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나 보기에 걱정은 이 혁명에 아무 말이 없는 것이다. 말이 사실은 없지 않은데, 만나면 반드시 서로 묻는데,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일체 이렇다는 소감, 비평이 없다. 언론인 다 죽었나? 죽였나? 이따금 있는 형식적인 칭찬 그까짓 것은 말이 아니다. 그것은 혁명의 말이 아니다. 의사보고 가뜬히 인사하는 것은 병이 아니다. 의사 온 줄도 모르면 죽은 사람이다. 참말 명의는 병인이 허튼 소리를 하거나 몸부림을 하거나 관계 아니한다. 왜? 자신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총 칼 보로 겁을 집어 먹었지. 겁난 국민은 아무 것도 못한다. 국민이 겁이 나게 하여 가지고는, 비겁한 민중 가지고는, 다스리기는 쉬울지 몰라도 혁명은 못한다. 다스리기 쉽기야 죽은 시체가 제일이지. 시체를 업어다 산 위에 놓고 스스로 무슨 공이 있다 할 어리석은 사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매장 인부 아닌가?
유언비어(流言蜚語)란 말이 볼래 아니된 말이다. 그것은 제국주의나 독재정치에서나 하는 말이다. 덕(德)이 높은 인격자(人格者)란 것은 무슨 비평을 하거나 그것을 도리어 고맙게 아는 사람이다. 정말 애국자는 자기 하는 일을 꺼림 없이 내놓고 비판, 비평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비평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다 하는 것은 실력과 성의를 의심케 하는 말이다. 내 이상이 아무리 좋아도 억지로 집어 싸우면 정치가 아니다. 선의(善意)의 독재(獨裁)란 말들을 하지만 그것은 내용 없는 빈 말이다. 선의(善意)인데 독재(獨裁)가 어떻게 있으며, 독재(獨裁)거든 어떻게 선(善)일 수 있을까? 강간이 사랑일까? 정말 정치가는 민중을 맘대로 말을 시키는 사람이다. 그래야만 정말 민중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말못하게 하면, 입은 닫고, 입 닫으면 국민이 음성화(陰性化)한다. 혈압이 높으면 보기에 신수가 좋은 것 같다가도 어느 날 졸도(卒倒)를 하여 죽지. 말 못하는 국민도 그렇다.
생명은 숨을 쉬는 것이다. 국민은 김이 빠지는 데가 있어야 된다. 그 김빠지는 데가 언론(言論), 유언비어다. 방귀가 나가야만 살듯이 국민도 기운을 빼는 데가 있어야 한다. 파고다, 사직동, 그 밖 곳곳의 잡담터가 있으므로 그나마 서울이 생명을 유지한다. 그것 없으면 풋뽈처럼 터지던지 그렇지 않으면 질식이 돼버리고 만다. 민중의 입을 막고 말썽 없는 정치를 하려던 앞의 차들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러기 때문에 민주주의라고 한다. 떠도는 소리일수록 들려주어야 한다. 더구나 지금은 사상이 문제되는 시대 아닌가?
혹들 하는 말이 우리 사회는 아직 민주주의에는 정도가 모자란다 하지만 모르는 말이다. 민주주의일수록 어린 아기 때부터 해야 한다. 낳은 어미가 아니니 아직은 계모의 심정을 좀 부리다가 차차 참 어미 노릇을 하겠다면 된 말인가? 낳지 않았을수록 첨부터 어미 노릇을 더 정성으로 해야 할 것 아닌가? 善에도 무슨 시기가 있느냐? 없다. 아직은 독재를 좀 하다가 점진적으로 민주정치를 한다는 그런 모순된, 어리석은, 거짓 말이 어디 있나? 이제 즉각으로 네 혼을 여는 것이 선(善)이요, 선을 하면 또 반드시 알아보고 같이 여는 것이 혼이다.
