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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환향(錦衣還鄕)-3 통권127
백호나한이 용천검을 들고 나타나자 서제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상경에서 힘을 키우던 천림왕(天林王) 호천린(虎天潾)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렸다. 천림왕은 서제가 자신의 본거지인 갑주가 위태로워지자 중경에 진주시켜두었던 자신의 군대를 모조리 이끌고 갑주로 돌아가버려 사실상 실세가 되었다. 그러나 임주에서 학가의 반란이 일어나고 조정이 뒤숭숭해지자 극도로 몸을 낮추었다. 원주의 군사가 파견되는 결정이 나오면 또다시 상경의 병력이 빠져나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호황이 임주 사태에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지 못한 이유는 바로 천림왕의 복지부동(伏地不動)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고이고이 간직한 상경의 군사들을 4년 전 자신의 명에 따라 앙신으로 파견한 이름 없는 장수가 털도 뽑지 않고 날름 삼켜버린 것이다. 천림왕으로서는 환장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차라리 대군을 이끌고 임주로 갔다면 일군을 책임진 병권을 가질 수도 있을 터였지만 것이었지만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리 해도 늦는 법이었다.
“이럴 수가! 상경 금군의 모든 무관을 모조리 바꿔버리다니….”
“천무공의 수하들은 본디 백호문을 지키던 금군들이었습니다.”
무골후 호장은 황진성부윤부터 말단의 관리까지 자기 사람으로 채운 백호나한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이는 그의 눈과 귀가 상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었다. 상경의 금군을 지휘하던 군관들은 경험 많은 5만 정병의 기세에 눌려 말 한마디 못하고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중경으로 돌아와야 했다. 애초에 천림왕이 관리하던 용황가의 재산이 그에게 넘어간다고 해도 관리자는 어차피 천림왕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상경에 용호원수부를 열면서 천림왕에게 충성하는 인사들이 순식간에 교체되었다. 이제 사실상 천림왕의 영향력 아래 있던 상경은 이제 완전히 그의 손을 떠나버린 것이었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천림왕의 자금줄 중 하나였던 토금전장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끊은 일이었다. 이제 천림왕 호천린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천림왕이 몸져누웠다는 소식에 병 문안차 찾아온 무골후 호장은 천링왕으로 하여금 울화가 치미는 소식만 전해주고 떠났고, 홀로 남은 천림왕은 독한 화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며 울화를 삭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하였거늘 내가 너무 욕심을 과하게 부린 것인가?”
자포자기한 심정이 된 천림왕은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홀로 술을 자작하며 독백했다. 그러나 대답을 바라지 않은 독백에 누군가 대답해오니….
“꽃이 빨리 져야, 열매가 빨리 영글지 않겠나?”
“누구?”
천림왕은 술에 취해 몽롱한 전신으로 소리가 난 쪽에 눈을 주었다. 그리고 그곳에 원래부터 서 있었던 듯 섭선을 멋들어지게 든 백의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구, 누구냐?”
“아무리 버린 가족이지만 날 벌써 잊은 겐가?”
“너, 너는…?”
천림왕은 한순간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그는 절대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였다.
“천! 어찌 네가 살아 있었던 것이냐?”
천상의 미공자를 연상시키는 백의인은 겉으로 보기에 이제 갓 스물을 될까 말까 한 모습이었지만 실제로는 60이 넘는 나이였다.
“내가 너보다 연배가 윗줄이거늘, 말조심해야지.”
“다, 닥쳐라! 잡종 주제에….”
―퍽~!
“캭! 콜록, 콜록콜록~! 우웩!”
천림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의인의 우수에 들린 섭선이 목젖을 때렸다. 그러자 천림왕은 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뱃속에 있던 술을 토하기 시작했다. 백의인은 그런 천림왕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이런, 이런, 이런, 이렇게 술만 마시면 몸이 상하지 않느냐? 그러나 경고하는데 말은 가려서 하거라. 내 손에 친인의 피가 묻지 않도록!”
“이 미친….”
“내가 미쳤다는 것은 오랜 이야기 아니냐? 그 이야기도 이젠 만 하자꾸나.”
백의인은 천림왕을 타이르듯 말했고, 그럴수록 천림왕의 표정이 일그러져갔다.
“어쩔 셈이냐?”
“후후후후, 이제 밝은 곳으로 나오고 싶어 그런다.”
“무슨 말이냐?”
“백호나한의 아내 천상천화를 아느냐?”
“…?”
“아무래도 그 아이가 내 딸인 것 같아서 말이지.”
천림왕은 ‘천’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나는 딸에게 어미가 어찌하여 죽음에 이르렀는지 소상히 알려줄 생각이다.”
“그, 그걸 왜 내게 말하는 냐?”
“그냥 심술이라고 해두지. 상지 형님이 새로 생긴 조카에게 나에게 했던 것처럼 괄시하지 말길 바란다고 전해주게. 내가 보기에 사위는 내 딸아이를 무척 아끼는 듯하니 말일세. 후후후.”
