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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회 박승국 선배가 1948년~1950년의 모교에 대한 회고가 있어 55회 홈페이지에 4회에 걸쳐 연재하여 반응이 좋아 60회 김평일 후배가 생각나서 그 원고를 보냅니다. - 55회 김원호>
붉은 언덕[紅峴]에 올라서서
박승국(50회)
편집자의 말 : 박승국 씨의 자서전 <할아버지의 소년 이야기>를 읽다가 우리가 잘 모르는 1948년~1952년의 모교 얘기가 나와 소개하려고 한다.
(1) 입학시험
녹음이 짙어졌다. 졸업에 앞서 중학교 입학원서 제출 준비로 선생님은 분주했다. 진로 상담하느라 수업은 거의 못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정한 바가 있어 내 차례가 되자 가고 싶은 학교를 선생님께 말씀 드렸다.
“경기사범학교에 가겠습니다.”
선생님은 내 얼굴을 새삼스럽게 한번 쳐다보시고는 아무 말씀도 없이 다음 학생을 불렀다. 나는 4학년 때 우리를 가르쳤던 경성사범학교 학생이었던 선생님을 따르고 싶었다. 그런데 경성사범학교는 국립서울대학교가 생길 때 사범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 자리는 사범대학 부속중학교가 되고 효창동에 경기사범학교가 생겼다. 그러니까 경기사범이 경성사범의 후신이라 할 수 있다.
시험은 1차와 2차로 나누어 보았다. 사범학교는 특차여서 1차보다 앞서 보고, 떨어져도 1차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저녁에 아버지께서 경복중학교 원서를 가지고 오셨다. 북악산이 학교 바로 뒤에 있고 조경(造景)이 훌륭하다며 학교 자랑을 하셨다.
경기중학교가 교모에 흰 줄이 하나인 것은 , 제일고보(第一高普) 시절 일고에 一자를 상징한 것이었다. 경복이 제이고보로 개교했을 때에 모자에 二를 뜻하여 흰 줄이 둘이다. 그러니 경복은 경기나 마찬가지로 좋은 학교라고 말씀하셨다.
다음날 선생님께 어제 밤에 아버지가 써 주신 경복중학교 입학원서를 드렸다. 선생님은 말 없이 원서를 서랍에 넣고는 인봉이와 나에게 경기중학교에 가서 원서를 사 갖고 오라고 하셨다.
전차를 경복궁 앞에서 내려 학교 위치를 물어 가며 안국동에서 가회동으로 오르며 학교를 찾아갔다. 파란 페인트 칠을 한 나무대문이 내게는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낮은 언덕으로 올라서니 왕모래가 깔린 운동장 저편에 북악을 등지고 하얀 3층 건물이 우뚝 서 있다.
매점에서 원서를 사 들고 돌아와 선생님께 제출했다. 우리들의 입학 지원 원서는 초등학교 서무과에서 일괄하여 각 중학교로 제출했다. 그 후 시험 보기 직전에 담임선생님에게서 수험번호표를 받았다. 중학교 입학시험은 졸업 후 7월 초로 예정되어 있었다.
7월, 장맛비가 며칠째 주룩주룩 내렸다. 밤에는 더 세차게 내리붓더니 천둥 번개까지 친다. 이층으로 올라갔다. 용산 철도국 너머 관악산 쪽 밤하늘에 뻔쩍 번개가 비친다. 동에서 서로 뻗친 번갯불이 잠시 주변을 밝힌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터지는 굉음이 천지를 뒤흔든다.
나는 비 오는 날이 좋았다. 가만가만 촉촉이 내리는 봄비도 좋고, 고궁(古宮) 뒤안길에 뒹구는 낙엽을 적시는 가을비도 좋아한다.
숨 막힐 듯 뜨거운 여름날 단번에 더위를 식혀 주는 한 줄기 소나기도 좋다.
그러나 오늘밤처럼 천둥 번개를 치며 장대같이 퍼붓는 빗줄기는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밤새 비가 그치고 길가 웅덩이에는 물이 고였다.
종로 화신백화점 앞 전차 정거장에서 내려 안국동으로 향해 걸어갔다.
안국동 로터리에서 길을 건너 가회동 골목길로 들어서니 나 같은 수험생들이 줄을 이었다.
학교 운동장에 모였던 수험생들은 지도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각 수험장 교실로 입실했다.
수험번호가 610번인 나는 본관 이층 교실로 들어갔다. 609번인 김인봉은 내 책상 바로 앞에 앉았다.
국어, 산수, 사회, 자연(그 당시에는 사회는 공민, 자연은 과학이라 했다.) 네 과목을 네 시간에 걸쳐 보았다. 시험문제 가운데 몰랐거나 이상했던 것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국어 문제는 기억이 안 나는데, 산수와 자연 사회 문제는 하나씩 생각이 난다. 그 중 산수 문제는 응용 문제로 출제한 문제인데 너무 단순한 문제여서 혼란스러웠다. 문제는 이러하다.
