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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수부대원들에게 맞은 공수부대 출신 반룡마을 통장
증언자 : 김현기(남)
생년월일 : 1949. 10. 11(당시 나이 31세)
직 업 : 회사원(현재 동일금속 생산과장)
조사일시 : 1989. 1
개 요
21일 오후 2시경에 공수들이 전남대학교 상대 뒤쪽에 있는 반룡마을로 쫓아왔다. 이때 두들겨맞고 병원에 옮겨진다.
여단장으로 알았던 전두환이가 대통령이 된다고?
1980년 당시 주조조합(주물공장)에 주사로 일하면서 20만 원 정도를 월급으로 받으며 살고 있었다. 반룡마을(전남대 뒤)에서는 통장을 맡은 만 31살의 노총각이었다.
1980년 전남대학교는 매일 소란스러웠다. 5월이 되면서부터 학생들의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학생들은 매일같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반룡마을로 찾아와 막걸리와 라면을 사먹었다. 학생들이 서럽게 데모 노래를 부르거나 정치 이야기로 날을 지새우곤 하는 것을 보았다. 더군다나 나는 반룡마을의 통장이었으므로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알고 있어야 했다.
4월쯤엔가. 학생들의 노랫소리에 주민들이 잠을 자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노랫 소리가 흘러나오는 곳으로 쫓아갔다.
"밤낮으로 떠들어대는 농악대 소리에, 노랫 소리에 이 동네 사람들이 잠을 못 자니까 제발 마음껏 떠들고 싶으면 농대 뒷산으로 올라가던지 상대 앞 노천극장에서 떠들어라. 왜 잠 못 자게 동네에서 떠드는가."
달래보기도 하고 나무라보기도 하며 사정했지만 그때뿐,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열기는 높아만 갔다.
5월 10일이 넘어가면서 전남대에서는 매일같이 데모를 했다. 밤이 되면 박관현이를 비롯해 학생회 간부들이 막걸리집에 라면을 먹으러 오곤 했다. 나는 학생들의 움직임에 관심도 생기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어서 자꾸 기웃거려보기도 하였다.
전남대 학생들은 필요한 것을 찾아서 반룡부락을 자주 찾아 오곤 했다. 그 무렵에도 덕석이 필요하다고 해서 빌려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항상 난폭해지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반룡마을의 어른들은 조금씩만 자제해 줄 것을 빌었다.
5월 그 무렵 고등학교 동창생들끼리 남해대교에 놀러 간 일이 있었다. 승용차 몇 대를 빌려타고 갔다. 돌아오는 승용차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가 나왔다. 시국이 시끄러워 하는 이야기들이었다.
"학생들의 데모가 더 심해지면 전두환이가 집권할 명목을 주는 게 될지도 몰라. 아무튼 어떻게 될지 걱정이야."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난 도대체 전두환이가 누굴까?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은 데, 내가 어디에서 전두환을 들었을까?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혼자 중얼거리며 생각했지만 누군지 알 수가 없었다. "전두환이가 누구야?" 하고 묻자, 한 친구가 "거 있잖아, 현재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있는 사람....." 난 그 때에야 비로소 전두환이가 누군지 떠올랐다.
나는 전두환이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1971년 3월에 일반하사로 입대하여 공수부대원으로 차출되었다. 이때까지도 우리 부대 여단장은 정병주 씨였다.
공수부대원으로 차출되어 1972년 3월에 한미 합동훈련에 참가하게 되었다. 훈련이 끝나고 1972년 11월 부대에 돌아와보니 전두환이가 공수부대 여단장 대령으로 와 있었다.
바로 그 여단장이었던 전두환과, 학생들이 "전두환이 물러가라 좋다 좋다" 하던 인물이 내 머리 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감히 대통령을?" 전두환이가 대통령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 한 일이라고 말했다. 난 적어도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5월 13일쯤 주변이 너무나 시끄러워 낚시를 가자고 했다. 반룡부락 선배들과 이웃집 아저씨들 몇 분이 함께 낚시를 갔다가 15일 돌아왔다. 이때에도 전남대에서는 매일 데모를 했다고 들었다.
나도 왕년엔 공수부대였다
5월 17일 오후쯤 반룡마을 동사무소에서 통장회의가 있었다. 18일 오전 10시 증심사에 모여 놀다가 점심을 먹자고 누군가 제의했다.
