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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필에 대하여..
조용필(趙容弼, 1950년 3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대중 음악가이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기타리스트로 데뷔했으나, 1976
년 발표한〈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첫 앨범 [창밖의 여자]는 100만장 이상 팔린 단일 앨범이다.
대한민국 가요계 최초로 오빠부대를 이끌고 다니기도 했으며, 80년대
에는 일본 가요계에 진출하여,1986년 일본 발매 앨범 [추억의 미아1]
100만장 판매로 골든디스크를 수상하였다. 1994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음반 판매량 1000만장을 기록했다.
▒▒▒ 약력 ▒▒▒
◈ 어린 시절
대중 앞에 나서서 노래 부른 기억이 거의 없는 평범한 소년이었던
그는 어느날 맹인가수 레이 찰스의 목소리에 감명받아 팝음악광이
되었고, 내한공연을 한 벤처스의 [상하이 트위스트],[파이프라인]
[불독]등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매료되어 기타를 배우게 된다.
염전업을 하던 아버지는 경기도 화성군의 송산 중학교 설립자로 교
육자 집안에 연예인이 나오는 것을 몹시 반대했다. 그러나 반대가
심할수록 그의 결심은 굳어져갔다. 대입준비 대신에 음악학원을
드나들던 그는 졸업하자 마자 뜻을 같이한 친구들과 가출해 [애트
킨즈]라는 밴드를 만들었지만 멤버들의 가정사정으로 곧 해체된다.
◈ 화이브 핑거스 시절
혼자가 된 조용필은 다시 문산 근처 기지촌 무명밴드에서 연주를 시작
한다.그러다가 69년초 [화이브 핑거스]에 스카웃돼 미8군무대에 서게
된다. [화이브 핑거스]는 당시, 실력있는 밴드들의 집합소였던 이태원
까지 진출한 인정받는 팀이었다.
그러나 1년반 동안의 활동은 집에서 형이 그를 찾아오는 것으로 마감
됐다. 그러나 [화이브 핑거스]의 활동은 제임스 브라운, 윌슨 피케트,
템테이션 등의 흑인음악에 심취하게 된 가수으로서 커다란 전환점이
됐다.
◈ 김트리오 시절
1971년 조용필은 김대환, 최이철과 함께 [김트리오]로 활동한다.
그는 최이철과 투 기타 시스템으로 기타와 보컬 부분에서 선의의 경쟁
을 하며 실력을 쌓아갔다. [김트리오]는 수준급 밴드로 인정받았고 이
듬해 [사랑의 자장가],[하얀모래의 꿈],[님이여]등 6곡이담긴 앨범을
출반했으나 발매가 되지 않아 기념음반이 되었다. 이때 그는 프리재즈
를 하던 강태환에게 청음을 배우기도 했다. 1972년 김대환이 재즈를
하겠다며 손을 떼면서 팀이 해체된다.
◈ 싱글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러다가 군복무를 마칠 때 쯤 킹 레코드사로부터 취입 제안을 받는다.
그래서 발매 된 것이 1976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다.이 곡은 1972년
초 [김트리오] 시절 통기타를 연주하며 불렀던 곡이었는데 당시 4분의
2박자 [뽕짝]이었던 것을 젊은 취향의 4분의 4박자로 편곡, 국내 최초
의 트롯고고를 시도한 것이었으나 처음엔 반응이 시원찮았다. 그러다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마침 재일동포 모국 방문으로 그 인기를
더했다. 그렇게 부산에서의 인기가 서울로 올라오며 전국을 휩쓸었다.
◈ 대마초 사건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 연예가를 휩쓸었을 때 조용필 역시 구속되
었다. 과거에 뭔지 모르고 피우다 알레르기 반응이 생겨 곧 중단하긴
했어도 대마초를 몇 차례 피웠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죄가 경미해 활동금지는 면했었지만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인기가수
대열에 서자 과거 경력이 다시 문제가 되었고, 결국 다른 가수들처럼
1979년 완전 해금까지 활동금지가수가 된다.
◈ 조용필 1집
완전 해금 얼마 후, 동아방송 라디오 주제가 였던 [창 밖에 여자]를 만
들고 전속이던 지구레코드에서 앨범 준비에 들어간다. 그룹이름도 [조
용필과 그림자]라는 어두운 이름 대신 [위대한 탄생]으로 바꾸며 이미
지를 쇄신했다.
1980년 3월에 발표한 1집 [창 밖의 여자]는 평론가에게 현악기나 관악
기를 배제하고 신세사이저를 적극 사용한 것이 신선하다는 평을 받았으
며 [창 밖의 여자]와 [단발머리] 등 대부분의 곡이 히트를 하여 조용필
을 단숨에 국민가수로 부상시켰다.
