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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파두르 후작 부인(Madame de Pompadour)
(1721년 12월29일~ 1764년 4월 15일 )
프랑스 루이15세 애첩
(1745년 9월 14일 정식 왕의 정부로 인정)
본명; 잔느 앙투아네트 푸아송
(Jeanne-Antoinette Poi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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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4년 4월15일 밤 10시 , 베르사이유 궁 정문이 공식적으로 닫히기 직전,
어둠 속에서 인부들이 들것을멘채 아무 궁정인도 모르게 급히,
빠져 나갔다. 인부들이 멘것은 한 여인, 마담 퐁파두르 시체였다.
왕족을 제외한 어떤사람도 죽어서는 베르사이유 궁
안에 머물수 없었기에 , 숨이 멎자마자 옷이 모두 벗겨진 시체는
썩지 않도록 향만 뿌린채 급히 침대보로 둘둘 싸여 궁밖으로 내쳐졌다.
이틀뒤 4월17일 늦은 오후,
베르사이유궁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여인의 장례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19년이나 루이 15세의 애첩이자 친구였으며
왕의 뒤에서 프랑스를 쥐락펴락 했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의
43살의 쓸쓸한 퇴장은 이러했다.
당시의 유명화가; 부셰 (Boucher) 가 그린 퐁파두르
마담 퐁파두르 는
1721년 , 군수물자를 공급하던 "샤를 프랑수아 폴 르 노르망 드 투르넴"의
첫째딸로 태어났다. 잔느 푸아송은 평민이란 신분에 속했지만 ,
부르주아 계층인 어머니 애인의 교육을 받아
예술, 연극,악기연주,그림, 보석디자인,등
정원사이자 식물학자 이기도 했으며
지적이고 훌륭한 유머감각도 지닌 여인 이었다 한다.
어렸을때부터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던 그녀는 스무살 되던해
1741년3월 9일 자신의사촌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과 결혼하여
여러번 유산의 아픔을 겪은 퐁파두르는 1744년 딸 "알렉상드 린" 을 낳았다.
그리고
1745년가끔 수렵을오던 루이 15세의 눈에 띄어
공식적인 첩으로 간택되어 "마담 퐁파두르 후작 부인" 이라는 귀족의
지위를 받고 베르사이유 궁에 입성하게 된다.
모리스 켕탱 드 라 투르; 1755년 파스텔 175/ 128cm 루브르 박물관
그때만 해도 퐁파두르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당시 루이 15세의 공식적인 후궁이던 "마담 마이으"(Madame de Mailly)나
"마담 벵티밀"(Madame de Vintimile), "마담 샤토루"(Madame de Chateauroux)는
모두 귀족 출신이지만 , 그녀는 일개 부르주아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유부녀였고 평민이었던, 여러 흠결이 많았던 그녀를, 루이15세는
이혼과 빚을 대신 갚아주며 만인의예상을 뒤엎고 당당하게 공식적인
후궁의 자리를 궤찰수있었던것은 탁월한 미모 였던것일까?
정확히 알수없으나 당시 유명한 화가 "부세(Boucher)", 나티에(Nattier)
라 투르(La tour), 카를 반 루(Carle van Loo), 코친(Cochin) , 드루에(Drouais),
르무안느(Lemoyne), 피갈(Pigalle)등 화가와 조각가들이 모두 그녀를 모델로 작품을 남겼다.
당 시대의 유명화가; 부셰( Boucher)가 그린 그림
세상에 미인을 싫어하는 남자가 없다지만 , 루이15세는 마담 퐁파두르 이전에 간택한
세 후궁 중에서 가장 총애하는" 마담 벵티밀"(거구에다 목소리는 걸걸)은 예뻐지도 않았고,
퐁파두르 사후의 빼어난 미모의 후궁 "마담 뒤 바리"도 있지만, 루이15세는
마담 퐁파두르에게 더 중요한 다른 자질을 발견, 의지했음을 느꼈다.
