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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포 지교(管鮑之交)의 뒷 이야기
관포지교란 말을 많이 쓰면서 그 뒷 얘기들을 구체적으로 잘 모른다. 여기서 관중은 대단하다. 공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관중의 이럼은 이오(夷吾), 이오자는 중(仲) 즉 관자(管子)라 하고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업적을 남긴다.
관자는 바로 관중의 언행록이며 공자가 태어나기 약 90년 전에 죽었고 제자백가의 대선배이나 다른 제자백가
들과는 특이하게 스스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다.
춘추시대 초엽, 제(齊)나라에 관중(管仲 : ?~B.C 645)과 포숙아(鮑叔牙), 그리고 소홀(召忽)이라는 세 친구가 있었는데 둘도 없는 친구사이였다.
본래 제환공의 아버지 희공(僖公)에게 세 공자(公子) 제예(諸兒),규(糺),소백(小白)이 있었는데 제예는 후에 양공(襄公)이 되고 관중과 소홀은 규의 후견인이, 포숙아는 소백의 후견인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그때 포숙아는 막내이고 이복동생인 소백의 후견인이 되게 한 것은 자신을 무능하다고 하찮게 여겨서라 판단하고 병을 핑계로 출근을 하지 않았다.
누구의 후견인이 되는가하는 것은 다음 왕이 누가 되는가와 연관된 것이라 막내에게 순서가 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니 포숙아는 한마디로 서운했던 것이다. 그런 포숙아를 관중과 소홀이 찾아갔을 때의 대화이다.
“이건 좋지 못해. 국가의 대사를 맡는 이상 어떤 일이든 사퇴해서는 안되며 아무리 한직(閑職)이라 하더라고 임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네. 취임하는 게 좋겠네”
이 문제는 관중과 소홀의 논쟁이 되어버렸다. 소홀은,
“아니야. 제나라에 있어 우리 세 사람은 솥의 세발과 같은 사람이야. 솥은 발이 하나만 없더라도 넘어지고 마는 것이니 이 문제는 신중하게 처리해야하네”
“아니지.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잖아. 규공자는 어머니가 온 나라 사람들로부터 증오를 받고있기 때문에 자신도 불리한 상태에 놓여 있거든. 한편 소백공자는 어머니가 안계시기 때문에 국민들로부터 동정을 받고 있지 않나. 제예공자는 장남이라 제일 유망하겠지만 그 어머니의 신분이 낮다는 약점이 있네. 누구도 일장일단이 있어 누가 후계자가 될지는 예측하기가 매우 힘들어. 그러나 장래에 제나라를 짊어지고 갈 사람은 규공자 아니면 소백공자 일걸세. 나는 소백공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네. 그분은 약삭 바르지는 못하지만 도량이 큰 분인 까닭에 사물을 옳게 판단할 수 있는 분이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이미 규공자의 후견인이 되어 있네. 장차 군위가 몇 대 계속될 것인가 점칠 적에 희공이 세상을 떠나신 후에 마약 규공자께서 지위를 빼앗기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다면 그것은 군주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는 나도 살아 남을 수가 없지. 비록 제나라를 아니 천하를 나에게 준다고 해도 나는 군주를 배반할 수 없네. 군주의 명령을 받은 이상 몸을 던져서라도 그 책임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하네. 이것이 신하 된 자로서의 의(義)가 아니겠는가?
“아니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네. 신하라는 것은 군주의 명을 받은 이상 나라의 안태(安泰)를 꾀하고 종묘를 지켜야하는 것이 첫째로 마음을 쓸 일이 아니겠나. 규 공자 한 사람을 위해서 죽을 필요는 없어. 만약 죽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라가 망하든가 종묘가 무너지든가 제사가 끊어지고 말았을 때야.
이 세가지 경우가 아니면 목숨을 걸지 않겠네.“
포숙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관중의 의견을 따라 다시 출근하면서 관중에게 어떻게 소백공자를 모셔야되는가를 물었다.
관중은 대답했다.
“우선 군주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걸세. 그렇지 않으면 신뢰를 받을 수 없지 않겠나. 신뢰받지 못하면 무엇을 건의하더라도 채용되지 않는다네. 그렇게 되면 나라를 안태하게 만들 수가 없지. 무엇보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 그것이 신하된 도리라네.”
여기서 세 사람의 가치관과 철학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렇게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어 갔다.
그런데 양공이 왕위를 물려받지 못한데 앙심을 품고 있던 사촌 동생 공손무지(公孫無知)가 인사에 불만을 품은 세력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켜 궁중에 쳐들어오자 신하를 자신으로 변장시켜 침대에 누워있게 하고 문 뒤에 숨어 있었으나 문 밑으로 발이 보여 마침내 잡혀 죽었다.(B.C. 686)
이렇게 되자 관중과 포숙아는 각각 공자와 함께 관중은 이웃 노(魯) 나라로 포숙아는 거(莒)나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이듬해 공손무지가 옹림(壅林)이라는 자에게 원한을 사서 노나라 장공(莊公) 9년에 피살당하게되자 두 공자는 군위(君位)를 다투어 귀국을 서둘렀고 관중과 포숙아는 본의 아니게 정적(政敵)이 되었다.
