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8일은 중국 송나라 때 시가문학, 명필로 그림 잘 그리는
시서화 두루 통한, 만능예술가라 할 소동파 이야기를 골라봤습니다.
무슨 특별한 연고를 가지고 소동파를 끌어 낸 것은 아니었구요.
다만 일세의 천재라 할 소동파의 오만과
그 오만으로부터 일깨운 일화를 통해서
우리가 개개인 나름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또는 겸손한 것인지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한 시대를 휘젓다 보니 심심해진 소동파가
산중에 있는 선사들과 장난이라도 치고 싶었던 그 오만함에서
그 산을 내려오면서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를 깨우침으 소리로
그 산을 다시 보면서 진리가 어찌 살아 눈 앞에 펼쳐 지는지를
즐겁게 노래한 그 부분이 이쁜 곳이 있어 이 이야기를 잡아 봤습니다.
그리고 물어 봅니다.
천하의 인물을 잴 수 있노라며 달려 든 소동파 오만을 한마디로
일깨워 준 형주 땅 옥천사 승호선사가 전해 준 한마디
이땅엔 그 무엇으로도 잴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별만치 많더란 거.
그래서 개미새끼 한 마리 앞에서도 오만 떨지 말라는 거.
과연 우리는 한 순간만이라도 하루살이가 날고자 일으키는 파장에
마음 흔들려 본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누군가는 우리더러 하루살이라 하는데, 그래서 쉽게 잡을 것 같은
하루살이 일생도 우린 잡지 못하고, 하루살이 몸 무게도 잴 수 없겠지요.
누가 하루살이 그 치열한 삶을 재 봤다 하던가요?
잠시 오만한 소동파와 만나고, 자연의 일부인 채로 하산한 동파를 만나보시죠.
완성418월.hwp
♣ 고전코너 ‘신 명심보감 ---소동파가 잴 수 없었던 것은? ’
놀보 이 시간은 마음을 밝혀줄 보배로운 거울같은 ‘명심보감’을
새롭게 풀어보는 ‘신 명심보감’ 자리입니다.
초란 고전 속에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며 마음에 양식을 쌓아보는
‘신 명심보감!’ 오늘은 고전 속에 어떤 구절인가요?
놀보 송나라 때 소동파에 얽힌 일화를 잠시 돌아볼까 합니다.
초란 소동파라면 우리음악 속에도 ‘적벽부’ 소리가 대대로
전해 올 정도로 이름난 문장가 아닌가요?
놀보 우리 가사문학 곳곳에 소동파의 시가 인용돼 있고
판소리 사설에도 소동파가 남긴 멋진 문장이 새겨져
있는데요. 꽤 오만했다고 합니다.
초란 재주가 넘치는 분이라서 나 보다 잘난 사람 누구냐?
그랬던 모양이군요.
놀보 원래 재주가 넘치는 인물 중에 경박하고 오만한 사람이
있거든요. 시에 명필에 그림 잘 그리고 문장 출중하니
이 시대에 나를 넘을 사람 누구여? 했겠지요. 근데
그런 사람이 또 임자를 만나거든요.
초란 오만한 소동파를 잡은 사람이 등장했군요. 누군데요?
놀보 형주 땅 옥천사에 승호선사를 찾아가서 인사를 하는데
소동파가 하는 말이 가관이었답니다.
소동파 (여=오만) 나는 칭가라고 합니다.
선사 (남-담박) 칭가라니 어떤 칭가 이신지요?
소동파 세상에 재주를 재어 보는 저울을 가진지라 저울칭자
칭가라고 하지요.
선사 (비명처럼) 어헉! 지금 이 소리는 몇근이나 되던가요?
소동파 (당황) 커헉, 어허허험.
선사 (웃으며) 저울을 가진 분이 어찌 망설이십니까. 몇근이나 됩니까?
소동파 (탄식) 허허, 이제 알것 같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요.
놀보 이 짤막한 이야기 속에 우리를 일깨운 소리가 들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이건 내가 최고야. 어디 나와 봐
나보다 잘난 사람 누구야. 그런 마음을 가졌다면
도대체 그 잘난 게 몇근이나 나가는지 재어는 봤더냐구요.
초란 그럼 그 오만했던 소동파가 승호선사에게 마음공부 하고서
달라진 게 있긴 있었나요?
놀보 암은요. 그 산중에서 자신과 세상을 한꺼번에 보면서 결국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내려 왔다고 합니다.
(낭송) 계곡의 물소리는 끝없는 일깨움의 설법이요
산빛은 그대로 깨친 자의 모습이구나.
어젯밤 바람 속에 깨달은 팔만사천의 법문을
어찌하면 그대에게 설명해 전해 줄 수 있으랴.