◈ 조용필 2집
1980년 12월 발매한 2집은 1집만큼은 히트하지 못했지만, KBS드라마
[축복]의 주제곡[촛불]이 가요순위프로그램에서 수주간 1위를 차지했
었고,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간양록] [잊기로 했네] 등이 좋
은 반응을 얻었다. 지구레코드의 압력이 많이 미쳤던 2집은 음반회사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음반이 되었지만 조용필은 2집은 정규앨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조용필 3집
1981년 1월1일 발매한 3집에서부터 그는 꿈꿔왔던 사운드를 구현하기
위해서 정진하기 시작한다. 애당초, 그는 비록 1,2집에서 트로트 곡을
히트시켰지만 3집에서는 트로트를 넣지 않겠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주변의 압력으로 결국에 [미워 미워 미워]를 부르게 됐는데 그
곡은 히트했다. 그가 원래 하고 싶었던 음악은 록이었다. 3집에서 선보
인 [고추잠자리] [여와 남][물망초] 등의 곡들은 1집의 것들보다 자신
이 목표로 했던 사운드에 진일보 한다.
1집에서의 핑크 플로이드의 특징적 요소를 가져다 쓰는 어설픈 모방에
서 나아가 자신이 목표로 하는 핑크 플로이드 풍의 웅장하고 화려한 사
운드에 한발 더 접근한 것이다. 사운드 뿐 아니라 메시지도 보다 충실히
담기 위해서 노력했다.
◈ 조용필 4집
1982년 5월에 발매된 4집에서는 자신의 가출시절을 노래한 [못찾겠다
꾀꼬리]와 [생명], [자존심], [비련] 등이 담겨있다. 4집은 3집에 비해
앨범이 보다 록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3집의 [고추잠자리]가 록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한 것이었다면 [못찾겠다 꾀꼬리]는 자신감의 획득이
었다.
이 시기에 그는 록을 자신의 음악적 목표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조용필은 점점 록의 색채를 강화시켜나갔지만 위대한 탄생의 멤버들의
연주실력은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보다 웅장하고 스케일이
큰 록정신이 충만한 사운드를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4집을 마지막으로
멤버 전원이 교체된다.
◈ 음악 활동
조용필의 음악은 시간이 흐르면서 항상 진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그것
은 민요, 락, 성인 가요 등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그의 탁월한 보컬실력
과 편곡 능력이 뒷받침 되어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보컬이라는 측면에서, 70년대에는 단순한 미성을 구사하였다가 70
년대 말에 판소리에 바탕을 둔 탁성을 구사하게 되어 다양한 음색과 탁월
한 기교의 표현이 가능해졌다. 80년대 초반에는 다양한 기교와 성량을 내
세우는 곡들이 많았다.
(창밖의 여자, 한오백년, 생명, 자존심, 민요메들리 등등)
80년대 중후반에 가면서 기교가 줄고 대신 탄탄하게 다져진듯한 발성을
주로 이용하게 된다. (미지의 세계, 그 겨울의 찻집, 떠나가는 배 등등)
90년대 들어와서 그의 보컬 스타일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시대가 변하면서 가수 자신과 정서와 대중들의 정서 변화, 그리고 일본
활동에 따른 여러 요인들의 영향으로 보인다. 감정을 감싸안으면서 절제
하는 듯한 창법으로 새로운 보컬 스타일을 확립하였다. (창밖의 여자 97
년 녹음, 슬픈 베아뜨리체, 꿈, 바람의 노래 등등)
음악도 항상 새로운 것을 선보였다.
우선 1집의 [단발머리]는 당시 한국에선 들을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사운드였다. 3집의 [고추잠자리]는 최초의 퓨전음악이라고 볼 수 있으
며, 4집의 [자존심]은 국악식 리듬과 판소리 창법에 기반을 둔 탁월한
한국식 로큰롤이다. 7집에 이르러 조용필 음악의 한 정점에 도달하는데,
키보드를 중심으로한 탄탄한 사운드와 절제되어 있는 힘있는 기타 간주
를 기반으로 한 그만의 독특한 편곡 방식이 확립된다.
10집 part I에선 퓨전재즈의 영향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가락은 조용필 식의 가락으로 남겨두고 편곡과 화성에서 재즈의
공식을 도입하여 한 장르에 메몰되지 않는데 성공하였다. 10집 part II에
선 20분에 달하는 대곡인[말하라 그대들이 본 것이 무엇인가를]을 발표
한다.