‘바둑 줄은 가로 세로 모두 열아홉 줄이다. 그러면 가로 세로가 만나는 지점은 모두 몇인가?’ 하는 문제이다. 출제자의 의도는 열 십(十)자 모양이 모두 몇 개인가를 물은 것 같다. 그러나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곳은 十자 모양이 아닌 바둑판 가장자리의 줄 ㅓ 나 ㅏ 또 ㄱ ㄴ의 모양도 가로 세로가 만나는 곳이 있다. 문제의 지문이 분명하지 못했다. 우리 국어교육이 제대로 안 된 때였으니 그런 일이 있었다고 본다. 출제자의 의도에 맞추어 바둑판 둘레의 양쪽 두 줄을 뺀,(19-2)X(19-2) 이런 식으로 계산을 했지만 찜찜했다.
자연 문제는 ‘독이 가장 많은 뱀은 다음 중 어느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나는 문득 4학년 때 구렁이를 삶아 먹던 선생님이 생각났다. 뱀 머리를 그린 네 개의 보기그림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다. 둥그스레한 머리와 둥글넙데데한 머리의 1,2번은 부드러운 느낌이어서 아닐 테고, 세모와 마늘모 모양의 3,4번 중에 하나일 것 같은데 삼각형이 날카롭게 보여 3번을 찍었다.
사회 문제도 넷 중에 하나를 고르는 문제다.
‘1945년, 우리나라가 해방되고 독립하는 데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하고 보기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미국과 소련 다음에 연합국(UN) 그리고 독립 운동한 애국지사였다. 답이 너무 뻔한 것이다. 해방 당시에 우리에게는 힘이 전혀 없었다. 미국과 소련 등 연합국의 힘으로 일본이 패망해서 우리가 해방된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독립투사를 보기에 넣은 것은 우리의 주체의식을 강조하기 위해 출제하였으리라고 생각되어 주저 않고 끝번을 택했다.
시험을 끝내고 교문 밖으로 나오니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다. 안국동으로 해서 종각 뒤로 걸어갔다. 관철동 개울가에 하동관이란 곰탕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물 흐르는 소리가 산중에라도 온 듯하다. 식탁 옆 창문 아래를 내려다보니 장맛비로 불어난 개울물이 흙탕물을 이루고 흘렀다.
다음날 신체검사와 면접을 했다. 비가 오락가락하여 본관 옆 체육관 건물에 모였다. 아직 짓다 만 것인지 마루가 깔리지 않은 흙바닥이었다. 먼저 체육 선생님의 구령에 따라 열 명이 나와 팔다리 굽히기를 했다. 다음은 내가 제일 싫은 뜀틀 넘기를 했다. 내 차례가 되어 달렸다. 어차피 나는 못하리라 생각했다. 발판을 발로 차고 뜀틀에 두 손을 대고 달려오던 탄력으로 뛰어넘어야 하는데 ‘하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주변에서 지켜보던 부모님들이 내 꼴을 보고 박장대소를 했다. 나는 뜀틀 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에 머리를 대고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려 있었다.
본관에서 신장과 체중을 재고 교장실로 한 사람씩 들어갔다. 교장선생님과 또 두 분 선생님이 계셨고, 질문은 교장선생님이 했는데 무엇을 물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며칠 후 합격자 발표하는 날, 아버지와 함께 갔다.
교문을 들어서서 언덕으로 오를 즈음, 우리 반 아이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름은 그 때도 잘 몰랐었다. 6학년도 거의 끝날 무렵에 전학와서 별로 알지 못했던 아이다.
그 애가 나를 보더니 대뜸,
“너 붙었어. 인봉이도.”
하고 말했다. 나는 그 아이도 같이 시험을 보았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입학원서를 낸 사실도 몰랐다. 그러나 합격자 발표장까지 왔다가는 것을 보면 분명 같이 시험을 보았으리라 생각되어,
“넌?”
하고 물었다. 그 아이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교문을 향해 내려갔다.
합격 순간의 짜릿한 기쁨은 놓쳤지만 안도하는 마음으로 발표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뜀틀 넘기를 하던 그 건물 안 벽면에 합격자 명단이 붙어 있었다. 수험번호와 그 밑에 이름이 붓글씨로 써 있었다. 그 친구 말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장마도 그치고 오래간만에 해가 나서 날씨가 후텁지근했다. 조장희 선생님이 우리들을 정릉 계곡으로 이끌고 가셨다. 장마로 계곡에 물이 불어나 물놀이하기에 참 좋았다.
