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手話
최승권
몇 몇은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
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
금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
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
나는 노을이 지는 바다를 훔쳐보았다.
싸락눈 잘게 뿌리던 날
문뜰나루 건너온 그놈들이
조회시간에 불쑥 내민 김뭉치를 받았을 때
지방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정적인 시골 중학교 선생님이 된 나는
그놈들의 부르트고 째진 손등과
교실바닥에 나뒹굴던 해우무침 조각을 보고
바다를 따라 흔들리는 유채꽃의 희망과
황토밭을 흐르는 고구마 줄기의 자유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일까.
해우 한 장보다도 얇은 졸업장을 주면서
바닷가 갯물냄새 투성이의 아이들과
마지막 뜨거운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빈 칠판에 갈매기 두 마리를 그리고
유리창 밑에 숨어 바다를 보며 울었다.
서울의 낯선 어둠을 깎는 대패질소리와
절망마다 강하게 내리박는 못질소리가
짧은 편지 가득 들려오는데
앨범에 묻어두었던 흑백의 그리움이
문뜰나루 갈매기 울음소리에 섞여
옹암리 앞 푸른 바다로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 시집 『정어리의 신탁』 (문학들, 2016)
정어리의 신탁(神託)
최승권-
이케르氏*는 스페인에 산다.
축구족 타운 마드리드에 사는 이케르氏는 문어다.
사실은 어쩌다 이케르氏가 되었는지 이케르氏도 모른다.
더 정확하게 말해 이케르氏는
월드컵 경기 결과를 예언했던 파울氏의 후계자다.
사람들은 이제 그의 용한 점술을 믿고 돈을 내건다.
TV 앞 이케르氏의 점술 노동은
전기자극장치 야바위의 속임수 없이 아주 단순명쾌하다.
경기에 참가할 두 팀의 이름을 적은 항아리 속에
정어리 몇 조각을 넣어 두면
배고픈 이케르氏가 그중 하나를 골라 먹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태양계 너머 우주 저편으로 가는 시대에
문어가 인간 대신 컴퓨터 대신 숭고한 신탁을 대리하는 것.
더 놀라운 것은 그 신성한 점술마저 이케르氏가 아닌
이케르氏를 꼬드기는 죽은 정어리가 하고 있다는 것.
더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죽은 정어리를 믿고
일류대학을 나온 변호사 판사 의사 교사 은행원
축구광팬들도 생피 같은 금전을 건다는 것.
여기에 까무러칠 하나는 재미로 시작했던 투기에
고금리 준다는 불량은행에 돈을 맡기듯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을 돈으로 뻥튀ㅣ기기 위해
문어 낙지 돌멩이 바위 쇳덩어리 공에 맡기는 신도들이
바르샤 런던 뉴욕 상하이 서울에서 점점 늘어난다는 것.
내일부터 나도 충장로에 나가 좌판에 물방개 한 마리 풀어놓고
氏氏들의 운명 신탁(神託) 신탁(信託)회사라도 차려야겠다.
내기가 재미이듯, 인생 장사도 운칠기삼(運七氣三)이렸다?
* 이케르 : 스페인 국가대표 레알 마드리드의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의 이름을 딴 16킬로그램에 달하는 문어.
자동인형-자유로부터의 도피
최승권
댓글로
생각을 후려친다.
기사로
세상을 후려친다.
검은 안경이
웃음저장소를 왔다 갔다…
두려운 건
자유다.
나의 자유가 아니라
너의 자유!
히틀러가 유대를 원하고
도조가 자이니치*를 들세우고
교과팀이 좌빨을 빨대로 빤다.
채플린은 안 것일까?
모던타임즈는 회전기계식임을…
자유로 네거리 근처,
오늘 대낮에도
자동으로 눈과 귀를 닫아야 하는,
피 흘린 착한 국민인형을 사야 한다.
* 자이니치 : 재일(在日) 한국인을 지칭하는 말.
셀레던트(saladent)* 엘레지
최승권
나의 아내는 50대 초반의 회사원,
그녀의 꿈은 무사히 직장을 퇴임한 후
대학 강의를 한 학기라도 해보는 시간강사가 되는 것.
일주일에 두 번 대학 캠퍼스를 가서
30년 전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공부한다며 흡족해한다.
하지만 토요일에도 대학원 오전 강의는 진행 중.
피곤의 촛농으로 붙인 눈꺼풀을 떼고 조반을 건너뛰며
종종걸음으로 자동차를 향해 내달린다.
키 작은 아내는 왜 아침부터 달려야 하는 걸까?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향해 달리고 있다.
남이 달리니까 나도 달리는 대열에
내가 달리지 않으면 나와 가족의 미래가 쓰러지니까
울퉁불퉁한 삶의 바닥에서 흙수저를 들기 싫으니까
다시 빠져나오기 어려운 지하층의 탄광 같은 삶이 두려우니까
우리는 모두 어딘가를 향해 달리고 있다.
누군가 나의 등 뒤 튼실한 실을 걸어놓고
목각의 팔다리를 앞뒤로 움직이게 하는 줄도 모른 채.
아니면 알면서도 뻔히 당하는 야바위처럼
늦밤의 주말의 대학의 학력 콤플렉스의 캠퍼스를 질주 당한다.
* 셀레던트(saladent) : 회사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사람.
[ 최승권 시인의 약력 ]
광주출신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교에서 교육학(국어)박사를 수료
198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겨울수화」 당선으로 등단
'금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집 : 정어리의 신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