12집에선 [추억속의 재회]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해바라기]에서
보이는 밝은 분위기의 새로운 스타일에 도전하였고, 13집, 14집에 와서
그는 다시금 정점에 도달하게 된다.13집, 14집은 그의 음반들 중에서도
특히 심도있게 다뤄져야하는데,이는 장르가 느껴지지 않는 그만의 독특
한 음악들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Michael Landau 등 호화 외국 세션으로 이루어진 13집은 그의 후기
사운드 확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3집은 록을 기반으로 하지만 재
즈의 어법과 라틴음악의 영향도 느껴진다. 14집은 클래식에 대한 관심
이 드러나는 음반이었다.
15집은 상당한 완성도를 지진 가요 음반이었으나 상업적으로 실패하고,
14집과 13집이 섞인듯한 16집에서 다시금 농익은 사운드를 들려주었다.
17집에선 단순하고 편안한 편곡이 강조된 음악을 발표하였고,18집에선
뮤지컬과 오페라의 영향이 짙은 음반을 발매하였다.
◈ 대표곡들..
돌아와요 부산항에
고추잠자리
모나리자
단발머리
비련
허공
친구여
못찾겠다 꾀꼬리
꿈
창밖의 여자
킬리만자로의 표범
여행을 떠나요 등등...
▒ 모두를 제압하는 그 이름, 조용필---
조용필은 가왕, 황제 그리고 밴드이름 '위대한 탄생'이라는 명칭에서
느껴지듯이 도저히 깨뜨릴 수 없는 그리고 성역과도 같은 한국 대중
음악의 거대한 축이다.
신중현, 이미자 등 장르의 거인들만이 차지하는 이 자리에 80년대 그
자체를 지배해버린 조용필이 차지해야 하는 공간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 무수히 많은 히트곡 퍼레이드를 차치하고서라도, 지금도 매진사태를
가벼이 기록하는 그의 공연장에 세대를 넘나드는 엄청나게 다양한 연령
대의 팬들은 그가 얼마나 암묵적으로(위로부터의 폭압에 의한 것이
아닌) 대중들에게 카리스마를 발휘하는가를 웅변하는 모습일게다.
여전히 많은 후배 뮤지션들이 앞다투어 그의 곡을 리메이크하는 것과
우리네 부모님 세대가 가끔 명절 때 특집으로 나오는 조용필의 특집
콘서트 방송에서 리모컨을 돌리지 못하는 것은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자
의 힘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메이드 인 코리아'로서의 뿌듯한 자부심인
것이다.
◈ 부정할 수 없는 전설의 시작 [창밖의 여자]
[창밖의 여자]는 18장의 정규앨범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편집음반과 베스트음반을 발매한 조용필 역사의 시작이다.
그러나 단순한 뮤지션이 갑작스레 세상을 향해 발표한 데뷔앨범이라
보기 힘든 것은 이미 경동고를 졸업한 60년대 말엽부터 꽤나 언더그라운
드에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느덧 음악인생 40주년이라
는 말이 붙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솔로 1집이라는 형식은 한국나이 서른에 나왔지만, 이미 약관의 나
이부터 활동을 시작한 그에게 솔로 데뷔앨범 [창밖의 여자]는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베테랑 뮤지션으로서의 야심찬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초기 조용필의 곡들이 트로트풍의 곡이라 하여 그 가치를 폄훼하는 사람
들이 있지만 이는 다소 위험한 발상이다. 대학가요제와 80년대 세계적인
뉴웨이브 물결 이전에 국내대중가요를 대부분 잠식한 것은 물론 트로트
이지만 이는 트로트가 다른 장르를 저해한 것이 아닌 군사정권시절의
그릇된 문화정책으로 인해 여타 장르가 숨을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그 시절 대중성을 의식해야하는 뮤지션이라면 트로트라는 장르
는 충분히 자기의 능력을 발휘하여 대중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매
체이다. 조용필은 그런 것을 잘 활용하였고, 탁월한 멜로디 메이킹을
이용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전체적인 구성은 트로트풍의 곡들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그러나 밴드음악에 익숙하고 실제로도 외국에 나가면 한번에 수백장의
앨범을 구입할 정도로 새로운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조용필이기에
'단발머리'와 같은 앨범 전체적으로 유난히 튀는 곡들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대중적 관심이 멜로디를 흥얼거리기 쉬운 트로트이기에 여기에
포커스를 맞추고 로큰롤 형식의 새로운 음악을 대중에게 선사해보겠다
는 황제의 초기 마인드로 해석을 해보는 건 어떨까.
