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철(文史哲) 의 힘
문사철(文史哲) - 전통적인 인문학 분야인 '문학, 역사, 철학'을 이르는 말
지금으로부터 약 36억 년 전, 지구의 환경이 안정되었을 때
바다에서 최초의 생명체, 단세포가 만들어졌다.
얇은 막에 둘러싸인 채 주변 환경과 분리되었고,
이렇게 분리됨으로서 하나의 생명체가 되었다.
이후 얼마간의 변이를 동반하면서 복제되는 유전체계가 생겨났고
자연선택이 유전체계와 공동으로 유전적 진화과정에 개입했다.
생명활동이 처음 시작되고 나서 지금과 같이 엄청난 생명의
다양성-생물의 다양성이 생겨난 것도 폐쇄적 유전체계가
각기 다른 환경에 놓임으로서 가능했다.
쉽게 말해 단세포의 자기복제를 통해 수많은 생명체가
만들어져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 하면서 엄청난 종류의
생명체가 지구를 뒤덮은 것이다.
우리는 그 생명체들 중 얼마가 멸종했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생명체의 다양성에 대해 그 전부를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다.
생태계는 그렇게 복잡한 세계다.
약 6,500만 년 전, 외계의 거대한 물체가 지금의 멕시코 유카탄반도에
떨어졌으며 그 엄청난 충돌로 생긴 거대한 먼지구름은
아주 오래 동안 대기를 덮어 햇볕을 차단했다.
이때 공룡과 같은 거대한 초식동물들이 멸종했으며
황폐한 지표면에는 생쥐정도로 작은 포유동물들만이
살아남아 진화를 거듭했다.
그중에는 우리의 조상이 되는 유인원도 포함된다.
침팬지, 오랑우탄, 고릴라들과 함께 같은 종(種)으로 분류되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아프리카누스- 아프리카 동쪽의 원숭이‘ 가
그들이며, 그들이 나무에서 내려와 두발로 땅에 선 것이 약 700만년 전후다.
그 큰 줄기에서 약 4만 년 전에 살았던 크로마뇽인은 우리의
직계조상이며 그들은 상당한 수준의 정신세계를 가진 인간들이었다.
지금 우리 옆에 남아있는 유인원과 호모사피엔스의
핵심적인 차이는 ‘뇌의용량’ 이다.
우리는 400cc에서 1,400cc까지 뇌용량이 커졌으며 이는 생각하는
기능이 오늘날의 인류문명을 창출해 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그렇게 ‘생각하는 존재’ 가 된 것이다.
사냥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인간이 농경생활을 시작,
한곳에 정주한 역사는 채 1만년을 넘지 않는다.
먹거리인 식량이 농사로 비축되자 오직 거기에만 매 달렸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다른 일-전문직-분업’을 하게됐다.
과학도 그렇게 시작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0여 년 전 인류 최초의 ‘수메르문화’ 가
일어났으며 그들은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기록’을 남겼다.
비로소 선사시대가 끝나고 유사이래가 된 것이다.
기록은 ‘정신’의 산물이자 곧 ‘생각’의 산물이다.
모든 동물이 지금까지 동물로 남아있는 것은 생각하는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생각하는’ 정신적 존재이며 이 생각하는 기능이
과학을 낳고 ‘현대의 과학적인 삶’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중심에 문자와 기록이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글자와 종이는 위대한 인문학을 낳았으며 인류는 이 인문학을
통해 같은 가치를 공유, 더 많은 발전과 진화를 이룩했다.
동물적 조건을 가진 호모사피엔스가 ‘정신적n 존재’가 된 근원이 그러하다.
오늘을 정의하는 낱말은 수없이 많을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스마트폰’ 일 것이다.
과학의 첨단제품인 이 스마트폰은 오늘을 지배하는 제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69년 전인 1946년, 미 육군은 탄도계산을 위해
펜실바니아대학에 그것을 연산할 수 있는 기기의 제작을 의뢰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18,800개의 진공관이 들어간,
10진법을 이용하는 무게 130톤의 ‘에니악-ENIAC' 이었다.
컴퓨터의 어머니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컴퓨터는 스마트폰이 되어 사람들손에 쥐어졌으며
일부기능은 이미 손목시계로 대체되었고 곧 단추크기에서
콩알로 줄어들 것이다.
일부 극소수의 비즈니스를 제외하면 대다수는 메시지와 게임에 빠져있다.
PC중독은 6.9%로 줄어들고 스마트폰 중독은 14.2%로 늘어났으며
계속 늘어날 것이다.
지금은 개인이 정보를 생산, 유통시킬 수 있는 시대이고
그만큼 우리는 왜곡된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있기도 하다.
