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스맨십? 아니 스포츠맨십!
‘스포츠정신’을 말할 때 흔히 대비시키는 말로 게임스맨십(gamesmanship)과 스포츠맨십(sportsmanship)이 있다. 그 둘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1960년대 말, 어느 메이저 골프대회 연습라운드에서 백전노장 선수가 프로무대에 처음 나온 애송이(아마대회 우승자)에게 5$짜리 내기(낫소)게임을 제안한다. 그리고 난코스로 알려진 홀에서 짐짓 수작을 건다. “이보게, 내가 자네 나이 땐 저 앞 소나무들 위로 직접 홀을 공략했다네.”
그러자 애송이 골퍼는 ‘나라고 못하랴’는 듯 그 쪽으로 볼을 날린다. 하지만 볼은 턱도 없이 나무를 넘지 못했고, 애송이는 얼굴을 붉히며 되묻는다. "아니, 그땐 어떻게…?" 그제야 노장골퍼는 놀리듯 말한다. “그땐 저 나무들도 어려서 나지막했거든.”
게임은 뻔하게 노장의 승리로 끝나고 애송이는 씁쓸하게 진 값을 치른다. 그 내기에서 애송이는 무엇을 배웠을까.
어떤 종목이든 고수간의 승부는 한 끗 차이로 갈린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종목들에서는 특히 신경전이 승패를 가르기도 한다. 그럴 경우 승부욕이 지나치면 정당한 기량 외의 수단(?)을 쓰기도 하는데, 특별한 제재규정이 없으면 이것이 묵인되기도 한다. 이른바 게임스맨십으로 분류되는 ‘비신사적 행위’들이다.
가장 흔한 예가 넌지시 상대방의 신경을 긁는 언동들이다. ‘신사 스포츠’라는 골프에서도 위의 예처럼 조크를 빗댄 빈정거림에서 교묘한 자극까지, 보이지 않는 심리전이 치열하다.
이러한 예들과 달리, 진정한 스포츠맨십의 일면을 보여준 일화가 있다. 올해 6월초, 미국 오하이오주의 고교육상대회 2마일(3,200m)종목에서의 일이다. 선두를 달리던 선수가 결승선을 얼마 남기지 않고 지쳐 쓰러지는 일이 생긴다. 그러자 그 뒤를 달리던 선수가, (그대로 추월해 우승할 수 있었음에도) 쓰러진 선수를 부축해 간다. 그리고 결승선에 이르러서는 그를 먼저 통과시키고 자신은 뒤따라 골인한다.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 순위가 당연했다는 듯이. 그 행위는 그러나 경기규정에는 어긋나 둘 다 실격되고 만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 본 관중들은 감동의 기립박수로 우승보다 더한 축하를 보낸다. 그리고 그 일화는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보여준 사례로 전 세계 인터넷을 달군다.
흔히 스포츠의 세계는 ‘원초적 경쟁의 장’이라 일컬어진다.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승부의 세계. 스포츠는 ‘전쟁을 게임화’한 것이며 ‘사회의 축소판’이라 이르기도 한다. 어느 곳이든, 승자독식구조일수록 승부는 냉혹하다. 거기선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고 패자는 변명조차 구차한 죄인이 된다. 일단 이겨놓고 나서야 말발도 선다. 그런 환경에서 스포츠맨십이 깃들 여지는 없다. 차라리 게임스맨십이 미덕이 된다.
우리의 학교체육-체육교육은 어떤 정신을 길러주고 있는가? “게임스맨십을 넘어 스포츠맨십으로” 스포츠 윤리부터 건강하게 하는 일-이것을 꿈꾸기는 아직 시기상조일까. 우리 사회의 경쟁지상풍토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