공산당의 선전에 넘어갈 염려 때문이라 하지만, 그렇게 무서우면 정치에 손을 대지 마라. 왜 네가 옆집 사람보다 더 신뢰와 사랑을 얻을 자신이 없느냐? 사람은 아무리 어리석어도, 어리석을수록 말보다는 사실을 택한다. 공산주의자가 말로 하면 너는 왜 사실로 민중을 얻을 자신이 없느냐? 인(仁)이 네 속에 없다면 몰라도, 만일 정말 있다면 민중이 모를까봐, 유혹에 넘어 갈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자불우(仁者不憂)지. 송곳 끝을 손바닥으로 막을 놈은 없느니라. 원수의 가슴도 능히 뚫는 것이 참이요, 사랑이다. 칼을 든 것이 군인이 아니라 용기 있는 것이 군인이다. 남을 말못하게 하는 것이 용기가 아니라, 어린아이도 능히 와서 맘대로 끄들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말 용기다. 용기가 무기 쥠으로 있는 것 아니라, 능히 버림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공산당의 선전을 무서워하는 그런 따위 맥 빠지고 속 빠진 바람개비 같은 소리 마라. 공산당과의 싸움이 어찌 무기내기, 주먹내기, 꾀내기, 거짓말내기, 사람 못 살게 굴기내기냐? 맘 성내기, 혼내기, 도덕내기, 믿음내기 아니냐? 그렇다. 믿는 자만이, 민중을 믿는 자만이 이길 것이다. 믿음이, 무엇이 믿음이냐? 그의 인격(人格)대접, 사람됨 대접 아니냐? 사람됨이 어디 있느냐? 자유(自由)지. 자유(自由)에만 있다. 자유(自由)가 무엇이냐? 정신의 맘대로 자람 아니냐? 정신이 어떻게 자라느냐? 말함으로만, 말 들음으로만 자란다. 제 발이 오 천년 아퍼도 아프단 소리를 못하고, 슬퍼도 목을 놓고 울어도 못 본 이 민중을, 이제 겨우 해방이 되려는 민중을 또 다시 입에 굴레를 씌우지 마라. 정신에 이상이 생겼거든 지랄이라도 맘대로 하게 해야 될 것이다. 4·19 이후 첨으로 조금 열었던 입을 또 막아? 언론자유주니, 남북협상 소리 나오더라고 성급한 소리를 마라. 그 원인이 거기 있는 건 아니다. 옅은 수작 마라. 또 협상 무섭다 할 것 있느냐? 우리 자식들이 저것들을 설득이 아니라, 혼의 실력으로 누를 수 있도록, 누르는 것이 아니라, 녹여버릴 수 있도록 한 번 길러 보자꾸나? 군인이 왜 그리 기백(氣魄)이 없느냐? 나는 공산당 터럭만큼도 무서운 것 없더라.
이것이 마지막
또 군인의 귀에는 갔는지 아니 갔는지 모르나, 만나기만 하면 사람마다 "이것이 마지막이지요." 한다. 누가 가르친 것 없이 하는 그런 말은 하늘 말씀이다. 귀담아 듣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왜 마지막인가? 칼 뽑아 들었으니 마지막이지. 이번에 되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공산당의 다 돼 버리는 것 밖에 길이 없단 말이다. 혁명 일던 새벽에 외친 대로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다시 한 발걸음을 내킨 것이다.
그 말하는 민중, 제가 마지막 길에 나선 줄을 아는 민중은, 결코 생각 없는, 성의 없는, 죽은 민중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망 있다. 그들을 무시해서는, 너무 낮춰봐서는 아니 된다. 병은 나면서도 자라는 것이 생명이다. 이 민중이 무지하고 도덕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자란 민중이다. 결코 옛날 민중이 아니다. 현대의 세례를 받은 민중이다. 시대는 거꾸로는 아니 간다. 도덕적으로 타락은 하여도 시대가 물러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신사를 가지고도 오늘의 망나니와 바꿀 수 없다. 현대 사람으로 차라리 불행할지언정 결코 옛날 사람으로 행복하려 하지 않는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매양 여기서 오산(誤算)을 한다. 민중은 타락했어도 타락한 것 아니다. 개인적 도덕의 부족을 시대적 정신이 속(贖)하고 만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지, 타락했어도 역사에 못쓰는 법은 없다. 그리고 새 나라를 지으면 새 도덕이 스스로 선다. 이것이 마지막인 줄을 아는 민중은 스스로 새 시대의 지원병이 될 맘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기분을 한번 잘 돌려쓰지를 못할까? 아아, 답답하구나!
