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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관리
도처에 중심을 가지고 어디에도 원주가 없는 무한의 구형
― 빠스깔
김 동 립
9시 출근. 5시 퇴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만날같이 되풀이하는 이계장(李係長)의 일과였다. 버스나 전차에 흔들리든, 합승 한쪽 구석에 비비대고 앉든, 만날같이 무수한 시선 속에서 혼자 묵묵히 앉아 있어야 한다. 어떻게 자신이 객관화될 때마다 점점 위축되어가는 자기 위치를 깨달아야 한다. 또 그런대로 이튿날 그 이튿날로 마치 내일 아침이면 틀림없이 동쪽에서 해 떠오르듯 이어갔다.
그러나 오늘 아침부터는 처남인 창수(昌洙)와 같이 출근하게 되었다. 옆에 앉은 창수에게 생각이 미칠 때는 여간 즐거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사뭇 흐뭇하다. 단 하나인 처남, 그것도 제대하고 돌아와서는 올데갈데없는 놈을 그의 주선으로―그야말로 그의 힘으로―취직을 시켜주었다. 여간 의젓해지는 자신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그뿐이랴. 그 자리야말로 장차 얼마나 유망한 자린가 말이다. 한일피복(韓一被服) 산업주식회사의 관리부장(管理部長) 자리를 보증하고
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계장은 가로 양쪽에서 밀려오는 숱한 사람들이 눈 아래로 보였다. 창수가 자기를 호위하고 그리고 마치 자기는 개선장군처럼 허리가 펴지는 것이었다.
이계장은 그의 사무실이 있는 빌딩 앞에서 내렸다. 창수에게 부디 열심히 일을 배우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고는 가슴을 쭉 펐다.
그는 오전 내내 하늘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점심 때 아주양행(亞洲洋行)의 그 친구가 찾아와 과장을 모시고 같이 식사를 하면서도 그는 배가 점점 나오는 것 같았다. 사람은 풍채가 좋아야지, 이렇게 속으로 뇌곤 했다.
빌딩의 좁은 충계. 앞서 오르는 과장의 뒤꼭지엔 흰 머리칼이 희끔거렸다.
이계장은 자기의 눈을 의심이나 하듯 층계를 다잡아 오르며 과장의 뒤꼭지를 새삼스러이 쳐다보았다. 분명 염색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희디흰 칫솔 같은 머릿발, 얼핏 왜놈 타나까(田中)의 뒤통수가 저랬다는 기억이 번개 치듯 지나갔다.
그때 이계장과 과장의 옆구리를 휙 스치며 좁은 충계를 앞질러 뛰는 소년, 외원과(外援課)의 사환아이였다.
“그놈 참!”
이번엔 몇 사람의 묵묵한 얼굴이 좁은 층계를 내려간다. 복도에 올라서도 너비는 층계에 질 배 없이 좁다.
창마다 미국제 파란 플라스틱의 차양 커튼. 왼쪽 방마다의 조그만 흰 간판, 301. 302. 303 오른쪽 바깥엔 후면 빌딩, 회색 벽이 창문들 사이로 역시 많은 방들을 구획(區劃)하고, 한 창에는 여인―타이피스트? 여비서?―이 육중한 사내하고 한창 지껄이고 있다. 무성영화 같은 장면이 또 그 옆방에서 잇고 있다. 그런 가운데로 왜놈 타나까의 희끔희끔한 뒤통수와 앞서 걷는 과장의 뒤통수가 서로 앞섰다 뒤섰다 어른어른하는 것이 아닌가.
‘그 그놈 참! 그놈 말에야 일본이 영국 아니라 미국을 넘어뜨리고도 남았었지!’,
―그때, 리노이에(李家)씨는 타나까와 함께 무거운 남산 층계를 밟아 오르며 있었다. 밤마다 찾아와서는 성가시게 굴던 놈. 사열로 늘어선 몸빼의 아낙들이 까맣게 위로 줄짓고, 그 뒤를 이은 애국반(愛國班) 봉사대들의 행렬, 마지막 층계에 오른 네 사람이 하늘에 우뚝 솟았다가는 넘어갔다. 다시금 새로운 네 사람이 솟았다가는 넘어간다. 마치 기관차에 석탄을 퍼 올리는 기계처럼 마지막 층계를 굽어넘는다. 열외에 선 타나까는 거의 퇴색되어 누렇게 된 전투모에 국방색 ‘게또루’로 장딴지를 단단히 묶고, 창바닥에 수많은 못을 박은 군화에 힘을 주었다.
짜박 쫘박 짝 쫙.
타나까는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깃발을 나부끼며 오르고 있었다. 군화의 짝쫙거리는 소리가 리노이에씨의 가슴을 짓누른다. 금을 그어온다. 그는 타나까의 뒤통수를 쏘아보며 어쩔 수 없는 분노에 지쳐 있는 자신, 희끔희끔한 조놈의 대가리통을 그냥! 할 수 없는 것이다. 대동아전쟁 ―그 까마득한 일이 새삼스러이 되살아올 게 뭐람.
“그 친구 여간내기가 아니야!”
앞서 걷는 과장의 난데없는 말에 이계장은 얼핏 자신을 돌렸다.
“네에?”
제자리에 앉은 과장은 결재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과장의 시선은 자꾸만 그의 시선을 차단하고 있는 것 같다. 벌써 몇 번인가 뒤적인 서류도 눈에 익혀오지를 않는다. 그러고는 그 친구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과장의 말이 되살아 오르곤 한다.
어쩌면 간밤에 아주양행의 그 친구가 집에 왔다 간 사실을 과장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짐작이 이계장 자신의 등골을 끈다. 그리고 위선 받고 본 보증수표의 액면 일금 이백만환정(一金貳百萬園整)까지도. 따지고 보면 이번 아주양행의 이권(利權)은 이계장 혼자만이 알고 있는 사실, 따라서 부임한 지 두 달도 못되는 과장에겐 알리지 않고 그 혼자서 쓱싹 입을 씻어버릴 계획은 귀신처럼 감쪽같이 해치울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위선 수표를 받고 그 친구로 하여금 과장에게 점심을 사게 했다.
“과장님, 저 친구 앞으로 톡톡히 쓸 수 있는 인물입니다.”
하고는 다음 기회를 노리게 하는 마음의 여유를 과장에게 주고, 그 간격을 틈타서 이 서류에다 그의 눈먼 싸인이 멋들어지게 갈겨질 것을 바랐었다. 그러나 과장의 눈치는 그게 아니다. 보통의 단수가 아닌 것 같다. ‘그 친구 여간내기가 아니야!’라니?
하긴 과장에 관한 정보는 빈틈없이 수집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고려무역과 해풍공사로부터 각각 백만 환을 받았다는 것은 이계장의 정확한 정보, 이를테면 과장의 수회*다. 따라서 문제가 까다로워질 때는 피차 상쇄할 수 있는 비중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다. 더욱이 과장은 국장의 심복 부하가 아닌가. 그렇게 만만한 적수일 수는 없다. 과장과의 대결은 국장과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 되고 만다. 하긴 그때―일 년 전에 이 자리의 김계장을 밀어내고 그가 들어앉을 때 ―당시 김계장도 역시 당당한 국장의 빽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정당의 배경을 가진 이씨에게는 패배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 년 전과 지금과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계장을 밀어주던 당의 중앙위원은 이미 석 달 전에 모진 바람을 맞고 낙향하지 않았는가.
이계장은 살며시 과장의 눈치를 살펐다. 과장에게 정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읜쪽으로 돌려 들면서 시야의 맨 가장자리에 접촉하는 희미한 과장의 표정을 읽는다. 순간 난데없는 생각이 떠오른다. 백만 환쯤 내밀어? 그러면 저 작자하고 신경전을 면할 수 있지 않나. 그러나 그럴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그의 의지가 아닌 다른 어느 누가 그러했으리라는, 그의 경우와는 다른 세계의 일 같았다. 나에게 돌아온 내 몫을 괜히 뿌릴 게 뭐람.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비굴해져가는 자신을 깨달아야 했다. 앞으로 쭉 책상을 잇대고 앉아 있는 계원들, 작년에 김계장을 밀어내고 들어 앉았을 때
“계장님 상당히 센데요!”