[창밖의 여자]의 대표적인 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이미 이 앨범이 만들어지기 수년전에 만들어졌다.
바다의 도시 부산을 표현해내는 듯 저음의 신디사이저 소리가 뱃고동을
연상시키는게 다소 노골적이기까지 한 이 곡은 떠난 연인이 돌아오기를
읍소하는 처연한 내용이지만 수 십 년이 지난 지금 남녀노소 누구나
쉬이 흥얼거릴 수 있는 국민가요 중의 가요다.
건반을 이용한 심플한 구성이 돋보이는 단조곡인 셀프타이틀 '창밖의 여
자'는 조용히 점진하여 강하게 호소하는 보컬이 매력적인 곡으로서 조용
필 특유의 창법을 제법 음미할 수 있는 곡이다.
중간부분의 기타 솔로부분은 당시에 국내에서 유행하던 낮은플랫을 활용
한 단순한 멜로디이지만 오늘날 들어도 굉장히 인상적인 것이 감칠맛이
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창밖의 여자]에서 가장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단발머리'는 그야말로 가장 주목할 만한 곡이다. 그 위대한 멜로디 메이
킹은 훗날 서로들 리메이크를 해 갈 정도로 시대를 앞서갔다.
독특한 그루브감이 전체적으로 비장한 곡들로 채워진 이 앨범에서 그야
말로 같은 사람이 부르는게 맞나하는 의아함마저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
니크하다. 이미 밴드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음악에 익숙한 조용필이 시대
에 앞서서 다소 빈약한 장르음악에 허덕이던 대중들에게 선물한 '펑키'
뮤직의 한 장이기도 하다.
훗날 '고추잠자리'라는 곡에서도 유감없이 느낄 수 있지만 진성과 가성의
경계선상을 유유자적 넘어가버리는 조용필의 능수능란함은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조금도 빛바램이 없다.
'한 오백년' 또한 조용필의 절창을 만끽할 수 있는 곡이다.
초, 중, 고 시절에 음악수업때 접했을 법한 지방 아리랑이 바탕이
된 이 민요가락을 고유의 느낌을 거의 해치지 않은 채로 편곡을
했는데, 우리민족 특유의 한서린 정서를 보컬로서 표현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풀이된다.
트로트 장르 특유의 [꺾기]라는 창법이 있는데 오늘날 다소 감정의
전달이라는 본래 의미에서 퇴색한 채 기교의 형식으로 전락해버린
감이 있는데, 이 조용필의 '한 오백년'은 꺾기에서 이어지는 그 흐
드러짐이 구성지기도 하거니와 듣는 이를 넉 다운 시켜버릴 정도다.
'잘 있어라 나는 간다~'라는 소절로서 너무도 유명한 안정애 원곡의
'대전부르스'는 조용필의 새로운 해석이다.
당시에 트로트 일색이던 대중가요 판도속에서 조용필 역시 트로트를
기반으로 하는 곡들을 대거 발표하였다. [창밖의 여자]도 대부분 트로
트 성향의 곡들이지만 여기에는 분명 '단발머리'같은 곡도 존재한다.
이러한 시도는 나중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서 '여행을 떠나요', '모나
리자', '고추잠자리'같은 곡들의 탄생을 이끌어냄으로써 트로트, 록,
어덜트 컨템포러리 때로는 프로그레시브한 팝까지 조용필은 그야말
로 장르를 넘나드는 대중음악의 역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창밖의 여자]는 그런 황제의 첫 발돋움 치고는 이미 수 십 년 동안
위력이 지속될 핵폭탄급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 조용필 / 전 세대를 아우르는 진정한 국민가수의 표상(表象)
국내에서 조용필(58)을 얘기할 때 빼놓지 말아야 할 3가지 특징이 있다.
히트곡을 가장 많이 보유한 노래 잘하는 가수라는 점, 앨범이나 무대에
서 '최고'의 수식어가 붙을 만큼 웰메이드 작품을 선사한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이가 들수록 음악을 보는 시각이 예리할 뿐 아니라
진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용필은 언제나 그렇듯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거창한 말이나 그럴듯한 미사여구로 남을 감동시키는 재주는 없는
듯하다. 그런 특징은 그의 음악을 쏙 빼닮았다. 기교를 앞세운 보컬로
듣는 이를 순간적으로 현혹시키거나, 포장된 사운드로 청자의 머리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부르되, 자신만의 해석을 담고 머릿속엔 오로지 음악만을
담고 사는 외골수의 음악인생. 그것이 40년 그의 음악인생이 지금까지
생명력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아니었을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지난 9월22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아 펼치는 전국 콘서트
중 상반기 투어가 마무리되고 있는 시점의 그는 여유로워보였다.
