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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류계. 생각해보니 나도 소위 말하는 화류계에 ('유흥계'라고 하긴 그렇고..) 속하는 업소에 제법 다녀보았다. 대학교 때는 니나노 집에서 젓가락도 두드려봤고 (나만 그런 게 아니다. 그 땐 다 그랬다. 음^), 더 커서는 룸사롱에서 폭탄주도 마셔봤고, 요즘은 가끔 (정말 진짜 아주 가끔..돈이 없어서..) 단란주점에서 단란하게 술도 마셔봤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못 가본 데도 많다. 퇴폐이발소, 안마시술소 등과 같은 이상한 이름의 영업소에는 아직 가보질 못했다. (이름에 '퇴폐'가 붙질 않나? '시술' 한다지 않나? 이상한 이름들이다)
그런 업소에 못 가본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단지 그런 데는 어떻더라는 것을 '한담객'들에게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사명감!
화류계. 큰 기대를 한 '한담객'도 있겠으나 오늘은 이발소 이야기다. 죄송~
내가 어릴 때 또래 애들은 다 '상고머리'로 깎고 다녔다. 상고머리의 사전적인 뜻은 '앞머리는 그대로 두고 뒷머리는 치올려 깎고, 정수리를 평면 되게 깎은 머리'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 모습이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그 머리대로 그림을 그려보니 어째..예전의 탈북자 모습이 되어버리네..
그 때는 요즘같이 애들을 화초로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그 때 엄마들은 애들을 가꿀 여유가 없었다), 다 비슷비슷한 모양새들이었다. 획일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상대적인 개인차도 별로 드러나지 않았으니 一長一短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대신 모두가 같은 모양새라 그랬는지 머리가 조금만 길어도 이발을 해야했다.
이발. 이발 좋아하는 애가 있었을까? 지금은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애들은 예뻐진다면 물불을 안 가린다니까. 난 하여간 싫었다.
머리를 깎고 오라는 부모님 말씀에 이발소 앞에까지는 갔지만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결국 야단 맞을 일 있는 학생이 교무실에 들어가듯이 쭈빗쭈빗.. 마치 마귀같이 생긴 머리 커다란 이발소 아저씨는 씨익 웃으며 '어서 오너라'하고 나를 맞았다. 그러나 나는 그 아저씨가 속으로 '네 이놈 잘 만났다. Nice to meet you 다.'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었다.
아저씨는 바들바들 떨고 있는 먹이감을 보고 너무 흐뭇해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이발의자에 나무로 만든 받침을 더 올려놓고 나를 앉힌다. 어린이용 나무 받침. 그리고 목을 조이는 흰 천. 그래도 여기까진 참을 만했다.
그 당시 이발소의 수동 '바리깡'과 질 나쁜 가위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걸핏하면 머리를 찝히고 뽑혀서 움찔대야만 했다. 비명도 안 나왔다. 그런 열악한 장비도 문제였지만, 그나마도 비위생적인 곳이 많아서 '기계충'이라는 머리피부병이 옮기도 하였다. 나는 다행히 기계충에 감염 되어본 적이 없지만, 우리 반에도 머리에 떡갱이가 덕지덕지한 애들이 꽤 있었다. 오죽 흔한 병이었으면 길거리에서 작고 납작한 통에 든 '기계충 약'을 파는 행상의 모습도 흔했었다. 가끔은 '회충약' 파는 아저씨가 같이 팔기도 했었다.
(회충약? ㅎㅎ 이 또한 추억의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담에 떠들어 보자)
나에게 이발의 가장 큰 공포는 면도였다. 아저씨가 가죽끈에 대고 면도칼을 문지를 때부터 나는 오금이 저려왔었다. 찔끔~~ 그리고 면도칼이 목덜미를 오락가락할 때는 차라리 눈을 감고 말았었다. 지금은 면도하면 시원한 느낌을 갖는데 그때는 왜 그리 싫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머리를 다 뽑히듯이 깎이고 공포의 면도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발사 아저씨가 무슨 일이 있는지 밖으로 나가셔서 한동안 안 돌아 오셨다. 나는 얼씨구나 그냥 집으로 도망쳐 왔다. 저녁때. 퇴근 후 늦은 저녁을 들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너 오늘 머리 깎었니?" 하시는 것이 아닌가? 헉!! 나는 허둥대며 "예"라고 말씀드렸다. 아버지는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시면서 고개를 몇 번 갸웃하시더니 "안 한 것 같은데.."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속으로 혼비백산하였다. '어른들은 정말로 모르는 것이 없구나.. Oh my God..'
마침 옆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이발 다녀왔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고, 그냥 식사를 하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는 알고 계시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면도하기 직전에 도망쳤다는 것을.
