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의 힘 " 민 14:26-28, 막 11:12-14, 20-23
1. 구약 본문 -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귀는 두 개를 만드시고 입은 하나를 만드셨습니다. 두 개 만든 귀는 언제나 그 문이 열려있습니다. 좋은 소식 복된 소식 많이 듣고 살기 위함이요. 하나를 만든 입술은 방어벽을 두 개 두었습니다. 혀를 깊숙이 숨겨두고 이빨 벽을 두고 그 앞에 입술로 문을 닫아 두었습니다. 많은 말을 하면 손해 보는 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교회를 개척하며 예배당입구에 이런 말을 써 놓았습니다. "이 문안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긍정적인 말을 하시오. 긍정적인 말이 아니면 입을 다물고 계시오."
야고보는 사람의 말을 배의 키에 비유했습니다. 작은 키 하나가 배의 방향을 조정하듯이 사 람의 말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그 말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를 인도하기도 하고 나 를 몰락의 길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내 인격을 형성하고 인격의 형성대로 내 운명을 결정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이 땅의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주지 않은 말하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 말의 특권은 곧 이름을 짓는 권세로 작동이 되어집니다.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창 2:19) 모든 생물들은 아담이 말하는 대로 이름과 운명이 결정되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자식을 낳아 아무개라 부르면 그것이 곧 그 사람의 평 생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민 14:28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과 성품 그리고 인격을 걸고 맹세하는 한 말씀 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신구약 성경에 이 만한 강조어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이건 너무나도 엄청난 맹세입니다. 왜? 하나님이 직접하신 맹세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삶을 걸고한 맹세이기 때문입니다.
그 맹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 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이 말에는 이토록 어마어마한 권세가 있습니다. 이 권세를 깨달은 사 람만이 그 권세를 바로 사용하고 바로 누릴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여행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라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요 단강만 건너가면 그토록 그리워하던 가나안 땅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이 들은 그 땅을 정탐해 보기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실수가 되었습 니다. 열두 지파로부터 각각 한 명씩 대표를 뽑아 요단강을 건너가 정탐토록하고 보고를 받 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의 보고,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저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 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 14:7-9)
그러나 나머지 열 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말, 불 신앙적인 보고를 합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그 백성은 모 두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라 그들 앞에 우리의 꼴은 메뚜기와 같았다"(민 13:31-33)
이 부정적이고 불 신앙적인 말은 60만 이스라엘 장정들에게 염병처럼 전염이 되어집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에게 불평하고 심지어 애굽으로 돌아가자 외치며 지도자를 돌로 치 려 합니다.
바로 이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 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7-28)
말씀하는 그 하나님은 또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말의 권세를 주신 하나님은 그 말이 당 신의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의 특권은 곧 말의 책임을 의미합 니다. 하나님은 우리 입의 말을 따라 보상도 하시고 축복도 하시지만 그 말이 불 신앙적이 고 부정적일때 책임을 물으시고 심판도 하십니다.
2. 신약 본문 -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으면!
옛날 어느 상인이 시장 바닥에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지혜, 사람을 얻고 지위를 얻고 돈을 얻고 출세하는 지혜를 판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사람들은 그 지혜를 사기 위해 몰려들 었고 상인은 모인 사람들로부터 선불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를 남기곤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말조심 해!」
주자가 남긴 교훈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을 험담하는 사람은 경망한 자요 이와 더불어 맞장구 치는 사람은 비겁한 자요 이를 듣 고 전하는 사람은 간사한 사람이다."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라 이 불이 생의 바퀴를 불사르게 된다"(약 3:6)고 했습니다. 잘못된 말이 도화선이 되어 나를 사르고 너를 사르고 가정과 공동체를 소멸시킵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말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선한 말을 하면 내 마음이 먼저 선해집니다. 악한 말을 하면 내 마음이 먼저 악해집니다. 험악한 말을 하면 내 마음에 먼저 격분이 일어납니다. 더러운 말을 하면 내 마음이 먼저 더러워집니다.
선진국 복지 국가는 국민의 GNP가 높아져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언어수준으로 결정되 는 것입니다. 언어가 거칠어진 사회는 병든 사회입니다. 언어가 아름다운 사회는 건강한 사 회입니다.
우리 한국민이 선진국으로 가려면 국가 지도자들의 언어들이 희망적이고 진실해야 합니다. 언론 방송의 언어들이 희망적이고 건강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 신앙인들은 어떤 경우에도 그 말이 신앙적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 말이 축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가 되기도 합니다. 그 말이 기도가 되고 성취가 됩니다. 신앙인에겐 언제나 신앙 인의 말이 있고 그리스도인에겐 그리스도인다운 말이 있는 겁니다.
