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예술의특징
문물이 직접 교류되어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극받고 있음을 고분(古墳)의 축조나 출토유물의 성격에서 볼 수 있다. 불교의 영향으로 한성시대부터 사찰의 건축과 불상을 조성하였으며, 불교 용구의 생산은 백제의 한성시대부터 사비시대까지 이어져 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한성시대는 초기의 약 500년간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으나 현존하는 미술품은 거의 전무하며, 고고학적 발굴자료에 의해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문헌자료에 의하면 마한이 3세기 후반부터 진나라에 조공무역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계의 돌무지무덤[積石塚]인 경기 양평, 문호리, 삼곶리, 가락동, 석촌동, 연천 등에서 토기, 대롱옥[管玉], 널무덤[土壙墓]출토 흑유(黑釉)거치무늬 토기 등이 있다.
중국 동진에서 수입된 4∼5세기 미술품은 청자 도연편(陶硯片), 흑갈유 전문편(錢文片), 청자 사이호(四耳壺), 법천리 청자양형기(羊形器), 화성군 천계호(天鷄壺) 등이 있다. 불교의 전래와 함께 한산에 절을 세우고 승려를 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유적과 유물이 없다. 이 시기에 예배대상인 불상 등은 전래되거나 제작되었지만 귀걸이 이외의 장신구 등의 금속공예품은 거의 없다.
웅진시대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백제세력이 위축되면서 64년간 천도했던 시기로 초기에는 지방호족과의 다툼으로 혼란하였으나 곧 국내를 정비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고, 불교를 발전시키는 한편, 중국 양(梁)나라와 문물을 교류하여 새로운 발전의 기틀을 만들었다. 6세기 전반기에 축조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속공예품을 위시하여, 새로운 전축분 축조, 대통사(大統寺) 창건, 수원사(水源寺) 등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불교중흥의 바탕을 이룩하였다. 불교에서 외래양식 수용은 북위와 동·서위 양식을 받아들여 강건한 기상이 보이는 한편, 백제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기법을 볼 수 있다.
사비시대는 백제의 웅비(雄飛)의 시기이며, 부여는 마지막 천도로 123년 동안 수도였다. 성왕(523∼554)은 백제의 중흥의 왕으로 불교를 장려하고, 중국 양나라와 교류을 통해 새로운 문물을 흡수하였다. 미륵사(彌勒寺), 왕흥사(王興寺)와 같은 대찰을 창건하여 "사찰과 탑이 매우 많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흥하였다. 중국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남조(南朝)문화 뿐만 아니라, 그 이후 북조예술의 요소도 보이며, 백제미술은 국제적이고, 개방적이면서 백제적인 특징을 찬란하게 승화시킨 절정기의 높은 수준이 가늠된다.
백제미술의 특성은 북방적인 고구려 문화 요소를 토대로 하여 시대성·자연환경·토착성·인위적 창조성을 갖고, 서남의 바다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외교를 통해 받아들여 진취적으로 수용, 창조적으로 융화하여 찬란한 백제적인 미술품을 재창조하였다. 나아가 일본에 백제문화를 전파하여 일본문화 형성의 기조를 이루게 하였다.
2. 백제시대의 회화
고구려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들 나라와는 다른 차분한 화풍을 이루어 백제 특유의 완만하고 유연하며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고구려 회화와 유사한 양식을 창조했다. 고구려의 영향은 몇몇 고분벽화에서 확인되며, 중국 남조 특히 양나라와의 교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양서(梁書)》 등의 기록을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전하는 백제시대 회화작품으로는 공주송산리 6 호분(公州宋山里六號墳), 부여능산리고분(扶餘陵山里古墳)의 사신도(四神圖)·연꽃무늬[蓮花紋(연화문)]·비운무늬[飛雲紋(비운문)] 등의 벽화, 부여 규암면 절터에서 발견된 <산수문전(山水紋塼)>,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 등으로 매우 드물다.
7세기 초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산수문전>은 백제미술의 한 정점(頂點)이며, 백제 회화의 우수함을 가장 잘 보여준다. 좌우대칭으로 짜여진 이 벽돌은, 아랫부분의 도식화된 수면(水面)과 윗부분의 구름을 뺀 나머지 부분에 산들을 가득히 새겨 놓았다. 바위산과 소나무 덮인 산들이 첩첩이 겹치고 쌓인 모습을 공간감과 거리감 있게 나타냈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조화와 느낌에도 마음을 써서, 원융(圓融)한 세계를 이루었다. <산수문전>의 이 삼산형(三山形) 산악도는 무령왕릉 출토의 동탁은잔(銅托銀盞)에도 나타난다. 또한 백제회화는 일본의 고대회화 성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백가(白加)·아좌태자(阿左太子)·인사라아(因斯羅我) 등의 이름이 일본 기록에 남아 있다.
3. 백제시대의 조각
384년(침류왕 1) 중국 동진(東晉)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고부터 불상이 조각되었다. 처음에는 중국의 불상을 본뜨다가 차츰 백제 고유의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서울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좌불상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백제불상으로,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은 선정인형식(禪定印形式)을 취하고 있다.
부여군(扶餘郡) 규암면(窺巖面) 신리(新里)에서 출토된 금동좌불상과 부여읍 군수리(軍守里) 절터에서 출토된 납석(蠟石)으로 새긴 불좌상이 뚝섬에서 출토된 불상을 약간 발전시킨 6세기의 작품이다. 석조불상은 암벽에 돋을새김[浮彫(부조)]한 것들이 많다. 충청남도 태안군(泰安郡) 백화산(白華山)의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은 작은 보살을 중심으로 양쪽에 큰 보살이 서 있는 특이한 형식을 보여준다. 충청남도 서산시(瑞山市) 운산면(雲山面)의 마애삼존불은 얼굴의 티없는 웃음으로 <백제의 미소>라는 찬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우수한 수법을 보여준다. 왼쪽에 반가사유상을, 오른쪽에 관음보살입상을 거느린 삼존불은 삼국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진 형식으로 특히 백제에서 성행했는데, 중국 남조 불상들에서 그 원류(源流)를 찾아볼 수 있다.
이 형식을 본뜬 일본의 초기 불상들인 호오류사[法隆寺(법륭사)] 유메노도관음[夢殿觀音(몽전관음)]이나 금동48체불 중에도 두 손에 보주(寶珠)를 마주잡은 불상들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문화의 전파 경로를 짐작하게 한다. 7세기 전반기의 작품으로는 공주시(公州市) 의당면(儀堂面)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 등이 있는데, 오른쪽 다리에 무게중심을 둔 3곡자세와 달개[瓔珞(영락)]·천의(天衣)의 표현 등으로 미루어 중국 북제(北齊) 및 주(周)나라 말기와 수(隋)나라 초기의 새로운 양식이 더해졌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때의 석조상으로 전라북도 익산시(益山市) 삼기면(三箕面) 연동리(蓮洞里) 석불좌상이 있는데, 균형잡힌 몸매와 세련된 옷주름을 보여준다.
4. 백제 건축양식의 특징
처음에는 고구려와 거의 같았고, 그 뒤 중국 남조의 양식이 더해졌으리라고 짐작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공주·부여·익산지방의 절터와 석탑 2기뿐으로 자료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백제 초기의 목조건축은 강직하고 웅장한 고구려 양식이었다가, 점차 경쾌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변하고, 지붕은 맞배지붕·우진각지붕 외에도 중국에서 온 팔작지붕이 새로이 나타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석탑으로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삼고 있는 익산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이를 바탕으로 7백제양식의 완벽한 석탑으로 발전된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이 있다. 부여지방의 여러 절터와 익산 미륵사 절터의 발굴로 백제 가람 배치의 대강이 밝혀졌고, 성터에 대한 조사도 많이 이루어졌다.
금제관식<왕비>
종 목 국보 제155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관(冠) 장식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예리한 도구로 도려내어 무늬를 만들었는데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송이가 있다.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백제금관
백제에서 출토된 관모로서는 전남 나주군 반남면의 백제시대 옹관으로부터 출토된 내ㆍ외관모 한벌과 공주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각 한쌍의 왕과 왕비의 금제관모장식이 있다.

