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가시내
이용악 (李庸岳, 1914~1971)
알룩조개에 입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전 무섭지 않다만
어드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온갖 방자의 말을 품고 왔다
눈포래를 뚫고 왔다
가시내야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을 나는 헤매이자
술을 부어 남실남실 술을 따르어
가난한 이야기에 고이 잠궈다오
네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석 달 전이면
단풍이 물들어 천리 천리 또 천리 산마다 불탔을 겐데
그래도 외로워서 슬퍼서 초마폭으로 얼굴을 가렸더냐
두 낮 두 밤을 두루미처럼 울어 울어
불술기 구름 속을 달리는 양 유리창이 흐리더냐
차알삭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아닌 봄을 불러줄께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
이윽고 얼음길이 밝으면
나는 눈포래 휘감아치는 벌판에 우줄우줄 나설 게다
노래도 없이 사라질 게다
자욱도 없이 사라질 게다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보양이 머리태를 드리
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이용악(李庸岳, 1914~1971)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께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나를 만나거든
이용악(李庸岳, 1914~1971)
땀 말른 얼골에
소곰이 싸락싸락 돋힌 나를
공사장 가까운 숲속에서 만나거든
내 손을 쥐지 말라
만약 내 손을 쥐드래도
옛처럼 네 손처럼 부드럽지 못한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어다오
주름잡힌 이마에
석고(石膏)처럼 창백한 불만이 그윽한 나를
거리의 뒷골목에서 만나거든
먹었느냐고 묻지 말라
굶었느냐곤 더욱 묻지 말고
꿈 같은 이야기는 이야기의 한다디도
나의 침묵(沈默)에 침입(浸入)하지 말어다오
폐인인 양 씨드러져
턱을 고이고 앉은 나를
어둑한 폐가(廢家)의 회랑(廻廊)에서 만나거든
울지 말라
웃지도 말라
너는 평범(平凡)한 표정(表情)을 힘써 지켜야겠고
내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를
그 이유를 묻지 말어다오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이용악(李庸岳, 1914~1971)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寢床) 없는 최후(最後)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노령(露領)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 마디 남겨 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만(灣)의 파선도
설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목침을 반듯이 벤 채
다시 뜨시잖는 두 눈에
피지 못한 꿈의 꽃봉오리가 깔앉고
얼음장에 누우신 듯 손발은 식어갈 뿐
입술은 심장의 영원한 정지(停止)를 가르쳤다.
때늦은 의원(醫員)이 아모 말 없이 돌아간 뒤
이웃 늙은이 손으로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우리는 머리맡에 엎디어
있는 대로의 울음을 다아 울었고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의 밤은
풀버렛소리 가득 차 있었다.
* 아므을만(灣) : 흑룡강 하류의 아무르 지역.
* 니코리스크 : 시베리아 하구의 항구 도시 니콜라에프스크를 가리킴.
다시 항구에 와서
이용악(李庸岳, 1914~1971)
모든 기폭이 잠잠히 내려앉은
이 항구에
그래도 남은 것은 사람이올시다
한마디의 말도 배운 적 없는 듯한 많은 사람 속으로
어길게 생긴 이마며 수수한 입술이며
그저 좋아서
나도 한마디의 말없이 우줄우줄 걸어나가면
저리 산 밑에서 들려오는 돌 깨는 소리
시바우라 같은 데서 혹은 메구로 같은 데서
함께 일하고 함께 잠자며
퍽도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로만 여겨집니다
서로 모르게
어둠을 타 구름처럼 흩어졌다가
똑같이 고향이 그리워서
돌아온 이들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이 너무 푸르러
갈매기는 쭉지에 흰 목을 묻고
어느 움쑥한 바위틈 같은 데 숨어버렸나 본데
차라리 누구의 아들도 아닌 나는 어찌하여
검붉은 흙이 자꾸만 씹고 싶습니까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
이용악(李庸岳, 1914~1971)
삽살개 짖는 소리
눈보라에 얼어붙은 섣달 그믐
밤이
얄궃은 손을 하도 곱게 흔들길래
술을 마시어 불타는 소원이 이 부두로 왔다.
걸오온 길가에 찔레 한 송이 없었대도
나의 아롱범은
자옥 자옥을 뉘우칠 줄 모른다.
어깨에 쌓여도 하얀 눈이 무겁지 않고나.
철없는 누이 고수머릴랑 어루만지며
우라지오의 이야길 캐고 싶던 밤이면
울 어머닌
서투른 마우재 말도 들려주셨지.
졸음졸음 귀 밝히는 누이 잠들 때꺼정
등불이 깜빡 저절로 눈감을 때꺼정
다시 내게로 헤여드는
어머니의 입김이 무지개처럼 어질다.
나는 그 모두를 살뜰히 담았으니
어린 기억의 새야 귀성스럽다.
기다리지 말고 마음의 은줄에 작은 날개를 털라.
드나드는 배 하나 없는 지금
부두에 호젓 선 나는 멧비둘기 아니건만
날고 싶어 날고 싶어.
머리에 어슴푸레 그리어진 그 곳
우라지오의 바다는 얼음이 두껍다.
등대와 나와
서로 속삭일 수 없는 생각에 잠기고
밤은 얄팍한 꿈을 끝없이 꾀인다.
가도오도 못할 우라지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이용악(李庸岳, 1914~1971)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만
너의 가슴은 얼었으리라
그러나
나는 안다
다른 한 줄 너의 흐름이 쉬지 않고
바다로 가야 할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음을
지금
차는 차대로 달리고
바람이 이리처럼 날뛰는 강 건너 벌판엔
나의 젊은 넋이
무엇인가 기다리는 듯 얼어붙은 듯 섰으니
욕된 운명은 밤 위에 밤을 마련할 뿐
잠들지 마라 우리의 강아
오늘밤도
너의 가슴을 밟는 뭇슬픔이 목마르고
얼음길은 거칠다 길은 멀다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주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
* 강원도치 : 강원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