남 대흥사에 닿아서야 멈췄다.
그 산사에서 근현대의 대 강백 운기 스님을 은사로 삭발염의했다.(1976) 선일(禪一) 스님이다.
해군 군법사로 임관(1978)해 대위로 제대(1986)한 선일 스님은
훗날 명저로 평가받은 ‘불교학대사전(홍법원)’ 편찬위원장을 맡았다.
초판(1988)을 내고는 포교에 매진할 작정으로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주 타코마의 봉황사 주지를 맡았다.
그런데 잠시 떠난 미국 여행길에서 박성배 뉴욕주립대학 교수를 만났다.
“여기서 박사 과정을 밟아 보시지요!”
동국대에서 이미 석사를 끝냈던 터라 솔깃했고
미국과 유럽 사회가 주목하고 있는 불교도 궁금했던 터였다.
유학비를 지원해 줄 사찰이 필요했다.
인천의 한 상가에 방 하나를 얻어 ‘부루나포교원’(명법사 전신)을 열었다.
신도들이 몰려올 거라 예상했지만 한 달도 안 돼 산산조각 났다.
전기세 낼 형편도 여의치 않아 스티로폼 위에서 잠을 청해야 했으니 말이다.
절벽에 내려진 생명줄 잡듯 목탁 하나 움켜잡고 ‘100일 관세음 정근기도’에 들어갔다.
그렇게 꼬박 2년 기도하니 20가구의 신도가 생겼다.
기뻤다. 목탁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신 불자들 아닌가.
한 걸음 나아가 3801m²(150평)짜리 2개 공간을 얻어 들어갔다.
아래층은 어린이 포교 전문도량으로 활용했다.
파티션도 설치할 형편이 안 돼 백묵으로 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여기는 무슨 반, 저기는 무슨 반 했는데 놀랍게도 아이들 100여 명이 몰려들었다.
여행사에 맡겨둔 미국 비자는 뇌리에서 떨어져 나간 지 오래였다.
이후 인천 서구 원적로에 법명사(法明寺)를 세웠다.
부처님께서 “여래가 될 것”이라 수기하며 부루나존자에게 내린 이름이 ‘법명(法明)’이다.
인천은 개신교의 교세가 강하기로 정평 나 있는 지역이다.
지금도 조계종 사찰이 10개 정도다.
그 불모지에서 33년을 버텨내며 오늘도 부처님 법을 전하고 있다.
어린이·청소년, 대학생 등의 계층포교에서부터 장애아동·양로원은 물론
노동·환경까지 선일 스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속가의 어머니가 머무르시던 집을 리모델링해 가출 청소년들의 ‘쉼터’로 활용했다.
인천불교회관도 IMF 경제위기 당시 인천사암연합회장을 맡았던
선일 스님의 원력에 사부대중의 힘이 더해져 세워졌다.
해외를 오가는 선박의 사람들에게 법을 전하는 ‘외항선 포교’ 빼고는 다 해보았다는
선일 스님은 인천 지역포교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학 시절 땅끝으로 떠나 출가한 연유가 궁금하다고 여쭈니
“살려고 출가했다”며 미소를 보였다.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잡고 절에 간 추억,
그리고 인도철학과에 입학한 게 불교 인연의 전부였습니다.
격동의 시대를 건너며 저도 모르는 사이 참 많이 지쳐 있었던 듯싶습니다.”
밤새워 마신 ‘마약보다 더 지독한 술’도 청년의 허한 가슴을 채울 수는 없었을 터다.
철벽보다 더 단단하고 두꺼운 고독을 마주하고도 그 너머의 부처님 품으로 들어선 건 숙연이다.
선일 스님의 33년 포교 여정은 곧 인천 불교현대사이기도 하다.
그 길을 걷게 한 원동력이 궁금하다.
“옛 선지식은 ‘청정한 불사(佛事)에 부처님 가피가 내린다’고 하셨습니다.
그 가피를 저도 입었기에 오늘의 법명사가 있습니다.”
상가에 포교당을 내고 기도정진할 때다.
백중 맞이 지장 기도를 마치고 목욕탕에 가려 새벽에 길을 나섰다.
티코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신호등을 지켜보고 있는데 쿵!
그 이후의 기억은 없다. 경찰과 의사의 전언에 따르면 상황은 이렇다.
사람을 피하려 급히 운전대를 꺾은 대형트럭이 스타렉스를 치고는 다시 티코를 들이받았다.
119가 출동해 찌그러진 티코의 문을 잘라내니
스님 한 분이 멀쩡한 모습으로 나와서는 하늘 한 번 보고는 길바닥에 ‘푹’ 쓰러졌다.
나은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후 자신의 몸을 두루 살펴보았는데 멍이나 작은 상처 하나 없었다.
“당분간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만류에도 “기도하러 가야 한다”며 병원문을 나섰다.
법명사 내 명상박물관 전경.
법명사에는 178.5m² 규모의 전시공간과 99.2m²의 수장고를 겸비한 명상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한국·중국·인도명상 관련 300여 권의 서적과 유물을 선보이고 있다.
2층은 집중·통찰·초월명상 등을 주제로 한 시민강좌를 진행해 왔다.
코로나19 여파로 잠시 문을 닫았지만 명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시민선방도 개원했었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가 주는 메시지는 단순명료합니다.
인간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불러온 바이러스이고 재앙입니다.
유일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올바른 판단입니다.
잘못 대처하면 인류는 파멸을 맞이하고, 지혜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인류는 살아남습니다.