100대 명반에 두개의 앨범이 뽑혀 인터뷰를 진행한다는 기자의
설명이 이어지자, 그는 "1집과 7집?"하며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간혹 수록된 곡을 정확히 파악하기위해 옆에 있던 어쿠스틱 기타를
잡고 즉석에서 반주하며 노래하기도 했다. 국내 최고의 가수가 사석
에서 무대에서도 듣기 어려운 숨겨진 곡을 라이브로 들려주다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영광인가.
▒▒▒ [인터뷰] ▒▒▒
김고금평 : 하반기 투어까지 너무 힘든 일정 아닌가..?
조용필 : 일주일에 한번인데, 뭘. 안하면 더 심심하다.
김고금평 : 1집과 7집이 100대 명반에 뽑혔다. 아쉽거나 서운한
점이 있을 듯하다.
조용필 : 하하. 내 시각하고 대중의 시각이 다르고, 또 평론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앨범
들이어서 크게 서운한 점은 없다.
◈ 새로운 사운드에 대한 대중의 무의식적 갈망을 풀어준 셈
김고금평 : 1집(1980년 발표)이 뽑힌 것에 대해 본인의 시각은 어떤가..?
조용필 : 그 시대에 새로운 사운드를 투영했다는 점에서 아마 점수를 준
것 같다. 특히 그 앨범의 여러 곡(창밖의 여자/돌아와요 부산항에/단발
머리/한오백년/정 등)이 히트됐다는 것이 주목받지 않았을까. 그 시절에
는 장르를 따지지 않을 때였다. 가수라면 이것 저것 다 해봐야했던 시기
였고. '한오백년'도 대마초로 공백기를 가졌던 시기(1970년대 후반)에 판
소리와 창을 연마해서 넣었던 새로운 시도였다. 몇 년 동안 쉬면서 경험
했던 다양한 장르를 1집에 투영한 셈이었다.1집에는 내가 생각한 새로운
방식의 작곡(창밖의 여자, 단발머리)들도 있었고, 다른 사람의 곡들도 있
었다. 그때 LP라는 개념은 지금의 인터넷 매체와는 아주 다른 거였다.
LP를 사면 여러곡을 편하게 들을 수 있었으니까. 음악 네트워크가 그때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레코드 가게가 우리나라 어디
에든 있었으니까. 거리를 지나가다 음악을 듣고, 또 집에 가면 TV나 라디
오를 통해 음악을 계속 접했다.
김고금평 : 1집은 음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양한 면에서 의미가 있는
앨범인 것 같다.
조용필 : 맞다. 전두환 정권으로 바뀌면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는 분위
기가 당시 사회에 만연했다. 아마 음악도 그런 면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
을까. 사실 1집은 내 생각엔 3집이나 4집쯤 됐어야하는거다. (71년 경음
악 앨범, 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님이여' 등 발표) 전의 앨범들은 사실
독집이라고 보기 어려우니까 뺀 건데, 음악적인 성숙도로 보자면 3, 4집
낸 가수의 역량이 1집에 있었다고 봐야한다. 1집은 그룹의 악기편성을
확 바꾼 앨범이었다. 키보드도 달라졌고, 전자 악기의 쓰임새도 달랐다.
특히 건반쪽이 많이 달라져서 '단발머리'같은 실험적인 곡이 나올 수 있
었다. 기타의 액세서리도 달라져서 새로운 사운드를 대중들이 맛볼 수
있었다. 많이 달라진 사운드에 대중이 새롭게 느낀 것 같다.
김고금평 : 1집에는 트로트풍의 곡이 상대적으로 많았지만,'단발머리'라
는 곡때문에 조용필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어떻게 작곡하게 됐는가.?
조용필 : 잠재적 리듬감이랄까. 당시 외국 음악을 많이 듣다 보니까,일상
적인 코드 대신 새로운 코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여러 음악을 접하면
서 내 무의식속에 잠재적으로 그런 개념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난 우리
나라 음악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강했다.베이스 패턴도 그렇고
기타 코드도 그랬다. 그래서 가요쪽에 당시에는 쓰지 않던 메이저 세븐
코드를 사용했다.(이 부분에서 조용필은 어쿠스틱기타를 들고 '단발머리
'에 쓰인 메이저 세븐 코드들을 일일이 짚어가며 설명했다) 70년대만 하
더라도 틀에 박힌 걸 많이 사용했는데, 이른바 '패밀리 코드' 5, 6개로 모
든 음악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다른 코드로 승부를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이 세븐 코드를 '단발머리'에 적용해 리듬과 멜로디를 완성하
게 된 것이다.