초란 달라지긴 했군요. 우리가 보통 계곡물 소리 앞에서는
어허. 시원하다. 참 맑기도 하지. 그 정도로 머물러 있는데
소동파는 계곡물 소리가 일깨움의 설법으로 들렸다.
놀보 산에 나무며 바위며 흐르는 바람까지도
그냥 그대로 다 자신까지 한몸처럼 느껴졌던거지요.
누굴 따로 편 가르고 잘나고 못나고도 없이 있는 그대로말이죠
초란 봄꽃 앞에서 그냥 ‘이쁘다 곱다 화사하다’ 그런 거 보다.
‘한송이 꽃 앞에 세상이 다 이쁘더라’ 해주는 마음.
놀보 ‘종이를 줍던 할머니를 거들 때 잠깐 살포롬 흐르는 웃음에
세상이 다 행복할 수도 있다!‘
(성독조)♬ 계성편시 장광설에 산색기비 청정신이오
(溪聲便是長廣舌 山色豈非淸淨身)
초란 이 봄날 누군가 외로운 손을 잡을 수 있는 정을 과연 잴수 있을까요?
오늘 ‘신 명심보감’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다음 카페’ ‘우사모’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놀보 좋은 자료나 담론은 ‘우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에는 긴소리 쉰소리 할게 뭐 있을까 싶다.
참고로 소동파의 시를 올리면서 그가 자칭 세상의 인물을 재는
'칭稱'가라 했던 동파와 산을 내려 오면서 그때 일깨운 걸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길이 없음을 탄식했던 그 마음을 한번
더듬어 봤으면 싶다. 그건 동파의 마음에만 있는게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에 있는건데 꽁꽁 묶여 두고 잊었거나
거적데기 처럼 헐러덩하니 덮어두고 돌아보지도 않았거나
있다고 해도 그래서 달라질 건 뭐고. 팔자 고칠건 뭔데? 비웃고 있거나 할 것이니
그래서 산을 만나 산이 되는 자가 있고, 꼭대기에서 소리나 질러대며
정복했노라 헛소리 하는 자도 있는 일 아닌가?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오도송(悟道頌)
溪聲便是長廣舌 계곡의 물소리는 끝없는 일깨움의 설법이요
山色豈非淸淨身 산 산 빛깔 그대로 깨친 자 모습이구나
夜來八萬四千偈 어젯 밤 바람 속에 내게 온 팔만사천 법문들
他日如何擧似人 어찌하면 그대에게 풀어 건넬 수 있을까?
첫댓글 참, 고수들 끼리 지대로 만났군요.
일세를 풍미하던 문장가 소동파, 사통팔달로 시, 서, 화, 문장에 당할 자가 없었으니
오만할 만도 하겠지만 또, 미처 가늠치 못했던 부분은 겸허히 받아서 채우니
승호선사나, 소동파 참 시대를 초월한 수승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이란 생각입니다.
한데, 이 보라돌이는 산에 오르면 그냥, 산바람이나 쐬고 꽃을 보면 그냥 예쁘다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울로 잴수도 없을 겁니다. 그냥 똥 무게만 ~킬로그램?
같은 사물을 봐도 시선과 사고을 달리하는 두뇌가 부럽긴합니다.. 시서화에 능한 만능 예술가가 계곡에 물소리가 끝없는 일깨움에 설법이라 했으니 소동파는 어딜가나 배움에 길이 열렸을것 같네요. 가진자가 겸손하기 까지... 평인은 부러울 따름입니다^^
동양의 문호소동파 저는 가차없이 십여년 전에 어느 노인 분과 대화에서 한 말입니다..
적벽부를 읽어보면..유선에 경지.글이 비단곱고 부드럽고 고급스럽다 ..무식한 저는 그리 느낌니다..
타에 추종을 불허하는 문장가였으나..적벽부를 지을시에 탈고 원고가 서랍에 수북 수북 했다하지요?..
몇 년전에 고향에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하는 데 축시라고 ..이것 저것 짜집기해서 측평은 엉터리이고 운자만 맞추어서
갑자기 읊으면서..제가 한다는 소리가 소동파에 적벽부 탈고를 이야기하며..하물며..저같은 무지랭이 소인배의 글이 오죽 하겠습니까?..했었지요.글이란 남이 안했던 말을 해야 된다고 합니다...그리 배웠지요..
시해운주 두꺼운 책..사계의 구름처럼.수만의 조화가 들어 있는데..세월만 ...단문하니..
딱 배고 누우면 알맞은 높이의 책..운자에 재미를 붙이지지 마시요..
긴글을 오래 오래 읽으면 자연히 운자는 나오는 법입니다..인간파철 저에게 오래 전에 스승께서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