백제에서 출토된 관모로서는 전남 나주군 반남면의 백제시대 옹관으로부터 출토된 내ㆍ외관모 한벌과 공주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각 한쌍의 왕과 왕비의 금제관모장식이 있다.나주 옹관으로부터 출토된 금동관 중 내관은 반원형의 금동판 두장을 맞붙여 위쪽 둥근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씌워 붙였다.관모의 가장자리에는 간단한 인동문(忍冬紋)이 둘러져 있고, 바탕에는 초화문이 안쪽에서부터 돌출된 점선으로 표현되어 있다.세부의 의장(意匠)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앞서 고구려의 진파리 1호분 출토의 금동투각관모와 상통한다.한편, 외관은 너비 3㎝의 둥근 테두리 위에 세개의 입식을 세운 것으로, 입식들은 각기 가운데에 곧게 솟은 줄기를 중심으로 세 갈래의 가지가 뻗쳐져 전체적으로 투각된 수목형의 모습을 나타나게 하고, 표면에는 군데군데 원형의 영락을 매달았다.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금제의 관모장식들은 모두 순금판을 도려내어 줄기와 꽃잎을 나타낸 초화형으로서, 원형의 금제 영락은 왕의 관식에만 매달려 있으며, 왕비의 관식에는 영락이 없이 보다 간결하게 만들어 졌다.
◈ 백제벽돌무늬




◈ 백제시대전통문양

연꽃당초무늬 백제시대


◈ 백제와당

연꽃무늬 수막새(부여 능산리 절터 출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