김고금평 : '창밖의 여자'는 자다가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서 5분만에 쓴
곡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조용필 : 하하하. 그건 아니다. 대마초 관련해서 풀려 난 후 어느 날 라디
오 PD에게서 드라마 주제곡을 만들어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래서
가사를 받고 영감이 떠올라서 만들었다. 곡을 순식간에 만든 건 맞다.
김고금평 : 기타뿐 아니라, 피아노로도 작법을 꽤 많이 하지 않았나.
조용필 : 피아노도 혼자 독학해서 많이 작법을 하긴 했다. 하지만 기타와
키보드의 작법은 다르다. 키보드는 코드 위주로 작법을 하고,기타는 리듬
위주로 작법을 하는 식이다.내 생각에 록은 기타리스트가 만드는 것이다.
김고금평 : 1집에 알려지지 않은 다른 수록곡들에 대해 설명해달라.
조용필 : '잊혀진 사랑’이란 노래는 김희갑씨가 만든 곡이었는데, 내가
그런 풍의 곡을 만드는데는 좀 약하다. '정'같은 곡은 우리나라 연령있는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하는 명곡 아닌가. 세대를 막론하고 거부감이 없는
곡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블루스 곡을 쓰고 싶어서 만든 '슬픈 미소'는
블루스 곡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곡이다. '너무 짧아요'는 70년대 초반
이미 만들어놓은 곡이다. 1집은 사실 자의반, 타의반으로 낸 앨범이었다.
지금은 내가 곡을 받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넣지 않는다.
조용필이 [국민가수]로 추앙받는 것은 그의 노래가 특정 연령층에 국한
되지 않고, 모든 세대를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단발머리]를 듣고 10대
들이 미친듯이 따라부르고, [고추잠자리]와 [못찾겠다 꾀꼬리]를 들으
며 20, 30대들이 청춘을 불사르며, [그 겨울의 찻집] 등을 들으며 40대
이상 중장년층이 열광하는 것이 바로 그 징표들이다.하지만 정작 조용필
은 [국민가수][작은거인][가왕][슈퍼스타] 같은 칭호들을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
수식이 과장을 낳는 [신화속 이미지]에 갇히기 싫다는 이유때문이다.
그는 [그냥, 가수 조용필이 나에게 딱 맞는 표현]이라고 했다.
◈ 음악적 충격을 받지 않으면 창작의 욕구 나올 수 없어..
김고금평 : 역시 좋은 곡과 히트 곡을 많이 발표하니까
국민가수라는 칭호가 생기는게 아닌가~?
조용필 : 창작이라는 문제를 얘기하자면 음악적 충격을 받지 않으면 창작
할 수 없다는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충격을 받아야 [나도 저런 노래를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거다. 그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면 내 음악
도 낼 수 없는 것이다. 많이 듣는 건 뮤지션에게 아주 필수적인 요소다.
뮤지션들의 곡 만드는 스타일이 다 다르기 때문에 음악을 전체적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김고금평 : 작곡가로서 다른 이에게 곡을 준 적이 없는 것 같다.
조용필 : 사실 내 곡 만들기도 바쁘다. 남에게 주려면 좋은 곡을 만들어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음악은 그냥 되는게 아니지 않는가. 여러 가지를 생
각해야된다. 곡을 줄 때, 부를 가수의 톤과 음역을 생각해야되는 등 고심
해야하는 부분들이 있는 것이다. 요즘 노래들이 다 비슷하게 들리는 건
아마 그런 이유(기계처럼 뚝딱 만들어내는 습관적 작법) 때문 아닐까..
김고금평 : 7집(1985년 발표)은 3곡을 빼고는 모두 본인이 만들었다.
조용필 : '프리마돈나''들꽃''사랑하기 때문에'만 빼고 다 내가 만들었다.
리듬감이 풍부한 곡들이 많은데, 대부분 기타 위주의 곡이다. '미지의 세
계' 같은 곡은 제목처럼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달리는' 걸로
가야했다. '사랑하기 때문에'는 유재하의 곡인데,당시 우리 밴드 '위대한
탄생'의 세번째 키보디스트였다.'너도 곡을 써야 클수 있다'고 말했더니,
이 곡을 가져왔더라. 첫번째 키보디스트였던 김광민이 재하를 데려왔는
데, 곡 쓰는 솜씨를 보고 앞으로 대중음악계를 이끌 세대라고 생각했다.