같이 갔던 친구들은 아직 입학하지도 않은 각자 합격한 학교의 모자를 쓰고 갔다. 그것은 선생님의 지시였던 것 같았다. 물놀이하며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모두 위는 런닝 바람에 반바지는 개울물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머리에는 각 학교의 새 모자를 모두 쓰고 있고 그 가운데에 담임선생님이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사진이 지금은 내게 없는 것이 유감이다.
1948년 8월 15일, 해방된 지 꼭 3년 만에 미국 하지 중장의 군정(軍政)은 끝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해 봄 5월 10일 선거에서 선출된 제헌국회 의원들에 의해서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 날, 광화문 중앙청 광장에서 초대 대통령 취임식 행사가 열렸다. 그 뒤 세종로 네거리에서는 국군의 행진이 있었다.
동아일보 옆 지금의 청계천 분수대 부근에 사열대가 마련되었다. 사열대 위에는 대통령과 국회의장 등 각계 요인과 외국 사절단이 앉아 사열을 받았다. 남대문 쪽에서 광화문을 향해 국군이 보무당당한 걸음으로 행진을 하였다. 나는 사열대 건너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2) 붉은 재 紅峴
태백 준령에서 솟아난 샘물은 골짜기를 흘러 내를 이룬다. 냇물은 마을을 감싸며 남한강과 북한강이 되어 유유히 흐른다. 양수리에서 두 물이 한 물이 되어 비로소 한강이 된다. 하나가 된 한강은 팔당에서 잠시 호수처럼 쉬었다가 한성(漢城)을 감돌아 흐른다. 삼각산 큰 줄기에서 내리뻗은 북악이 한강을 반긴다. 북악산 기슭에서 삼청동, 가회동 자락으로 내려오면 진달래 그루턱이 나온다. 봄이면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어나 언덕이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언덕을 ‘붉은 재 紅峴’이라 불렀다.(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사용하는 꽃을 파는 장소가 홍현(紅峴)이란 이름을 갖게 했다는 주장도 있다 - 편집자)
북악을 배경으로 붉은 언덕에 학교가 세워졌다. 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언덕으로 오르면 붉은 벽돌 단층 건물이 나온다. 그 건물 옆으로 작은 비석이 있다. 비문(碑文)에는 ‘중등교육의 발상지(發祥地)’라고 새겨져 있다.
너른 운동장 저편에 빼어난 봉우리를 뒤로 하고 백악(白堊)의 3층 건물이 우뚝 섰다. 동쪽에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이루고 서 있다. 그 뒤로 몇 개의 돌층계를 오르면 대강당이 있다.
강당 뒤에는 수영장, 산 쪽으로 다시 올라가면 기숙사가 있었다. 그 뒤는 산이다. 기숙사 앞에는 2층의 별관 건물로 생물, 물리, 화학 등 실험실과 미술, 음악실이 있었다.
별관에서 서쪽으로 돌아 나오면 매점과 우리가 체육시험을 보았던 건물이 나온다. 우리가 입학했을 때는 교실로 정리가 되어 서관(西館)이라 했다.
이렇게 좋은 시설만으로도 학교는 훌륭했다.
시냇물이 강물을 이루듯, 전국 각지에서 모인 우리들은 그해 9월 1일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날 은로학교의 장재호와 윤두식을 만났다. 인봉이밖에 아는 아이가 없었는데 두 친구를 보니 반가웠다. 그들은 당연히 이 자리에 있을 것을 예상했다.
그런데 또 한 친구가 나를 놀라게 했다.
“오오다니(大谷)!”
하고 난데 없이 일본 이름(창씨)를 부르는데 보니까, ‘다께가와(竹川)’가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고 있었다.
김포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서울로 전근하게 되어 전학 간 ‘다께가와’가 정철화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전혀 뜻밖이어서 참으로 반가웠다.
합격자 발표 때 명단에서 내 이름을 보고 일학식 날을 학수고대했다며 만남을 기뻐하였다.
1학년은 옛날 ‘한성고보’ 건물에서 공부했다. 그 건물을 남관(南館)이라 불렀다.
1학년은 모두 여섯 반인데 나는 1반이었다. 담임은 습자(習字)를 가르치셨던 홍병억 선생님이었다. 영자팔법(永字八法)이란 선생님이 손수 해설한 책을 보고 글씨를 썼다. 술을 좋아하셔서 작취(昨醉)미성(未醒)일 때가 종종 계셨다.
반장은 수석으로 합격한 강태웅이고, 부반장은 2등인 안창식이었다.
국어는 소설가 상허 이태준과 국어학자 심악 이숭령 공저의 책으로 공부했다.