내가 그렇게 내 마음속에 큰 의문이었던 '어떻게 아셨을까?'에 대한 답을 깨달은 것은 어른이 다 되어서였다. 아버지는 내 뒷덜미를 보시고 아셨을 것이다. 면도를 안 해서 경계선이 모호한 뒷덜미와 구렛나루. 왜 모르셨겠나? 면도는 안 했고, 머리는 깎여있고.. 도망쳤다는 것을 아셨겠지만 속아주셨던 것이겠지..
(항상 어른의 깊은 뜻은 너무 늦게 알게된다.)
국민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는 이발비 삥땅치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이발학원이 생겼다. 그 학원에 가서 실습의 대상이 되는 것인데 이발비가 반값도 안 했다. 단지 머리를 안 감겨주는 것이 조금 불편했었다. 등어리가 따끔거리기도 하였고.. 그 학원을 다니며 삥땅친 이발비는 바로 군자금으로 전용되었다. 그 돈으로 십 원에 10 개씩 하는 'used 다마(玉)'를 사서는 <알빼기>판에 화려하게 뛰어들곤 했었는데..
(그 때는 중고 다마시장이 아주 활성화 되었었다. 그 때 'brand new' 다마 (구슬)는 10원에 2 개였다. 그래서 약간 깨진 것도 있긴 했지만, 보통 친구들에게 중고 다마를 사서 쓰곤 했다. 우리 반 찔찔이 하나는 겨울방학 내내 딴 다마를 팔아서 지 엄마 구리무 한 통 사드렸단다. 글마가 선생님한테 칭찬 받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알빼기>라는 다마 치기를 설명하자면 기니까, 정 궁금하면 메일을 보내시길.. )
그 학원은 이발비가 싼 대신 위험부담이 컸다. 대체로 크게 흉하지 않게 깎아놓긴 하는데, 어떤 때는 이발사가 신입생인지 지진아인지.. 아예 전위예술품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었다. 결국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실직고하고 광명 찾았지만..
중, 고교 때야 그저 그랬다. 기억에 남는 것은 중학교 입학식이었다. 우리 학교는 그 당시로는 드물게 스포츠 머리였는데, 나만 '2부 가리'로 깎고 나타났었다. 나는 혹시 스포츠일지도 모른다고 했었는데, 아버지께서 학생은 다 '2부 가리'라고 장담을 하셔서 깎고 갔었다. 그때의 쪽팔림은 훗날 나의 특징, '숫기 없음'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2부 가리.. 절대로 하지 마라. 으~~
대학교 때. 우리는 '장발단속'이라는 독재정권의 폭거에 맞서 '장발족'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일종의 민주화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던 투사들이었다. 서울 시내 파출소의 위치를 딸딸 외워가며 지하운동을 하던 우리들. 지금 생각해도 자랑스럽다. 게슈타포에게 걸려서 명동 유네스코 빌딩 옆, 생맥주집 'Red Ox' 들어가는 골목 옆의 파출소로 연행되어, 대기하고 있던 '파쇼 깎새'에게 50원 내고 머리를 깎이며 나는 더욱 가열찬 투쟁을 다짐, 또 다짐했었다. 나쁜 놈들. 거리 환경 차원에서 단속한다면서 돈을 받다니.. 그 정도는 나랏돈으로 해 줘야지.. 그리고 보기 좋은 미니스커트는 왜 잡노? 거리 환경 운운하면서.
기르고, 깎이고 하던 투쟁도 고학년이 되면서 점차 시들해졌다.
특공대 시절. 우리는 특공대답게 '이발 방우'에게 머리를 맡겼다. 각종 방우 가운데 이발 방우가 가장 불쌍하다. 열심히 깎아주고 나면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지랄하는 현역병들, 하사관들. 성질 드러운 놈 만나면 머리 깎아주고 조인트 깨지고.. 조금 고롭더라도 군대는 역시 현역이 낫다는 것을 느꼈었다.
우리 비서실에는 아침이면 늘 '이발 방우'가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 '깎새 방우' 중에 제일 고수였던 자였다. 아마 그 최전방 일대에서 제일 고수 깎새였을 것이다. 이 깎새 방우는 빗과 가위, 드라이어를 들고 대기하고 있다가 영감님(부대장)이 출근하시면 바로 들어가 머리를 손질하는, 국가안보에 정말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단지 영감의 당번병이라는 위세로 늘 장교 이발소에 가서 그 고수 깎새에게 머리를 맡겼었다. (狐假虎威라 좀 面이 팔리긴 했지만, 군대가 다 그런 거지하며 난 그런걸 즐겼다. 그래서 군대는 계급보다 '보직'이다)
그 때 우리 영감님은 그 전방에 단신으로 부임해 계셨다. 사모님과 애들은 (내 제자들. 방학 때면 나에게 사교육을 받던 놈들. 워낙 총기 있던 놈들이 좋은 스승을 만나서 성적이 수직 상승했었다. 그래서 사모님은 나를 '해동海東의 페스탈로찌'라고 불렀었다) 서울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서울서 사모님이 다니러 오셨다. 그 다음날 아침. 영감님 머리를 손질하고 나온 깎새 방우가 문득 나에게 묻는다.