먼저 소백이 포숙아와 먼저 거에서 귀국하였다. 한편 규는 관중과 노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귀국하였다.
그래서 양측은 건시(乾時)라는 곳에서 싸우게 되었다. 이때 관중이 쏜 화살이 소백의 대구(帶鉤:가죽․천으로 된 띠를 매기 위해 양끝에서 서로 끼워 맞추는 고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전쟁에서 결국 소백측이 승리하여 군주 자리에 오르니 바로 환공(桓公:B.C 685-643)이다. 한편 패한 규측을 밀었던 노나라에 압력을 가하여 공자 규를 죽이도록 했고, 규의 후견인이던 관중과 소홀은 그대로 노나라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관포지교의 포숙아 역할이 시작된다. 환공이 포숙아에게 나라가 잘 되는 방법을 물었다.
“관중과 소홀이 있으면 나라가 안태할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요”하며 못 마땅해 했다. 그러자 포숙아는 지난날 후견인으로 임명되었을 때의 일을 고백하자 환공은 뜻을 바로 납득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료. 그렇다면 내가 부르면 올 것 같소?”
“바로 손을 쓴다면 될 수 있을 것으로 압니다. 우물쭈물한다면 노나라의 시백(施伯)이라는 사람이 관중의 기량(器量)을 알고 노나라 정치를 관중에게 맡기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노나라가 우리 제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될 것이며 관중이 맡으려 하지 않으면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여 돌아오지 못하게 죽일 것입니다.“
“관중은 시백의 말을 들을 것 같소?”
“거절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규를 위해 순사(殉死)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제나라의 안태를 꾀한다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관중은 두 마음을 품는 사람이 아닙니다. 거절하면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노나라의 청을 거절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관중은 그토록 나를 생각하고 있단 말이오”
“죽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관중이 그러한 것은 돌아가신 선군(先君)을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황송하오나 상감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관중은 상감보다 규와의 관계가 더 친밀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규를 위해서 죽지 않겠다고 했으니 상감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감께서 진실로 나라의 안태를 위하신다면 바로 관중을 부르셔야 합니다.“
환공은 신속하게 관중의 압송(押送)을 노나라에 요구했다. 그러면서 노나라가 눈치채지 못하게 이렇게 명분을 달았다.
“지금 귀국에 망명하고 있는 관중과 소홀 두 사람은 우리 제나라의 역적입니다. 즉시 신병을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않다면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귀하도 역적을 편드는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장이 난처한 노나라 장공은 압송하기 위해 두 사람을 체포했다. 관중이 소홀에게 무섭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죽음은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으니 무섭니 않네.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것은 조국의 장래를 보고싶어서였네. 이제 우리나라는 안정을 되찾았고 우리는 좌상(左相),우상(右相)으로 영접을 받게 될 걸세.
그러나 주군을 죽인 상대의 신하가 된다는 것은 나로서는 할 일이 아니네. 자네는 살아서 제나라를 위해 일하게. 나는 죽음을 택하겠네. 대국의 재상으로 부름 받은 것을 알면서도 죽음을 택한다면 세상에서는 주군 규공자께서는 죽음으로 따르는 신하를 가졌다고 칭송할 것일세. 자네가 살아남아서 제나라의 패업을 이룬다면 세상은 나라를 위하여 살아남은 신하를 가졌다하여 역시 규를 칭찬할 걸세. 나를 죽어서 의를 지키겠으니 자네는 살아서 명성을 떨치도록 하게. 명성을 떨치기 위해서는 살아 남아야하고 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죽을 수밖에 없네. 규공자를 위해서 서로 어울리는 길을 택하지 않으면 안되네.“
이 말을 남기고 국경을 넘자 소홀은 스스로 자기 목을 쳐서 죽었으며, 관중은 제나라로 돌아왔다. 당시 식자(識字)들은 이와 같이 평가했다.
“소홀이 죽음을 택한 것은 살아남은 것보다 훌륭하고, 관중이 살아남은 것은 죽음보다 훌륭하다”
관포지교의 유래는 이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고 젊은 시절 관중이 전쟁터에서 도망하고, 장사의 이익을 더 챙긴 일들로 구성되어 있다.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낳아 준 분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 이다.』"
(生我者父母 知我 者鮑叔也)
참된 우정을 얘기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고사성어지만 그와 반대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친구를 『주육붕우(酒肉朋友)』라 하는데 “술자리에서 사귄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아직 많은 권력을 가지지 못한 상태의 관중과 관포지교의 유래에 관한 과정을 살펴봤다면 지금부터는 권력을 가지게 되는 과정과 관중의 정치역량에 대해서 살펴본다.