서울대학 문리대 국문과 1회 졸업생인 이명구 선생님이 가르치셨다. 이제 막 학교를 졸업했으니 젊으신 분인데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셨다. <금오신화>(매월당 김시습 지음)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 주셔서 인상 깊었다.
또 한 분은 역사 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 키가 작은데다가 얼굴도 까매서 어두운 곳에서는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구별하기도 어려웠다..
첫 시간, 수업을 하는데 우리를 보며 설명하면서 뒤는 돌아보지도 않고 판서를 했다. 그런데도 글씨가 반듯해서 우리들은 ‘와’ 하고 감탄을 했다.
선생님 이름을 한자로 칠판에 쓰면서 소개할 때 아이들은 배꼽을 잡았다.
“내 키가 높을 高(고)하고 얼굴은 밝을 明(명)하니 인물이 빛날 輝(휘)라. 즉 높고 밝고 빛나라. 이것이 내 이름이다.”
라고 하셨다. 한자(漢字)만 써 놓고 보면, 이름이 고명휘(高明輝)(32회)다. 한자의 뜻과 선생님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이름을 불러보던 아이들은 일제히 “꼬맹이!”하고 허리를 잡고 웃으며 합창을 했다. 선생님 별명이 ‘꼬맹이’가 된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그 전부터 별명이 ‘꼬맹이’였다.
점심 시간이면 선배들이 교실에 들어와 설교를 했다.
‘반세기에 빛나는 전통을 이어온 우리 학교는……’ 하고 시작해서 주제는 자긍심(自矜心)을 갖고 큰 포부를 지니라는 것으로 끝났다.
설교가 있던 날은 점심 먹기가 바빴다. 6학년 형들은 별로 없었고 주로 5학년이 설교를 했다.
그런데 2학년들 여럿이 남관 출입구를 모두 막고 점심 시간에 설교를 하려고 들어왔다. 교실 앞뒤를 한 사람씩 지키고 서서 꼼짝 못하게 엄포를 놓은 다음 설교를 했다.
5학년 선배나 똑같이 ‘반세기’로 시작해서 ‘프라이드’까지 주제도 같은데 영 서툴러 듣기가 힘들었다.
‘반세기(半世紀)’라니 50년도 안 넘었는데 무슨 세기(世紀)까지 들추나? 속으로 생각하며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으나 2학년 선배는 웅변 연습만 계속했다.
상급반 형은 점심 먹을 여유를 두고 설교를 마쳤으나, 2학년의 설교는 점심 시간을 다 빼앗아 밥 먹을 시간이 부족했다. 이 설교 행사는 개교 이래 계속 이어온 전통으로, 우리들도 2학년에 오르자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입학해서 얼마 안 되어 운동회가 열렸다. 초등학교 그것도 일제 강점기 때 운동회를 하고 중학교에 들어와 처음 맞이하는 운동회다. 그 후 전쟁으로 못했으니 그것이 학창 시절의 처음이자 마지막 운동회였다.
학부형들도 많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운동회는, 충격적인 이관섭 교장 배척 사건으로 끝났다. 모든 경기를 마친 뒤 마지막으로 가장행렬을 하는데 사건이 벌어졌다.
여러 가지 모양의 행렬이 지나가고 거지들의 각설이타령에 이어 ‘어이어이’하는 곡(哭)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검은 관(棺)짝을 여럿이서 어깨에 메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구경하던 학생이나 부형들 모두가 깜짝 놀랐다. 그 학생들은 모두 6학년인데, 관 위에 덮인 흰 천에는 ‘이관섭지구(李寬燮之柩)’라고 씌어 있었다. 관 뒤를 따라오던 상급생들은 “이관섭은 죽었다. 참신한 교장 선생님을 모셔 오자!” 하고 소리쳤다. 선생님들이 기겁을 하고 이리저리 뛰며 말리고 학생들도 우왕좌왕하는 중에 담임선생님이 어서 곧 해산하여 귀가하라고 했다.
어수선한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월요일 아침 운동장 조례 때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하고 6학년 반장이 구령을 했다. 모두들 본관 옥상에 있는 국기게양대를 주목하고 거수경례를 했다.
줄을 타고 서서히 오르던 국기가 바람에 날리자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日章旗)가 올라가고 있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꼭 3년 만에 보는 ‘히노마루’다.
경례를 하던 학생들은 ‘우!’ 하고 소리를 지르고, 선생님들은 황급히 학생들을 인솔해서 각 교실로 들어갔다.
뒤숭숭한 가운데 교실에 앉아 귀추를 기다리고 있는데 방송이 나왔다.
“각 교실에 계신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을 지금 곧 귀가 조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교문을 향해서 내려가는데 일제 도요다 트럭 한 대가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종로경찰서’라고 쓴 트럭에는 칼빈 소총을 든 수십 명의 순경들이 타고 있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갔으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우리들은 어제 일이 몹시 궁금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우리들이 물어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일은 또 터졌다.
