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노래 (2)
김영만
포교당을 더 넓은 공간으로 넓히기 위한 계획을 하던 차 친구가 보여준 석굴을 보자 오래도록 찾던 도량으로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석굴 도량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원력을 세우게 되었다. 친구에게 석굴이 마음에 드니 어떻게 쓸수가 없냐고 하니 친구는 그냥 석굴의 부분을 시주를 하겠다고 하였다. 사실 석굴이 있는 입암산은 순 바위로 형성이 되어서 그 석굴 말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석굴 산 주인이 친구내 소유였는데 친구의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은 목포 인근의 섬과 땅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정도로 많이 보유하고 있는 이름만 되면 다 아는 분들로 그곳 입암산에 있는 석굴 정도는 안중에도 없을 정도였다. 친구가 시주를 하겠다는 것은 가능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굴을 동양에서 가장 위용을 자량하는 공간으로 만들어 보고자 원력도 생겼다. 그리하여 산 정상에는 해수관음상을 입상으로 크게 모시고,안으로 석굴을 파고 들어가 약 50m 정도에 부처님을 화강암 석굴에 직접 조성하는 등 여러가지로 석굴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보았다. 석굴 작업을 위하여 주변에 집이 필요해서 알아보니 아마 목포 지역에서 가장 좋은 모 제약회사 회장님의 2층 별장이 비워있었다. 비워있는 연유를 여쭈어보니 이집은 일제 시대에 복전(福田)이라는 일본인이 온갖 정성을 들여서 그 당시에 만들어진 집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처음 집을 지어서 살았던 일본인(福田)이 얼마나 멋을 아는 사람인가를 가름하는, 일제 시대부터 자란 것으로 보이는 茶나무가 정원에 있고 돌담 옆에는 茶 나무가 쭉 차밭으로 늘어져 있었다. 차나무는 생리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식을 하며는 죽기 때문에 아마 그곳에서 자란 차나무는 일제 시대부터 자란 차나무라 여겨졌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후 일본인이 떠난후 이집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집터가 강해서 늘 아프다든지 아니면 죽고 하는등 흔히 말하는 집터를 이기지 못하는 까닭으로 집은 늘 비워져 있었고 그냥 관리인이 관리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집은 완전히 절터로 간판만 붙이면 절이였다. 흔히 말해는 집터가 강한 공간은 부처님이 좌정하시면 모든 기운을 누를 수 있다고 생각되니 어쩌면 나를 위하여 비워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관리인을 통하여 비워져 있는 집을 얻어서 수리에 들어갔다. 일본 사람들은 집을 지을때 방향등 풍수를 본다고 하는데 정말 그 집을 보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의 기둥도 향나무의 나무결을 그대로 살려서 기둥을 세우고 아궁이에서 굴뚝으로 가는 부분도 커다란 돌을 다듬어 바닥에 놓는등 하나 하나를 볼때 정말 세밀하게 지어져 있었다. 집의 내부 수리를 하기 위하여 자전거를 구입하여 타고와 직접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집의 구들장으로 되여있는 큰방은 연탄 보일러 아궁이로 바꾸고 원래 다다미가 깔려져 있는 거실 마루에는 다시 두꺼운 스티로플과 합판, 장판을 깔고 도배와 페인트를 칠하고 저녁에는 지친 몸으로 시내의 금강원에 들려 늦은 시간까지 일들을 정리를 하였다. 갓바위 입암산의 금강원이 거의 다 수리가 되여갈 무렵에는 입암산 금강원에서 잠을 잤다.
참고로,대구 팔공산에 갓바위가 있듯이 목포에도 바위의 모양이 스님의 삿갓 모양으로 생긴 바위가 바닷가에 있어서 이곳을 입암산 갓바위라고 한다. 그런데 입암산 금강원 개원식을 일주일 남겨놓고 그곳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 2시경에 큰형님에게서 시내 "금강원"에 불이 났다고 전화가 왔다. 시내 금강원은 목조로 된 전통 일제시대의 2층 건물로 2층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와 옆에 또 다른 가게가 있었다. 이분들을 생각하니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그야말로 아무 정신 없이 뛰어나가 택시를 겨우 잡아 타고 가보니 사람들이 연기가 나오는 금강원의 건물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다행히 금강원 건물은 그대로 있었다. 깜깜한 금강원의 내부를 보니 이미 소방서에서 화재는 진압한 상태였고 불이 난 이유를 찾을수가 없었다. 한참을 있으니 불이난 이유를 알수 있었다.