하며 선망의 얼굴을 하던 계원들의 눈이 이제는 ‘저 자식이 얼마나 갈지?’ 하는 멸시의 눈으로 번져온다. 그러고는 그가 과장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듯이 계원들 또한 나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 아닌가?
계원들의 옆얼굴이 서로 엇갈리며 여러모로 겹쳤다. 그 사이로 희끔희끔한 타나까의 뒤통수, 염색의 밑바닥으로 칫솔같이 내솟는 과장의 뒤꼭지가 포말(泡沫)처 럼 부각한다.
회색 플란넬 슈트의 말쑥한 신사. 관리부장.
그는 미국에서 경영경제학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장차 한국의 경제적 발전올 위한 초석이 될 인물이라고들 한다. 오늘날 세계를 논하는 데 경제 문제를 따로 돌려놓고 얘기할 수 없는, 그러기에 더욱이 우리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적인 발전, 그것을 위해서 관리부장과 같은 인물이야말로 가장 유망한 존재라고들 한다.
“네가 그 사람 밑에서 석 달 동안만 이를 악물고 배워봐! 지금 우리나라에서 경영경제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 줄 알아? 아주 극소수야. 그야말로 장래는 유망한 거야. 그 사람이 곧 나가고 나면 한일피복회사는 그대로 네 마음대로 경영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장차 내가 회사를 가지게 되더라도 그러한 유능한 관리자가 꼭 필요하게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하던 이계장의 의도가 어디 있든 간에 하여튼 창수는 제대 후 취직을 했다. 미술대학을 나온 그였으나 자형의 권유대로. 먼저 작업과정을 알아야 한다면서 공장 내를 시찰하자고 한다. 공장장이 앞서고 관리부장 뒤에 창수가 따랐다. 공장장은 작업과정을 단계별로 친절히 창수에게 설명했다.
이층의 재단부(裁斷部)로 갔다. 50미터나 될 재단대 위에는 수십 필이 될 베가 풀려 쌓여 있었다. 조금 전에 본(型) 뜨는 것이 끝나고 이제 재단이 시작됐다고 공장장이 설명했다. 베의 부피가 20센티나 될 높이를 두 대의 자동 전기재단기가 양쪽에서 재단하고 있었다. 창수는 나사(羅紗)접에서의 가위를 생각했다. 소매, 등판의 한 벌감을 자르는 가위. 자동 재단기는 수십 벌의 등판·소매 감을 단번에 재단해 냈다.
재단된 옷감의 여러 조각 뭉텅이는 네 사람의 재단사 조수들의 손에 의해서 차례대로 배열되었다. 깃, 앞판, 등판, 소매, 포켓, 포켓 덮개, 깃에 들어갈 심 같은 부속 베. 바지의 앞판, 뒤판, 허리판, 밴드, 고리의 조그만 여러 조각의 뭉텅 이, 뒤포켓 감.
이때, 회색 플란넬 슈트의 관리부장은 창수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것을 주의해 보세요. 한 사람의 재단사 밑에서 네 사람의 조수들이 움직이는 순서, 동작, 그리고 저들이 꼭 필요로 하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하는 점을 말입니다.”
창수는 그가 시키는 대로 그들의 동작에 주의했다. 재단기에서 떨어져 나오는 한 뭉텅이의 부분품은 조수의 손에 덜렁 낚이고, 조수는 왼발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뒤의 배열대에 붙은 번호의 9 앞에다 놓는다. 그리고 그다음이 10의 번호. 거의 틀림없고 빈틈없이 짜인 기계와 같은 동작에 의하여 1에서부터 순차적으로 배열된다.
얼마 후 아래층 재봉부(裁縫部)에서 울림해오던 모터의 소음이 일제히 멎었다. 작업이 끝난 모양이다. 그러나 이층 계단으로 갑자기 몰려드는 숱한 발자국 소리, 그와 동시에 배열대의 입구에 뚫린 창문으로 쑥 내미는 어느 여직공의 전표(傳票), 마치 은행의 여사무원과 같은 푸른 유니폼을 입은 여직공의 얼굴은 해사했다.
전표를 받은 재단부 조수는 전표의 번호를 힐끗 확인한다. 그러고는 배열대의 1번 감 뭉텅이를 창문으로 덜렁 내민다. 다음 파란 유니폼 해사한 얼굴은 2번, 그다음 유니폼은 3번, 4번, 5번. 21번까지의 배열대 뭉텅이가 다 나갈 때는 스물하나의 파란 유니폼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소요 시간 15분.
“그러니까 저것을 분배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한 사람이 42초 내지 43초 걸리는 셈이지요? 처음 내가 왔을 때 2분씩 걸렸던 겁니다.”
창수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관리부장의 말이었다.
재단부에서 돌아온 직공들은 모두 자기 재봉틀에 앉았다. 한쪽에 열 대의 재봉를이 두 줄로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스무 대로써 일개 조(組)를 편성한 동력장치. 다음 건물에 이어서 십 조까지 편성되어 있었다. 재봉틀 직공 뒤에는 시따바리(下針)라고 부르는 조수들이 한 사람씩 아이론질을 하며 손일을 맡고 있었다.
모두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재봉부장이 모터의 스위치를 넣자마자 와르르 하는, 공업용 동력 재봉틀이 일제히 돌아간다. 발을 누르기만 하면 돌아가는 동력 재봉틀. 따라서 움직이는 재빠른 직공들의 동작. 뽀얀 기름 냄새의 진동.
제1조와 제2조 제3조…… 10조까지의 각 건물 사이에는 열, 줄의 자동 운송장치가 되어 있다. 제1조에서 완성된 부분품은 시따바리의 동작에 의해서 자동 운송기의 고무벨트에 얹혀 제2조로 넘어간다. 건물들 사이를 누비어가는 고무벨트, 짙은 회색으료 진동하는 공기, 이 속에서 쇠붙이같이 굳어진 여직 공들의 얼굴은 수인(囚人)처럼 돌아간다.
제2조에서는 결합의 첫 단계가 이루어진다. 제1조에서 완성된 앞판과 등판과의 결합, 그리고 제3조로 넘어가면 깃을 단다…… 제10조의 마지막 시따바리 손에서는 한 벌의 옷이 차례차례로 쌓인다. 열 벌의 한 묶음이 되면 완성부로 운송된다. 완성부에서도 역시 자동 재봉틀에 의해서 단춧구멍과 단추가 달아진다. 그러고는 자동 압축기계에 의해서 말쑥하게 아이론되면 포장부로 넘어간다. 포장이 끝난 상자는 공장 뒤뜰 창고로 운송된다.
완성된 포장 상자의 창고는, 트럭으로 싣고 온 베가 수십 필씩 쌓인 원단창고와 나란히 있었다. 원단창고에서는 인양기로써 이층 재단부로 베 필을 올려주고, 상자창고에서는 완성된 피복을 받아들이는 작업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한쪽 창고에서는 베가 나가고 곁의 창고에서는 옷이 쌓였다.
오전과는 달리 이계장은 몹시 불쾌한 기분에 싸였다. 다른 생각으로 기분을 전환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머리를 흔들었다.
오늘 창수는 어떡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첫날이라 모든 것이 새로울 것이라, 그러나 이내 걱정이 뒤따른다. 약게 잘 굴어야 할 텐데…… 다른 생각을 해야겠다. 지금 살고 있는 백칠십만 환의 전셋집을 생각했다.