점심 시간에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을 때였다. 본관 옥상에서 한 학생이 무슨 말인지 들리지는 않았으나 소리 지르며 수십 장의 삐라를 뿌렸다. 서너 번에 걸쳐 뿌려대는 종이들이 종이비행기처럼 운동장에 날아 다녔다. 그 때 운동장 한가운데서도 삐라를 뿌리는 학생이 있었다. 그리고는 그 학생을 붙들고 뒹구는 무리와 엉켜서 싸움이 벌어졌다. 곧 상급생들이 그들을 모두 데리고 본관 건물로 들어갔다. 그 삐라는 아침에 등교해서 교실 서랍에서 발견했던 것과 같은 좌익 전단이었다. 그 일도 1학년인 우리들은 영문을 모르고 그 후 어떤 결과가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그 당시 거의 모든 학교에서는 이런 일이 많이 있었다.
시청에서 남대문으로 오다가 염천교로 가는 길목에 3층 건물이 있었다. 그 벽면에 한자로 남로당이라고 써 붙인 것을 초등학교 때 본 일이 있다. 또 그 앞에서는 대동청년단(우익 단체)과 서북청년단(이북에서 내려온 우익 단체)들이 “때려라, 부셔라, 공산당!” “공산당은 빨갱이다! 빨갱이를 때려잡자!” 하며 부르짖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해방 후부터 정부 수립될 때까지 좌익과 우익의 싸움은 격렬했다. 그런 사회적 정치적 혼란상이 그대로 학원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우리 중학교 교가 첫 구절이 다음과 같다.
“이 서울 이름 높은 <붉은 언덕>에 빛나는 역사 오랜 우리 중학교.”
가람 이병기 선생이 지은 가사인데, <붉은 언덕>이 문제였다. ‘붉은 언덕’이란 홍현(홍현)의 우리말이다. 이 곳에 봄이 되면 진달래가 붉게 피어났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 언덕을 ‘붉은 재(고개)’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붉은’ 것은 빨갱이고, 빨갱이는 공산당이니 가사를 고치라는 지시가 위로부터 왔다고 했다. 그즈음에 책도 겉이 붉은색으로 장정된 것을 갖고 다니다가는 파출소에 끌려들어가 심문을 받았다.
그래서 교가의 <붉은 언덕>이 <화동 언덕>으로 바뀌었다. 화동(花洞)이란 마을 이름도 진달래꽃에서 유래된 것이리라.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꽃들을 팔았다고 한다- 편집자)
시월도 하순께였다. 신문과 라디오에서는 여수와 순천에서 국군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연일 크게 보도했다. 그리고 참혹한 학살 사진도 신문 지상에 올라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며칠 결석했던 학생을 담임선생님이 교탁 앞으로 부르셨다. 그리고는 슬픈 일이라며, 이번 반란으로 이 학생의 아버지가 공직에 계셨는데 희생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보다 더 비참한 민족상잔(民族相殘)의 비극이 곧 다가올 줄을 그때 우리는 몰랐다.
(3) 중학 생활
학교 안팎으로 세상은 혼란했어도 우리들은 즐겁고 새로운 것에 설레던 푸른 봄날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명(照明)해 본다.
하나 : 문화행사
<영화>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중앙극장’에 단체로 영화관람을 갔다. 제목이 ‘해연(海燕)’이었다. 내용은 전혀 기억에 없고, 제목만 생각난다.
극장 2층 앞자리로 가서 앉으려는데,
“아 참, 귀여운 것들.”
이화여대 뺏지를 단 너덧 명의 여학생 중에 하나가 내 허리를 잡아 제 무릎에 앉히면서 하는 말이었다. 내가 귀여운 것이 아니고, 새 모자에 새 교복이 여대생에게는 귀여운 것이었겠다. 내 보기엔 여학생들도 1학년 신입생으로 스물쯤은 되었을까? 얼떨결에 잡힌 나는 애가 아니고 이미 나도 남자였다. 그러니 무슨 이야기의 영화였는지, 두 시간도 넘게 무릎에 앉아 있노라니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오페라>
현제명 작곡의 ‘춘향전’이 국립극장(현 서울시의회 건물)에서 공연되었다. 오페라 공연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표라 할 수 있다.
우리 음악 담당인 정영재 선생님이 이방으로 출연하셨다. “사또님 납시오.” 하는 짤막한 대사들이었지만 선생님은 우리나라 바리톤의 제일인자였다.