마지막이란 말이 무슨 소리일까? 이번 군사혁명은 먼저번 학생혁명에서도 일단 낮아진 것을 아는 말이다. 그 때는 맨 주먹으로 일어났다. 이번은 칼을 뽑았다. 그 때는 믿은 것이 정의의 법칙, 너와 나 사이에 다같이 있는 양심의 권위, 도리였지만, 이번은 믿은 것이 연 알과 화약이다. 그만큼 낮다. 그 때는 민중이 감격했지만 이번은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묵인이다. 그 때는 대낮에 내놓고 행진을 했지만 이번은 밤중에 몰래 갑자기 됐다. 그만큼 정신적으로는 낮다. 말을 아니 들으면 대접이 점점 내려가는 모양으로 혁명은 실패할수록 정신적으로는 내려가는 법이다. 먼저 번에 실패했기 때문에 자연 이번은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4·19 이후 자꾸 장난처럼 일어나는 데모보고 하지 말라 반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면 그럴 수록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더 험한 것이 될 것이으므로 한 말이었다. 그래 인제 그것을 알았으므로 "이번이 마지막이라." 는 것이다. 내려갔을수록 다시 하는 사람은 더 힘이 드는 법이다. 이번 혁명은 그 힘든 것이 학생혁명의 유가 아닐 것이다. 때려서까지 아니 들으면 가두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번은 갇히는 것이다. 그래 감격은 없고 두려움만이, 의견을 발표할 용기는 없고 그저 가만있음만이 있는 것이다. 옅게 보는 사람들은 "금새 먹기엔 곶감이 제일이라고", 우선 깡패 좀 없고, 썩어진 관리꼴 아니 보고, 찻간 좀 조용하니, 좋다 좋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행진의 뜻으로 볼진댄 이것이 더 험해진 길이지. 자칫하면 떨어져 죽는 낭떨어지 위를 가는 것이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멍청하지 마라.
이것이 마지막이다. 한 번 큰 각오하고 일어난 군인에 대하여 말하기가 미안하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지만, 민중 자기네끼리 모이면 여간 불안을 느끼는 것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러다 잘못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 속에 싸여있는 것이 현상이다. 이러다가 잘못되면 공산당이 돼 버리고 말 것이라는 판단과 공포심은 어떻게 무식한 사람 입에서도 다 나오고 있다. "이러다가..." 라는 것이 무엇일까? 까 내놓고 말하면 "만일 군사 독재가 됐다가는" 하는 말이다. 지금 우리는 광대 줄넘기를 한다. 성측군왕(成則君王)이요 패즉역적(敗則逆賊)이다. 혁명 일으킨 군인도 그런 심정일 것이요. 보는 군중도 그렇다. 그러나 알 것은, 어느 광대도 줄을 탈 때는, 다른 놈이 다 떨어져 죽었지만 그것은 잘못해 그렇지, 주의해 잘 하는데 왜 그럴 것이냐 하는 맘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는 사람은 불안(不安)이지, 안심(安心)할 수가 없다. 구경은 바로 그 불안(不安) 때문에 하는 것이지만 정치는 구경일 수는 없다. 이번 일이 터지기 바로 2, 3일전 남북협상을 주장하던 학생 몇 사람이 나한테도 의견을 물은 일이 있다. 그들의 말하는 것을 들은즉 도무지 자신 없는 소리였다. "어쨌거나 접촉해 보노라면 무엇이 나오지 않어요?" 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무조건 말리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 없이는 절대 하지 마라. 정치 무대는 연주장소일 수는 없다." 하고 말해 준 일이 있다. 연구자료도 돼서는 아니되는 정치를 구경심리로 할 수는 더구나도 없다. 그러므로 옛 어진이 말이 군자(君子)는 거이이후명(居易以侯命)이요, 소인(小人)은 행검이요행(行檢以僥倖)이라 했다. 흔히 건곤일척(乾坤一擲)이란 말을 하지만, 생(生)은 모험(冒險)이란 말도 하지만, 그 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악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 말 그렇게 옅은 뜻으로 쓰는 것 아니다.
모험을 해야지만 그것은 겸손한 사람만이 해야 한다. 그런데 손에 칼을 들고 겸손하기는 참 힘이 드는 일이다.
다시 또 한번 외치자, "이번이 마지막이다!"
누가 하는 혁명이냐
요점은 혁명의 주체가 누구냐 하는데 있다.
혁명은 사람만이 한다.