그것은 날마다 사람들이 금강원을 찾으면 차를 직접 내어주기 위하여 사용하던 커피포트가 과열하여 불이난 것이다. 다음날 이야기를 들어보니 금강원을 지나던 불교 학생회 후배가 내가 운영하는 금강원의 닫혀진 샷다의 구멍에서 시커면 연기가 무럭 무럭 나와 소방서에 신고 하고,소방대원들이 닫혀진 샷다를 부수고 들어가 커피 포트에서 불이 벌거케 타 불이 막 번지려는 순간에 소방 소화기로 불을 진압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금강원에서 취급하던 불교 관련 모든 물품은 거의 그대로 있는데 시커먼 그을림이 모든 물품에 붙어서 하나도 쓸모가 없는 상태가 되였다. 참으로 어떻게 꾸러온 금강원인데 하루 아침에 이렇게 불이 나니 넋이 나갈 지경이였다. 금강원 불이 났다는 광주권 뉴스에 5,00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로 뉴스 보도 되였는데 실질적으로는 금전적 피해가 더 컸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그렇게 불이 막 커질려 할때 발견되어 화재가 진압이 되어 다행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갓바위 입암산 "금강원" 개원식은 정해진 날짜에 목포지역의 스님들과 포교사단 재가자들의 모임인 "호법포교사단'의 2기 회장단에서 개원 법회때 회장님과 몇분을 모시고 증명스님의 점안식으로 주존불인 관세음보살(좌불 3자) 님과 그리고 신중전, 칠성탱화를 함께 모셨다. 이모님이 여러 방면으로 화주를 해 주셨고,특히 고등학교 동창들도 방석을 30개 가량 시주를 하는등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여법하게 부처님 점안식등 개원식을 마쳤다. 시내에 위치한 금강원에 들려서 아직 정리가 덜된 부분을 정리하였다. 불에 그을은 물품을 정리하는 마음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
시내의 금강원은 화재로 다시는 일어서기 힘든 상황였다. 선배가 가게를 알아보기에 주인에게 소개를 해 드리고 마음으로 울면서 언젠가 다시 기회가 되면 해보겠다고 생각했다. 한순간의 실수로 화재가 발생하여 그렇게 "금강원"은 문을 닫았다.
입암산 석굴 불사하면서
시내의 금강원을 정리하면서 지나온 일들을 생각하니 참으로 그저 멍할 뿐이였다. 특히 처음에 금강원을 개원할때 자금을 투자하신 매형에게 그렇게 미안할수가 없었다. 매형이 자금을 댈때는 가지고 계시는 시골의 전답을 정리하여 마련하셨는데 그 땅들이 몇년 후에는 몇배가 아닌 몇 십배로 땅값이 올라서 더욱 안타까웠다. 만약에 그 땅을 처분하지 않고 그대로 나두었다면 십억대의 땅으로 환산되였는데 이를테면 금강원이 불이나서 십억대의 재산을 잃은 셈이 되였다.
생각으로는 나중에 금강원을 크게 발전을 시켜서 매형에게 그대로 전달해 드릴려고 했는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늘 매형에게 빛을 진 마음이 든다. 그렇게 시내의 금강원을 정리를 하고서 수입원이 없어진 상태에서 오르지 매진하는 부분은 입암산에 있는 기도처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삽과 곡갱이를 들고 매일 석굴을 개발하려고 법당으로 사용하는 건물과 약 50m 가량에 위치한 석굴에 시간만 나며는 올라가서 조금씩 석굴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갓바위 입암산의 건물에 부처님을 모시고 처음에는 상호를 "금강원"으로 쓰다 禪 불교를 펼쳐보겠다는 마음으로 상호를 "금강선원"으로 바뀌고 "금강선원" 들어오는 길에 나무 원목으로 크게 글씨를 새겨 세워 놓았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부처님 오신날 행사에는 앞에 있는 남농기념관 앞까지 연등을 설치하여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알렸다.