스마트폰을 잠시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중후군’ 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고있는 게 오늘의 사정이다.
신세계 그릅은 2년째 ‘인문학콘서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 4월9일 고대의 인촌기념관에서 ‘2015 지식향연’을 개최했다.
이날의 강연은 신세계의 정용진 부회장이 맡았다.
그는 이날의 강연에서,
‘지금은 스마트폰 시대다.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와 편리를 제공하지만 인간만이 가진 ‘사고력과 판단력’이 퇴화하고
‘비판적사고’ 가 결여되는 문제점도 낳고 있다.
스마트시대의 축복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스마트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축복을 제대로 누리려면 ‘생각의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면서,
첫째 인문학적 지혜가 담긴 글을 읽고, 특히 역사책을 많이 읽어야 하며
둘째는 생각을 많이 하고 직접 글을 써 보라고 했으며
셋째는 주변의 사람들과 토론을 많이 해 보라고 했다.
말하자면 ‘생각하는 기능-정신’ 이 퇴화하는 것을 막자는 얘기다.
위기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사려 깊은 진단이 아닐 수 없다.
브라운대학 출신다운 혜안이라고 평하고 싶다.
아직까지의 철학적 명제는 분명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가 그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 말은 인간이 ‘정신적 존재’ 이며
가장 결정적 기능이 생각-사유하는 것임을 천명한 말이다.
앞으로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해 나가기 위해서는 이 기능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작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영역을 넓혀나가고 있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가 그것이다.
접속은, 둘 이상의 사물을 떨어지지 않게 붙이거나,
공간적 시간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사고기능은 독립적 이지만, 접속은 종속적이 된다.
스마트폰의 가장 큰 속성이 이 접속이며 접속이 차단되면 무용지물이다.
접속으로 그 존재가 확인되는 인간은 독창적인 ‘생각’의 기능이
없다는 얘기다. 접속이 차단되면 쓰러지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은 빨리와 편리의 대명사다. 동시에 온갖 정보의 홍수
그 자체이기도 하다. 문자뿐 아니라 영상까지 있기 때문에
그 누구든 정보를 생산, 유통시킬 수 있다.
이런, 쓰나미 같은 정보유통 속에서 그 진위를 파악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고력과 판단력이며 비판적 기능이다.
필수적인 이런 기능들은 어디에서 얻어지는 것일까. 그게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학문의 총칭이며
연구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 학문으로 나뉜다.
대표적인 것이 문학이며, 문학은 삶의 가치 있는 경험을
상상력을 토대로 하여 언어로 짜임새 있게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리고 사학, 역사학의 준말이며 인간, 인류의 역사를 연구대상으로
하는 학문이다. 다음이 철학으로서, 철학은 인간이나 세계에 대한
지혜,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의 토대 없이 판단력과 비판적 사고능력은 가질 수 없다.
문사철의 힘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시대의 가장 큰 약점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스마트폰 시대에는,
‘생각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정체성을 가지고 개성적으로 사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삶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다.
생각함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접속을 통한 ‘쏠림 현상’ 에 따라 사는 것이다.
정제되고 걸러진 정보가 아니라 주어진 대로의 정보에 따라 사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기 정체성도, 가치관도, 개성적인 것도 없다.
남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그 무게가 몸 전체의 2%밖에 되지 않지만,
에너지의 20%를 사용한다. 생각한다는 것은 그렇게
큰 에너지를 소비하는 핵심적인 기능이다.
그 어떤 것도 이 기능을 대신하지 못한다.
첨단의 기기라 해도 그건 모두 인간이 만든 ‘인공물’ 일 뿐이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인간의 ‘생각하는 기능’은 그대로
남을 수밖에 없고 또 남아있어야 한다.
우리들은 모두가 차에 네비케이션을 달고 있다.
아무리 낯선 초행길이라 해도 네비를 따라가면 쉽게 다녀올 수 있다.
그런데, 모두가 겪은 일이지만, 네비를 따라 다녀온 길은 기억이 안 된다.
길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도 기억에 없다.
그러나 네비 없이, 길을 물어가며 다녀오면
길도 풍경도 모두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는 '균형‘ 이 절실하다.
급할 때는 네비를 쓰고, 다른 때는 네비없이 다니는 균형이
필요한 것이다. 아름다운 길과 풍경도 기억 못하는 삶이 반드시
더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천지가 디지털로 덮혀 있어도 우리의 육신-몸은
생로병사를 비껴갈 수 없는 아날로그적 존재다.
빨리와 편리가 우리의 ‘생각하는 기능’을 퇴화시킨다면,
우리 모두는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하는 새-키위가 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일도 달리 없다.
출처 : 무진장 - 행운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