김고금평 : 7집은 정성을 많이 들인 앨범으로 기억한다.
특히 키보드를 세명이나 둘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조용필 : 슬로우 템포 음악의 경우 오케스트라 흉내를 내려면 건반 세 개
는 있어야할 것 같았다. 당시엔 코드 위주의 록을 많이 했었는데, 우리의
경우 강렬하게 간 케이스다. 기타 리프(Riff . 반복선율)의 리듬이 이 앨범
에서 강했다. 그때 그루브(Grooveㆍ리듬감,흥)로서 강한 리듬을 만들어
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앨범에서 본격적으로 실행한 셈이었
다. 남들이 이 앨범에 대해 '어덜트 컨템포러리(성인 취향)의 록'의 전형
이라고 말하는데, 그 설명에 동의한다.
지금까지 18개의 앨범을 낸 그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앨범을 무엇이냐]
고 묻자, 조용필은 [글쎄]라며 [하나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만들때는
늘 만족하지만, 지나고 나서는 늘 아쉽다는게 그의 설명. 그런 기분은 앞
으로 새 앨범을 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 내 목소리의 우울함 때문에 장조 곡 선호
김고금평 : 8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싱어송라이터로 이름을 날렸는데,
다른 작곡가의 곡도 많이 수용했다.
조용필 : 작곡은 70년대 초반부터 이미 해왔다. 다만 어떤 스타일로 만드
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에 발표 시기가 늦어진 것 뿐이다. '단발머리'와 '창
밖의 여자'는 이미 70년대 후반에 만들어놨던 곡이다. 내 음반에서 1, 3,
5, 7 등 홀수 음반들은 내 곡이 많고, 짝수 음반은 다른 작곡자의 곡이 많
다. 곡을 만들고나서 또 만드는 작업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난 가요뿐 아니라, 솔(Soul),록, 리듬앤블루스(R&B)등
모든 장르를 다 해봐서,들어서 좋으면 다른 작곡자의 곡도 받아들이자는
주의다. '비틀즈'나 엘비스 프레슬리도 남의 곡을 받지 않았는가. 다양한
음악적 체험을 하는것은 내가 지금도 잃지 않고 있는 내음악의 특징이다.
김고금평 : 조용필의 곡들은 대개 단조 보다 장조가 많다.
그런데도 그 특유의 목소리때문에 슬프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조용필 : 맞다. 난 장조를 좋아한다. 마이너(단조)곡은 너무 슬픈 것 같다.
슬퍼도 웃으면서 슬플 수 있는, 그런 색깔의 음악을 좋아한다. 내 목소리
에서 나오는 우울함 때문에 일부러 밝은 장조 곡을 선호하는건 사실이다.
김고금평 : 솔로가수로 나설 수 있는데도,
굳이 밴드(위대한 탄생) 형식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나..?
조용필 : 한가지는 내가 연주인(68년 미8군에서 기타리스트로활동) 출신
이고, 두번째는 내가 추구하려는 음악성 때문이다.내가 만든 음악을 하려
면 난 절대적으로 밴드가 필요한 가수다.또 음악은 쉽고 간편해야 대중들
이 듣기 좋아하는데, 밴드는 그런 욕구에도 충분히 부응한다.
김고금평 : 실수한 스태프는 아주 많이 혼난다고 들었다.
안 맞아 본 스태프가 없다고 하는데..
조용필 : 하하. 우린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다.30곡을 무대에 올리는데,
그 중 한 두 곡의 어느 부분이 틀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반복된
다는 것은 프로로서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처음 날 보는 사람은 차
갑다고 얘기한다. 지내고 보면 따뜻하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처음부터
다정한 인상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웃음)
김고금평 : 조용필의 노래 가사를 분석한 논문도 최근 나왔다.
인간의 보편적 감성을 잘 표현하는 가수라는 평가가 많다.
조용필 : 사람의 꿈이라든지, 사랑의 표현이라든지 지극히 우리 정서를
기초로 했기 때문이다. 다만 직선적인 표현은 피하자는 원칙이 있다. 내
가 하는 노래에는 한발짝 물러서서 반투명 정도의 말들을 집어넣는 경우
가 많다. 가사는 시적이어야하고, 패션도 필요하다고 본다. 말장난이
아닌 범위내에서..
◈ 모니터가 망가져도 정확한 박자를 읽어내는 천하무적 보컬리스트
조용필의 음악성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지난 35주년 공연. 객석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세차게 몰아친 비때문에 무대 내부는 아수라장이었다.