오늘 신약 본문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가 주목해야 될 귀절들이 있습니다.
① 14절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예수님은 귀가 없는 나무에게 말씀하시고 바람 과 태풍에게도 말을 하십니다. 왜요? 말은 말 자체에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② 13절 "무화과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무화과의 때 가 아닌데 열매 없다고 이 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열매의 때가 아닌데 열매가 없는 것은 당 연한 것이요, 무화과 잘못이 아니지만 왜 저주를 하셨을까요? 뭔가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 다.
③ 14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말을 하면 듣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구태여 이 터무니 없는 말을 제자들이 듣는다고 기록했을까요? 말에도 힘이 있지만 듣는 것 또한 힘이 됩니 다. 어떤 말을 듣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합니다.
④ 오후에 그 길로 돌아올 때 보니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말라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아침 에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21절).
이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열매 없는 나무는 저주를 받듯 열매 없는 인생은 저주를 받는다."
⑤ 그러나 본문의 결론은 전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 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절).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을 믿으라!」
제자들에게 말의 권세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하는 것 이 마가의 해석입니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도 예수께서 믿음의 권세를 가르치기 위 해 이 사건을 일으키신 것으로 해석합니다.
3. 말의 권세
오늘 구약의 본문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는 말씀과 신약의 본문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의 공통 된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말에는 힘이 있다! 말에는 권세가 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 에겐 말의 힘, 말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 1:12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 세를 주셨으니" 그런데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권세를 몰라서 실패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당선되고 취임하는 그 순간부터 권세가 주어집니다. 이처럼 예수 믿은 지 1초 후 부터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 그리고 말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한 후에 가 아니라 믿는자는 누구나 믿는 그 순간에 권세가 주어집니다. 교회에 덕이 쌓이고 충성 헌신이 쌓인 다음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가 있습니다.
물론 권세가 있다는 말이 곧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대통령에겐 취임하는 그 순간부 터 권세가 주어지지만 그 권세를 사용하는 능력은 대통령마다 다릅니다.
운전면허증이 있는 것과 운전 실력은 분명 다릅니다. 여기 운전면허증은 권세를 말합니다. 운전 실력은 능력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겐 권세가 있지만 믿음의 분량 기도의 파워에 따라 능력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권세를 모르고 기도만 하는 사람은 능력을 얻 어도 그 능력을 사용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의 말이 기적을 만든다"라는 책을 쓴 박 필 목사는 "권세를 알고 기도하는 사 람과 권세를 모르고 기도하는 사람의 차이는 태양과 촛불만큼 차이가 있다"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 자녀들이 애원하고 징징거리는 기도에 머물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권 세있는 말을 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제자들과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무서운 광풍이 일어나자 제자들이 예 수님을 깨웁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마 8:25) 이때 예수님께서 "그래 그 문제를 내게 맡겨 주어서 고맙다. 앞으로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를 깨우고 기도하거라 "라고 칭찬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책망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누가 복음에서는 더 혹독하게 나무라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 8:25).
풀러 신학교 챨스 크레프트 교수가 쓴 책 가운데 「신자가 소유한 놀라운 권세」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땅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를 주셨습니 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마귀에게 순종하므로 그 권세를 상실했고 나아가 그 마귀에게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에게 시험을 당하실 때 마귀가 예수님께 "내게 절하라. 내가 권세를 주마. 이 권세는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 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노라."라고 말합니다. 이 권세를 넘겨받았다고 큰소리칩니다.
예수님은 바로 인간이 잃어버린 이 권세를 빼앗아 우리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십자가 위 에서 마귀의 머리, 마귀의 권세를 부수시고(창 3:15) 모든 권세를 되찾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되돌려 주시며 이제 주께서 분부하신 모든 사명을 권세있게 감당하라하십니다. 이것이 크레프트 교수가 말하는 「신자가 소유한 놀라 운 권세」입니다.
혹 어떤 이들은 예수를 믿어도 내겐 외형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는데 무슨 권세가 있다고 말 하는가? 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었나? 예수 믿었다 고 한달 만에 진급이 되고 지위가 달라졌나? 라고 합니다.
여러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어떤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까?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 루 아침에 전투 비행기를 조종하고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의 권세 는 말로 행사되어집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온 군데가 움직입니다. 경제정책이 결정됩니다. 수교국가와 단절국가가 결정되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권세를 말로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 마귀의 영향력을 거절하고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 하시도록 합니다. 말로 승리를 선포합니다. 말로 내 안에 머물고 있는 부정적인 영향들을 물리칩니다. 말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립니다. 이 권세가 당신에게 있습니다.