삼독을 다스리지 않고는 지혜로운 결정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참선 등의 명상이 그 삼독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를 구할 명약은 명상입니다.
옛 수행자들은 물을 걸러내는 ‘녹수낭(漉水囊)’을 지니고 다녔습니다.
물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미물을 죽이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 마음이 인류를 구합니다.
그러기에 내 가정의 음식물 쓰레기라도 줄여보려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그 마음이 탄소배출을 줄이는 정책에 힘을 싣습니다.”
진해 해군 통제부와 김포 해병대 초대법사였던 선일 스님은 만 7년 동안 군법당 지으려 동분서주했다.
김포 해병2사단 화랑중대 법당도 선일 스님의 원력으로 지었는데
그 불사로 감봉 징계를 받았다. 낙성 법회 때 초청장에 그려 넣은 약도가
보안상의 문제로 거론됐기 때문이다.
당시 봉급 20만원은 화주 받으러 다니는 교통비로 다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복이 없어 목사 가운을 입고 참선을 지도했다.
“처음 군법사로 임관해 근무한 곳은 교회였습니다.
상관이 책상과 의자 마련해 주고는 ‘여기서 근무해!’ 하더군요. 법당이 없었던 겁니다.
장병 참선 지도할 때 입은 건 목사 가운이었습니다. 군에서 입을 법복도 없었습니다.”
장병들을 위한 최고의 선물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선일 스님은 “기도!”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한불교진흥원에서 지원한 오토바이에 커피를 싣고
밤 보초를 서는 장병들을 찾아가곤 했습니다. 초를 켜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국가를 위해 전방에 선 청년이 부처님 가피로 건강하게 복무하다 전역하기를 기도드립니다!’
그들의 눈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보다 더 초롱 했습니다.”
선일 스님은 2021년 6월 제5대 조계종 군종특별교구장에 선출됐다.
취임 직후 추진한 눈에 띄는 불사가 있다. 장병용 ‘불교성전’ 보급이다.
가슴 먹먹하다 못해 쓰라렸던 기억을 털어놓았다. 백령도에서 근무할 때다.
“당시 기독교가 수백만 권의 성경을 쏟아붓는다는 말은 헛소문이 아니었습니다.
섬에도 밀물처럼 ‘성경’이 밀려들어왔습니다.
군법사인 제가 하는 일이 성경 쌓는 일이었을 정도였습니다.
불자 장병 품에 불교성전 한 권씩 안겨주고 싶은 건 저만은 아닐 터인데 녹록지 않습니다.”
호국 홍제사 조감도.
꼭 해내고 싶은 불사가 있는지를 여쭈니 “계룡대 영외법당인 호국 홍제사 회향”이라고 했다.
조계종 백만원력 불사 중의 하나인 호국 홍제사는 6월에 준공된다. 하지만 더 큰 불사가 남아 있다.
“일주문과 탑을 세우고 법당 안에 부처님도 조성해야 합니다.
아울러 ‘호국불교 역사전시관(가칭)’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고려, 조선에 이르는 호국 법회와 사례,
승군의 활동 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전시공간을 조성하려 합니다.
대찰에 가면 조사전이 있듯이,
국가위기 때 헌신한 청허휴정, 사명유정 등 고승의 진영도 봉안하려 합니다.”
이 불사에만도 약 50억원의 불사금이 필요할 것이라 한다.
사부대중의 원력이 응집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장병들에게는 불교문화를 체험하는 배움의 공간이자 휴식공간입니다.
영외 법당이므로 지역 주민·불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기에 지역포교의 교두보 역할도 담당합니다.
육해공 3군의 총본산이자 호국불교 근본도량인 호국 홍제사는 불교계의 자부심이자 자긍심입니다.
제 생애의 ‘마지막 불사’라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갈등원인과 상생의 가치를 명료하게 짚었다.
선일 스님은 2021년 10월 사색집 ‘사유하는 기쁨’을 선보였다.
나와 너,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 등 부분에서 전체로의
확대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상생의 가치를 명료하게 짚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충실하라’는 당부가 책 속 행간에 스며있다.
“‘팔리중부경전’ 제3권에서 언급한 ‘시간’을 제 가슴에 새겨놓았습니다.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미래를 원하지도 말라.
꿈은 여기 현재의 일에서 가져야 할 것이니 이루고자 하는 뜻에
확고부동하여 흔들림 없이 자신의 능력을 계발하라.
오로지 오늘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 땀 흘려 노력하라.’”
‘사유하는 기쁨’ 판매 수익금과 인세 전액을 호국 홍제사 건립기금으로 기부한 선일 스님이다.
이 책 ‘한겨울에도 꽃은 핀다’의 울림이 깊다.
‘아무리 추운 환경이라 해도 눈 속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것이 세상이고
이것이 세상을 만들어 가는 우주의 묘한 힘이다.
우리 인생에 겨울이 왔을 때, 좌절하지 않고 눈 속의 꽃 같은 용기로 살았으면 하고 소망해 본다.
매서운 추위와 눈발도 촉촉이 녹이며
한 생을 엮어 가는 저 꽃의 생명을 떠올리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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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일 스님은
1976년 해남 대흥사에서 운기 스님을 은사로 출가.
동국대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 수료.
1978년 군승 파송 초기 군법사로 임관해
1986년까지 해군에서 포교. 미국 봉황사 주지를 역임했다.
현재 인천 법명사 회주이자 조계종 제5대 군종특별교구장이다.
사단법인 청소년교화연합회 총재,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인천본부장 소임도 맡고 있다.
2022년 2월 23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