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계시판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맞는 것 인지는 모르 겠으나
우리 아줌마 들도 나를 성찰 하여야 함은 인생살이의 필연적 요청 일것이 것이며 또한 우리(민족 또
는 국가)의 주체적역사는 과연 제도권 사학의 주장이 진실인지 아닌지 깊은 고민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단재 신채호선생의 명쾌한 역사인식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我와 非我의 투쟁이 시간으로부터 발전하여 공간으로 확대하는 心的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 世界史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朝鮮史라면 조선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찬란했던 상고사를 신채호 정인보 박은식 등의 선각자들이 독립운동을 병행하며 전장에서 재야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집대성한 론설을 작금 뜻있는 강호사학자들과 명지대 석문대 등에서 서지학적 고고학적 천문학적인 과학으로 선각자들의 주장이 전연 과장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였으며 이에 모화주의(慕華主義),숭미주의(崇美主義) 친일부역자(親日附逆者)(이병도,신(辛)석호 등등의 조선사편수회에 부역한자들)와 그의 제자들이 울구어 먹고사는 제도권의 식민사학(매식자)자들을 조만간 박멸할날이 멀지 않음을 확신한다.
진실의 승리는 시간의 문제 일 뿐이며 가유(假有)의 전횡은 낫낫히 해체되어 나락으로 추락하게 됨을 믿어의심치 않는바이다
독일의 재상 비스마르크의 황화론(황색인종에 대한 역사적 공포심)을 촉발시킨 훈족을 흉노라 하나 고고학적 유물이나 생활습관에서는 다른면이 제법 많습니다
강호사학에서는 가야족이 신라의 압박으로 3분 되었는데, 첯째는 김유신을 필두로 신라에 흡수된 무리, 둘째는 일본열도로 피양해서 왜의 주력이 되어 야마토정권을 일으켯으며, 제삼의 무리는 본향인 만주로 해서 스텝로드를 따라 서진하면서 원주민(백인종)을 토벌 흡수시키고 400녀년에 걸처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유린하고 마자르족으로 헝가리를 건설했다는 이것이 재야사학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강호(江湖)사학도 상례씀~
독일 ZDF 방송의 "잃어버린 고리 찾기"
훈족의 실체에 대해 서양의 역사가들은 많이 알고 있지 않다. 그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그런데 독일 ZDF 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스핑크스, 역사의 비밀」"잃어버린 고리 찾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 훈족의 서쪽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유물과 한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을 비교 검토하여 훈족의 원류가 한국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참고로 동부 유럽 트라키아 지역에서 제작된 황금보검과 같은 것이 신라 수도 경주 미추왕릉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트라키아 지역은 세계 3대 제국을 건설하여 유럽을 공포에 몰아 넣은 훈족 아틸라의 근거지이다. 우연 치고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사실은 훈족과 한민족이 어떤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게 아닐까?
독일의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계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유물을 제시하였다.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되는 동복(청동 솥)이 가야 지방에 출토되었다
· 훈족은 동복을 말 등에 싣고 다녔는데 신라에서 말에 동복을 싣고 있는 기마 인물상이 발견되었다
· 동복의 문양을 한국의 머리 장식에서 흔히 볼수 있다
물론 어느 특정 지역에 주로 출토 되던 물건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 된다고 해서 그 지역이 동일한 문화권에 있었다고 말하는 건 속단이다. 하지만 이 유물들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 이는 그 유물들을 만든 이들이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복은 유목 부족장들에게 바쳐진 것으로 정화 의식을 행할 때 고기를 삶는데 쓰던 대형 화분 형태의 동제 용기로, 유목민들의 상징적인 유물로 간주된다. 동복이 한반도 동쪽,남부 김해, 경주 지역에 발굴 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에 북방계 유목 문화가 상당히 흡수 되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특히 브론즈 냄비는 가야 시대 고분인 경남 김해의 대성동과 양동리 유적에서도 발견된다. 브론즈 냄비는 가야의 원류가 북방의 기마 민족이라는 증거로 자주 거론되어 왔다.
참고로 훈족은 동복을 말 엉덩이에 매달고 다녔는데,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에서 1924년에 출토된 기마 인물형 토기 같은 신라 시대 점토상을 보면 기마상 주인공이 동복을 말 엉덩이에 싣고 있다. 그런데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이들 솥이 말이 탄 사람의 등에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기마상 주인공의 복장과 삼각모가 전형적인 유목민의 복장이고, 안장과 등자도 훈족이 사용하던 유물과 같다고 주장하였다.
북방 유목민들은 우주 개념을 이해하는데 순록과 우주수목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라 금관의 장식이 바로 이 순록과 우주수목을 형상화하였다. 이는 신라가 북방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해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베렌트와 슈미트 박사는 한민족과 훈족이 연관되는 특성으로 다음 세가지를 제시하였다.