4. 멸망의 언어
때문에 이제 말의 권세를 아는 사람들이 삼가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아니 이 말은 삼가 할 정도가 아니라 예수를 믿은 그때부터 영원히 하지 말아야 할 말입니다. 우선 구약 본문 민수기에서 하나님 귀에 어떤 말이 들렸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의 말, 그리고 불평 의 말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말한 대로 되리라는 것입니다.
민 14: 29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서 엎드러질 것이라"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결단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37절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
그리고 신약 본문의 핵심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믿고 말을 했으면 이룰 줄로 믿으 라는 것입니다. 두 본문을 통하여 말의 권세를 아는 사람들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첫째 불신의 말이요 둘째 원망, 불평의 말입니다. T.V.에서 하는 게임 중에 큰 공이 마구 굴러 내려오는 경사진 판을 공을 피해가며 올라가는 게임이 있었습니다. 한 출연자가 거의 다 올라갔다 싶었는데 마지막 큰 공을 한방 얻어 맞 고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권세있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믿음의 언어, 긍정적인 말을 하던 사람도 때로 마음이 불편하여, 때로 믿음을 잃어 버려, 때로 삶이 너무 힘들어 불신의 말, 불평의 말, 비난의 말 을 쏟아냅니다. 그러면 누리던 권세를 상실하게 됩니다. 말의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천사 가브리엘이 세례요한의 잉태를 예고할 때 믿음의 사람 사가랴는 상식적으로 이성적으로 받아 들일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신의 말을 해버립니다.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눅 1:18) 이때 하나님은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사가랴 를 벙어리로 만들어버립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신의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 니다. 불신의 말로 망하는 것보다는 벙어리가 되는 것이 낫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돌 때 절대명령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모든 백 성은 침묵하고 돌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거 뭐하는 짓이야. 돈다고 무너지냐? 계속 돌 고 돌다가 정말 돌겠다." 불신의 말을 누군가 뱉었다면 이 불신의 말은 금방 모든 백성들에 게 전염이 되고 여리고 성은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우리가 자주 듣습니다. "어쩌다 우연히 교회내 꽤 신앙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분들이 얘기하는 자리에 동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앞뒤 살피지 않고 되는대로 얘기를 하는지 크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내 리더들이 모여앉아 혀로 죄를 짓고 우리의 말이 교회와 성 령님을 아프게 할 수 있고 슬프게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들은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경박한 자리에 앉아 보신 적이 없습니까?
제가 설교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데 아내가 밖에서 들어오더니 뭔가를 이것 저것 얘기를 걸어왔습니다. 저는 설교 구상이 깨져 화가 났습니다. "조용히 해! 아니면 좀 나가!" 아내는 미안해하며 나갔습니다. 아내가 나간 다음에 저는 얼마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아내가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왜 내가 맞장구를 쳐주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아내에게 얼마나 힘이 되었을까? 설교 준비가 아내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한번 나간 말은 엎질러진 물과도 같이 주워 담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금방 미안하다고 말할 주변머리도 없어 서 지금 설교시간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는 겁니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 13:3)
탈무드에 이런 교훈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임금님이 시몬이라는 광대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구해 오게 하고, 요한이라는 광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얼마 후 두 광대가 돌아와 각각 그들이 담아 가지고 온 상자를 임금님께 바쳤습니다. 시몬의 상자를 여니까 사람의 혀가 나 왔습니다. 다음으로 요한의 상자를 풀었더니 역시 사람의 혀가 나왔습니다.
이 탈무드의 교훈은 "혀, 곧 말이 가장 유익한 것이 될 수 있고, 가장 해를 끼치는 나쁜 것 이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어떤 가정사역 연구소에서 자녀들이 부모로부터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이 무엇인가를 조사 해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네가 제일 소중해. 난 너를 위해 매일 하나님께 기도해. 너만 보면 하나님께 감사해. 언제나 엄마는 널 사랑한단다. 엄마는 너를 믿는다. 네가 자랑스럽다. 엄만 행복하다.
그리고 자녀들이 듣고 싶지 않은 말, 자녀를 망하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니가 잘하는 게 뭐가 있니? 이 바보야. 멍청아. 너만 보면 지겹다 지겨워. 맘에 드는 게 한구석이라도 있어야지. 꺼져 버려. 나가 죽어! 그래 꺼지고 나가 죽어야 시원하시겠습니까?
부모들도 자녀로부터 상처받는 말이 있답니다. "나한테 해 준 게 뭐 있어요." "엄마 아빠 때문에 창피해 죽겠어요."