학생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먼젓번에는 실패했다. 군인도 사람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번도 군인이 혁명하려 해서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냐? 학생은 그 혁명 4월에 했듯이 사월의 잎이다. 사월은 잎이 피는 달이다. 잎은 나무가 아니다. 잎이 나무를 만드는 것 아니라, 나무가 잎을 피운다. 학생은 잎처럼 길이 푸를 것이다. 4·19의 정신 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녹색(綠色)정신, 그 평화주의, 그 비폭력주의(非暴力主義), 그 공명정대주의(公明正大主義) 늘 길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잎으로서 하는 것이 아니요, 나무로서만 하는 것이다. 민중(民衆)의 덕(德)은 목덕(木德)이다. 나무의 산 것이 잎에서 발단(發端)하지, 자엽(子葉)부터 나오지, 허지만 마침내는 나무가 서야 한다. 학생이 시작했지만 혁명은 민중의 혁명이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4·19, 4·19, 서로 주고 받는 빈 칭찬, 아첨, 나쁜 이용, 쓸데없이 부푼 가슴뿐이었지 민중 운동이 되지 못했다. 거기는 민주당, 혁신당의 죄가 많지만, 그래도 역시 따지면 결국 민중 저 자신의 죄였다.
학생이 잎이라면 군인은 꽃이다. 5월은 꽃달 아닌가? 5·16은 꽃 한번 핀 것이다. 꽃은 찬란하기가 잎의 유가 아니다. 저번은 젊은 목청으로 외쳤지만 이번은 총·칼과 군악대로 행진을 했고, 탱크로 행진했다. 그러나 잎은 영원히 길어야 하는 것이지만 꽃은 활짝 피었다가는 깨끗이 뚝 떨어져야 한다. 화락능성실(花落能成實)이다. 꽃은 떨어져야 열매맺는다. 5·16은 빨리 그 사명을 다 하고 잊어져야 한다. 노량진두에서 많지는 않지만 흐른 피는, 그 알고 모르고를 무를 것 없이 전 국민이 스스로 흘려 역사의 제단에 바친 것이다. 그것은 부득이하여 한 번 잠깐 할 것이요, 될수록 없어야 하는 것이요, 있다 하여도 곧 잊어야 하는 것이다.
군인정신은 '깨끗' 이라는 한 말에 다 된다. 필 때는 천지가 눈이 부시게 피었다가도 수정(受精)이 된 다음엔 깨끗이 싹 떨어져야 꽃의 값이 있다. 진 후에도 떨어지기 싫다는 듯 시들시들, 지적지적 붙어있는 꽃은 참 더럽다. 그러므로 할 일을 다 한 후는 곧 정권을 민간인에 물려주고 본래의 자리로 물러간다 선언한 것은 참 군인다운 말이다. 잎은 길이 길이 있으므로 나무에 그 바치는 바가 있지만 꽃은 깨끗이 떨어지므로 그 나무를 위해 영원히 공헌하는 것이 있다. 그 꽃이 떨어져도 그 뿌리로 돌아가 그 나무 속에 길이 사는 것이다. 다만 그 형식이 다를 뿐이지 그 뜻은 같다. 평화(平和)정신은 늘 부르짖어야지만 무단(武斷)정신은 한 번만 써야 한다.
