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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7편의 다윗 시에 예언되고 있는 복
시편 137편 / 1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5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6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7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8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9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2014년 12월 31일 밤, 서울 종로의 보신각을 찾아 2015년 1월 1일 신년이 시작되는 첫 시간의 타종을 듣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신년을 맞이하면서 일출 광경이 유명하다는 곳은 각 지역의 먼거리를 마다하고 이곳을 찾아 소원을 빌며 한 해를 기원하는 사람들로 북적였습니다. 이들이 타종을 듣고 일출을 보며 이런 저런 각기 가진 다양한 소망은 한 가지로 집약됩니다. 그것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행복이 주제가 되는 몇 개의 강의를 동영상을 통해 들어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공통된 것은 사람을 웃게 하는 것이요, 웃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보이스컨설팅의 김창욱, 웃음치료사 이요셉 등은“일단 웃어라, 이왕이면 웃어라, 웃되 길게 웃어라”에 강의의 초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공통점은 행복한 사람이 웃는 게 아니라, 웃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에서였습니다. 웃으면 생각이 바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세월이 한참 되었을 때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그때 목사님 한 분이 설교지론을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는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온 교인들에게 두 가지 중에 하나를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는, 교인을 웃게 하는 설교를 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렇지 않으면 교인을 울게 하는 설교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이 설교를 들은 내용을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웃으며 집으로 돌아가게 하든지, 아니면 설교를 들은 교인이 가슴 저려하며 눈물 적시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든지 하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웃고 울며 돌아간 교인은 그 다음 주일에도 교회에 나온다면서 말입니다. 만일에 웃는 설교나 우는 설교가 없으면, 설교를 들은 교인이 아무런 감흥도 없이, 그래서 교회를 찾아온 아무런 행복감이 없이 돌아가기에 그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올 기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로부터 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부흥이 잘 안 되는 것은 그렇게 웃게 하거나 울리는 설교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설교는 과연 그러한 것인지요. 목사가 전하고 성도들이 그 말씀을 듣는 설교는 그렇게 웃기고 울리는 것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인가요. 설교하는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행복 지수를 생각하며,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이 기대하고 있는 행복 수치를 올려줄 수 있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며, 웃겼다 울렸다 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 그것을 이용하여서 웃기는 설교를 하고 울리는 설교를 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사용되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이러한 설교를 하지 못하면 성도들을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가요.
하나님을 우리가 듣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어떤 것인지요. 만일에 말입니다. 성도들이 기대하는 높아지고 싶어 하는 행복 수치가 웃음치료사 등이 말하는 것에서라고 하면 성경을 읽으면 그렇게 해서 웃을 일이 결코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생각 없이 단지 박수를 크게 치게 하며 입을 크게 벌려 하하하 라고 소리치며 웃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이런 이야기를 듣고자 하다면 요즘의 복지문화센터나 기타의 자리를 찾아 가서 웃음치료사가 말하여 하게 하는 대로 따라서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면 되지요. 그리고 눈물 쏙 빠지게 한바탕 실컷 웃은데 따라 마음이 시원하여져서 느낀 행복감을 갖고 집에 돌아오면 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 말씀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웃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진지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몰입 됩니다. 시편 137장에서 보겠습니다. 이 시편이 우리에게 해 주시고 있는 말씀의 내용이 무엇인데요. 시편 137장에서 보는 시는 이스라엘 왕국의 초기 시대인 다윗왕(B.C. 1040-970)이 지은 것인데, 먼 훗날에 있을 바벨론 강가에 앉아서 시온<이스라엘>을 생각하며 울음에 있게 될 것에 있을 이스라엘<남왕국 유다>의 형편을 내다보고 이를 예언하는 것에서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통치하던 시대는 주전 1010-970 때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울 때는 바벨론 포로 시기인 주전 606-536년입니다. 그러니까 404-364년 후에 있을 일입니다. 그러면 말이죠. 앞으로 먼 장래에 있게 되는 70년간을 겪게 되는 바벨론 포로시기가 지나서야 있을 일을 내다봄에 있는 예언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그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먼 이방 땅 바벨론에 끌려가 종살이를 하는 것에서 시온을 돌아보게 될 것에 대한 것입니다.