그 말을 끝으로 백의인 ‘천’은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꿈결같이 느껴지는 대화였지만 천림왕은 일부러 놓고 간 것이 분명한 부채를 집어들고 그것이 꿈이 아님을 알았다.
“놈이, 호사천 그 잡종 놈이 살아 있었다니. 어서 빨리 폐하에게 알려야 해.”
호사천이 말한 상지 형님은 바로 호황 호상지(虎上志)를 말했다.
호사천의 출생의 비밀이란, 사실 별거 없었다. 호사천의 부친은 호제였고, 모친은 강호제일세(江湖第一勢) 철혈사자성(鐵血獅子城)의 금지옥엽(金枝玉葉) 천향군주(天香君主) 사염애(獅念愛)다. 당시 호제가에선 강호 야적의 딸에 불과한 사염애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했다. 그러나 호제의 사염애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정말 처절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불행인 것은 사염애가 호제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봄놀이를 나온 사염애가 미행을 나온 호제의 눈에 띄었고 ‘하늘향기’라는 별호를 가진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호제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내 반강권으로 철사성에 사염애를 달라는 압력을 넣기에 이른다. 그러나 철사성의 입장에서도 이미 부인이 둘이나 있는 호제였지만 탐나는 신랑감이었다. 그렇게 해서 사염애의 뜻과는 무관하게 일은 진행되었고 사염애는 호제의 셋째 부인이 되었다. 다분히 정략적인 혼사이다 보니 사랑하는 감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아껴주는 남편이 있고, 그 남편은 사실상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인물이었다. 살을 섞는 부부지간인지라 좋은 감정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강호의 여걸 사염애에게 중경 호궁 깊숙한 구중궁궐(九重宮闕)은 그야말로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나들이를 가려 해도 호위 군사들과 궁녀들이 주렁주렁 따라나서고 호제는 그녀의 바깥출입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호제가의 친지들이 강호 야적의 딸인 사염애를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염애는 무공의 고수 호제가 호궁을 비울 때면 호제가 돌아오기 전까지 몰래 호궁 규중심처를 벗어나 나들이를 다니곤 했다.
그리고 사염애가 수태를 하고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바로 호사천이었다. 그러나 갓 태어난 호사천은 호랑이가 아니었다. 호랑이인 호제와 사자인 사염애의 자식인 호사천은 사자였다. 수인의 경우 부친이 말이면 아내가 토끼라도 말이 태어나야 했다. 부계(父系)의 피를 따라야 하는 것이었다. 모계의 피를 따르는 경우는 부친이 수인이 아닌 인간인 경우뿐이었다. 그런데 태어난 아이가 사자였으니 호제는 진노했다. 호제는 사염애가 자신이 호궁을 비우면 몰래 궁을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호제 정도의 인물이 모를 리 없었다. 호제는 사염애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부인 이상 언젠가 한번은 돌아봐줄 것이라고 스스로 자위했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호랑이가 아닌 사자였다. 이에 호제는 사염애를 별궁에 가두고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염애는 호제의 무관심 속에서 아이를 낳은 후 조리를 잘못한 탓에 몸이 약해져 쓸쓸히 죽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호제는 사염애를 찾았고 각성한 호사천을 보았다.
호사천(虎獅天), 그는 보기 드물게 호랑이와 사자의 특징을 함께 타고난 호사(虎獅)였던 것이다. 호사천은 분명한 호제의 피를 받은 아이였다. 이에 사모하는 여인을 끝까지 믿지 못한 호제는 크게 후회하고 한때 자신이 버렸던 아들에게 서염애에게 미안한 만큼 관심을 기울였고 어미를 잃은 소년은 아비를 얻어 나름대로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 그러나 호제의 큰아들이자 후계자인 태자는 자신에게 기울여야 할 부친의 관심이 잡종 놈에게 가는 것을 증오했다. 이는 다른 호제의 자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호사천에게 그들은 가족이었다. 형제들에게 가족으로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호제가의 그늘에서 일하는 귀호기주가 되어 호제가를 위해 묵묵히 일했다. 그리고 부친의 뒤를 이어 호제가 된 호사천의 상지 형님은 웬만해선 수인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 호사천의 능력을 귀히 여기고 그를 이용해 반수인 세력이라 의심되는 세력을 감시하고 증거가 드러나면 금위위를 동원하여 일소했다.