다음날 18일 오전 8시 30분 정도 되었다. 증심사로 가기 위해 전남대학교 정문으로 걸어나왔다. 전남대학교 종합운동장에서는 얼룩무늬 옷을 입은 공수들이 보이고 군 텐트가 처져 있었다. 내가 군대시절에 공수생활을 하고 진압을 나가본 경험도 있어서 금방 눈에 띄었다. 텐트 숫자만 보아도 텐트 하나에 공수가 몇 명이라는 것까지 알 수 있었으니까 난 아주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종합운동장에 쳐진 텐트를 보자 2개 대대 병력 정도 될 것 같았다.
전남대학교 정문에서는 공수대원 7, 8명이 길 양쪽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얼룩무늬의 점프복(공수들 복장을 군에서는 점프복이라 함)을 입고 M16총을 등에 가로로 메고 진압봉을 들고 있었다. 내가 정문을 걸어나올 때에는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고 공수들도 아무런 저지를 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증심사로 가는 도중 시내는 조용했고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공수들이나 전경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증심사에서 조금 놀다가 점심식사를 하고 약속이 있어 먼저 나왔다. 대성약국에 근무하는 친구를 찾아가기로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후 2시쯤 증심사에서 차를 타고 시내 쪽으로 오는데 노동청 앞을 조금 지나서 갑자기 버스가 멈추었다. 버스 운전사는 시위 때문에 도로가 막혀서 더 이상 갈 수가 없다며 모두 차에서 내리라고 하였다. 나는 남도예술회관 부근에서 차에서 내렸다. 하는 수 없이 걸어서 금남로로 올라가야 했다. 한일은행 사거리를 지나 구역 쪽으로 간 뒤 대성약국으로 가려고 올라가는 중이었다.
금남로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전경들도 시민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이 보였다. 전경들은 도청 쪽에 등을 지고 한일은행 쪽을 향해 있었다. 중앙극장 앞에서 방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도를 완전히 가로막고 다섯 줄이 넘게 겹겹이 서 있는 모습이었다. 광주일고 쪽에는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 일시에 돌진하여 돌을 던지고 도망을 갔다. 전경들은 학생들이 던진 돌을 방패로 가볍게 막으며 뒤로 조금 물러섰다가 다시 앞으로 전진하 면서 최루탄을 쏘았다. 학생들은 공수들이 최루탄을 쏘면 다시 뒤로 밀렸다가 무리를 지어 밀려와 동시에 돌을 던졌다.
금남로의 인도에선 시민들이 자유스럽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난 시위광경을 보면서 한일은행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대성약국 친구에게 갔다.
"지금 저곳에서 난리가 났어. 난리난 판국에 누가 약을 사러 오겠냐? 우리 잠시 구경 좀 하자"며 앉아 있는 친구를 끌었다.
증심사에서 기념품으로 받은 타올 두 장을 한 개씩 나누어 입과 코를 막고 한일은행 사거리로 갔다. 몹시 매웠다. 기침도 나오고 눈물도 흘리며 30분 정도를 구경했다. 나는 통금시간이 9시로 앞당겨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친구는 약국으로 가고 나는 서둘러 반룡마을로 돌아왔다.
전남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공수들이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는 신분증을 꺼내며 "나도 군대에서 공수로 있었습니다" 하고 말했더니 학교 안으로 들어가도록 길을 열어주어서 아무 일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공수들은 며칠씩 압축스프만으로 식사를 했다
5월 19일. 반룡마을 사람들의 출입문은 전남대학교 정문과 후문이었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전남대학교 정문을 통하여 드나들었고 전남대학교를 거치지 않고는 거의 반룡마을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 까닭이었는지 아침부터 마을주민의 명단을 적어 보내줄 것을 공수부대에게서 요구받았다. 나는 반룡마을의 주민명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적어서 전남대 정문 수위실로 갖다주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해서라도 반룡주민들의 피해가 없도록 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잘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오후 1시쯤 이웃집의 애들 몇 명이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형님, 공수들 3명이 와서 라면을 끓여주라고 하는데.... 혹시나 옛날에 함께 근무했던 사람이 있는지 보렵니까?"
그애들과 함께 공수들이 있다는 가게로 갔다. 공수들은 라면을 먹고 있었다.