집 살 돈이 없어서 세를 든 것은 아니다. 안방의 다락 구석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둔 조그만 금고. 그 속에 들어 있을 이천오백만 환의 현금, 사부 이자로 빌려준 사백만 환의 차용증서. 그리고 역시 숨겨둔, 한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지구형 라디오. 동생이 굴리고 있는 59년형 쎄단 ‘닷지’의 시가(時價). 이러한 그의 재산을 생각한다는 것은 더없는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그만한 정도면 나도 이제는 허리를 펴고 한숨 쉴 수 있는 여유는 생긴 게 아닌가. 그나마 지금쯤은 아내가 현금으로 바꿔놨을 어젯밤의 수표. 일금 이백만환정.
마음만 내키면 언제라도 바꿔칠 수 있는 백칠십 만환의 전셋집과 최신 문화주택. 플라스틱의 찬란한 타일을 깐 응접실. 형광등이 산뜻한 불빛 아래서 빛나는 텔레비전, 전축. 전축 옆에는 몇 년을 계속 진열한 타임 잡지. 미처 읽지는 못했지만…… 옆방에는 일제 전기냉장고, 전기세탁기가 아내를 즐겁게 해줄 것이다.
그때 이계장은 때를 한 벌 벗는 거다. 가슴이 뛴다. 사실 버스나 전차에 오르면 저놈이 쌍놈인지, 이자가 양반인지, 내가 촌놈의 자손인지 누가 알 게 뭐람! 다같이 고르게 사는 세상이것다,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살〔買〕 수 있는 호화로운 생활. 다들 그나 내나 비슷비슷한 놈의, 하여튼 세상은 편리해졌다. 옛날에는 권세 있는 대궐집엔 근처에도 못 갔다. 그러나 지금이야 그 옆에다 일류 문화주택을 짓는 것도 다만 돈 문제다. 그것도 대문 기둥에서부터 벽으로 쭉 인조석으로 빛내고, 정원의 비싼 상록수가 대궐과의 차질을 비중하는 척도가 되는 거다. 그것이 바로 계급이 가지는 미묘한 차이와 교양이라는 섬세한 뉘앙스가 풍기는 차이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고 뭐람. 하긴 나야 대학을 못 나왔지만 미자(美子)와 철(徹)이, 고 내 이세(二世)들이야 삼류 대학을 시키더라도 나오고 말 것이 아닌가. 그리고 철이놈은 공과대학을 보내서 어느 놈이 탐내지도 못하고 끌어내지도 못할 기술부장(技術部長)을 시켜야지. 그렇다! 문제는 돈과 내가 차지하고 있을 이 계장이라는 지위!
사장실 옆, ‘Briefing Room’이라는 영자 간판이 붙은 회의실. 스무 개의 접을 수 있는 간이용 의자를 중심해서 가운뎃벽에 가구(家具)식으로 미닫이를 짜 넣은 여러 가지 도표판.
작업표, 직무분석표, 작업분담표, 작업과정표, 작업 평가표, 일일생산표, 예산배정표, 월별생산목표계획표, 노무자배치표, 업무순환도……
이때부터 창수는 인사관리·노무관리·생산관리 ― 이러한 관리(管理)자가 붙는 수없는 낱말들과 사귀어야 했다. 특히 생산관리에서의 ‘타임 스터디’ (시간 연구), ‘모션 스터디’ (동작 연구) 라는 영어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었다.
“우리는 업무를 능률화함으로써 소요경비를 될 수 있는 대로 제한하고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고, 그리하여 최소의 생산원가를 가지고 최대의 이윤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회색 플란넬 슈트의 관리부장은 열심히 강의를 시작했다.
“따라서 관리자는 언제나 정확한 ‘숫자’와 ‘도표’로써 실적과 능률을 표시하여 확실한 예산의 사용과 그에 비례한 능률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닫이를 연다. 하나하나의 도표를 설명한다.
작업표― 여직공 H의 실례가 도표화되어 있다.
1. 작업 내용, ‘소매 만들기’
2. 한 건의 소요시간, 5분 30초.
3. 하루의 작업 시간, 7시간 10분.
(이 작업 시간은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 퇴근할 때까지 점심시간 1시간과 오전 10시에서 15분, 오후 3시에서 15분, 합계 30분간의 휴식시간에다가 재봉틀에 기름 주는 시간과 변소에 가는 시간을 합한 20분을 빼고 난, 순 전히 작업에만 소요하는 시간을 말함.)
4. 따라서 H가 생산하는 하루의 생산량은 ‘소매 만들기’ 78개.
5. 잉여시간, 5초.
창수는 관리부장이 따지는 시간수의 도표 숫자를 보면서 아찔하는 현기증 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와 같은 세밀한 계산에 탄복한 자신인지도 몰랐다. 진득진득하고 눅진눅진할 관리부장의 뇌수(腦髓)가 시계 안을 들여다본 때의 톱니바퀴로 변해오는 듯한 환각에 싸인다. 그러고는 재단부 창문에 쑥 내미는 여직공의 전표. 푸른 유니폼. 화장기라고는 찾을 데 없는 해사한 얼굴들이 서로 엇갈려온다.
이계장은 슬며시 일어났다. 과장 앞으로 다가섰다. 문제의 아주양행의 서류를 결재판 옆에다 살며시 놓는다. 과장은 치켜보지도 않는다. 전혀 알은체를 않는다.
‘시치미를 떼는 건가? 돈 백만 환 줘? 체, 어림도 없다! 제까짓 게 뭐야!’
마침내 그는 밖으로 후딱 나와버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여전히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뭐 자기는 먹지 않았나? 피장파장이지!
이계장은 괜히 화가 났다. 복도로 걸어 나오는 허벅지의 근육이 경련을 일으킨다. 실룩실룩 후들거린다. 가슴까지 설렌다. 마구 흔들린다.
어쩌면 계원인 미스터 박이 어젯밤에 놀다가 돌아가는 길에 아주양행의 그 친구를 만났는지도 모른다. 미스터 박이 막 나가자마자 그 친구가 왔었다. 골목에서 만났을지 모른다. 그래서 혹시 미스터 박의 입을 통해서 과장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스터 박은 나의 심복이 아닌가?
“계장님, 왜 매일같이 신임 과장한테 놀러 오는 친구 있잖아요? 그 인상 고약한 친구 말입니다. 그 친구 아무래도 계장님 자리를 노리는 것 같애요. 경계하세요. 제가 눈치 보는 것 하나만은 확실히 배워왔거든요.”
어젯밤 미스터 박의 말, 고 인상 고약한 친구는 아침나절에도 과장에게 뭣인지 소곤거리고 갔다. 그치가 내 자리를 밀어? 어림도 없다! 그는 그가 결심만 한다면 언제라도 뿌릴 수 있는 운동자금, 다락 속 금고 안의 현금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따위 작자들 때문에 그 돈을 뿌린다는 건 이계장의 살을 에듯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러운 자식들!
그건 그렇고 저걸 결재해주지 않으면 어떡한다? 지금쯤 과장은 그 서류를 놓고 고개를 요리조리 비틀고 있을 게 아닌가. 먼저 과장만 그대로 있었더라면 아무런 걱정도 없을걸. 그치 그것 국장 갈리는 바람 하나를 막지 못하고, 병신 같은 자식!
이계장은 아무런 반항 없이 밀려간 전 과장이 원망스러웠다.
소학교 다닐 때 일이었다. 외다리 위에서 아랫마을 애들하고 패싸움을 한 일이 있다. 나무토막으로 엮은 나무다리,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다리에서다. 처음엔 개울을 사이에 두고 돌싸움을 하다가, 마지막엔 대장을 하나씩 뽑아 다리 위에서 결판을 내기로 했다. 그때 이계장은 다리에서 싸웠다. 별로 치명적으로 맞지도 않았는데, 상대편이 그의 왼뺨을 갈겼을 때다. 뒤의 동료 패들이 그만 도망을 쳐버렸다. 그러고는 그 혼자서 실컷 녹초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무수한 손, 발, 운동화, 짚세기. 그래도 그때는 끝까지 싸우지 않았나.