"이 상병님.. 사모님 내려오셨어요?"
"응..근데..왜?"
"단장님 머리가 엉망이라서요"
"........"
헉! 머리가 엉망이라고? (나의 머리는 마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영감님네는 머리채를 부여잡..고.. ~~다는 말이 아닌가?! 헉!!
난 깎새 방우를 조용히 참모부 뒤, '영내 보안대' 앞으로 끌고 가서 그런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날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고 엄포를 놓으면서 눈으로는 보안대 사무실을 가리켰다. 그 방우는 그렇게 잘 단도리해 내려보냈는데, 정작 나는 하루종일 그 상상의 그림이 지워지질 않는 것이었다. 저 근엄하고 무섭게 생긴 영감님이 머리채를 잡히고.. 아~~ 이런 국가안보에 위험한 생각이 떠나질 않다니..
결국 나는 화장실 뒤의 숲에 가서 비밀의 응어리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가 아니고 "머리채를 잡고 ~~대.." 라고.
그후 그 참모부 화장실 뒤에 귀신이 나온다고 소문이 돌았고, 심지어 그 쪽 초소로는 보초 근무를 나가지 않으려는 시키들도 생겼었다. 그 숲에서 '머리채~~' 어쩌구 하는 소리가 들린다나 어쨌다나..
나는 그 때 그 깎새 방우의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뭐든지 하나에 달통하면 많은 것을, 심지어 남의 삶도 알 수 있다는 진리. 헝클어진 머리를 보고 영감님의 전날 행적을 알아낼 수 있는 그 높은 무공..
(그런데.. 그 전날 사모님이 안 내려오셨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그렇다면 그건 정말 국가기밀인데..)
직장에 들어온 뒤에는 늘 직장 이발소를 이용했다. 직장의 이발소는 benefit 차원에서 존재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근무시간에 이발소에 간다고 뭐라는 상사가 있다면 그 상사를 내쫓던가, 부서를 옮기던가 아니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굳세게 구내 이발소를 이용하는 나에게 아내는 다른 곳을 가보라고 자꾸 권한다. 구내 이발소의 이발사조(思潮)는 다분히 고전주의적이다. 아니 군국주의, 복고주의적이다. 그래서 아내는 잘 생긴 남편이 마치 탈북자 같은 모습으로 보이는 게 싫었나 보다. 그래도 나는 구내 이발소를 다녔다. 편리하니까..
그날은 외부에서 회의가 있었다. 아침에 머리를 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거울을 보니 머리도 길고.. 이발을 하기로 했다. 오전을 정신없이 보내고 오후에 이발소에 전화를 해보니 만원滿員.. 결국 기다리다 회의 출발 시간이 다 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나가서 집에 차를 세워놓고 고민을 했다. 머리를 깎아야 하는데.. 물론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나를 보고 잘 모를 것이다.
'저 놈은 기름기가 넘치나 보군..머리도 기름이 반지르르 하네..'
'저 분은 무지 바쁘시군. 머리도 못 감고..'
이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불편해서도, 또 처음 보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예절에도 용납되지 않았다. 시간은 없고..
동네 이발소를 찾았다. 미장원은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그 곳에 들어갈 숫기도 없고, 그 미용실 언니들이 제대로 깎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어릴 때부터 하도 예쁘다고 얼림을 당하다 보니 언니들만 있는 곳도 무섭고.. 그런 곳은 피하기로 했다.
언젠가 식구들한테 들은 것이 있어서 근처 골목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찾았다.
가게는 이름도 없었다. 그냥 '이발'.. 빙빙 돌아가는 이발소 표지만이 있었다.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여긴 어디인가? 아련함이 밀려왔다.
"어서 오세요.."하는 할아버지(?)의 반김. 어느 한 손님과 이야기를 재미지게 하시며 머리를 깎던 할아버지(?)가 활짝 웃으시며 반겨 주셨다. (아저씨인지 할아버지인지..중간인지..) 그런데..
여기는 30년 전의 이발소였다. Time Line(마이크 크라이튼의 소설)..
긴 거울과 거울 앞의 좁은 선반,
걸려있는 그림은 산수화였는데, 낭만주의의 허황한 끼가 전혀 없는 사실적 산수화였다. 아주 긴 액자에 걸려있는 것으로 보아서 '화양구곡'쯤 되려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내 순서가 되길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드르륵 여리더니 웬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셨다.