우리들은 음악 시간에 악보는 계명과 음정을 함께 읽고 부르며 배웠다. 교가도 ‘도미솔솔…’ 하고 배웠고, 음악 시험은 악보를 보면서 계명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 때 시험 본 노래들은 “아! 가을인가”와 “산들바람”이었다. 다행히 집에 오르간이 있어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취주악>
명동에 공연장이 있었는데 이름을 ‘시공관’이라 불렀다.
각 학교마다 취주악대가 있었다. 그 중 우리 학교 관악이 가장 우수했다고 장담할 수 있다. 6학년 양명식 형이 이끄는 밴드부원들이 시공관에서 공연을 했다. 지도 선생님도 없이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을 지휘하고 연주했다. 양명식 형의 명성은 교내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같은 6학년에 박춘석 형도 있었다. 기라성겉아 빛나는 많은 선배들 이야기는 생략한다.
<미술, 사진>
미술계의 거장 박상옥 선생님과 제1회 국전(國展)에 불상 목각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박승구 선생님이 우리들 미술을 지도하셨다. 특히 박승구 선생님은 별관 옆에 도자기요(陶瓷器窯)까지 만들어, 우리들은 진흙으로 그릇을 빚어 가마(窯)에 넣고 자기도 만들었다.
선배 형들의 그림 솜씨도 뛰어났다. 조선호텔 앞에 있던 ‘정자옥’(구 미도파 백화점) 2층에서 미술전람회도 열었다. 사진 찍기를 잘하는 학생들은 직접 인화도 해서 정자옥에서 사진전시회도 열었다.
둘 : 운동경기
학교 수업이 끝난 방과 후에는 운동장이 여러 가지 운동경기 연습으로 활기가 차올랐다. 남관 앞에서는 농구, 농구는 일제강점기에도 여러 번 우승한 경력이 있었던 전통 있는 팀이었다.
서쪽 철봉 가에서는 배구부원들이 토스를 하고 있다. 전국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적도 있고, 그때 서울운동장 제2구장으로 응원을 갔던 일도 있다.
회화나무 아래서는 야구부 캐처가 내야와 외야의 선수들을 향해 파이팅을 외친다.
당시 농협 야구팀의 주장으로 활약하던 야구계의 원로 김영조 씨가 감독으로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야구이기도 하지만 매년 전국대회에 우리 학교가 출전하여 항상 응원하러 다녔다. 봄에는 조선일보의 청룡기, 가을에는 동아일보의 황금사자기 대회 결승전에 우리 야구부가 올라갔다. 그러나 한 번도 우승을 해 본 적은 없다.(2000년 제54회 황금사자기 대회에 처음으로 우승한 적이 있다.) 늘 부산의 경남중학교에 패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김영조 감독이 인천 동산중학에서 투타에 뛰어난 박현식을 특별히 발탁해 왔다. 그러나 대회에는 한번도 참가하지 못하고 박 선수는 자퇴하고 동산학교로 돌아갔다. 그 당시 대부분의 학교에서 운동선수들은 조례만 참석하고 운동장이나 각 연습장으로 가서 운동만 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수업을 마치고 운동을 했다. 선수라고 예외는 없었다. 교실에 앉아 있는 박 선수를 생각하면 이해가 간다. 거의 교실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이 그것도 수재들과 하루 종일 보내자니 보통 고민이 아니었을 것이다. 두 달 만에 그 생활이 끝났다.
우리들은 그 소식을 듣고 아쉬워했고, 그 뒤 곧 열린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또 경남중학에 우승을 내주고 말았다.
운동부는 전 종목에 걸쳐 두루 다 있었다. 럭비도 일제강점기 때부터 유명했고 우승도 했다. 축구, 권투, 레슬링, 유도, 역도, 육상, 빙상, 승마 등 공부만큼 운동도 열심히 했다.
셋 : 특별활동
운동 종목보다 더 많은 여러 가지의 특활반이 활발했다. 그것이 우리 학교의 자랑이고 특징이었다. 오랜 시간을 두고 선배들로부터 이어온 전통이기도 한 각 특활반은 번잡할 정도로 많다. 그 많은 반을 열거하기는 어렵고, 신입생인 우리들에게 관심이 있었던 몇 개 반만 소개한다.
1학년이 흥미를 갖는 반은 산악반이었다. 방과 후 본관 건물 옥상에서부터 로푸를 타고 오르내리는 모습이 멋있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들어갔다.
비행기 모형을 만들고 띄어보는 항공반도 좋았고, 밴드부에도 많이 들어갔다. 야구, 배구, 농구 등 운동부에 들어간 아이들은 아직 어려 심부름만 했다.
홍원식 선생님이 지도한 생물반도 많이 지원해서 주말이면 야외로 식물채집을 나갔다.
학년이 올라 나도 문예반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도서반이 본관 1층 교실에 새로 생겨서 찾아갔다. 그러나 책이 아직 구비되지 않아 도서관이 빈약했다.