이계장은 왠지 현기중이 핑 돌았다. 왼뺨을 쓰다듬었다. 무심코. 다음 순간 난데없이 자신이 계장 자리를 물러앉은 경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실직. 매일같이 조르던 미자와의 약속, 오토파인 피아노를 사주겠다고 한 약속은 깨지고 만다. 회사를 가지면 창수를 관리부장을 시킨다. 그것도 틀어지고 만다. 그래도 그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만날 경찰에 불려 다닐지도 모른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장부를 압수당하고, 하나 그때는 위에서부터 눌러서 쓱싹해 버렸다. 그러나 미스터 박의 말, 고 인상 더러운 자식, 국장의 심복인 과장, 또다시 며리가 핑 엇갈린다. 무수한 은실이 눈언저리에서 작렬(炸裂)했다.
그때였다. 뭣이 뒤에서 그를 쫓는 급한 인기척. 과장? 경찰? 이백만 환! 소름이 쪽 끼쳤다. 이상하게 오금이 저린다. 뱃멀미에 취한 것처럼 가라앉지 않는 마음, 순간 몸뚱어리 세포마다 샅샅이 내뱉는 송곳, 동시에 옆을 획 스치며 복도를 좁혀 뛰는 인기척, 사환아이.
“조놈의 자식!”
가슴이 철벙 바닥으로 꺼졌다. 순간 아찔했다. 도어 파란 플라스틱 303, 302. 천장, 골수에서 튀는 불꽃!
순간적인 일이었다. 그는 졸도하고 있었다.
작업 분담표
1. 기구 단위, 재봉부.
2. 업무계통, 제1조의 B에서 제2조 B, 제2조의 B에서 제3조의 B, 제4조ː의 B…… 제10조의 B.
3. 소요시간(상의 10착당)
가. 제1조의 B는 원형 가공. 18분.
나. 제2조의 B는 앞등판의 결합 및 포켓 부착. 17분 45초.
다. 제¸조의 B는 깃을 달고. 18분 2초.
(…)
차. 제10조의 B는 앞등판의 옆구리 결합과 가장자리 깁기. 18분.
“모든 분야에 있어서 기계의 놀라운 발전은 인간을 돕고 있으나 실제 기계를 조작하는 인간의 동작은 너무나 불규칙적이며 비과학적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시간의 낭비와 생산을 저하시키고 있습니다.”
창수는 관리부장의 점점 절정에 이르는 열변이 머리 위에서 억눌러음을 느꼈다. 그리고 새카만 숫자투성이의 도표를 그의 시야 속에서 지탱해내기에 질려오는 자신을 깨닫고 있었다.
고개를 치켜 머리를 흔들었다. 백 근의 쇠뭉치를 지탱하듯 목줄기가 땅겼다.
이계장이 의식을 회복한 것은 병원에서였다. 그의 머리맡엔 미자가 눈물을 짜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을 꼭 쥔 아내는 여느 때보다도 눈이 작아 보였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복도에서 가슴이 마구 뛰고 현기증이 들고 몹시 어지럽던 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러나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빨리 내 집으로 돌아가서 혼자 누워 있었으면·…… 간절한 생각뿐.
마다는 것을 아내와 딸이 양쪽에서 억지로 부축해주었다. 차에서 내려, 집까지의 오르막 골목길을 걷는 데는 자꾸만 숨이 찼다. 백 미터를 세 번이나 쉬었다. 그래도 차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아스팔트 위에 쾅쾅 다지는 듯한 고통보다는 나았다.
간신히 축담에 올라섰을 때는 이젠 살 것 같았다. 그러나 마루에 나와 있는 지구형 라디오가 눈에 띄었을 때, 그는 어디서 기운이 솟는지 어성을 버럭 높였다.
“왜 저건 내놨어! 치우지 못해!”
곁에서 그를 부축하던 그의 아내는 냉큼 마루에 오르며 라디오를 덥석 들어서는 다락으로 갔다. 그녀는 남편이 입이 닳도록 말하던, 남에게 잘산다는 눈치를 뵈지 않도록 하라는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낮에 미자가, 놀러 온 동무들에게 자랑하느라고 내온 것을 병원으로 가는 통에 그만 잊었던 것이었다.
빈혈증이라고 말하던 의사의 말에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리에 누웠어도 이계장은 마음이 편칠 않았다.
자꾸만 가슴이 설레었다. 꼭 무엇에 쫓기고 있는 상태, 난데없는 환상들, 6·25 때 마루 밑에 흙을 파내고 숨었다. 밤은 더욱 싫다. 새벽 한시 두시를 가리지 않고 인민군의 대문을 차는 소리, 짜박짜박 밀려드는 군화 소리, 가슴이 잇달아서 쿵쾅거린다, 따발총이 머리 위 마루에서 꽝! 못을 박을 때 전신에 쪽 배는 식은땀, 불 켜라는 군대 고함소리, 아내가 들고 나오는 촛불은 깜깜한 마룻장 사이에서 일직선으로 가슴을 찌른다. 섬뜩! 전신이 조여든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숨을 죽인다, 가슴이 꽉 조인다, 자세를 획 돌렸다, 울부짖듯 고함을 질렀다.
“창수!”
갑자기 옆으로 획 돌아누우며 지르는 고함소리에 그 아내는 깜짝 놀랐다.
라디오를 내놨다가 들은 조금 전의 꾸지람을 되씹고 있던 그녀였다.
미자가 아버지의 팔을 붙들었다.
이계장은 간신히 자신을 감당했다. 그러고는 이내 자신이 왜 그렇게 고함을 질러야 했을까 하는 스스로의 심정을 저울질하는 것이었다. 뭣 때문에 갑자기 창수를 찾았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숨이 막힐 듯이 가슴이 답답하여 견디다 못해 잠자리를 고쳐 누운 순간을 기억할 수 있었다. 철이, 미자, 아내의 얼굴이 눈에 띄었고, 그러고는 창수가 아내의 곁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도 않고서 고함을 질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알 수 없다. 창수는 회사에 나가고 없는 게 사실이 아닌가?
이계장은 다시금 그의 잠자리 곁에 앉아 있는 식구들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창수는 보이지 않는다. 어딘지 마음 한쪽 구석이 비어 있는 허전함, 그것은 또한 쓸쓸한 고독감 비슷한, 어떻게 창수가 곁에 앉음으로써 이 허전함을 메울 수 있는 그러한 상태, 하기야 창수가 취직을 않고 빈들빈들 놀며 곁에 있으면 지금보다 더 못 견디도록 가슴이 답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취직을 한 지금에야 이렇게 누워있는 것이 오히려 의젓하지 못한, 얼마나 거북살스러울까 싶었다. 그러나 이 거북함은 짐작에 불과한 미지의 것, 당장에 창수가 곁에 있었으면 싶다. 어딘지 쓸쓸하다.
이계장은 자신이 몹시 고독하다 싶었다. 모든 것에서 떨려 나온 외톨 같았다.
이계장은 또 한 번 식구들의 얼굴을 두루 살펴보았다. 철이, 미자, 아내. 그러나 시야에 떠오르는 식구들의 얼굴과는 달리 머릿속을 죄어드는 미스터 박의 말, 고 인상 더러운 자식, 수표, 그러고는 여러모로 겹친 계원들의 얼굴, 전차 속의 많은 눈들이 그에게만 주시하는 순간,
“다 나가 있어!”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마침내 식구들을 아랫방으로 쫓아내고 말았다. 모두가 그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환상, 빨리 거기서 헤어나야만 한다. 혼자 있고 싶었다.
기계의 발전.