그리고 내가 대학생불교연합의 지도 법사를 하니 대학생들이 입암산 "금강선원" 까지 찾아와 법회를 보기도 하고 茶를 나누면서 불교이야기를 나누었다. 개발하고자 하는 석굴은 자연적으로 생긴 석굴인데 일제 시대부터 입구를 돌로 막아놓은 석굴이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일본인이 음식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까지 돌로 막아진 부분을 제거하고 앞쪽에 쌓여진 흙들을 파내고 정말 혼자서 밥을 해서 먹으며 어느때는 그냥 식사 때를 잊기도하고 조금씩 조금씩 석굴 작업을 하여갔다.
그러한 가운데 동양화와 서양화를 전공한 미술 후배들 두명이 찾아와 노예처럼 혼자서 일을 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는지 불교 신자도 아닌데 틈틈히 도아 주었다. 그렇게 석굴 안쪽과 바깥쪽의 쌓인 흙들을 퍼내기를 아마 8t 짜리 덤프 트럭으로 아마 100 여대 이상의 흙을 파내니 굴의 윤곽이 조금씩 들어났다. 그렇게 근 2년 반이 넘게 일하며 고독감에 혼자 울기도 하고,배가 너무 고파 "금강선원"에 들어오는 입구의 수수밭의 수수를 잡고서 수수의 낱알을 먹을려니 수수밭 주인에게 나중에 빚을 갚아야하지 않으까 생각이 들어 참기도 하였다. 정말 누가 알아 주지도 않는 길을 가면서 그래도 우리나라에 재가 불교의 운동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러한 터전의 공간으로 이곳이 적합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가끔 친구들 중에 나의 생활을 이해를 못하는지 자기는 한달에 몇 백만원을 준다고 하여도 "금강선원"의 공간에서는 살지 못하겠다며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그야말로 신기하게 생각하는 친구도 있었다. 겨울에 석굴 작업을 하면서 양쪽 귀에 동상이 걸리기도 하고,아무튼 어렵게 혼자서 의식주를 해결하며 작업 하여갔다.
그러나 보다 더욱 고생하시는 분은 어머님이셨고 "금강선원"에 오시지 말라고 하셔도 일주일에 꼭 한두번은 교통도 불편한데 오시어 먹는것 등을 챙겨 주셨다. 어머니는 아들을 칠 형제나 두셨으니 나를 차라리 스님으로 생각하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으로써는 이해하기 힘드신 상황에서도 다 큰 아들이 부처님 법이 좋아서 가는 길에 깊으신 신앙심으로 이해를 하여 주셨다. 몇 지인들은 어머님께 휼륭한 일을 하는 아드님이라고 칭찬을 하여주시니 어머님께 조금 안심은 되었다.
석굴의 작업을 하면서 굴에서 나온 다듬어진 돌로는 돌계단을 만들고 주변에 나무도 심고하는등 오르지 석굴 법당을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흙을 파고 또 파내어갔다. 이제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들어나 손으로 할수있는 부분은 어느정도 된듯하여 친구의 아버님과 함께 목재소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커다란 통 원목으로된 목재등을 트럭으로 시주를 받아 밑에서 부터 위 까지 나르기 위하여 혼자서 어깨에 3m 터가 넘는 통나무를 이고 그림을 하는 후배들과 함께 작업을 하였다. 기도를 정성껏 하여야 겠다고 생각하고 석굴에 나무로 불단을 만들고 인연이 된 석불 부처님을 모시고 날마다 기도에 들어갔다. 석굴 작업을 하며 저녁에는 석굴에서 목청껏 염불을 하면서 누구도 나의 기도 소리에 환희심을 갖도록 더욱 더 염불의 소리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렇게 만 2년 반의 세월을 석굴 기초 작업을 하며 보내고 있는데 하루는 광산업을 하시는 분이 오시어 석굴 작업을 하는 모습에 감동을 하셨는지 산 주인의 승락서만 받아오면 무료로 석굴을 50m~100m 정도 파준다고 하였다. 그렇게 파고 들어간 상태에서 바위에다 직접 부처님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광산의 기술이 발달하여 바위를 발파 작업이 없이 약물처리로 작업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일단계로 손수 할 수 있는 부분을 하고 산 주인으로 계시는 친구 어머님에게 허락을 받고자 마음을 먹고 비가 오는 어느날 석굴전에 삼배를 드리고 기도를 마치는데 저 밑에서 누가 올라오는 것이다. 가까이 뵈니 그분은 다름 아닌 친구의 어머님이셨다. 친구의 어머님은 교회의 집사님으로 이곳은 교회의 기도처로 생각하고서 있었는데 이게 무슨일이냐고 하시면서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2년 반 동안에 틈틈이 친구에게 이야기를 하였고 서류로는 받지 않았지만 주변의 친구들도 친구가 석굴을 시주한 걸로 알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 어려운 작업을 만 2년 반 동안에 오르지 불심 하나로 하였는데 이제와서 안된다니, 정말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 어떻게든 친구의 어머님을 설득하여도 통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주변에 인연되시는 분들이 딱한 사정을 듣고 그럼 우리가 살테니 석굴을 파는 것을 여쭈워 보라고 하여 의중을 여쭈니 파는것 마져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동안에 친구의 어머님은 친구의 아버님 묘소가 바로 밑에 있어 내가 석굴 작업을 하는것을 몇 번 보셨는데 그때는 아무런 말씀이 없다가 석굴이 어느정도 윤곽이 드러나니 욕심이 생기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일 후 그동안 옆에서 석굴 작업을 위하여 도와준 미술 후배들과 찹찹한 마음을 달래려고 주막에 들렸다. 