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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 곳에 기상대가 있을까? 추풍령기상대를 찾아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였던 시절, 그네들은 당시 꽤나 오지였을 추풍령에 왜 기상대를 세웠을까? 추풍령기상대는 1935년 9월 1일 ‘인천측후소 추풍령지소’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해방 당시 남한에 있던 14개의 기상대(당시 측후소) 중 섬인 울릉도를 제외하고 추풍령만이 대도시가 아닌 산간벽지에 위치하였다. 왜 그랬을까? 기상학적으로 중요하니 그랬을 것이라는 추측은 너무나 당연하기에 재미가 없다. 이 곳의 역사를 살펴보면 1935년 창설된 이후 1945년 9월 국립중앙관상대 추풍령측후소로 명칭이 바뀌었고 1970년에 관할이 부산지대로 바뀌어 1985년 서울, 1987년부터 대전에서 관할해 오늘에 이른다. 1905년에 경부선이 깔리고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이 지역을 통과하였으니 교통 하나는 편리하다. 추풍령은 조선시대에도 교통의 요충지여서 관리들의 숙소인 ‘황금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의 행정구역 명칭이 황금소면이었다가 황금면으로 다시 1991년에 이르러 추풍령면으로 바뀌었다. 충남․, 전북, 전남 3도가 이웃한다하여 삼도봉(1,181m)과 민주지산(1,241m)과 같은 높은 봉우리 사이사이로 비교적 낮은 계곡을 따라 도로가 연결되어 남에서 북으로 올라갈 때 동서로 가로질러 뻗쳐있는 소백산맥을 넘는 고개가 바로 추풍령이다. 거기에 추풍령기상대(250m)가 있다. 추풍령기상대에 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현지를 방문했다. 박규만 대장은 이를 해결해준다며 이 곳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강태영(68세)씨를 찾았다. 강태영 씨는 추풍령기상대 부근의 마을에서 성장하여 전쟁중인 1951년 국립중앙관상대 기상기술원양성소 4기로 부산에서 6개월 교육을 마치고 추풍령에 처음 부임한 후 1994년 안동기상대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했다. 지금은 고향에서 포도밭을 가꾸며 노년을 건강하게 보내고 있다. 그는 1951~1962년, 1967~1978년, 1980~1985년 간 모두 27년을 추풍령기상대에서 근무하였으며 이 중 2번은 기관장을 역임했다. 일본은 당초 추풍령에 항공관측을 목적으로 기상관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출발한 프로펠러 비행기는 요즈음처럼 계기 비행이 없었으니 조종사는 육안으로 경부선 철도를 따라 비행하여 서울도 가고 만주로도 갔다. 그런데 이 부근에서 비행기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비행기가 계곡을 따라 날아가다 이 지역의 산을 넘어야 하는 데 항상 이 부근의 기상이 불안정하기 때문이었다. 비행기는 바로 추풍령기상대 머리위로 날아간다. 기상대 바로 앞산인 선계산에 항공표시등이 있어 비행기의 등대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추풍령기상대는 항공기상을 관측하고 비행기의 이동 상황을 보고하였다고 한다. 이 부근의 기상이 일본에게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얼마 후 종관기상관측과 지진관측이 추가되었다. 강태영 씨가 증언하는 일제시대 때 추풍령기상대 당시 분위기는 군사보호구역으로 군의 경비가 매우 삼엄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당시 기상대 직원을 우대하였다. 은행원, 교사, 도청직원 보다 봉급이 많았고 년 400%의 상여금이 있어 좋은 직장으로 인식되었다. 한국인 등용의 문은 넓게 개방되지 않아 한국인은 드물고 주로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기술직을 우대하였으므로 소장의 직급이 높아 군수가 부임해 오면 이 곳을 인사차 반드시 들렀다고 전한다. 추풍령기상대 가까운 거리에 경부선 기차역이 있다. 계속 오르막인 고개를 넘기 위해 증기기관차가 석탄과 물을 보충하기 위해 이 역에 정차하였으니 부근이 꽤나 번성하였다. 더욱이 추풍령 부근에 일본 황가의 휴양지가 있어 이동인구가 많았다고 한다. 주민은 별로 많지 않았으나 육상과 항공 교통,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다. 또한 당시 기상관서 배치 구도 상 한반도 내륙의 중심이기도 하였다. 기상대급이었던 이곳은 1985년 기상관측소로 기관의 위상이 낮아지는 아픔을 겪었다가 15년 뒤인 올해 다시 기상대로 격상되었다. 이 곳의 지리적인 여건이 충북, 충남, 경북, 경남 4개 도의 변방에 해당한다. 행정구역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중부와 남부지방을 가르는 소백산맥이 동서로 뻗어 있어 산악효과를 유발하여 기류변화에 영향을 준다. 수치예보와 같은 첨단 예보기술의 중요한 성공요소는 이러한 지역의 정확한 관측자료이다. 산맥을 넘나들며 달라지는 변수의 값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이러한 지점에 추풍령기상대가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이곳을 점령하여 현재 건물이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전쟁 중 포격으로 청사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현관 바닥에 남아있는 그 때의 대포탄환 자국은 올해 청사를 보수하면서 없앴다고 한다. 추풍령기상대 청사 문제는 전 직원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숙원사업이다. 1936년에 지어진 건물이므로 공간이 좁다. 최근 늘어난 첨단 기능의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에는 너무 좁아 보인다. 올 7월에 부임한 박규만 대장은 청사신축이 내년도 주요사업계획이라며 적극 추진하겠다고 강조하였다. 이 곳의 정원은 7명이다. 대장 외에 김진형, 장건수, 이봉수, 오숙영, 한민택, 엄순용이 근무하고 있다. 요즈음 기상대급 야간 근무는 2명으로 이루어지니 적은 인원 때문에 4명을 2조로 나누어 2교대 근무를 한다. 정원 증원 역시 해결되어야 할 숙원사업이다. 이 곳의 예보관할 구역은 충북남부에 해당하는 영동, 옥천지방이다. 이 지역에서 전국 포도 수확량의 10%가 생산된다. 추풍령기상대는 올해 포도작목반에 기상정보를 특별히 지원하여 고객을 감동시켰다. 이 곳에 역사가 깊은 기상대가 있어서인지 몇 가구 되지 않는 부근 마을이 고향인 기상청 직원이 많은 편이다. 퇴직한 강태영씨와 더불어 이상근, 정창영, 김진형씨 등이 현직에 있다. 눈앞의 선계산(720m) 중턱에 구름이 걸려있다. 바로 저 구름이 ‘구름도 울고 넘는다’는 추풍령 고개의 그 구름인가보다. 한반도 내륙의 한 가운데 있는 추풍령기상대. 비록 사람이 많이 살지 않은 곳에 있지만 그 중요성은 역사가 잘 말해주고 있었다.
(글 : 김승배, 2000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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