관리부장의 ‘기계의 놀라운 발전……’이라는 말이 골수에 점점 깊이 해왔다.
퇴근의 버스 속에서도 창수는 그 말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더 깊이 배겨왔다.
―기계의 역사. 그것은 인간 역사의 개가인지도 모른다. 지렛대로써 물건을 움직이던 18세기 이전의 힘을 교환하는 기계. 증기기관차의 발명과 더불어 산업혁명을 일으킨 열역학이 가지고 온 에너지의 종류를 교환하는 기계. 전신·전화·영화 등의 정보를 처리하는 기계. 그리하여 오늘날의 텔레비전, 레이더, 전자두뇌로 발전한……
그는 문득 구체음악(musique concrete), 자기녹음(磁氣錄音)을 전제로 한 전자음악이 생각혔다. 그것도 기계의 힘이다. 연주가가 필요 없는 음악, 전자음으로 된 물체로서의 음악, 음악은 이제 20세기에 들어와서 조형(造型)된 물체의 창조로 들어섰다. 기계와 음악, 과학과 예술.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지 모르겠다. 인간의 문자, 그것도 점차로 기호화하고 그래서 기호의 의미론으로 전문화하고 도표화하고 기계화하는 게 아닌가. 자기녹음장치의 눈부신 발달, 자성 테이프 위에 부호로 영상을 기록해두었다가 그것을 재생시켜 스크린
위에 다시 그 영상을 나타내는 텔레비전. 대량생산.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발달할 학교의 무의미성, 이러한 것은 결국 문자를 우리들 일상생활에서 추방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학교가 필요없다면 거기에서 가르칠 과목은 간단할 것이 아닌가. 다만 귀로 듣는 문자의 훈련으로써 충분하지 않은가. 이제 와서 과학을 능가할 만한 묘사와 발전을 기계를 떠난 어느 분야에서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발달하는 과학·경제학이 점하는 사회관계의 적확성, 정신분석학이 천착한 인간의 깊이, 이러한 것이 예술적 감동의 근원이 되는 예술적 분야를 얼마나 좁혀놓았는가, 과학이란 이름으로. 그림〔繪晝〕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결국은 무정형에까지 이른 오늘의 그림, 그것은 화가의 기능 이상을 말할 무슨 변명을 할 것인가. 귀로 듣는 희곡, 스크린에 비치는 아름다운 그림, 눈으로 보는 문학으로 충분한 게 아닌가. 지금까지의 문자에 대한 읽기, 쓰기, 작문 짓기를 위한 에너지의 소모는 필요 없을 것이 아닌가. 인간의 생활에 조금이라도 편리하고 행복을 가져올 것이라면 문자가 무서워서 과학이 가만있을 것인가, 과학은 편리한 기계의 예술을 얼마든지 발달시킬 것이 아닌가. 무슨 이유로 글을 쓰고 붓으로 그릴 것인가.
잠이 오지 않는다.
창수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일어나서 무엇이든지 그려보고 싶은 충동, 붓을 들고 싶은 충동, 아무렇게나 캔버스를 박박 문질러보고 싶은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윗방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자형의 한숨소리.
열흘이 지났어도 이계장의 증세에는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밤잠이 오지 않는 데는 죽을 지경이다. 그날 이후로 하룻밤이라도 곤히 잠들어본 일이 없다. 머리가 깨질 듯이 골치를 쑤시는 가운데로 쓸데없는 공상만 늘어날 뿐이다. 잠자리에서 숨바꼭질하듯 자리를 고쳐 누워도 막무가내다. 그럴라치면 되레 엉뚱한 생각이 더해오는 것이다. 아득한 옛날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서 아무리 빨아도 젖이 안 나와, 이렇게 괴로워하며 보챘으리라는 뚱딴지같은 생각까지 떠오른다.
빈혈증이 다 뭐야, 그놈의 의사가 아무래도 새까만 엉터리 의사에 틀림없을 것 같다. 조금만 걸음을 걸어도 심장이 뛴다. 행길 가에 나가면 전차바퀴 소리가 그대로 골수 속으로 금을 그어오고, 이내 전신이 피로해온다. 온 몸뚱어리가 비에 촉촉이 젖은 것처럼 피로에 젖는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이름난 병원을 차례차례로 찾아다녔다.
아무래도 심장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이계장은 미자를 곁에서 한시라도 떠나지 않도록 명령했다. 미자를 데리고 종합병원의 심장내과로 갔다. 과학적인 정확한 진단, 의사의 말대로 심전도(心電圖)를 꼭 한번 찍어보고 싶다.
상반신을 홀랑 벗고 침대 위에 누운 이계장은 어쩐지 무서웠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조수들이 노오란 구리쇠가 붙은 고무줄로 양쪽 팔목과 발목을 묶었다. 그러고는 심전계로부터 나오는 전기코드를 각각 네 군데의 팔목 발목에 묶은 노오란 구리쇠에 꽂았다.
“아무런 감각이나 반응은 없으니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누워 계세요. X광선 촬영은 백혈구를 죽이지만 이건 그런 장애도 전혀 없어요. 호흡은 정상적으로 하시고…….”
스위치를 넣는 소리와 함께 더르르더르르, 머리 위에서 울려오는 심전계의 회전, 한 일 분도 못돼서 스위치는 꺼지고 팔목과 발목에 접촉시킨 코드를 교대시킨다. 여섯 번을 다시금 더르르거렸다.
이젠 끝나는가? 그러나 조수는 흰 고약 같은 것을 가슴 가운데서 왼쪽 젖가슴 쪽으로 여섯 군데에 반점 찍듯 바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팔목에 묶은 것과 같은 노오란 구리쇠를 반점 하나하나마다 짓이겨서 밀착시킨다. 그리고 역시 여섯 번을 스위치를 넣었다 꼈다 하며 더르르거렸다.
약 십 분간이 이계장에게는 한 시간이 넘는가 싶도록 지루했다. 그리고 의사나 조수들은 마치 이방인처럼 그에게는 낯설고 거북한 존재들이었다. 어떻게 그들과 얼굴이 마주치면 일종의 두려움, 일종의 공포증까지 솟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자가 곁에 있어주어서 외롭지 않고 좋았다.
심전계의 촬영을 마치고 난 의사는 이계장의 혈압과 체중, 신장을 재고 연령을 물었다.
그러고는 아버지가 잠을 못 이루고, 공상이 많고, 이내 피로해지며, 꼭 무엇에 쫓기듯 불안해지고 가슴이 뛴다는 미자의 설명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엔 아무렇지도 않은, 키 크고, 건장하게 생긴, 알맞은 근육을 팔과 다리, 가슴에 붙이고 있는 이계장을 동정이나 하듯 힐끗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약방에 가시면 메프로바메이트*라는 약이 있어요. 위선 그걸 몇 알 사 먹어보세요. 많이 먹지는 마시고요.”
심장내과의 진찰실을 나오는 이계장은 미자가 여간 똑똑한 년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마치 자기가 환자인 것처럼 그의 증세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는 놀랐다. 그리고 의사가 말하는 약 이름을 종이에 메모하는 그 침착성.
진찰실을 나오던 이계장은 복도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아니 부장님이 어떻게 여길?”
바로 창수가 취직한 한일피복산업의 관리부장이었다. 회색 플란넬슈트의 말쑥한 신사.
“네, 아마 심장이 좋지 않는 것 같애요. 그래서 오늘은 ECG*나 한 번 찍어볼까 하고 왔는데…… 그런데 참 이선생에겐 창수씨로부터 소식을 듣고서도 문병 한번 못 가보고…… 어떻게 좀 차도가…….”
이계장은 이내 관리부장과 헤어져 병원을 나왔다. 귀찮고 또 여간 자신이 못나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나 관리부장이 이러한 병원에 나타나리라고는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창수로부터도 아무런 말이 없었던 것이다.
‘설마 나와 같은 증세로서 온 건 아니겠지.’