그러므로 문제는 민중에 있다. 학생도 군인도 사람이 아니란 말은 그 말이다. 학생, 군인 만이냐. 관리도, 목사도, 신부도, 교수도 사람은 아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에 든, 잡은 것의 이름, 그 입은 옷의 이름이다. 사람은 맨 사람만이 사람이다. 잎도, 꽃도, 열매도 나무가 아니요, 나무만이 나무다. 매양 제 재간, 제 맡은 일, 자격을 저 자신보다 더 중한 듯 내세우는 데서 일은 잘못된다. 혁명은 다른 것 아니고 그 잘못을 회복하여 다시 근본 모양에 돌아가 잠이다. 사람은 서로 맨 사람으로 만날 때에만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다. 군인이란 뽑아 든 칼이다. 일을 일으킨 것은 그 속의 사람이지 그 칼이나 군복이 아니다. 그런데 아무도 일단 일을 시작하면 제 사람으로서의 근본을 잊고 그 자리에 붙어 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하여서 사람이 제도의 종이 된다. 특권 없는 제도 없다. 혁명은 제도를 부수는 일이다. 부수면 또 생길 것이다. 그러나 또 부수어야 한다. 영원히 그 부수는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 날마다 우리가 피차 지위 자격을 잊고 맨 사람으로 만나고 대하기를 힘써야 한단 말이다. 그것이 정말 혁명이다. 그것을 하는 것이 민중이다. 역사의 변동이 있을 때마다, 즉 낡아서 해 되는, 사람을 차별하는 제도를 부수려 할 때마다 민중에로 내려와서 그 민중을 그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이 때문이다. 3일천하(三日天下)란 말이 있지만 민중이야말로 늘 3일천하(三日天下)다. 혁명할 때는 민중이 주인이 되지만 사흘이 못가서 속고 뺏기는 것이 민중이다. 혁명 일어나는 날 장교, 졸병, 민간인의 구별 있었을까? 모든 참된 일은 다 그렇다. 나라 운영이 달린 일선에서 참모총장과 졸병이 나란히 섰기로서 이가 저를 높다 할까? 저가 이를 낮다 할까? 그저 한 가지 의무, 감격, 생명의 산 운동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대적을 물리치고 진지에 돌아온즉 하나는 "각하"로 하나는 "이 자식"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거짓 것이다. 그게 다 뭐냐? 인간의 가슴에서 그런 것을 영원히 버려라! 이 날껏 그렇게 속아온 것이 민중이지만 지금은 그래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 '민주주의'다.
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못한다. 아무 혁명도 민중의 전적(全的) 찬성, 전적(全的) 참가를 받지 않고는 혁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재가 있을 수 없다. 민중의 의사를 듣지 않고 꾸미는 혁명은 아무리 성의로 했다 하여도 참이 아니다. 또 민중의 의사를 모르고 하는 것이 자기네로서는 아무리 선(善)이라 하더라도, 또 사실 민중에게 물질적인 행복을 가져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의(誠意)는 아니다. 강아지를 아무리 잘 길러도 그것이 참 사랑은 아니다. 참 사랑은 내가 저를 좋아할 뿐 아니라 제가 또 나를 좋아하도록 되어야 하는 것이다. 민중을 동물로 사랑하고 길르고 불쌍히 여겨서도 성의(誠意)는 아니다. 그는 때리면서라도 사람으로 대접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민중 내놓고 꾸미는 혁명은 참 혁명이 아니다. 반드시 어느 때 가서는 민중과 버그러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의 본색을 나타내고야 만다. 그리고 오래 속였으면 속였을수록 그 죄는 크고 그 해는 깊다.
인간 개조
그리고 또 한가지 더 이번 혁명으로 새로 나온 말은 "인간을 개조해야 한다." 하는 말이다. 4·19 때만 해도 "정신적인 운동으로까지 들어가야 한다." 하는 정도였으나 이번은 좀더 분명해졌다 이것은 나와야 할 것이 나온 것이다. 옳은 말이다. 인간이 달라져야 한다. 제도만 고쳐서 되는 것 아니요, 사람, 바로 그것이 달라져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분명히 알 것은 인간 개조는 강제로는 아니 된다. 사람이 다 성인이 아닌 이상, 민중이란 더구나 무지하고 타락된 것인 이상 어느 정도의 강제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정치는 결국 강제 없이는 아니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간성이 달라지는 줄 알아서는 아니 된다. 정치만능을 믿는 정치가는 정치가가 아니요, 도둑이다. 정치가 없을 수 없지만 정치가 전부, 더구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참 정치가다. 정치를 다루는 사람에 그 겸손이 있지 않고는 아니 된다. 혁명이 필요하다. 잘못이 굳어지면 혁명으로 만이야 된다. 그러나 어떤 혁명도 반드시 철학이 그 뒤에 서지 않아서는 아니 된다. 새 세계관, 새 인생관이 있지 않아서는 더구나 인간미(人間味_를 가진 것이 아니어서는 아니 된다. 한 마리의 강아지를 길을 들이려 해도 강제만으로는 아니 되는데 하물며 사람에게서일까? 강제는 늘 도리(道理)의 지도를 받아서 해야 한다. 도리라니 다른 것 아니요, 모든 사람은 다 같은 사람으로, 다 자유(自由)를 그 본질(本質)로 삼는 것으로 아는 일이다. 거의 불가능한 것을 강제하되 강제인 줄 알지도 못하리만큼 스스로 기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종교란 것이다. 혁명가에게야말로 종교의 스승을 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실에는 피스톨 하나로 민족 개조를 해 보자는 열심당이 어찌 그리 많은가? 그 성의를 아깝게 여긴다.