별관 2층 한 교실에 ‘문예반’이란 표찰이 달린 방으로 들어갔다.
반장인 6학년 신동준 형이 새로 나올 교지(校誌)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지도교사는 이원혁 선생님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번도 뵌 적은 없고 5,6학년 형들이 주관해서 책을 만들었다. 그때 “文藝경기”라는 이름으로 교지가 창간되었다. 신동준 형이 미술반 반장도 겸하고 있어서 표지와 컷 등, 모두 형이 맡아 했다. 단편소설 ‘땅바닥’도 썼다. 이십 안짝의 나이에는 누구라도 그랬듯 어렵게 쓰려고 노력한 흔적이 뚜렷했다. 그래서인지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글과 그림에 뛰어난 신동준 형은 동아일보에서 오랫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文藝경기’는 2호까지 간행되었다.
(4) 김구 선생님의 서거
1949년 4월 봄, 각급 학교마다 학도호국단이 생겼다. 교련 시간도 새로 생기고, 중위 계급장을 단 배속 장교가 우리학교에도 왔다. 세 명의 배속 장교 중에서 백(白)교관이 우리 교련 담당이었다.
딱 벌어진 어깨에, 웃음을 지을 때 눈가에 잔주름이 더 멋있는 교관이었다. 배속장교 중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수료하여 우리학교로 배치되었다고 한다. 세 교관 중에 인기도 가장 좋았다.
매주 월요일마다 교련조회를 했다. 군대식으로 사열을 하고 취주악대의 행진곡에 맞춰 분열을 했다. 다리에는 각반을 차고, 허리에는 요대를 둘렀다. 상급반 형들은 일제강점기 때에 사용하던 목총을 어깨에 메고 행진을 했다.
학도호국단 간부들은 제주도를 다녀와서 작년(1948년) 4월 제주에서 일어난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와 그 고장의 이색적인 풍물을 들려 주었다.
교련 시간과 반공영화를 통해서 반공교육이 날로 강화되었다.
6월 24일 일요일 용산 철도도서관에서다. 노는 날이면 자주 가던 철도도서관에서 기막힌 소식을 들었다. 방금 라디오에서 긴급 뉴스라고 하며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님이 암살당하셨다.’는 것이다.
도서관 직원이 열람석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례를 깨고 알려 준 말이다.
다음 날 조간신문에 김구 선생님의 서거 기사가 큰 사진과 함께 전면을 뒤덮었다. 작년 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 회의에 김구 선생은 김규식 선생과 함께 참석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민족의 분할을 초래하는 일이라고 김구 선생은 반대했다. 선생의 평양행을 만류하는 사람들이 경교장 문앞을 가로막았으나, 선생은 뒷문을 통해서 38선으로 향했다.
그때 ‘38도선’이란 표지판을 배경으로, 입북하기 직전에 김구 선생 일행이 찍은 사진을 신문에서ㅜ본 일이 있다. 그 사진 옆으로는 ‘남북협상에 실패하면 이 38선을 베개 삼아 죽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선생 말씀이 큰 제목과 기사로 실려 있었다. 그러나 선생이 평양에 도착하기도 전에 회의는 시작되었다. 선생은 결과적으로 김일성의 잔치놀이에 농락당하였다.
김구 선생이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왜경들이 그렇게 체포하려고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해방된 조국 땅에서 현역의 육군 중위에게 암살을 당했던 것이다.
우리의 애국자를 우리의 손으로 죽인 것이다. 나는 해방되던 해 여름, 일본인 학교 관사에서 경사(京師) 학생이었던 선생님 이야기가 생각났다. 우리 민족이 단결심도 없고, 지도자의 자질(資質)도 부족하다고 우리를 깎아내리던 말이 사실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7월의 무더운 여름날. 백범 김구 선생님은 국민장(國民葬)으로 모셔졌다. 기거하시던 서대문 경교장에서 출발한 상여는 광화문 네거리를 돌아 덕수궁 대한문 앞을 지나 남대문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라디오에서는 경교장의 상황과 그 분위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상여의 앞뒤를 따르며 중계방송을 하였다.
숭례문을 거쳐 서울역으로 내려선 상여는 용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집에서 라디오 중계방송을 듣고 있던 나는 용산경찰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거리는 한산하고 전차도 다니지 않았다. 아니, 다닐 수가 없었다. 서울의 중심 거리가 모두 통제됐고, 상여가 지나는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내가 용산경찰서 앞에 이르렀을 때 마침 국민장 행렬의 선두가 원효로 1가 선린상고 입구를 지나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전찻길 양편으로는 사람들로 빈틈이 없었다.