"나도 한때는 공수생활을 좀 했습니다" 하면서 어색스레 인사를 하고 살펴보자 함께 군생활을 했던 공수가 끼어 있었다. 당시에는 그 공수의 이름을 알고 있었는데 9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잊어버렸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자니 공수들은 라면을 2그릇 이상씩 먹어댔다.
"아니 높은 사람들이 라면을 그렇게 많이 먹어요? 상사 정도 되면 밥도 부족하지 않을 텐데."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그래요."
"밥을 못 먹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놀라서 되물었더니 공수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매일 비상이라 대기하고 이동하여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고속도로변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차 위에서 말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라고는 이것 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손바닥만한 것을 내밀었다. 빨래비누처럼 생긴 건빵과 같은 것이었다.
"이게 뭡니까?"
"압축스프라고 합니다."
"그럼 며칠 동안 이것만 먹었단 말이에요?"
"압축스프를 먹고 난 다음에 물을 먹으면 됩니다."
나는 압축스프를 먹어보았다. 건빵 맛밖에 무슨 맛인지 느껴지지도 않았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공수들은 이틀 이상을 압축스프에 물만 먹은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수들의 과잉진압이 이런 이유에서 연유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공수들은 다 먹은 듯 입을 훔치며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으니까 되도록이면 밖에 나가지 마시오. 만약에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군시절 공수로 근무했다는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도록 하시오"라고 말하고 걸어나갔다. 서로 조심하라며 헤어졌지만 그들이 그리도 무자비하게 진압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군대에 있을 때였다. 그때가 1972년쯤 되었을 것이다. 우리 부대가 연세대학교 데모진압을 나갔다. 연세대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교문에서 나와 돌을 던졌다. 그러자 나를 포함한 전경들은 여러 줄로 진압자세를 하고 교문을 밀고 들어갔다. 방패로만 돌을 막으면서 밀고 가자 학생들은 모두 도망갔다. 간혹 도망가면서도 계속 우리를 향해 돌을 던지는 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잡아서 때린 적은 없었다. 우리는 모두들 자기가 만든 진압봉을 갖고 다녔다. 각자가 나무를 깎아서 회색으로 칠하여 제각기 소지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때려도 된다는 지시가 있었다. 다만 허리 윗부분은 때릴 수 없고 하체만을 때려도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는 누구 하나 진압봉을 휘두르지 않았다. 학생들이 도망가면 도망가도록 길을 터주었고 잡지 않았다고 나무란 적도 없었다.
공수부대원들이 철수한 뒤 전남대학교 종합운동장 잔디 위에 그 압축스프라는 것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와 내가 한때 공수였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뒤적거려보았다. 다행히도 몇 가지 증명될 만한 것이 있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을 때 간혹 군대 사진반 애들이 훈련의 장면을 사진에 담아주기도 했다. 그중에 김포공항서 헬기를 타고 뛰어내릴 준비자세를 취하고 있을 때 찍어주었던 사진 한 장이 보였다.
또 한 장의 사진은 행주산성 나루터 반대편에서 낙하훈련을 받을 때 착륙함과 동시에 찍어주었던 사진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었다. 이거 역시 훈련과정에서 얻은 것이었다. 통신능력, 태 권도 능력, 무장구보 능력 등을 측정하고 이에 통과되어 도장을 찍고 '0년 0월 0일 대령 전두환'이라고 씌어진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말하자면 자격증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원래 제대할 때 회수를 하는 것이었는데 나에게는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2장의 사진과 증명서 1개를 찾아 이보다 더 이상 안전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잠바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이것만으로도 난 마음이 든든해지는 것을 느꼈다.
악질 중사가 대검으로 목을 찌르려고
5월 21일. 부처님 오시는 날이었다. 날씨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나는 밖에 나갈 일도 없고 날씨도 더워서 하얀색 반팔 티샤쓰만 걸치고 있었다. 회사는 자동 폐쇄상태였으므로 나가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전 10시쯤 반룡마을에서 걸어나와 전남대학교에서 지대가 가장 높은 곳으로 갔다. 인사대 건물 앞의 나무가 심어져 있고 잔디가 깔린 곳으로 갔다. 종합운동장 쪽은 천막만 쳐져 있었고, 공수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기에 진압을 나갔나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시내 쪽에서는 헬기 두대가 떠서 왔다 갔다 맴돌고 있었다. '도대체 헬기가 떠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시내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보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상대 건물 뒤쪽으로 돌아 반룡마을로 들어가자면 왼쪽으로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어린 대나무들이 부지런히 자라고 있었고 풀도 무성하게 자랐다.