갑자기 덧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주막집의 연탄불위에 순간적으로 주먹을 넣었다. 그 광경을 본 후배가 무엇하시냐고 하면서 손을 불에서 빼어내었는데. 그러한 후유증으로 몇달간 손에 상처가 아물지 않아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때의 상처의 허물은 몇년이 지나도 허물이 벗겨지고 또 벗겨졌다.
그동안 2년 반동안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마음은 온 몸을 부처님께 전신 공양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석굴에서 저녁에 벽을 보고서 좌선을 하고 있으면 환청으로 군인들이 여러 명이서 저쪽에서 처벅 처벅 군대 행열하는 발걸음으로 나를 행하여 걸어오다가 그쪽을 보며는 그 소리가 멀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속인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일주일에 한팀이나 두팀 정도 목포, 전주등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모시는 령들의 안내로 왔다며 밤을 새우고 가기도 했다. 그런한 가운데 무속인들의 세계도 조금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거의가 내림신을 받은 사람들로 자신에 들린 신들에게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여야 생활과 일들이 풀리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그들이 모시는 령들이 바로 자신들에게 해를 가하여 참으로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신들의 의지에 관계없이 남의 인생을 대신하여 사는 참으로 가련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생각되었다. 그러한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삶이 정말 어려워 그러한 세계에서 벗어날려고 하여도 잘 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남자 무당을 법사라고 하는데 그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의식을 행할때 읽는 경이 정통 불교에서 주로 독송하는 천수경과 반야심경도 있었다.
그렇게 하루 하루 석굴을 개발하면서 미술을 공부하는 후배들과 저녁에 석굴에서 시내를 내려다 보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그날도 미술 공부하는 후배들과 석굴에서 좌선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자기 동양화를 전공하는 후배가 임시 불단으로 올라가더니 불단에 오줌을 누는 것이다. 순간 손이 다친 상태에서 후배 녀석에게 달려가서 한방을 날렸더니 이녀석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해서 졸지에 후배 녀석하고 싸움이 벌어졌다. 다른 서양화를 전공하는 후배는 싸움을 말린다고 동양화를 전공하는 후배의 편에 서게되어 2:1로 싸우는 결과가 되였다. 분이 안풀려서 그림을 그리는 공간으로 처들어 갔더니 문을 잠그고서 죽어도 안열어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심신이 지칠데로 지쳐있는데 이러한 경우를 당하니 정말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갓바위 입암산에 들어 올때는 만약에 다른 이교도 장정들이 몇 명이 달라든다고 하여도 몇명 정도는 상대할 수 있는 마음이었는데 하심하는 자세로 다혈적인 성격 다 죽이고 살아가는 마당에 석굴 작업을 도와준 후배가 그렇게 나오니 그저 슬플 뿐이였다. 너무나 억울하여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친구가 와서 달래며 오늘은 그냥 넘기고 내일 낮에 그 후배랑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였다. 다음날 참참한 심정으로 있는데 어제 싸운 후배가 찾아와 정말 죄송하다면서 무릎을 끊고 비는 것이었다. 기가 막혀 상대를 하지 않으니 빗자루와 바개스에 물을 담아서 석굴에 올라가 물로 청소를 하였다고 거듭 용서를 빌었다. 그날은 곡차를 한잔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객기(?)로 여기고 화해를 하였다.