5·16이 뭐냐? 이것은 달라지려는 인간의 꿈틀거림의 조그마한 한 마디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계역사의 흐름의 향하는 바를 아는가? 모르는가? 모르고는 모처럼의 성의와 힘씀도 소용이 없다. 이 혼란이 왜 오나? 첫째는 민족주의의 무너짐으로 인해 오는 것이다. 민족은 이 날껏 인간의 길러주는 어머니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인제는 아기는 어머니 품에만 있기에는 너무도 지나쳐 자랐다. 이 앞으로는 집에서 살지 않는다는 것 아니다. 그러나 집이 그 전부가 아니다. 인제는 사회의 아이다. 이제 인간은 세계의 인간이란 말이다. 민족은 운명을 같이 하는 단체이니 아직 이 앞으로도 상당한 동안 계속할 것이지만, 그러므로 제 민족 잊고 나라할 수 없지만, 인제는 도덕을 규정하는 마지막 표준이 민족이 있지 않고 세계에 있다. 민족에 권위가 있을 때에는 국민정신 통일하기가 참 쉬웠다. 그 때 나라의 걱정은 주로 기술적인 문명에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상이 문제다. 이상, 이념이 문제다. 그것은 민족사상이 "전체(全體)"를 대표해 주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새 표준이 제시(提示)되지 않은 것 아니다. 민주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지나간 시대에 민족 감정같이 자연적인 감정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혼란이다. 인간 개조를 하려 하는데 민족주의만 고취하면 되는 줄 아는 것은 사상의 간난을 표시하는 말이다.
그 다음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소유권 문제다. 지금까지 인류 사회를 지지해 온 것은 소유권은 신성하다는 사상이다. 이것이 거의 자연율(自然律)처럼 알지만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역사를 지어오는 동안 경험이 의해 얻은 도덕이다. 사람에게 물론 소유본능이 있지만 그것과 소유권의 제도와는 별개 문제다. 하여간 이날까지는 소유권은 거룩한 것으로, 절대 침범할 수 없는 것으로 알아 그것이 사회규율을 이루어 가는 근본 기둥의 하나로 서 있어서 인간의 생활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세계 두 진영의 충돌은 그 문제의 나타난 것이다. 인류는 이제 이것을 새로 해결하여 새 도덕이 서고야 말 것이다. 앞에 인간개조 하는데 그것을 생각 아니 할 수 없다.
그 다음 또 하나는 가정(家庭) 문제다. 소유권 제도와 밀접히 붙어 있는 것이 집이란 것이다. 집 없이는 오늘의 문명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또 인제는 의심을 받게 됐다. 공산주의가 가정 파괴를 목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물론 공산주의가 하는 그런 방식으로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벌써 지금부터 몇 천년 전부터 위대한 정신의 지도자들은 가정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 왔다는 것과 맞추어 생각할 때 이것이 어떻게 뜻 깊은 문제임을 알 수 있다. 가정 없이는 인류사회가 되어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또 가정 때문에 인간의 발전, 더구나 그 정신적 자유가 제한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하나? 지금은 이것이 옛날 보다 더 간절한 문제로 되어졌다. 사실상에 많이 가정파괴가 되었다. 현대사상의 어지러움의 원인이 거기 많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니 도저히 옛날 같이 딴딴한 가정 살림을 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오늘 인간의 또한 큰 고민이다.
이와 같이 이날까지 이 인류사회의 캠푸를 버텨오던 세 기둥이 다 흔들리게 되어 그것을 새로 어떻게 하지 않고는 세계적으로 번저져 있는 문제를 도저히 풀 수가 없다. 앞의 인간은 그 점을 생각하면서야 그 갈 바를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므로 칼자루 하나만 가지고는 인간개조가 아니 된다는 것이다. 반공을 국시(國是)로 내세우지만, 물론 당면문제는 반공이지만, 반공만으로 나라 나가는 방향을 결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발 앞에 당한 바위다. 길은 그 보다 훨씬 더 험하다. 그것만 해결하면 되는 줄로 믿었다가는 큰 잘못을 저지를 것이다. 국민을 될수록 넓은 눈을 가지도록 길러야 할 것이다. 분명히 잊지 말 것, 민중을 기르는 일이다. 호랑이 넋을 길러야 한다.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호랑이 나오라더니 정말 호랑이 나오지 않았소?" 한다. 나왔다면 나왔지, 허지만 내 호랑이 아직 아니다. 발톱쯤 나왔는지 모르지만, 그것 가지고 되느냐? 호랑이 전체가 나와야지. 발톱 하나 아니 쓰고도 모든 짐승이 저절로 도망하게.