"밥 차려 놨시우.. 어여 가서 한 술 뜨시우.."
"그려.. 손님들 다 해드리구.."
부부인가? 그 할머니는 내 쪽으로 오시더니 휴지를 한 장 뽑아서 내가 벗어 선반에 놓아둔 안경을 그 위에 올려놓으신다.
내 앞의 손님이 다 끝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는 동네 사람이고, membership이 있는 것 같았다. 돈도 내지 않고 그냥 나갔다. 그 대신 머리를 안 감고 나가는 'local rule'을 충실히 지키면서.. 아~~ '동네삶'의 편안함이여..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어느 새 바쁘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바리깡 좀 대도 되겠읍니껴?" "예"
"어떤 스타일로 할까요?" "맘대로 하세요.." (대갈통이 워낙 그런 걸 뭐..)
할아버지에게 머리를 맡기고 눈을 감았다. 안경 낀 놈이 이발 당할 땐 눈뜨나 감으나 마찬가지니까.. 다 깍았나 보다. 그럼 면도는 누가 하나?
갑자기 그 비리비리한 할머니가 나선다. 윽!! 이럴 수가..
할머니는 아주 느리게 내 얼굴에 로숀도 바르고, 뜨거운 수건으로 지지고..몹시 느렸다. 이 할머니에겐 '관절염 파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할머니가 서걱서걱 칼을 갈더니, 휘리릭.. 칼을 휘두르는데.. 아~ 이것이 바로 '조자룡 헌 창 쓰듯" 이라는 표현, 바로 그 것 아니겠는가?
날렵함!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한껏 멋을 부리는 칼부림. 이는 절정의 무공이었다. '와호장룡'에서 예쁜 '장쯔이'는 끊임없는 곡예의 칼부림을 보여주었지만, 이 할머니는 '완급緩急의 妙'와 '단속斷續의 美, 강약의 數'를 마음대로 부리질 않는가? 나는 내가 면도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손님의 턱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손길에도 리듬이 있고 운률이 있질 않은가? 아~~ 동네삶의 즐거움..
면도 도중 전화가 왔나보다. 때르르르릉.. 앗! 이 소리는?
특공대 시절, 비서실에는 전화가 4대 있었다. 오고가는 곳이 다 다른 4대의 전화. 소리도 조금씩 다른 4대의 전화. 그 중 하나의 소리가 나질 않는가? 짬이 났을 때 돌아보니 아! 저 까만 전화. 다이얼이 달려있는 저 전화. 손가락을 집어넣어 돌리는 전화. 그래서 내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혔던 저 전화..
그제서야 나는 그 이발소를 다시 천천히 돌아보았다.
TV.. 로터리식으로 돌리는 채널이 있는 TV. 네 다리와 문이 없는 것이 오히려 아쉬웠다. (우리 어릴 때 TV는 마치 테이블 같이 네 다리가 있었고, 화면 앞으로는 sliding door 같은 덮개가 있었다) 여긴 어딘가.. 박물관?
머리를 감으라고 한다. 시멘트로 모양을 만든 싱크대. 타일이 붙은 싱크대. 그곳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대가리를 숙이고 머리를 감았다. 역시 능숙한 할머니의 손놀림. 저런 비실 할머니가 어디서 힘이 나서 이리 머리를 시원하게 감겨줄까? 두 번을 감기고 난 할머니는 물으셨다.
"한번 더 감아드릴까요?"
"됐습니다. 고맙습니다."
돈을 치르고 나오는데도 내 머리를 자꾸 훑어보는 할아버지. 야쿠르트 하나 들고 가라는 할머니.. 나는 서둘러 그 집을 나왔다. 회의는 늦었다.
그날 저녁. 아내는 오랜만에 흡족해 했다.
"머리.. 예쁘다.." (참.. 바탕이 되니까 이쁜 거지..)
둘리에게 물어보았다.
이러저러해서.. 골목으로.. 이러저러한 거기가 거기냐? 맞다고 한다. 음..둘리 단골집이라는 곳이구나.. 그런데 뒤이은 둘리의 말에 나는 멈추고 말았다.
"그 할아버지는 나올 때 꼭 과자 사먹으라고 백원씩 줘.."
아득함, 알싸함.. 저녁 무렵 시골 동산에서 보았던, 낮은 굴뚝마다 흘러나오는 밥짓는 연기의 싸함이 내 가슴을 지나갔다. 그래..옛날 어른들은 그랬었지..
"어~나! 과자나 사먹어라" 그러면서 동전 한 닢을 쥐어주셨지..
이 바쁜 시절.. 이 아파트 천지에 이런 박물관이 있어 나는 좋다.
누구나 머리를 깎으러 헤어샵에 가는 시절, 이런 박물관 이발소가 있어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