그런데 언뜻 보기에 공수들이 그곳에 모여있는 것 같았다. 모여있다는 표현보다도 숨어 있었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왜 저기 저렇게 있는 걸까?' 이상하게 생각된다고 느끼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고 오후 2시쯤 되었다. 갑자기 우리 집 앞으로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린 꼬마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몇백 명은 되었다. 특히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많았다.
몰려드는 사람들은 전남대학교 농대 연습림을 통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신안동으로 돌아서 걸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이런 광경을 보자니 우리 집 부근은 땅이 꺼져 있고 상대 건물 뒤쪽으로는 땅이 솟아 있어서 쉽게 사람들이 공수들의 눈에 띌 것이라 생각하자 이만저만 걱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집 앞에 모여든 학생들에게 타이르듯 저쪽은 위험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내 말을 들을 리 없었다.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만약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반룡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어린 학생들도 다치게 될 거라는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마을 또한 쑥대밭이 될 것 같은 염려도 없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렇듯 웅성거리며 서성이고 있는데, 아니나다를까 저쪽에 있던 공수들 50여 명이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등에는 M16총을 메고 오른손에는 곤봉을 들고 왼손에는 대검을 들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공수들을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도 돌이라도 던지면서 사람들이 도망가는 것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마당에는 돌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사람들에게 일러주었다.
"마을 뒤쪽으로 도망가지 말고 농대 뒤쪽 산으로 도망가야 더 쉬우니까 빨리 도망가시오" 하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말했다. 내게는 동네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책임이 있고, 시민, 학생이 빨리 도망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모두들 무사히 도망을 간 것 같았고 아무 일 없으리라 생각했다.
'모두들 무사했구나' 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쉬고 아버님과 형, 형수님, 동생들과 집에 있었다. 그런데 공수들 20여 명이 우리 집 울타리를 넘어서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는 게 아닌가? 무어라고 말을 할 여유도 없었다. 공수가 곤봉으로 내 머리를 내리쳤다.
"이놈이 주동자다."
나는 순간 '아까 내가 손가락질한 것을 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정신이 멍해졌다. 곤봉의 위력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불과 한 대를 맞았는데 뜨거운 액체가 얼굴을 덮으며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아프지는 않았다. 아프다고 느낄 만한 겨를도 없었다.
"나는 시위하는 학생이 아니오. 나와 함께 공수생활을 했던 당신의 상관을 알고 있소. 나는 공수부대에서 근무를 했단 말이오."
"거짓말이야."
중사의 날카로운 경상도 말투가 들려왔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두들겨맞기 시작했다. 얼굴과 몸은 피범벅이 되었고 곤봉에 온몸을 맞았으며 군화발에 짓밟혔다. 그리고 그들을 나는 질질 끌고 갔다.
나는 비틀거리고 넘어지면서 농대의, 쟁기질이 되어 있는 사료밭 언덕을 넘어 가는데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쓰러지면 옆구리를 군화발로 갈겼고 허벅지를 곤봉으로 쿡쿡 내질렀다. 더욱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공수들은 나의 발목을 잡고 개끌듯 끌고 갔다. 사다리꼴 모양의 밭을 지나 참나무가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 나는 이때까지도 꼭 죽을 것 같았지만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를 썼다. 잠바를 입고 있었으면 사진을 내보였을 텐데 집에 있으면서 잠바를 벗어 두었기 때문에 보여줄 수가 없었다.
악질 같은 중사 놈은 나를 내팽개치듯 땅바닥에 던져놓고 군화발로 짓누르고 대검을 빼들었다. 나의 목을 향해 찔렀다. 나는 본능적으로 양손을 모아 칼을 잡았다.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살려주시오. 제발 살려주시오"
애원했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야 했다. 중사 놈은 칼을 잡은 내 손을 곤봉으로 내리쳤다. 손이 부러지는 아픔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어느 병상이었다. 꿈속에선지 현실이었는지 사람들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참 후 정신을 깨어보니 내가 누워 있는 곳은 임동의 삼일병원이었다. 머리가 터진 곳을 열일곱 바늘 꿰맸다.