그무렵 석굴 밑에 법당으로 사용하는 금강원을 하루는 주인으로 있는 모 제약회사의 회장님이 직접 오시어 나의 사는 모습을 보더니 다음날 부처님을 모시는 공간을 비워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회장님께 친히 친필 서신으로 젊은 사람이 종교적인 뜻을 가지고 고생하고 있으니 한번 도와 주십사하고 편지를 띄웠다. 그러나 도움이 없고 오히려 빨리 나가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곳에서 생활 할수있는 방법을 여러각도로 강구를 하여도 해답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인연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시내에 다시 포교당의 공간을 알아보았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석굴 작업시에 친구가 시주를 한다고 할때 구두상으로만 확답을 받을께 아니라 서류로 직접 받아서 확인을 하여야 했었다.
그리고 산을 개발 할때는 늘 처처에 함께하시는 불보살님께 향하는 마음으로 조심 조심하여야 했었다. 석굴의 친구는 내가 석굴을 개발하면서 한번씩 물어보면 반드시 시주를 한다고 하였는데 본인의 어머님이 완강히 나오시니 참 난감해 하다며 그동안에 정말 수고를 하였다며 몇 백만원이라도 받으면 어쩌겠냐고 하였다. 내가 그동안에 고생한 일들이 돈으로 해결될 부분도 아니어 단돈 한 푼도 받지않고 석굴에서 그대로 하산을 하였다. 비록 허공에 법당을 만드는 격이 되였다고 하여도 불보살님을 향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으며 오히려 더욱 가행이 가능하리라 생각되었다.
나의 노래 그리고 "나의 노래"
불교 공부를 하면서 초심자가 불교을 접하는 계기에 따라 달리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을 본다. 그러한 가운데 잘못 전달 되어 불교가 너무나 어렵고 형이상적으로 다가가는데. 그러한 부분은 불교을 한쪽 으로만 알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화두선의 장점을 파악하고 염불선의 장점인 굳건한 믿음으로 숙업의 업장을 함께 제거하며 수행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를 이해를 하려면 간화(화두)선의 세계를 이해를 하고 현상계적으로 표현되는 종교적인 내세관과 더불어 부처님의 일대기등 종교적 신앙도 함께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처님 법은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설하신 근기법이라서 각 각의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선택하여야 하며 깨달아도 깨달음의 차이에 각 각의 차이가 있다. 그래서 나는 깨달음에 있어서는 "돈오점수" 쪽이라고 생각하고 화두선과 염불선을 함께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지고보면 화두선이나 염불선이 같다고 생각할수 있으나 진언 수행등의 타력적인 부분으로 업장을 녹이면 화두선을 좀 더 가깝게 다가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일단 부처님의 경전의 말씀과 실질적으로 체득하신
큰스님들의 말씀을 일단 믿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수승한 마음으로 이루워진 불법의 만남이라면 불보살님들도 호법을 하여 주실 것 이다.
참으로 좋은 시절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마음 공부를 하기가 어려운것이 보고, 느끼는점 마음을 현혹하는 부분이 많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수없이 많은 분들과 시간과 공간을 함께한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복을 받은 시대라 생각된다. 우리는 함께 살며 불법을 선택하고 정법을 선택한 복받은 사람이다.