보컬을 비롯한 각 연주자에겐 모니터가 하나씩 설치돼 있는데,이 모니터
로 연주자들은 다른 악기의 소리를 들으며 연주할 수 있다. (모니터가 없
으면 연주했을 때, 다른 악기 소리를 몇 초 후에나 들을 수 있다.
그 소리의 파장이 주경기장 맨 끝쪽을 치고 돌아오는 시간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야외무대에선 소리의 파장을 고려해 모니터가 제대로 작동
돼야한다) 그런데 몇 곡을 부른 뒤,조용필의 모니터가 갑자기 고장이 났
다. 초특급 사고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관객 5만을 두고 엔지니어가 무대에 뛰어올라 모니터를 고칠 수
도, 그렇다고 잠시 중단한다는 안내방송을 내보낼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조용필은 모니터가 고장났다는 걸 노래를 부르면서 알게 됐다.
1소절을 부르면서 모니터에서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는
이렇게 대처했다. 비때문에 씌워진 모니터위의 비닐을 이용한 것이다.
모니터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키보드가 연주할 때 (조용필의) 모니터
에서 비닐이 펄럭거리는 모양새를 보고 박자를 맞춘 것이다.
김고금평 : 그때 기분이 어땠나..?
조용필 : 사실 많이 당황했다. 그렇다고 그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데, 곡을
중단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행히 느린 곡이어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소리 파장에 비닐이 들쑥 날쑥하는 걸 박자로 이용하는 재미가 썩 나쁘지
는 않았다. 하하.
김고금평 : 뮤지션 조용필은 남 보다 항상 앞서간다는 점에서 계속 후한
점수를 얻고 있다. 앞으로도 획기적인 계획들이 있을 것 같은데..
조용필 : 이제 환갑이 얼마남지 않았는데, 대형 프로젝트 2개를 준비하고
있다. 하나는 19집에 대한 청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2010년 3D를 이용한
실황 다큐멘터리 공연을 찍는 일이다. 내년 9월쯤 발매되는 새 앨범은 아
마 나이드신 분들은 싫어할 수도 있는 아주 강한 앨범이 될 것 같다.차 안
에서 AFKN에서 흘러나오는 트렌드음악들을 들어보니,너무 약한 것 같다
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간 피아노 위주의 달콤한 선율을 모두 배제할
생각이다. 전주, 후주, 코드 등 모든 연주가 기타 위주로 작업될 것이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피아노 2대에서 1대로 줄이고,기타 하나를 늘릴 생각
이다. 가사도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다소 파격적으로 구성할 계획이다.
두번째 프로젝트는 2010년 공연 실황 다큐 작업인데, 롤링스톤즈의 다큐
영화 '샤인 어 라이트'와는 또다른 차원의 작품이 될 듯하다. 2010년 5월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이틀 연속 공연 실황을 찍는 것인데,3D로 미국의
초특급 엔지니어로 구성된 프로젝트팀이 연출 및 촬영을 담당한다.
◈ 가수라면 죽기 살기로 연습해야..
조용필은 [갈수록 체력은 떨어지는데, 자꾸 강한 록을 하려니 역주행하
는 느낌이 있다]며 웃었다. 그가 새 앨범을 좀 더 강한 리듬 위에 던져놓
고 싶은 욕구는 최신음악의 경향에 대한 [반발]이자 [교정]같은 심리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요즘 가요 세태에 대해서도 한마디 건넸다.
[가수라는 타이틀을 달면 일주일에 다섯번은 녹음실에서 싫어도 죽기살
기로 연습을 해야돼요. 그래야 최소한 혹시라도 나올 수 있는 기침 같은
것도 막을 수 있으니까. 더 중요한 건 연습을 안하면 음정을 정확히 맞추
기가 힘들고, 강한 음악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기 마련이에요.]
조용필의 무대를 한 번이라도 본 이들이라면 이미 잘 알겠지만,
그의 음정은 스트라이크존에 확실히 꽂히는 낙차 큰 커브를 만나는
것처럼 안정적이고 정확하다.
음악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고..
대중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대한민국 최고 가수 조용필.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큼큼~
▲ 생전의 부인 안진현씨와 함께..
☞ 아래는 [You Tube]에 소개된 조용필의 동영상 음악임돠~!
▲ 허공(虚空)
▲ 단발머리
▲ 돌아와요. 부산항에..
▲ 킬리만자로의 표범
▲ Q..
▲ 고추잠자리
▲ 여행을 떠나요
▲ 들꽃
▲ 홀로 아리랑( 평양 콘서트 2005년)
첫댓글 울 마더가 젤 좋아하는 가수 조용필, 패티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