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요 12:1-8 (마 26:6-13; 막 14:3-9)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붓다 찬송: 252, 453장
예수님의 공생애를 살펴보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십자가 지시기 전 마지막 일주일의 사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사도 요한은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요한이 유월절 엿새 전이라고 했으며, 또한 유대인들은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를 하루로 생각하기 때문에, 유월절이 금요일 저녁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 토요일 저녁에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으셔서 베다니에 오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본문에 나와 있다. 2절에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라고 번역된 것은 ‘그들이 예수를 위하여 거기에서 저녁을 제공했다’라고 직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녁 식사를 위하여 베다니에 오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태와 마가와 요한의 기록에 몇 가지 차이가 있는데, 요한은 이곳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고 소개하는 반면, 마태와 마가는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사역하시는 도중 베다니에서 나병환자 시몬을 고쳐주셨고, 이 사람이 예수님을 초대하였는데,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시몬의 집에 와서 잔치를 도우며 준비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요한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차이점은 그들의 식사 문화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된다. 복음서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듯이 그들이 식사를 할 때는 비스듬히 왼쪽으로 기대어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예수의 머리에서 몸과 발까지 향유를 붓게 되었고,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머리를 기록함으로써 그분의 왕 되심에, 요한은 발을 기록함으로써 그분의 낮아지심을 강조하고 있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한 여인, 즉 마리아가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모든 사역을 마치신 후에,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 향유를 부은 사건은 엿새 후의 죽음과 장례를 상징하게 된다. 이처럼 예수님은 미리 당신의 사역이 무엇인가를 마리아를 통해 친히 보여주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두 가지 다른 대화가 나온다. 하나는 마리아가 향유를 부었을 때 제자들이 했던 말, 특히 가룟 유다가 한 말과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것이다. 요한은 가룟 유다의 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 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마 26:8-9절을 보면 제자들이 했던 말이 기록되어 있다.
마 26:8-9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이 두 구절을 보면 제자들이 했던 말은 그들의 현실적인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향하여 나아가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환심을 살 수 있을까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종교성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데, 그들은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그리고 명예를 위하여 종교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 예수를 따라다니게 되면, 그분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거기에서 그들이 우위를 차지하며, 위에서 가난한 자들에게 적선하듯이 나누어주게 되면 인기를 더 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유치한 종교성인가! 이런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12:7-8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마태복음은 여기에 한 말씀을 더하셨다.
마 26:11-13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리라”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보면 예수님은 지금 세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마리아가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향유를 부었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가난한 자들은 후에 너희가 친히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요, 마지막 세 번째는 마리아의 행동을 복음 전파와 함께 말하라는 것이다.
장례를 준비했다는 것은 당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죽으심을 위해 초막절을 지나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오신 것이다. 이것은 신 21:23에서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지금 당국자들의 추적을 받고 있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보게 되면 신고하여 잡게 하라고 공고를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잡혔을 때, 저주 받은 자가 되어야만 했으며, 이 공모를 통해 나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여 저주 받은 자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기 때문에 당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한 것이다. 이 얼마나 귀한 신앙의 행동인가!
사실 우리는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알고 믿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의 언니 마르다와 함께 부활 신앙을 배웠다. 그의 오라비 나사로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림을 받은 경험을 통해 예수님을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을 따른 것이다.
여기에서 어떤 이는 인간적인 감정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께서 마리아와 결혼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이런 주장을 따라 미국의 소설가 댄 브라운은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 속에서 예수께서 죽은 것이 아니라 본문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사라”라는 딸을 낳고 남부 프랑스로 피신하였는데, 이 사라의 후손이 프랑크의 메로빙거 왕조의 왕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혈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이야기냐고 하면서 무시할 수도 있지만,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은 참고 계시며, 사실 그들 가운데에도 구원의 손길을 베풀기 원하시는 자비의 하나님인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들이 이전부터 왜 퍼졌을까? 그것은 종교를 이용하는 당국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결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의 인간 되심을 믿지 않는 자들 때문이다. 세상은 이렇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을 절대 믿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것을 믿게 되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해야 되기 때문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의 당국자들도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고, 제자들조차도 공생애 육 개월을 남겨 두고 세 번씩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이들은 절대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장례를 준비하는 마리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 향유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 왜냐하면 삼백 데나리온은 300일 치의 일당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일 년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양이기 때문에 세상에 관심이 있는 제자들로서는 당연히 아깝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친히 가난한 자들을 돌아볼 것을 명령하신 것이며, 삼백 데나리온의 가격의 향유를 당신께 쓰신 것을 통하여 당신의 죽음이 그렇게 고귀한 것임을 깨달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항상 마리아의 향유를 부어 장례를 준비한 것을 말하여 기억하라고 하셨는데,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물질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오직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에 대한 복음이 이 죽음을 통하여 주어진 것임을 강조하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 우리는 본문에서 마리아의 감사의 행동과 제자들의 실리를 추구한 믿음 없음을 보게 된다. 사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섬김과 헌신의 대상이시다. 마리아는 바로 이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향유를 부은 것이요, 그녀는 감사의 마음과 헌신의 마음으로 예수를 섬긴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일 년 치 봉급에 해당하는 향유를 예수와 비교하여 더 아까워 하면서 예수를 향한 우선적인 헌신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를 따라다니며 하늘 나라의 가르침을 들었고, 많은 이적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특히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는 약 7개월 전 가이사랴에서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을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조차도 분개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있기 이전에는 결코 예수님의 사역을 이해할 수도 없고, 관심조차도 가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우리의 헌신이 세상을 향한 헌신에서 벗어나서 오직 나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모습이 참으로 귀한 것임을 여기에서 배울 수 있으며, 이 헌신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귀한 단계를 지나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리에 들어왔음을 기억하라. 그리고 제자들의 모습처럼 세상을 향한 헌신에서 이제 마리아처럼 예수를 향한 헌신으로 돌아오라.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