그래서 현실적인 불교의 사상이 늘 기쁨 속에서 이웃과 더불어 현생에서도 부처님 법을 통하여 잘 살고 더 나아가서는 깨달음에 이룰수있는 수행법이 제시 되어야 한다. 그러한 수행법은 바로 "아미타불"을 날마다 환희롭게 생각하고 그리면서 모든이웃을 모두 "아미타불"로 보는 마음이라 생각 된다. 청화 큰스님의 말씀대로 空의 개념으로는 극락의 세계가 있다 없다는 표현이 안되지만 현상계적으로 보면 분명코 극락이 있다고 하셨다.
지금의 사람들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어쩌면 동적인 움직임 속에서 살아가는지 모른다. 이에 맞추어 어렵게 표현되는 간화선도 쉽게 접근할수 있도록 연구되여야 한다. 그리고 종교적인 자신감과 더불어 믿음을 심을수 있는 포교의 방법론이 제기 되어야 하며 그러한 포교론으로는 오래전부터 내려오다 잠시 잊혀진 "아미타불" 염불법을 대중화 하는것으로 늘 환희심으로 염송하는 수행의 모습을 펼쳐야 하는 것으로 생각 된다.
그래서 아마타부처님을 모시는 염불 도량이 많이 생겼으면 한다. 이제 나의 끝없는 노래로 인연되는 모든 이들이 함께 "아미타불"을 불러보고 싶다. 그것은 모두가 이생에서는 늘 즐거웁고 환희로움이요,금생을 인연을 다할때는 기쁜 마음으로 또 다른 인연처인 극락정토로 향할수 있는 "아미타불" 염불법을 함께하는 것이다.
"무량수경"에 보면 극락의 세계를 오랜 발원과 참회 수행을 통하여 48가지의 원력으로써 만드신 아미타 부처님의 전생이신 법장 비구로써 수 없는 윤회속에서 원력으로써 수행을 하시면서 48가지의 원을 세워 발원을 하시면서 행하신 18번째 서원 "십념왕생원" 이라는 부분에 죽음에 임하여 "아미타불"을 열념만 불러도 누구나 극락 정토에 갈수 있고 만약 중생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코 정각을 이루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미 전생에 법장 비구이신 아미타 부처님은 극락 정토에 상주하고 계시니 그러한 발원은 당연히 이루워지는 것이라서 누구나 "아미타불을 임종시에 열념만 지극한 정성으로 염하면 갈 수 있는데 과연 죽음에 이르러서 "아미타불"을 열념 염송하실 수 있는 분이 몇 분이나 가능할지, 살아 생전에 "아미타불"을 늘 염송하는 상태에서나 죽음의 순간에도 "아미타불" 염송이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이제 나의 수 겁동안의 윤회의 끝없는 노래는 오르지 환희로움으로 "아미타불"을 모두가 함께 불러서 무량수여래불의 세계에 귀의하는 것이다.
미주현대불교제공
첫댓글 너무나 좋은 글을 읽었습니다. 감동입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 ()()()
감명 깊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휼륭하십니다. 합장공경드립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의 글을 읽어주시어 감사드립니다.아미타불.
경전추천해 드립니다.--공부중에 일어나는 많은 현상들을 바라볼수 있는 경전은 능엄경(50마장)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그리고 밀라레빠 스님께서 하신 수행법도 공부중에 일어나는 환영의 현상을 능엄경보다는 좀더 쉽게 알수 있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수행중에 일어나는 단계를 저 두권의 말씀으로 해결해 갑니다.
그리고 틈틈히 부처님 일대기는 자주 봅니다.개인적으로 세권으리 책을 보면 정진하는데 한시도 고삐를 놓지 않게 해서 말씀적습니다. 지금까지 읽은 수행기 중에 마음에 남습니다.
(),감사 드립니다.아미타불.
보시는 능엄경과 밀라레빠스님책 구해보고 싶군요. 출판사와 저자(번역인) 부탁 드려봅니다.감사합니다.
저도요, 알려 주십시요^^
능엄경은 한문 원전에 주석서는 월운스님께서 하신 책 봅니다. 동국역경원/ 밀레라빠는 류시화님이 번역하신것 출판사는 시공사입니다.
김영만님 소개글에서 대학청년팀장에서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사단"로 정정하겠습니다.보강님은 20년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부처님법을 알리고 계십니다. 합장합니다.
보강거사님 훌륭하십니다....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