형님의 말에 의하면 내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공수들이 나를 끌고 이학부 쪽으로 데리고 갔다. 형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어 어찌할 줄 몰랐다. 남동생은 내 옆에 있다가 곤봉에 맞아서 머리가 터지고 피가 쏟아지자 아버님은 동생을 보살폈다. 형님은 언뜻 사진을 생각해 냈다. 내가 봄잠바에 넣어둔 것을 다행히 기억해 낸 것이었다. 형님은 얼른 집으로 가서 사진을 들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공수들에게 달려갔다.
그러자 공수들은 형님을 두들겨팼다. 형님은 두들겨맞았지만 사진을 얼른 내밀면서 "이애가 바로 여기 있어요. 옛날에 공수였다구요. 제발 살려주세요" 하며 사정하자 장교 한 사람이 사진을 받아들었다. 얼굴을 사진과 대조해 보고 사진을 자세히 보더니 "놔줘"하면서 철수명령을 내렸다.
형님은 나를 업고 집으로 왔다. 집에 있는 헝겊이라고 생긴 모든 것과 이불 속의 솜까지 꺼내어 머리를 막고 온몸을 이불로 감싸고 리어카에 실어서 농대 쪽문으로 돌아 신안동으로 갔다. 신안동 사람들은 리어카가 지나가자 누구냐고 물었고 "현기"라고 하자 혀를 차며 죽은 것으로 알았다. 그 후로도 신안동 사람들은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임동 삼일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한 후 내 상의 옷을 벗겼는데 피가 빨래물 빠지듯 병원 바닥에 쏟아졌다 한다.
이날 오후 4시쯤 나는 의식을 회복했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난 후 나는 병원으로부터 매우 고급스런 대우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병원 안은 부상자들로 가득 찼고 병원 복도에 옷이나 신문을 깔고 누워 있었다. 병원 안 부상자는 수백 명도 넘었을 것이다. 거기에 비하면 난 호강받은 것이었다.
내 병상 아래 오른쪽 땅바닥에 부상자가 하나 누워 있었다. 그 사람은 40대 정도 되어 보였다. 병원에 있던 사람들은 지나다니면서 "저 사람 왼쪽 눈알이 빠졌대" 하며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렸다. 그런 연유로 나도 그를 더욱 자세하게 쳐다보기 위해 자꾸 곁눈질하여 내려다봤는데 얼굴 전체가 온통 부어서 공처럼 둥글둥글해져 있었다. 왼쪽 눈 부위에는 시커먼 액들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시궁창의 더러운 물이 한곳에 고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군가 그 사람의 손을 잡아보았다. "체온이 내려간다. 이를 어쩌지?" 하면서 의사를 찾으러 달려나갔다. 의사가 들어왔다. 병원 원장인 것 같았는데, 의사는 그 사람의 손을 잡아보더니 "안 되겠어요. 빨리 종합병원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서둘러야겠습니다" 했다. 30분 정도 걸려서 차를 대기시키고 차로 옮겼다. 그러나 그 사람을 차에 옮겼던 사람들이 이미 죽어 있었던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삼일병원에서 퇴원한 후 동네 사람들에게 반룡마을에서 21일날 공수들에게 두들겨맞아 죽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21일 반룡부락에서 공수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아무 집이나 들어갔지만 숨을 곳이 없어 장농 속으로 숨었는데 공수들은 방안 장농까지 쳐들어와서 질질 끌어내 담배가게 앞에서 주민들이 쳐다보는 가운데 두들겨팼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니여서 내가 보았던 그 사람과 동일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보상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해가 넘어가고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 공수들이 다시 나타날지 몰라 밖에도 나가지 못했다. 나의 형님도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아버님이 병원으로 오셨다. 병원에선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도 보이고 울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밤 9시경 평상복 차림의 젊은 청년 5, 6명이 시민군이라고 하면서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차를 타고 왔다고 했다. 나는 병원 밖에는 더 많은 시민군들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시민군들은 "밤이 되면 공수들이 다시 올 겁니다. 병원을 뒤져서 다시 많은 사람들이 죽을지 모릅니다. 그러니 중상자들은 종합병원으로 옮기세요. 밖에 차가 있으니 중상자는 차에 옮기고 죽지 않을 것 같은 환자들은 되도록이면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하면서 무척 서둘렀다.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나를 리어카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며칠 동안은 밖에도 나가지 않고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있었다. 집에서 치료를 하는 동안 대성약국에 있던 친구가 비닐 봉지 같은 곳에 든 350시시 혈액을 갖다주고 몸에 좋다는 영양제를 많이 갖다 주곤 했다.