도량이 넓고 식견이 높은 환공은 신뢰하는 포숙아의 진언을 받아들여 관중을 대부(大夫)로 중용(重用)하고 정사를 맡겼다. 이윽고 재상이 된 관중은 과연 대 정치가다운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안다 [倉弟實則 知禮節]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안다 [衣食足則知榮辱]
고 한 관중의 유명한 정치철학이 말해 주듯, 그는 국민 경제의 안정에 입각한 덕본주의(德本主義)의 선정을 베풀어 마침내 환공으로 하여금 춘추(春秋)의 첫 패자로 군림케 하였다.
이 같은 정치적인 성공은 환공의 관용과 관중의 재능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이긴 하지만 그 출발점은 역시 관중에 대한 포숙아의 변함 없는 우정에 있었다. 관중의 소년시절은 관포지교의 고사이외에는 별로 확인되는 것이 없으나 권력을 잡은 후의 40여년 동안 환공을 보좌하여 제나라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당시는 4백여년 동안 중원에 군림하던 주(周)왕실이 그 힘을 잃어 군웅할거(群雄割據)시대에 접어든 상태에 있었다.
환공이 군주가 된지 7년만에 관중의 도움으로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주재하는 패자(覇者)의 자리를 확보하였다. 패자란 그 당시 명목만 남아있던 주왕실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제후들을 통제하는 맹주(盟主)를 말하는 것이다.
백성을 가르치는 것을 옛날에는 목민(牧民)이라 했는데 어리석은 백성은 동물들과 같기 때문에 목축(牧畜)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인 목민이라는 말을 쓰게된 것이다.
지난번 내가 다산(茶山)정약용과의 대화에서 언급한바있는 그 말이다. 아무튼 관중은 백성을 훌륭히 사육(?)하는 것이 통치자의 의무라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활을 보증해주어야 하며 또 법률에 의한 규제와 억압이 있어야한다 생각했고, 이는 훗날 법가사상의 원천을 제공하였다.
하지만 그의 법은 법가들의 그 법과 사용방법에서 많은 차이가 있는 베품이 있는 법이었으며 가혹한 통제수단 만으로서의 법은 아니었다.
관중이 나이 들어 병석에 눕자 혹시 불행한 일이 생기면 대비하고자 환공이 찾아가서 후임자로서 포숙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관중은
“포숙은 군자입니다. 그는 천승(千乘)대국일지라도 정당하게 주는 것이 아니라면 결코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정사를 맡기는 것은 적당치 않습니다.
그 성격이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는 정도가 지나칩니다. 그래서 한가지 악을 보면 평생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좋겠소?”
“습붕(隰朋)이 좋겠습니다. 습붕은 옛 성인의 선행가언(善行嘉言)을 많이 기억하고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덕을 남에게 주는 것을 인(仁)이라고 하고, 재물을 남에게 주는 것을 양(良)이라고 한다고 소신은 들었습니다.
선을 남과 다투어 이기는 사람은 사람을 심복(心服)시키지 못합니다. 선으로 남을 키워주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남을 심복 시킬 수 있는 법입니다. 언제나 관대하고 대범해서 나라에서는 정치에의 잔일에 관여하지 아니하고 집에서도 잔일에 참견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습붕일 것입니다.
또 습붕은 집에 있으면서도 정부를 잊지 않고 정부에 있으면서 그 집을 잊지 않고 그러면서도 그 일신(一身)도 잊지 않는 사람입니다.
제나라 화폐를 써서 망가진 지붕 50채를 고쳐주었건만 그 사람들은 그것이 습붕의 덕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습붕이야말로 큰 인인(仁人)이라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관중의 인사원칙을 엿볼 수 있다. 적재적소를 찾는 그의 현명함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위정자(爲政者)는 세세한 일에까지 관여하지 말아야하고 대범하여야하며 포용력이 있어야하며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위해서는 변화와 상황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의 능력을 가져야한다는 관중의 주장이다. 단순히 우정만을 생각한다면 포숙아를 버릴 수는 것이고 야박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관중은 후세에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된다. 훗날 유학자들과 제자백가들로부터 이군(二君)을 섬긴 부분을 제일 많이 질타하였으며, 특히 유가로부터의 비난은 관자가 설명하는 패도(覇道)가 유가가 주장하는 인(仁)과 왕도(王道)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니 당연하고 또 관자의 기저를 이루는 것은 부국강병책이며 물질 우선의 사상이니 유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불인(不仁)의 서(書)』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는 한편으로 전쟁없이 패권을 잡은 그의 정치능력을 높이 칭송한바 있다. 다만 예(禮)를 모르는 사람이라 언급하였다.
출처:http://blog.daum.net/cheongpa580601
첫댓글 좋은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