사실 마담 퐁파두르가"공식적인 후궁" 자리에 있었던 시기는
1745년 부터 1750년 까지 불과 5년에 불과 했다.
그 뒤로는 왕족만 거주하는 베르사이유 궁 1층에 머물면서
루이15세의 친구이자 조언자로서 후궁때보다 더한 권세를 누리며,
19년동안 루이15세의 "그림자 실력자"로 정치에도 관여하는
(외무대신 쇼아죌 10년 재상이 되게하였고, 저택이나 성곽을짓는,
또 세브르 도자기 공장을 이전하는등..) 절대적인 권력을 ,
"나의 시대가 왔다" 는 유명한 말을 남기는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었다.
루이 15세
또한, 마담 퐁파두르는 루이15세에게 후궁을 두지 않게하고,
대신 베르사이유 궁 근처에 " 사슴 정원 " 이라고 알려진 작은집에다
출신이 미천한 처녀들을 데려다 향략을 즐기게하는 프랑스 야사에 손꼽히는,...
루이15세의 아이를 낳거나 나이가 차면 지참금을 주고 시집을 보내고 ,
스캔들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면 위험을 감수하며 둘러쌓으며,
" 오직 왕 한 사람의 기쁨을 위해 "
루이15세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 자폐증에 빠지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열정을 쏟았다.
궁정안에 조립식무대를 만들어 친구들을 중시하는 루이15세에게
지인들이 직접 나오는오페라의 이벤트를, 사냥을 좋아하는 왕에게 파리 근교에
새로운 성을 사서 새롭게 장식하여 보여주었고,
루이15세의 성격이나 , 자폐증상을 가장 잘 받아준 이기에,
왕의 한편의 따스한 감성을 , 왕으로서의 겪는 스트레스와 회한을
치유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이었을 것이다.
탁월한 의상 디자인 이었으며 ,구두heel 디자인, 훌륭한 업적을 남긴 퐁파두르
애초 취지는
왕 한사람의 기쁨을 위한 것이엇으나, 끊임없는 성 개축
공사 덕분에 마담 퐁파두르는 프렁스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그녀는 당대의 최고의 예술가 들을 불러 "벨뷰성" 을 장식케하고, 애착을
가지며 벽화는 당대 최고의 화가 " 부셰 " 에게, 식당은유명한 " 우드리 "가 장식 했으며
전체 리모델링은 루이 15세의 초상화를 남기도 한 왕실 화가 "카를 반 루"에게
감독을 맡겼다.
정원에는 오늘날 루브르에 소장되어 잇는 18세기 프랑스 대표적인 조각가
" 피갈 "과 " 팔코네 " 의 조각들을 놓았다.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총동원 공사가 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이 성은 프랑스혁명 때 구 왕조의
퇴폐적인 악습을 상징한다 하여
혁명정부가 부숴버렸다.
마담 퐁파두르의 방
매우 지성적이고 ,
예술전반에 걸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던
마담 퐁파두르는 학예보호에도 힘써 그녀의 싸롱에는
볼테르와 몽테스키외 등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자주 드나들어
문예를 진흥 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으며,
또한, 색채감각이 남달랐던 그녀가
도자기(세브르), 그릇, 의상 디자인, 헤어 스타일, 힐(heel) 구두,
샴페인((Coupe de champagne) 보석, 그림, 곡선의가구 (로코코스타일) ,책 등
수많은 수집품을 멀리 중국이나 일본에서 ,파스텔 톤의 랑브리,로즈 핑크
(일명 ;퐁파두르의색)와 페파민트색을 주 색조로, 왕을 기쁘게 하기위해 ,
벵센에 있는 도자기 공장의 장인을 불러 " 생생한 도자기 꽃을
만들어 향을 뿌린뒤 루이를 깜짝 놀라게" 도 했다한다.
오늘날의 파리가 세계 최첨단 유행을 선도하는
기초를 만들은 것 이다.