그는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자의 부축을 받았다.
“요는 기계의 능력에 따르는 작업조직과 인간조직의 유기적인 상태를 계속적으로 유지 하는 데 있습니다.”
회색 플란넬 슈트는 조금도 빈틈이 없다.
“따라서 인간이 동작할 수 있는 활동범위라는 것도 기계의 속도에 조절하여 과학적인 개선을 해야 합니다.”
창수는 관리부장의 명석한 두뇌와 자신있는 건강한 체격에 점점 압도당했다. 그리고 점 점 왜소해져가는 자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관리 업무를 배워야 했다.
동작 연구
1. 인간의 선 자세나 앉은 자세에 있어서 한 사람의 최대 활동범위는 팔을 각각 어깨로부터 펴서 원을 그림으로써 결정된다. 바른팔과 왼팔을 돌림 으로써 그려진 두 개의 중첩된 부분은 몸을 움직이지 않고 두 손을 서로 가깝게 놀려 일할 수 있는 최대한계다.
2. 정상적인 활동범위는 팔의 전박만을 펴고 후박은 굽혀서 팔꿈치를 신체 에 붙여서 원을 그린 것이며 이때에 중첩된 부분은 양팔로 하는 일을 가 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범위다. 이 범위 내에서는 눈의 이동은 최소한으 로 움직인다.
3. 따라서 동작 절약의 원리는
가. 양손은 동시에 운동을 시작하여야 한다.
나. 휴식시간 외는 양손이 놀아서는 안된다.
다. 양손은 같은 순간에 동작을 완료하여야 한다.
라. 양손의 동작은 반대 반향으로 균형 있게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마. 작은 물건은 보통 운반하는 것보다 미는 것이 더 빠르다.
바. 방향을 갑자기 바꿔야 하는 직선운동은 계속적인 곡선동작보다 좋지 못하다.
사. 필요한 기재는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잡을 수 있는 범위 내에가깝게 놓아야 한다.
아. …………
자. ……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는 데는 비단 직공뿐이 아니라 일반 사무원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무원의 사무능력 향상과 동작절약을 위해서는 앉아서 손을 폈을 때 책상 끝이 미치지 못하는 커다란 책상은 필요 없으며, 모든 책상은 가장자리를 잘라버리는 책상 개선이 필요하게 됩니다.”
창수는, 관리부장의 말은 앞뒤가 뒤죽박죽으로,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다. 날이 쌓일수록 무거워지는 머리. 숫자와 계산척이 온통 머리를 휘저어놓았다. 그것은 그 자신의 팔다리의 관절을 하나하나씩 분해해가는 과정 같았다.
―기계의 속도에 조절하는 과학적인 동작! 기계 중심! 그거야말로 기계를 조작하는 또 하나의 기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초등학교의 운동장, 체조선생의 호각, 거기에 맞추어서 움직이는 수백의 학생이 하나같이 움직인다. 하나같이 팔을 양쪽으로 벌리며 다리굽히기 운동, 그런데 한 놈이 팔을 위로 펴며 가슴펴기를 했다. 이내 여러 학생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놈은 앞으로 끌려나간다. 부속품의 고장!
보름이 지났어도 이계장의 증세에는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미자가 찾아온 심전도의 결과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정상적인 상태라고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슴은 울렁거리고 밤잠은 오지 않는다. 골치가 아프다. 직장의 동료들이 문병을 와도 귀찮다. 이야기하는 시간이 한 십 분만 지나도 이내 피로해온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괴롭다. 미스터 박이 가지고 온 술을 마셔보아도 더 갑갑하고 괴롭다.
메프로바메이트를 그동안에 얼마나 사 먹었는지 모른다. 그 약이 불안 신경에 먹는 거라는 것을 알았을 때 이계장은 당황했다.
‘내가 정신병 환자가 되다니?’
믿기지 않았다.
이제 겨우 남부럽지 않게 살게 되려니, 하는 생각이 뒤미치기만 했다. 짜증이 났다. 아직까지 시골에서 흙을 뒤적이고 있는 친척들, 오로지 이계장에게만 온 가문에서 희망을 걸고 있는 사실. 그는 만사가 이제 틀려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초조하다. 만약 이대로 죽기나 하는 날에는 저 철이 미자는 그대로 시골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저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미칠 것 같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동안 신문도 보지 않았다. 이젠 활자를 대하는 것만도 골치가 띵한다. 그러나 광고란은, 그중에도 약 광고, ‘불안 신경…….’ 운운하는 광고는 단번에 눈에 익혀온다.
오늘도 出勤하실 때 잊어서는 안됩니다 마음의 평화와 均衡(밸런스)을 위하여 出勤하시기 한 時間 前에 精神神經安靜劑 “피이스” 錠 한 錠을 服用하시라는 醫師先生님의 말씀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오늘도 職場에 나가시면 또 머리골치 아프고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피이스” 한 錠으로 미리 마음(心)의 武裝을 든든하게 하십 시오. (사랑하는 아내의: 권고) |
그러나 세상에 믿을 수 없는 건 약이고 의사다. 그들의 말을 들을 때는 그럴싸하다. 이번에는 꼭 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놈의 병은 약을 먹을 그때뿐이다. 수면제도 그렇다. 먹고서 잠을 자고 나면 그만큼 피로가 풀려야 이치에 닿는다. 그러나 이건 더더욱 머리가 무겁고, 어디 호되게 얻어맞고 자고 난 뒤 같다. 그걸 안 먹고 잠을 청해보려고 무진 애를 써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부엌에서 딸그락거리는 쥐 소리, 방이 조금만 더워도 신경에 거슬린다. 잠자리를 고쳐 누울수록 더 초조해온다. 바람이 처마 끝을 스쳐간다. 무엇이 담을 훌렁 뛰어넘고 들어오는 것 같다. 담은 칠척이 되도록 높다. 그나마 담 위에는 빨강 파랑 노랑의 병조각, 피색 유릿조각을 수없이 꽂아놓았다. 어느 놈도 얼씬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틀림 없이 무엇이 뛰어넘어오는 것 같다.
이계장은 일어나서 불을 켰다. 그러나 다락문은 틀림없이 잠겨진 채 그대로다.
창수는 회사가 싫었다. 괜히 공상만 늘어가고 밤잠은 오지 않는다. 하루의 피로는 그날의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하는 데서 그 이튿날로 그대로 겹쳐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상하게시리 그림이 그리고 싶다. 빨간 물감으로 한일피복회사를 그리고 그 위로 무수한 톱니 바퀴를 새카맣게 그려 넣고 싶다.
톱니바퀴. 기계. 모든 것이 기계로만 행세하는 것이 현대인지도 모를 노릇이다. 전자두뇌, 인조인간의 기계가 정말 등장할 것이다. 달나라를 정복하는 것도 기계의 힘, 현대의 두 조각 세계도 이를테면 기계의 대결, 유도탄과 수소탄과 ICBM*이라는 기계의 대결. 어느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기 위해서 유도탄이라는 기계에게 조절을 한다. 그러면 그놈은 틀림없이 그 도시에 가서 터지고 만다. 그러면 다다. 비극이다. 목적을 달성할 기계에게 수단만 가르친 게 탈이다. 그때 그놈의 부비트랩 *이 하필이면 안중사(安中士)가 지나갈 때 터졌느냐
말이다. 중공군이 접근하기 용이한 거기에 설치한 그놈의 부비트랩이다. 하룻밤의 비바람에 인계철선이 어떻게 어긋나 있었기에 그 옆을 지나가던 정찰대의 안중사가 걸렸느냐 말이다. 배가 터져서 빨랫줄 같은 창자가, 그 이튿날 가보니까 새까맣게 썩었는데, 다가서 보니 파리떼가 윙 날아갔다. 허옇게 구더기가 꿇고 있었다. 기계에게 목표를 주고, 그 목표를, 그 임무를 달성할 기능까지 주고서는 오로지 그 목표 뒤에 있는 가치판단만 인간 편에 두어둔 게 탈이다. 인간까지 기계화가 될 이 마당에서. 어느 기계를 믿을 것인가? 기계화하는 인간에겐 위엄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유물론의 단백질과 그게 그거다. 과거의 인간은 종합적이었으나 오늘의 인간은 분석적이다. 기계만은 종합의 능력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인간과 기계는 같은 뜻이 아닌가. 체조시간에 호각 하나로 움직이던 그 많은 부분품들, 운동화, 농구화 다 어디로 갔을까? 전장에서 죽었을까? 뽀얀 기름 냄새의 공장에서 기계화됐을까?