20여 년 전 호사천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강무세가에 잠입했다. 후려 강무세가에 잠입한 호사천은 당시 호제에게 불새 일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불새, 주작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깃털의 존재를 알았다. 그런데 호사천이 불새 일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과 맺어졌다는 사실은 호사천의 역량에 두려움을 품고 있던 호제를 자극했다. 강무세가라는 실제적인 힘과 주작이라는 명분, 그리고 무엇보다 호제에게 내재되어 있던 그에 대한 증오는 호제로 하여금 그들 제거할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호사천을 제거하는 것은 간단했다. 수인 천하에 조직적으로 반하는 인세에 신분을 숨기고 잠입한 호사천이 갑주에서 인세가 꾸미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무림마저 장악하려 하는 갑주의 서제가에 인세가 암약하고 있다는 정보를 슬쩍 흘린 것이다. 물론 호사천의 정체에 대해 인세의 주요 인물이란 것을 강조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귀호기주인 호사천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불새의 깃털을 확보하라는 명을 내려 모든 귀호기들을 불새의 깃털이 있다는 남례성으로 보낸다. 더불어 세제가에는 호사천 곁에 있는 불새 일족의 여인에 대한 정보를 흘리고, 야망가인 서제 서포틈은 호제가 원하던 반응을 보였다. 연인이자 아내가 행방불명되고 서제가의 무사들의 손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호사천은 상지 형님 호제에게 아내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서제가가 노골적으로 나온 이상 사실을 밝히고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호제는 오히려 호사천이 반역을 도모했다며 추살령을 내린다. 그리고 호사천은 자신을 추적하는 호영(虎影)의 태반을 죽이지만 그들의 저돌적인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에 결국 장강 어느 한곳에 수장되고 만다. 그리고 호사천을 추살하는 일에 직접 관여하고 시체는 찾지 못했으나 죽었다고 결론을 내린 이가 바로 천림왕 호천린 자신이었다.
***
“뭘 그렇게 불안해하시는 거예요?”
“몰라. 앞으로 큰일이 생길 것 같은데, 뿌연 안개처럼 보이질 않아.”
응소매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정서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설화 아가씨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소매는 설화 아가씨에게 앞으로의 일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쁜 일이에요?”
“글쎄? 그것도 모르겠어!”
“에이~! 그럼 좋은 일이네요. 뭐! 그리고 아가씨의 그 신기한 능력은 상공에게는 통하지 않으니 상공과 관련된 일이잖아요.”
“그래, 그래서 더 불안해!”
설화은 아직 가니아 할머니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신이 황제가 되면 서방님이 변을 당한다는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설화는 서방님을 위해 자신이 황제가 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숨기기로 했고, 서방님 또한 그런 자신의 뜻을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나 포포를 통해 자신의 신분을 알린 것은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이미 서방님의 위세가 자신의 신분 따위는 아무 상관 없을 정도로 대단해졌기에 백수회로서는 굳이 자신이 호황가와 관련 있다고 밝혀 더욱 견제를 받게 할 이유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자신의 신분이 밝혀지면 아이가 태어날 경우 다음 대 호황이 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황이 나서지 않는 가운데 용천검의 다음 주인이 될 아이는 자연히 용황을 대신하여 천원회의에 출사할 것이고, 그때도 천하가 여전히 어지럽다면 실제적인 힘을 가진 아이가 호황이 될 수도 있었다.
수인 조정이 서로 나라를 분리하지 않고 천원회의에 묶여 있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수인들이기 때문이었다. 열두 개 수인 가문이 천하를 지배하는 가운데 인간은 물론이고, 다른 수인가들도 그들에게는 심각한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서로 힘을 모아야 했고,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수인 조정은 그렇게 4백년을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용황이 있었다. 고래로 용은 황제(皇帝)을 상징하는데다 십삼인가(十三人家)들도 용(龍)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기에 수인 조정은 유지되었다.
“에잉! 평소 상공에 대해 그렇게 자랑을 하시더니 그건 다 거짓이었군요. 뭐, 천하십이지존이 몽땅 덤비더라도 끄떡없을 무위를 가지고 있다면서요? 거기다 60만 대군을 손끝 하나로 움직이는 분인데 무얼 걱정하는 거예요. 다른 건 다 걱정하셔도 되지만, 상공은 조금도 요만큼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호호호, 그러니?”
“도대체가 상공이 걱정할 데가 어디 있다고 걱정을 사서 하는 거예요?”
“호호호호, 그래 네 말이 맞아. 천하무적 백호나한이 잘못될까 걱정하는 것은 내가 생각해보아도 우스운 일이지.”
“피! 됐네요! 아가씨, 남편 자랑은 이제 그만 듣고 싶네요.”
설화는 응소매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기분이 풀려 연방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지?”
“꺄아! 상공!”
“서방님!”
응소매는 어느새 귀신같이 나타나 등 뒤에 서 있는 상공을 보고 비명을 질렀고, 설화도 깜짝 놀랐다. 설화는 이미 화경의 경지에 들어선 초극 고수, 그러나 서방님 라혼은 천상천(天上天) 하늘 위에 있었다. 설화도 서방님이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매 너, 모초에게 고백을 받았다며?”
“엥?”
응소매는 상공의 한마디에 딴청 부리는 설화 아가씨를 바라보며 항의했다.
“너무해. 우리끼리 비밀로 하기로 해놓고!”
“뭐야? 내가 알면 안 되는 일이었나? 모초가 요새 허공에 붕붕 떠다녀서 소매, 네가 허락한 줄 알았는데?”
“서방님 그게 정말이에요? 소매 너 그 이야기는 왜 안 했어?”
“모, 몰라요.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볼게요.”
설화는 허둥지둥 도망치듯 방을 나서는 응소매에게 한마디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우리 초아! 잘 부탁해!”
“모, 몰라요!”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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