거북 등껍질 화장도구와 타피스트리 이브닝 빽
나아가 그녀는
벵센에 있던 도자기공장을 자신의 벨뷰 성 근처로 옮겨서
세브르 도자기 왕실 제조창을 만들었다.
영국이나 독일, 중국이나 일본에서 수입한 자기들이 대세였던
그때, 마담 퐁파두르 후원으로 이곳은 곧 일류 자기를
생산하는 명소로 유럽에서 손꼽히게 됐다.
" 퐁파두르색" 이라는 핑크색등 생생한 컬러로
유명한 세브르의 도자기중에는 우아한 꽃 문양과 " 부세"나 " 에베르 "
의 섬세한 그림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그야 말로 퐁파두르 취향의 도자기, 가구이다.
즉, 로코코 양식의 절정기 인것이다.
그러던 그녀도,.....
베르사이유 생활 5년만에 그림에서 보던 미모를 잃어가기 시작했고,
결국 편두통과 신경증에 시달리다가 43세의나이에 죽음을 맞이하게된다.
항상 루이 15세의 곁에 매여 있어야 했던 마담 퐁파두르는
1753년 외동딸 알렉상드린 이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을때조차 병상을 지켜주지 못 했던
그녀였다. 19년이나 권력의 심장부에 있었던 그녀의 죽음은 너무나 초라 했다.
곧 궁정인들은 그녀의 죽음을 잊었고,어떤 왕족도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 하지 않았다.
때로는 지상의 모든죄를 대표하는 악녀로, 뚜쟁이로, 발톱을 숨긴
고양이처럼 맹목적인 권력욕의 화신처럼 그려진 마담 퐁파두르는
그렇게 쉽게 잊혀져 버린것이다.
말년의 퐁파두르
그러나 ,역시 루이15세는 한 여자가 바친 사랑을 ,....
.............
루이15세를 대신해서 여론의 돌을 맞아 주었고, 그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 평생 온 힘을 다한 한 여인의 지순한 사랑을 ", 지상에서 가장 큰죄로
남게한 그녀의 어두운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
그녀가 죽고 5년뒤에야, "마담 뒤 바리" 를
새로운 후궁으로 맞아 들인다.
마담 뒤 바리
...............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그녀가 하필 야간에 숨지는 바람에 ,
폭풍우가 몰아치듯 검은 먹구름이 비를 뿌리는 가운데
여덟명의 남자가 관을 운구 해와, 형식적인 귀족의
마지막 길을 위해 신부100명과 하인 42명
장엄한 미사곡을 뒤로하고 여인의 관은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파리의
카퓨친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장례식이 열리던 시간, 루이15세는 카비네에
틀어박혀 빗방울이 부딪히는 어둑한 창가에 홀로서서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에서 굵은 눈물을 흘러 내렸다.
왕의 자리에서 할 수있는일이라고는 멀찍이서
눈물을 흘리며 고인의 마지막길을 지켜보는것 뿐이다.
19년이나 루이15세의 애첩이자 친구였으며, 왕의 뒤에서
프랑스를 절대적 권력을 휘둘렸던 " 퐁파두르 후작부인"
의 쓸쓸한 퇴장 이었다.
첫댓글 학교 다녔을때 공부 잘한 티 나져? ㅋㅋ
학교 다닐때 컴퓨터 배웠나요...? 아니면 공부완 상관없는거 아닌가요...?
ㅎㅎ 학교 다닐때..컴퓨터 배웠어요~ 진짜루~ㅎㅎ
정말 훌륭합니다. 토를 달려고 했었는데, 큰일날뻔...
중요한건요... 옷이 벗겨져 향만 뿌리고 이불보에 둘둘 말려서 밖으로 내던져졌다는거 아니겠어요...? 그렇게 허망한 인생이거늘 사람들은 헛된 미망에 사로잡혀서... 음냐음냐...
왠지 울 나라의 장희빈 같은 여인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조금은 성격이 다르겠지만...
권력의 뒤안길을 보고 있는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