기르는 말 들으려나?
송나라 사람이 제 곡식이 자라지 않는 것 같아 애를 태우는 자 있었다. 그래 나가서 모두 고갱이를 뽑아 놨다, 그리고는 부산히 돌아와 집사람들 보고하는 말이, 아, 내 오늘 죽을 번했다. 곡식좀 크게 해놨다 했다. 그래 그 아들이 나가보니 곡식이 다 말라 죽었더라는 거다.
이것은 중국 전국시절의 정치가들을 보고 맹자가 준 침이다. 제발 뽑지 말도록. 길르란 말은 뽑으란 말 아니다. 네 할 것하고는 가만히 하늘 법칙을 기대라는 말이다. 열심이 있을 수록 성급해지기가 쉽지만 성급해지면 나를 지나쳐 믿기 쉽다. 내가 하는 것 아니다. 하나님이 하는 거야. 다른 말로 하면 민중이 스스로 하는 거다. 스스로다. '저절로'란 말 아니다. '제가'란 말이다. 민중의 혼이 깨도록 깨워라. 그러나 너무 급히 깨우다 정신병자를 만들지는 마라.
수술
한 마디만 더. 혁명은 이를테면 복부 수술이다. 병이 시초 때에 문지르고 물찜이나 했으면 됐을 것이요, 그 담에라도 약이라도 먹었으면 됐을 것인데, 그 말 아니 들은 고로 인젠 배를 갈르고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래 칼을 잡은 것이다. 이제 병인께 할 말은 그저 믿고 참으라는 것 뿐이다. 죽기 각오하고 참아야 한다. 그러나 칼든 의사보고는 할 말이 많다. 이것을 외아들로 둔 늙은 부모로서는 할 말이 많다. 무식한 말이지만 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첫째, 성의지. 어떡해 서든지 살려 주겠다는 정성을 가져 주야지. 의(醫)는 인술(仁術)이라 정말 인(仁)해야지.
둘째, 술(術)이 높아야지. 성의 아무리 있어도 기술이 높지 않으면 못 살린다.
셋째, 기구가 완비 되야지, 기술 아무리 좋아도 맨손으론 복부 수술 못한다.
넷째, 그러나 외과(外科)의 생명은 소독에 있다. 남의 배를 열어 놓고 소독 잘 못했다가는, 살리려든 일이 도리어 죽이게 된다. 아무리 의사라도 그 전신이 박테리아 천지다. 소독 못했거든 손도 대지 마라. 소독이 무슨 소독일까? 가지가지의 병균이다. 민족의 복부 수술하는데 경계해야 하는 병균 얼마나 많을까? 영웅심, 권리욕, 제 고집, 시기심, 이런 따위는 그 중에서도 무서운, 하나만 묻어 들면 모든 성의, 기술, 지식, 기구, 약이 다 소용이 없어지는, 당장에 죽고 마는 무서운 균이다.
다섯째, 그리고 될수록 신속히 해야지 마취해 놓고 시간 길게 가면 회생 못하고 말지 않나? 얼른하고 물러나서 부모에게 내 주어야지. 지금 민중이 군사혁명 당하고도 어리둥절하고 말도 못하는 것은 총소리에 마취 당한 것이다.
불안한 맘엔 자꾸 생각나는 옛 말이 있다.
뿔은 바로잡다 소 죽인다. 아이는 죽었어도 학질 떨어지니 시원하다.
싸놓고 보면 속과는 딴판 같아 찢어 버리고 싶은 넋두리를 하는 동안에 6·25의 밤이 다 새었구나. 3년전 이 밤엔 잠 못 자고 한 생각 말했더니 "나라 없는 백성이라." 했다고 이 나라가 나를 스무날 참선을 시켰지. 이번엔 또 무슨 선물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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