‘결국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인간에게 시달리게 되는군요.’
독일의, 괴테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말이 연달아 떠올랐다.
창수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윗방으로 갔다. 방문 앞에서 이미 잠든 누님을 깨웠다. 마치 메피스토펠레스에게나 홀린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었다.
누님에게 사정을 했다.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가겠다고, 평생소원이니 그림 그릴 재료를 사달라고, 그때 자형이 덧문을 열고 넋 잃은 표정으로 건너보고 있었다.
이튿날 이계장은 아무래도 옆집 모양으로 가시철조망으로 담을 좀더 높여 야겠다고 결심 했다.
그에게는 한마디 의논도 없이 회사를 그만둔 창수놈을 생각하면 당장에 쫓아내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더더욱 답답하고 미간이 찢어질 것 같다. 하는 수 없다. 꾹 참자.
창수가 밖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일꾼을 데리고 오라고 했다.
“아니 이 담을 또 더 높여요?”
“도둑이 얼마나 들끓는지 모르니?”
“그만두세요. 이 담을 넘을 도둑이 있어요? 먼저 이사 간 사람이 살 때 한 놈이 넘으려다가 왼통 핏자죽만 남기고는 도망갔다던데, 저기 핏자죽이 말라붙은 걸 본걸요.”
이계장은 들은 바 있는 그 자리를 쳐다보았다.
“형님도 이젠 괜한 데 신경을 너무 쓰지 마세요. 접때 병원의 심장사진 결과도 아무런 이상이 없잖았어요. 의사가 하는 말도 환경을 조용하게 하고 휴양을 하면 아무런 병도 아니라고 한대잖았어요?”
이계장은 화가 벌끈 치밀었다. 저놈이 나에게 빈정댄다 싶었다.
“아니 내가 무슨, 병 때문에 담을 높이자는 거야? 그래 당장에 한 번이라도 도둑을 맞는 날에는 너나 내나 빨가벗는 거야, 알겠어? 그래 네가 나를 멕여 살리겠니? 너가 얼마나 돈을 벌었니?”
“아니 뭘 그렇게 화를 내세요. 신경을 너무 쓰지 말래는데 그 왜 돈 얘기는 끄집어내세요. 허기야 재산을 갖지 않은 현대인! 그것도 현대의 특징이죠.”
“제애가!”
이계장 부인이 부엌에서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따라서 미자가 아랫방에서 나온다.
“외삼촌은 너무하세요. 아저씨는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시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우리 집안에서 우리 빼놓고 하루 세 끼라도 제대로 배불리 먹는 집이 몇이나 돼요. 정말 아저씨가 마음 놓고 놀 수 있는 것도 아버지 덕이구, 제가 일류 여고에 진학한 것도 다 누구 때문이에요. 아저씬 아버지의 심정을 모르세요. 너무하세요.”
그러고는 눈물을 찔금찔금 짜는 것이 아닌가.
창수는 뜻밖의 일에 난처했다. 어떻게 자신이 서 있는 현재의 위치가 애매했다. 하긴 자신이 이 집안의 일에 간섭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는지 모른다. 그는 그만 밖으로 나와버렸다.
‘당신네들의 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그야 당연히 물러나지요.’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뒤에서 “창수ㅡ” 하며 부르는 자형의 음성이 들렸으나 그냥 골목으로 빠져나와버렸다.
그러면서도 한편 속으로는 자형이 불쌍했다. 악착같이 살아보려고 애를 빠득빠득 쓰는, 미자 말마따나 자기는 자형이라는 인간을 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이 계장은 이십 일 만에야 굳은 결심을 하고 사무실에 출근했다. 그동안에 미스터 박이 매일같이 드나들면서 직장의 정보를 샅샅이 들려주긴 했으나, 아주양행 건은 모두 결재가 나고 완결되었다고 하나, 계장 자리를 오래도록 비울 수는 없었다. 그 자리를 그렇게 쉽게 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또 한편 병과 한번 싸워보자는 굳은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반나절을 견디지 못했다. 오후 5시까지는 견뎌야지 하는 시간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창문 유리에 팽창되어 울려드는 전차바퀴 소리, 버스 소리, 자동차의 브레이크 소리는 골수에 찌익찍 금을 그어왔다.
이제는 좀더 적극적으로 철저히 병을 고치는 방향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창수를 데리고 정신병원으로 가는 용기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창수가 집을 나간 후 그의 친구 집에서 묵고 있는 모양이었으나 그래도 하루 한 번은 들러주는 게 고마웠다. 눈치를 보아 하니 제 누이에게 용돈을 얻으러 오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계장은 모른 척했다. 비굴한 놈이라고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도 얻기 어려운 자리를 박차고 나온 놈을 생각하면 문 앞에도 얼씬 못하게 하고 싶다. 그러나 그래도 창수가 곁에 있으면 어딘지 든든하고 덜 고적하다. 특히 병원엘 갈 때는 더했다.
이계장이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결심한 일이었다. 위선 무엇보다도 남이 알기에 여간 창피스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가족들에게도 숨겼다. 창수에게도 누구한테나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했다.
병원의 원장실로 들어섰을 때, 이것이 병원인가 싶었다. 의료기구는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보통 사무실과 같은 원장의 책상 위에는 청진기 하나만이 놓여 있다.
이계장은 무엇이 뒷덜미를 자꾸만 찹아당기는 듯한 불안감을 어쩌지 못하면서, 원장에게 그날 복도에서 졸도한 자신을 설명 했다. 과장과의 암투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는 차마 못했다. 그리고 그 후의 증세를 이야기 했다.
“네, 알겠습니다. 머리가 아프고 기억력이 감퇴하고 정신집중이 되지 않고 공상이 많다든가, 잠이 오지 않아서 괴로워한다든가, 모든 것이 권태롭고, 쉬이 피로해오고 사람을 대하기가 귀찮고 책은 읽기도 싫다든가 하는 중세. 그렇습니까?”
이계장은 원장이 자기의 중상을 환히 알고 얘기하는 데는 놀랐다. 정말 자신은 틀림없는 노이로제 환자이며, 이제는 이 원장이 시키는 대로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싶었다.