1. 훈족의 후예들에게는 몽골리안 반점이 있다
프랑스 같은 서유럽에 살고 있는 훈족의 후예들에게서 (몽골반점)몽고반점이 발견되고 있다. 몽고반점이 한민족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지만 훈족 후예들이 몽골반점을 갖고 태어난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한민족과 훈족은 친척의 인연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 훈족은 복합궁을 사용하였다
이 특이한 활은 만드는 데만 5년, 제대로 쏘기 위해 활을 익히는 데만 10년이 걸리지만, 1분안에 15발 이상 쏠 수 있다고 알려진 활이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아퀼레이아에 자리한 크리프다 아프레시 교회의 프레스코화가 훈족이 이 특이한 활을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이 그림에는 말을 탄 훈족이 추격해오는 로마 기병을 향해 활을 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고구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말을 탄 채 활로 동물을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과 똑같다. 고분벽화에 나오는 화살촉은 도끼날 화살촉인데, 이 화살촉은 날아가면서 회전하기 때문에 목표물에 꽂히는 순간의 충격이 매우 크다. 훈족도 바로 이 도끼날 화살촉을 사용했다.
3. 훈족은 편두를 갖고 있다
편두라는 것은, 갓 태어난 어린 아이를 반듯이 눕혀 놓은 상태에서 이마를 돌 같은 것으로 눌러 이마와 뒷머리를 평평하게 하는 대신 정수리를 봉긋 솟아오르게 만든 머리 형태이다. 일종의 성형 수술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몽골 지역부터 독일 튀링겐과 오덴발트, 프랑스 칼바도스 지방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발견된 분묘에서 나온 훈족의 뼈를 보면 이마와 뒷머리는 눌려있고 정수리는 툭 튀어 올라와 있다. 그런데 가야국이 있었던 경남 김해에서도 편두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법흥왕 등 신라의 왕들도 편두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국사 지증대사의 공덕비에 법흥왕이 편두라고 기록했다.
고대 인도에서 행해졌던 관습, 혹은 코카서스 북부 지역에 사는 유목민들의 풍습으로도 알려진 편두는 한민족과 연관성이 크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에서도 ‘ 진韓 사람은 모두 편두’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조선에는 일찍부터 편두를 만드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편두는 중국과는 구별되는, 꽤 오랫동안 한민족 사이에서 내려온 풍습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 한가지는, 훈족에게는 편두 풍습이 있었지만 흉노에게는 그 풍습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훈족은 편두 습속을 가지고 있는 특수 민족으로, 한반도 남부의 가야와 신라 지역과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세가지 특성은 훈족과 가야, 신라의 친연 관계를 설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훈족이 한민족과 연관된다는 증거가 여러가지 있다.
북방 유목 민족의 전형적인 습속인 순장(殉葬) 또한 가야 지역의 고분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특히 금관 가야 유적인 대성동 고분군 1호분에선 우마(牛馬)의 머리를 베어 곽 위에 얹어놓은 목곽(木槨)이 발견 되었는데, 이는 훈족을 포함한 북방 유목 민족의 동물 희생 행위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훈족이 나무에 빨간 헝겊을 달아 악귀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는 기록과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 했다는 점은 우리 민족이 마을 어구에 장승이나 솟대를 세워 염원을 빌고 곰을 토템으로 삼은 점과 매우 유사하다. 대다수 유목 민족들은 곰이 아닌 다른 동물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토템 대상으로 가장 일반적인 순록과 수달은 지금까지도 몽골 지역에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훈족의 영웅 아틸라의 장례의 절차는 우리의 장례 절차와 비슷하다.
아틸라가 죽자 훈족은 그가 사망한 지 3일, 7일, 49일째 되는 날 고인의 말을 도살하여 일가 친척과 지인들이 함께 나눠먹고, 문상객들을 잘 대접하며 남은 음식은 말의 재갈이나 안자, 무기와 함께 장작 더미 위에 놓고 태웠다. 이 때 남은 재와 문상객을 대접할 때 사용한 청동솥(동복)을 깨뜨려 부장품으로 무덤 속에 묻었다.
그런데 우리의 장례 절차는 사망한지 3일째 되는 날(3일장) 시신을 무덤에 매장한다. 사망한 후 5일되는 날에는 삼오제를 치르며 사망한 후 49일째 되는 날에는 49제를 치른다. 그리고 3년상이라 하여 3주년 되는 기일에 탈상한다.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은 오랜기간 변하지 않는 민족 고유의 전통이다.그런데 훈족의 장례 의식과 우리의 장례 의식이 거의 같다는 것은 무얼 말할까? 이는 훈족과 우리 민족이 연관성이 있다고 해석되어도 좋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