시편 137편은 1-3절에서 그렇게 바벨론 강가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는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는 말입니다. 그들은 강기슭 버드나무 가지 위에 수금을 걸어놓고서는 자신들을 사로잡아온 자들이 자기들을 위해 신명나는 노래를 부르라고 하면서, 그 노래로 자기들을 위해 시온 노래를 한 가락 읊으라는 조롱을 받으며 그 수치에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4절에서는 말합니다.“우리가 어찌 이방 땅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노래를 이들을 위해서 부를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어찌 한바탕 웃으면서 주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를 시온을 모욕하며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위해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요. 이 시편 137장을 설교하면서, 이것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웃으라 할 수 있고,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듣는지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강가에서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지 아십니까? 탄식하며 비탄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원수들의 압제를 받는 처지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에서 떠나 있는 죄에 있어온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말이죠.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엔 웃음이 사라져 다시는 웃을 일이 없는 것인지요. 웃음치료사가 하게 하는데 따라 손뼉 치며 크게 소리 내어 웃는 아무런 내용도 뜻도 없이 그저 소리 내어 웃는 웃음으로써 몸에서 엔돌핀이 나오게 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그런 만들어 내는 웃음에서가 아니라, 사람이 행복하게 되는 요건이 갖추어져 있어 행복하여 기쁨에 있는 것에서 웃는 웃음이 있습니다. 다윗은 바벨론에 포로 되어 있는 탄식 속에서 이방 땅에서 여호와께 드리는 노래를 부를 일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있는 기쁨의 웃음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시온의 예루살렘을 떠올리며 그 생각에 잠겨 있는 것에서 갖는 것입니다. 시온의 예루살렘을 잊고 있다면 바벨론 강가에 앉아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어놓고 음률을 타며 노래를 부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입에 있는 것이 낫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비록 바벨론에 포로 되어 종 된 자로 있는 비탄에 있지만, 그래서 속에서 나오는 것은 탄식뿐이지만, 시온의 예루살렘을 생각하는 이스라엘의 가슴은 벅찬 기쁨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던 날 그 광경을 목격하는 에돔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저주하기를“바닥에 내동댕이쳐 찢어버리라”라고 한 말을 하나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며,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예루살렘에게 저지른 짓을 잘 알고 계시기에, 그들이 한 짓 그대로 갚아 그들과 그들의 어린 것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붙잡아다가 바닥에 내 동댕이치고 바위 위에 매어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137편은 다윗이 그 일을 할 자는 복되다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한 일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대하며 이곳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베푸시는 복을 받을 것이며, 이로 인해서 온 세상 또한 하나님에게 나아와 하나님을 바라보는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예언함에 있습니다. 이 복을 모르면 웃으며 기뻐할 일이 없죠. 그런 것인데 자신들에게 일어날 이 복을 훤히 알고 이미 내다보고 있기에 자신들이 탄식하며 비탄에 빠져 있는 날이 오래 가지 않고 곧 끝나고 새 날을 맞이할 기쁨에서 웃음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으로 첫째를 건강이라고 꼽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일자리를 갖고 있는 것이며, 동반자(케어)가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웃음치료사들이 사람들에게서 웃음을 만들어내서라도 웃게 하며 행복의 기쁨에 있게 하는 것은 그 웃음이 웃는 자를 행복의 첫째 조건인 건강한 몸으로 있게 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웃음을 만들어내서라도 웃는 자로 있다면 그는 그 노력으로 몸이 건강하며 행복에 있는 값진 가치를 창출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베푸시는 속죄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행복의 기쁨에서 웃는 웃음은 몸이 건강할 때만 아니라 몸이 병약할 때도 부유하여 잘 살 때만 아니라 가난하여 궁핍할 때에도 평탄한 세월을 살 때만 아니라 역경의 세월을 살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박수 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하하호호 하며 입을 벌려 크게 웃어서 웃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고 그것을 바라봄에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는 것에서 가져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 지수는 우리가 얼마나 웃으며 기뻐하느냐에 의해서 그 수치가 올라가고 내려가며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 지수는 수치로 말해지지 않습니다. 수치만큼 행복의 정도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 지수는 수치가 아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장 존귀함을 아는 믿음에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고, 그렇게 바라본 그대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영원히 있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또한 우리를 살리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장 존귀한 것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사람들이 행복의 수치로 삼는 모든 것을 이런저런 사유로 다 잃어 도무지 행복할 수 없어 기쁨의 웃음을 갖지 못하고 비통한 탄식 속에서 세월을 보내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에서도, 오늘날 사람들이 행복 지수의 요인으로 꼽는 건강, 일자리, 동반자<케어> 중 그 어느 하나도 갖추고 있지 못하거나 갖추고 있어도 온전하게 제대로 된 것이 아니어서 늘 힘겨움으로 기뻐하여 웃을 일에 있지 못해도 산상설교의 팔복에서“너희는 참으로 복 있다/행복하다”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언이 성취되는 행복 속에 있습니다.“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예수님이 설명해 주신 말씀 따라 소위 초가삼간에 살아도 행복하여 기쁨의 웃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죠. 건강을 잃어버리면 같이 잃어버려지는 게 아닙니다. 일자리를 갖지 못하여 힘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이고 뭐고 만사가 다 귀찮아져 생각조차 갖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반자<케어>가 없어 돌봄을 받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에서도 마음이 멀어지고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예언에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떠나와 있어 바벨론 강가에 앉아 탄식하며 비통해하는 상황에서도 예루살렘을 생각하고 그곳에서의 일을 기억할 때 그들의 마음, 그들의 가슴은 벅찬 기쁨으로 뛰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기뻐함에 있는 것은 자신들이 신원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자신들이 있어야 할 곳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실 그분은 참으로 자신들의 복이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언하는 것을 통해 그것을 보는 다윗은 이스라엘에 앞서 벅찬 기쁨을 시로 나타냈습니다.
우리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에서 한 말인“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한 말을 듣습니다.“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요. 우리는 장차 우리 앞에 펼쳐질 일을 전혀 모르고, 그렇게 아무 것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말이죠. 주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 날이 이르면 우리가 죽어 있든지 또는 살아 있든지 간에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나라에서 살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알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이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요 또한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는 부활을 하신 것임을 알고서 그분을 믿는 믿음에 의해서 흑암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뻐하여 웃을 일이 전혀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기뻐하여 웃을 이유를 갖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쉬지 않고 하나님께 구할 것을 가지고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주신 구원의 은혜와 평강에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의 처지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느끼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는“참으로 복 있다”는, 참으로 복 있는 행복한 자이니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