“네, 저의 경우가 바로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증세가 나타날 때까지의 원인을 잘 규명해야만 하는데요. 이를테면 오늘날과 같은 사회제도라는 것도 커다란 원인이 되죠. 현대의 교육제도도 그렇지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돈만 있고 공부만 하면 자연히 밟게 되는 과정이지요. 학생이 가고 싶어서 입학하는 게 아니에요. 남이 가니 자기도 가고, 또 거기를 나와야만 자격을 주는 제도 때문이죠. 또 여기까지는 괜찮아요. 대학에 들어갈 때는 어떠합니까. 그야말로 훌륭한 법관이 되겠다는 마음으로써 법과를 택하는 학생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또 그야말로 인술로써 질병에 신음하는 불쌍한 환자를 구하겠다고 의과를 택하는 학생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혹시 청진기 하나만 있으면 굶지 않는다는 타산 하에 의과를 택하는 학생은 없을까요? 혹은 대학을 간다는 자체가 취직을 위한 한갓 기정 코스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또 이러한 대학의 각 전문분야에 대한 전문인이 된다는 것은 다른 분야에서는 장님을 만들고 있는} 현상은 없을까요? 보세요! 우리가 커 나오는 성장기부터가 이미 제도화하고 자막대기로써 딱 재서 자라게 되어 있잖아요. 따라서 사회조직이라든가 나아가서는 과학의 발달로 인한 타율적인 생활, 이러한 환경 속에 사는 우리들은 누구나 그런 노이로제에 걸릴 가능성이 많아요. 왜냐하면 정신이 과학을 통제할 만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러한 과도기를 틈타서 외부로부터 인체에 밀려드는 온갖 자극, 이러한 자극을 우리의 신경은 미처 정리하지를 못하거든요. 물론 이러한 것은 보편적인 문제이고, 또 각기 개인에게는 개인으로서의 복잡한 현실들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아마 선생도 선생 개인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있을 거예요. 아니 못하는 거죠. 가장 가까운 부모나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겝니다. 뭐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각 개인의 현실이란 그렇게 각기 복잡한 현실을 가지고 있는 거죠. 이 개인이 가지는 복잡한 현실과 외부로부터 받는 자극과의 균열 그 자체가 문제 되는 겁니다.”
잠깐 말을 끊은 원장은 바깥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장안의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사회라는 틀 안에서 조그맣게 움직이는 개인이라는 존재, 이 문제는 제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여간 벅찬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분야의 지식은 전문화하기 마련이지요? 따라서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은 일반 문화제도하고는 쉽사리 연결이 되지 않지요? 그러니 오늘날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와서 자연에 관해서나 인간에 관해서나 말 한마디 할 수 없이 과학에 억눌려 있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각 개인인 개인 자체가 하나의 전체이며 스스로가 자기 완결적인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까. 참으로 재미나는 패러독스지요. 인간에 관한 지식의 종합이 불가능할 때에 오히려 인간의 현실은 종합적이거든요.”
이계장은 원장의 말이 그의 병을 아주 꿰뚫어 보듯 진단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편 어쩐지 부끄러웠다. 원장이 그의 사생활이라든가 마음속까지를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지레 생각.
“따라서 선생의 치료방법도 결국은 선생 자신이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 말지요. 왜냐하면 그 병 이라는 것이 외부에 나타나는 종기라든가, 대장 속에 나쁜 균이 들었다든가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러니 문제는 선생이 가지는 온갖 정신적인 현실 문제 그건데 그 선생이 가지는 현실이라는 것은 선생만이 알 수 있고 또 선생만이 가지는 유일한 세계일 테니까요. 그러나 제가 조언은 해드릴 수 있지요. 하나의 전문의사로서라고나 할까요. 한데 제 조언은 이래요. 선생과 같은 경우는 좀더 여유 있는 마음으로써…… 인생을 새로이 살아간다고 할까…… 그러한 마음의 준비부터가 먼저 필요할 것 같애요. 무턱대고 약만 쓴다는 것보다는 위선 자신의 현실 문제부터 하나하나씩 원만하게 해결해나가기 위하여 종교적인 신앙을 갖는다든가, 혹은 인생을 사는 태도와 자세를 좀더 소박하고 건실한 방향으로 신념을 바꾸어본다든가 하는, 그것을 주체성이라고 할까 혹은 자주성이라고 할까 그러한 말로 바꿔놔도 좋습니다마는…… 하여튼 인간만큼 제멋대로 생겨먹은 동물은 없잖아요? 선생은 신을 믿는지 안믿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믿는 자에게는 존재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없는 거죠. 따라서 각 개인이 가지는 신념은 그것이 그대로 절대가 되는 거 아니에요? 이러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 개인의 신념, 이것이야말로 노이로제 환자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어요.”
원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이계장은 가끔 한번씩 자기의 가슴에 손을 가져가보는 것이었다. 원장의 말 사이사이에 떠오르는 환상들, 이때까지 그를 괴롭히던, 고 인상 고약한 친구, 그의 바로 등 뒤에서 낯선 형사가 노리고 있는 듯한, 다락 속의 금고, 그를 쫓던 수많은 발, 대낮 가로를 빨간 불을 켜고는 질주하는 헌병차, 6·25, 인민군…… 그러한 상념들이 때때로 과장의 얼굴과 겹쳐서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은, 자기 자신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자꾸만 그의 가슴에 손을 가져가보는 것이었으나 정말 가슴은 아주 평온하고 조금도 설레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계장은 그렇게 오래 계속된 원장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다만 그가 말한 한마디의 말은 극히 짧았다.
“앞으로 선생님의 지도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것 이었다.
이에 대한 원장의 말 또한 아주 평범했다. 앞으로 친구가 되자고 했다. 그리고 약은 원장이 시키는 대로의 분량을 먹고, 하루 한 시간이면 한 시간씩 이계장의 짬이 생기는 대로 와서 같이 얘기하고 사귀어 보자는 것 이었다. 인생 문제나 사회 문제나 서로의 생활 신념이나.
창수는 마치, 꼭 한번 찾아가보고 싶던 교수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원장이 말하는 여러 가지 많은 얘기 가운데는 어느 책에서 읽은 거와 같은 얘기, 혹은 흔히들 말하는 현대라는 뜻의 비인간적인 면에 대한 저주스러운 반항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회의적이었다. 정말 원장의 말과 같은, 그와 같은 논리, 그와 같은 어떠한 질서가 자형의 불안을 치료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말의 이면에는 어렴풋이나마 떠오르는 따뜻한 신뢰감, 그러한 무엇이 그의 가슴을 축축이 적셔주는 것이었다.
원장실을 나왔다. 자형과 같이 그 역시 한마디의 말없이 묵묵히 자형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앞서 걷던 자형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 손을 마주 잡는 것이 아닌가!
그는 순간 가슴이 뭉클함을 의식했다.
“어서 같이 가자. 창수. 그런데 말이야 난 직장을 바꿔볼까 싶어!”
하며 그의 손을 잡으려는, 갑자기 온 복도가 훤하게 밝아오는, 그리고 분명히 반짝이는 자형의 눈, 인자스럽고 부드러운 눈!
그는 눈언저리가 뜨끈함을 의식 했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형님 앞서세요. 제가 뒤따르죠.”
목멘 소리를 간신히 하는 것이었다.
병원을 막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병원 앞에 선 시발택시*에서 내리는 사람, 회색 플란넬 슈트의 말쑥한 신사. 관리부장!
창수는 관리부장과 무슨 말의 대화를 했는지도 잘 알 수 없었다. 다만 몇 분 동안을 오가고 한 대화가 희미하게 떠오르다가는, 관리부장이 복도를 지나서 원장실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으로 따라서 사라져갈 뿐, 검붉은 바탕이 깜깜한 암흑빛으로 변해가는 회색 플란넬, 그렇게도 건장하던 그의 허리가 반 동강이로 탁 꺾이며 원장실 도어 속으로 쑤욱 말리어들어가는 관리부장.
창수는 복도가 캄캄해짐을 의식했다. 그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눈을 비볐다. 가슴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며 끓어오르는 무엇, 흙먼지에 폭삭 덮인 탄흔(彈痕)의 밑바닥에서 헤어나야 하는, 안간힘을 꼭 다문…… 그는 어떻게라도 몸을 가누어야 했다. 자형의 팔에 힘을 주며 돌아서려고 애썼다.
『사상계』 77호(1959. 12)
김 동 립
김동립(金東立)은 1928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국학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1959년 『사상계』 에 단편 「영웅」이 추천되어 등단한 뒤 현실에서 소외된 인간의 고독과 비애를 보여주는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산업화가 인간을 기계화하는 메커니즘을 집중적으로 고발하고 비판한 「대중관리」 외에 주요 작품으로 「보충병」 Γ자유의 길」 「두 암살자」 「주인 없는 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