집에서 치료를 하는 동안 상처는 아물어갔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록 혼자서 화장실을 다니지 못했다.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했다. 화장실을 가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또 가슴이 절려서 결음을 걸을 때에도 가슴을 펴고 다니지 못했다. 반룡마을 사람들의 도움이 많았다. 나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 돈을 모아 개를 사다가 보신탕을 끓여주었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치료를 시작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나자 회사엘 나가야 했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선배 한 분에게 가슴이 아프다고 얘기하자 "가슴이 아픈 곳에는 뱀술이 최고네. 마침 우리 집에 뱀술이 있으니 먹도록 하소. 뱀술도 조금만 먹으면 아무 효험이 없으니까 한꺼번에 독하게 먹어야 하는 거야" 하면서 대접으로 세 번을 따라주어서 나는 꿀꺽꿀꺽 마셨다.
다음날 나는 목포에 출장을 갔다. 이날 밤 잠을 자는데 갑자기 기침이 심해졌다. 기침뿐만 아니라 가래까지 밤새도록 쏟아졌다. 새벽 내내 한숨도 못 자고 쓰레기통에 가래를 뱉아냈다. 어제까지도 가슴이 빠개질 듯한 고통이 있었는데 당장에 뱀술의 효력 때문인지 가슴이 별로 아프지 않았다.
그 후 서서히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지만 직장의 일을 다시 시작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1983년까지 실업자가 되었다. 그때는 닥치는 대로 생활을 했다. 1981년에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은 뒤였으므로 놀고 먹기엔 어려운 살림이었다. 그리하여 할 수 있는 한 일당으로 일을 하기도 하고 어쩔 수 없는 날에는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나는 운이 좋았던지 차차 가벼운 운동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이 완쾌되었다.
1983년 하반기에 현재 다니고 있는 동일금속에 입사하게 되었다. 다만 후유증이 있다면 L자 모양으로 꿰맨 머리의 상처가 겨울이 되면 유난히 시렵다. 오토바이나 자전거를 타면 특히 시렵고 비가 오는 날에는 상처부위가 가렵다.
1988년 6월 부상자 추가신고 기간에 '5·18 광주의거부상자회'에 가입하고 시청에도 신고를 했다. 신고를 한 뒤 정부에서 오랫동안을 조사를 해갔다. 그러곤 얼마 지나 5·18 부상자로 확정이 됐으니 신체검사를 받으러 건강협회로 나오라는 통지서가 왔다. 88년 11월경 2차례 진단을 받았다. 처음에는 정신과와 내과에서 진료를 받았다. 엑스레이, 소변, 대변, 혈액검사까지 마치고 아무 이상이 없다는 판명을 받았다.
나는 1980년 그때의 일을 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오고 있다. 나보다도 더 많이 다쳐서 걷지도 못하고 매일 고통받는 부상자들을 보면서 이제 건강하게 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감사하며 지낸다.
나는 5·18 부상자이므로 얼마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식으로 1980년 5·18 문제를 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1980년 당시 무고하게 정부에 의해 공수들에게 두들겨맞아 다쳤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나에겐 여섯 살 먹은 큰딸이 있다. 나의 소중한 딸은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뇌성마비라는 병을 갖고 태어났다. 딸을 살리기 위해서 나는 오늘도 일을 한다. 1백 퍼센트도 채 되지 않은 보너스에 월 35만 원의 월급을 받으면서도 감사하며 지낸다. 월급의 70퍼센터를 딸을 위해 쓰고 있다. 오로지 나의 딸 은희를 살리고 싶은 마음밖에 없다. 지난 과거를 생각하면 이렇게 어렵게 사는 것이 안타깝고 억울할 뿐이다. 세상이 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내 인생의 길이 여러 갈래로 바뀌면서 힘들게 살아왔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현재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지만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부는 국민이 바라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민주화가 됐다고 정부는 떠들어대지만 민주화는 되지 않았다. 건강하고 올바른 국가 건설을 생각하고 있다면 자기 한 사람이 희생된다는 각오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억압과 폭력으로는 민주화를 절대로 이룰 수 없다. (조사.정리 안은정)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