커다란 백범 선생의 영정을 두 사람이 들고, 색색의 만장(輓章)을 학생들이 들고 걸었다. 그 뒤로 화려하게 꾸며진 상여가 거리를 메웠다. 상여 앞과 뒤로 두 줄씩 넉 줄의 긴 줄을 수백 명이 붙들고 따랐다.
백범 선생의 영구(靈柩)는 효창공원에 안장되셨다.
(5) 칠순(七旬)의 소년들
학년 초가 6월로 바뀜에 따라 5월에 2학년도 끝났다. 그러니까 지난 가을에 2학년이 되어 겨울방학이 지나고 봄이 되니 3학년이 된 것이다.
각 교과목의 진도도 끝나지 않았는데, 수업은 안 하고 전교생들이 학년별로 견학을 다녔다.
6월 1일, 3학년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지난 봄에 맹주천 교장선생님이 새로 부임했다. 이관섭 교장선생님 후임으로 서울문리대 사학과 교수 김종무 선생이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1년도 안 되어 사임했다. 원흥균 장학관이 두어 달 교장서리로 있었다.
맹교장 선생님은 경기 선배로 체육교사인데 경기상업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다 오셨다. 2년 사이에 교장선생님이 여러 번 바뀌었다.
3학년 1반인 우리 반은 본관 2층이었다. 그 동안 우리들은 언제쯤이나 본관 건물에서 공부해 볼까 하고 무척 기다렸다.
1학년 때 운동장 조례가 끝나고 선생님이 ‘각 교실로 행진!’ 하고 구령을 하면 1학년은 남관을 향해서 뒤로 돌아섰다. 그러나 6반은 반장 안한식이 앞장을 서서 본관으로 향했다. 비록 본관 1층 동쪽 출입구에 있는 교실이지만, 남관에서 공부하는 우리들은 6반을 부러워했다.
입학시험을 볼 때 2층 교실에 들어갔었으나 그때는 긴장되어 바깥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이제, 2층 교실 창가에 앉아 창 밖을 보니 종로에서 제일 높은 화신백화점이 눈앞에 들어왔다. 그 뒤로 남산자락이 아늑하니 장안을 감싸 안은 모습이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런 감상은 며칠 못 갔다. 그 달 25일, 끔찍한 민족의 참상을 야기한 포연(砲煙)과 함께 우리들의 중학생활도 끝났다.
70을 넘어 80에 가까운 지금도 우리 중학교 동기들은 어느 모임에서나 만나면 서로 1학년 때 몇 반이었는가를 자주 묻는다. 그것은 우리의 중학생활이 거기서 정지해 있기 때문이다. 1학년 시절은 뚜렷한데, 그 이후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더구나 20여일밖에 다니지 않은 3학년 때를 얘기하면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
1948년 9월에 입학해서 1950년 6월까지 겨우 1년 9개월 만에 우리들은 ‘붉은 언덕’에서 영영 떠나고 말았다. 그것도 두 번의 겨울방학과 한 번의 여름방학 기간을 빼면 화동 교사(校舍)에서 지낸 세월은 일 년 반밖에 되지 않는다.
1953년 휴전 이후, 정부가 환도하였으나 영국군의 통신대가 화동 우리 학교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래서 광화문에 있는 덕수초등학교 선물의 한편을 빌어 수업을 하였다.
3년 만에 우리 동기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고3이 된 우리들은 대학입시 준비로 교우(交友)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우리들 학창시절의 추억은 남관(1학년)과 서관(2학년)에만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운 좋은 친구들은 부산 구덕산 천막교실에서 공부했지만, 그 밖의 다른 친구들은 피란 중에 그 고장 학교를 다니다가 덕수초등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수십 명의 친구들은 환도 후에도 서울로 오지 못하고 그 곳 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들과는 영 이별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동기들은 백발에 만나서도 화제(話題)는 항상 열네 살 소년시절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우리들 졸업 회기가 50회인데, 졸업 후 50년과 우리 나이 칠순(七旬)을 기념하는 모임을 지난 2004년 5월에 가졌다.
50여 년 만에 만난 그 친구들은, 2학년 때 내가 노는 시간에 재미있게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나는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어렴풋한 안개 속에 문학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내 모습은 아니었다. 그들이 말하는 사연의 기억이 내게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3학년 때 담임은 김동일 체육선생님이다. 럭비공을 ‘늑비공’이라고 경상도 사투리를 많이 쓰던 키가 작은 분이었다. 반 친구로는 조성호 군을 기억한다. 바로 옆에 앉았는데 그의 형도 승월이 형과 같이 배재학교 6학년 한 반이었다.
조성호도 전쟁으로 헤어졌다가 칠순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그러니까 3학년을 기억하는 친구는 우리 둘뿐, 대부분 동기들에게‘우리의 3학년’은 전쟁과 함께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