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오랜만이다. 또 나갔다 왔냐?".
매년 가을이면 '에이펙'과 '아세안+3'가 열린다. 2년에 한번씩 '아셈'도 개최된다. 외국에 한번 다녀오면 친구,친지들은 "또 갔다왔냐?"고 묻는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다시 만나면 "야 얼마 전에 갔다와 놓고 또 간다며? 아셈은 뭐고 에이펙은 또 뭐냐"고 한다.
'ASEM'이 뭔지, 'APEC'이 뭔지를 대략이라도 알고 계시는지? 만약 그렇다면 스스로 국제감각이 상당하다고 평가해도 괜찮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 기자도 청와대에 출입하기 전까지는 '아셈'이 뭔지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우리나라가 국제무대에서 참가하고 있는 정상회의는 크게 세가지다.
첫째는 에이펙(APEC)이다. '아시아 태평양 경제공동체 정상회의'다. 한,중,일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이 주요 멤버이고 여기에 미국,러시아등이 참여하고 있다. 태평양을 매개로 해서 미국과 아시아권이 협력을 도모하는 회의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아셈(ASEM)이다.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다. 한,중,일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국가들과 EU(유럽연합) 중심의 유럽 국가들이 만든 모임이다. 2년마다 한번씩 아시아와 유럽에서 번갈아 열리는데 지난 2천년 3차 회의는 서울에서 열렸다.
셋째는 아세안+3(아세안 플러스 쓰리)이다. 이 모임은 아세안, 즉 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이 자기들끼리 모임을 가져 오다가 지평을 넓히는 차원에서 동북아시아 3국, 즉 한,중,일을 초청하는 형태로 확대됐다. 순수하게 아시아 국가들만 모이는 유일한 협력체여서 이 모임을 아시아 정상회의라는 형태로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기자는 뒤늦게야 이런 국제협력체들을 취재할 기회를 가진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느끼게 됐다. 이런 회의들이 자꾸 열리는 것은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국가간, 지역간 협력의 필요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미 유럽은 EU를 통해 화폐통합까지 이룬 상태이다. 북중미 국가들도 NAFTA(북미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자유무역을 하고 있다. 이제는 자국 경제권만으로는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없고 경제블럭을 만들어야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판단인 것이다.
물론 에이펙이나 아셈, 아세안+3 같은 협력체들은 아직까지는 그야말로 협력체 수준이다. 정상회의에서의 결정이 구속력을 갖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서로 덕담 수준의 논의만 진행되다 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혹자는 정상들의 사교장에 불과하다고 혹평하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니다. 세상에 미국, 중국, 일본같은 나라의 정상들이 얼마나 바쁜 사람들인가. 그들이 매년 열리는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할 때는 그만한 필요성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아셈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아셈은 미국이 참여하지 않는 몇 안되는 국제 정상회의이다. 이번 아셈에서는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이라크 공격준비를 겨냥해 '테러에 대한 제재는 유엔의 헌장에 따라야 한다'는 폐막선언을 채택했다. 드러내 놓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견제구를 던진 셈이다. 기회만 있으면 2루(이라크)로 뛰려고 호시탐탐하던 부시의 입장에서는 예상치 않았던 아셈의 견제구에 움찔했을 것이다. 물론 그래도 다시 뛰려고는 하겠지만 말이다.
[2002 아셈 개회식에 참석한 아시아,유럽 정상들]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4년전 외환위기가 한참일 때 영국에서 열렸던 아셈에서 한국등 아시아 국가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자는 논의가 이뤄졌었다. 이는 유럽 기업들의 한국 투자 확대로 이어져 외환위기 극복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물론 유럽 기업들이 돈도 안되는데 아셈이 권유한다고 한국에 투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 기업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한국시장의 상품성과 투자가치를 아셈 차원에서 환기시켜주고 촉진시켜준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2년전 가을에 열린 서울 아셈에서는 6.15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그리고 김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분위기를 타고 EU 국가들이 대거 북한과의 수교를 결정했다. 이는 다음해 EU 정상국 정상인 페르손 스웨덴 총리의 방북으로 이어졌고 북한의 개방을 촉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올해 열린 덴마크 아셈에서는 한반도 문제가 중요한 의제로 다뤄졌다. 우리 측 한 외교당국자는 '이번 아셈은 한반도 문제 대책회의나 마찬가지였다' 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한반도 평화를 위한 코펜하겐 선언'이 채택됐고 북한의 개방 촉구와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아셈 차원에서 촉구했다. 이 역시 북한의 개방에 명분을 부여하고 앞으로 진행될 신의주 특구 개발등에서 유럽 기업들의 북한진출을 앞당기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한일 정상회담도 아셈 기간중 열려서 미국의 대북대화 재개를 촉구했다. 반드시 이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아셈이 끝난 직후 부시 대통령은 김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켈리 특사의 북한 파견을 통보했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아셈 기간중 미국이 한-일 정상회담과 아셈의 '테러 제재시 유엔헌장 준수' 선언에 상당히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얘기들이 들려오기도 했다.
이렇게 세계화 시대의 국제 정상회의는 정상들이 자국의 이익과 입장을 걸고 모여서 신경전을 벌이는 장이다. 어떤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이 산적한 국내현안은 외면하고 자꾸 외유(外遊)만 한다"고 근엄한 표정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무식의 소치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이제 동북아의 변방 국가가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이고 더구나 대외 무역과 투자로 벌어먹고 사는 나라이다. CEO한테 '자꾸 밖으로만 돌아다니지 말고 사장실 좀 지키고 앉아 있으라'고 해서야 되겠는가. 옛날만 해도 대통령이 외국 나가서 여유있게 구경도 하고 동포들 만나서 좋은 소리도 듣고 바람도 좀 쐬고 올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눈알이 핑핑 도는 세계화 시대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다. 제대로 된 나라 치고 정상들이 국제회의 끝난뒤 하루라도 더 머무르면서 머리 식히다 돌아갔다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회의만 끝나면 총알같이 전용기 타고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은 좀 딱딱한 얘기를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다음 칼럼에서는 '대통령 전용기'에 대해 써볼까 한다. 의외로 대통령 전용기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 것같아서다. 보안에 문제가 안되는 범위에서 여러분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겠다.
첫댓글 이글의 제목이 저의 궁금한 마음과 딱 일치 했는데 좋은걸 배웠습니다.. 김대통령이 아셈이네 에이펙이네 하는 곳에서 정상연설을 하신다고 했을때 그런가보다(흐~무식폭로)했는데 이제 학실히 알았습니다.
에이펙이던가 아시아+3이던가,,,김영삼이가 클린턴 옆에 앉아서 끝가지 개겨서(원래는 사진 촬영때문에 돌아가면서 앉는다합디다만) 왕따됐다고 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