부모들이 행복해 하는 말로는, "아빠 세상에서 제일 존경해요. 엄마 사랑해요."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고 나가기 전에 여러분들이 무심코 던졌던 말이 내 자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길 수 있다는 사실, 내 자녀를 저주로 몰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말로 사람을 살리고 말로 사람을 죽입니다. 말로 세우고 말로 무너뜨립니다. 말로 교회를 세우기도하고 말로 교회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당신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5. 기적을 만드는 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잠언 18장 21절의 말씀입니다.
역사상 성공한 사람들을 연구해 보면 그 배경에는 성공을 만들어준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실패한 사람의 배후엔 언제나 실패의 언어가 있습니다. 말은 보이지 않지만 무한한 창조력 과 힘을 가진 인생 최대의 에너지입니다. 마치 태양 에너지가 모든 생물을 살게 하듯이 말 도 사람의 모든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고 움직이게 하는 생명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중에는 그 권세를 작동시켜 기적을 낳게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성공을 가져다 주는 신비의 언어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권세를 능력으로 나타나게 하 는 말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시인하는 말입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여기 구원은 천국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에서는 홍해의 위기를 극복했을 때 구 원이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누가복음 8장 48절에서는 병고침을 받았을 때 구원이란 말을 사 용합니다. 입으로 시인하여 천국도 가고 위기도 극복하고 병과 상처도 고치는 겁니다. 그리 고 시인이란 말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 력을 믿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시인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격려하고 칭찬하는 것입니 다. 성령의 사람이 하는 말은 언제나 격려가 됩니다. 위로가 됩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 니다. 반대로 사람을 아프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옳은데 힘이 빠지는 말이 있습니다. 나아가 자기 자신을 시인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자신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인정하면 내 안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하나님을 시인하면 하나 님은 모든 환경에서 나를 구원하십니다.
마리아는 사내를 가까이 한 적이 없는 자신에게서 예수가 잉태할 것이라는 말씀 앞에 "아멘 "하고 시인했습니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때 자신의 몸이 기적의 도구가 됩니 다. 마리아만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노크할 때 아멘해야 합니다.
둘째, 고백하고 선포하는 말은 기적을 낳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니 자신에겐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히고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잠 6:2)
기적의 언어를 선포하면 기적을 봅니다. 말은 우리의 환경과 운명,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 다. 기적의 주인공이 되고 싶으십니까? 기적의 말을 선포하십시요.
이해인 시인의 '나를 키우는 말'이란 시가 있습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은 고마운 마음이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이제 선포하십시요
나는 적극적인 사람이다. 나는 믿음의 사람이다. 나는 맑은 사람이다. 나는 승리의 사람이 다. 나는 기적의 주인공이다! 그때 과연 당신은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명령하는 말입니다.
권세있는 자는 부탁하지 않습니다. 구걸하지 않습니다. 명령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명령 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바람과 풍랑을 꾸짖고 명령했습니다. "잠잠하고 고요하라" 베 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습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그렇습니다. 당신이 질병을 꾸짖고 명령할 때 우리의 몸은 예수의 이름 앞에 순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나 비정상적 상태를 꾸짖고 명령할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 탄을 대적하고 명령할 때 귀신이 물러갑니다. 위기상황을 명령할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명 령해도 상황은 그대로 인 것 같지만 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땅 속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가지고 시인하고 고백하고 선포하고 명령할 때 그 싹은 이미 자라고 있습니 다. 기적의 움이 돋고 자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명령한 그 말은 반드시 열매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원종수 권사를 오늘의 원종수로 만든 히데오 속장님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방언기도를 할 때 "히데오 요시다 마시다"라고 기도하시던 분이라 히데오 속장이라 불려지던 분이었지요. 그분은 가난한 환경에서 꿈도 없이 자라온 소년을 볼 때마다 품에 안고 늘 그렇게 말했습니 다. "종시야, 하나님이 틱별히 너를 사랑한데이." 그래서 종수는 자신은 하나님의 특별한 존 재요 특별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늘 인정하고 특별한 존 재로 살았습니다.
「나는 특별한 존재다. 하나님이 나를 특별히 사랑한다.」 말하십시요. 인정하십시요. 고백하십시요. 선포하십시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 14: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 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3)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 당신의 말엔 권세가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민14:26-35<내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전염병의 재앙은 철회하셨지만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수없이 보았음에도 하나님을 열 번이나 시험하고 그 목소리에 청종치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정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까지 오게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가나안만 바라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정탐자들의 믿음없는 부정적인 보고에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말로 하나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되지도 않을 일을 약속했다고 하나님을 향하여 한탄한 것입니다. 졸지에 하나님이 사기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자식들이 알아주지 못하면 답답한 마음에 속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은 오죽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기도응답의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원망의 말을 들으셨다고 했습니다. 27절에 보면,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28절)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여기에 보면 백성의 원망의 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그 귀에 들린 대로 백성들에게 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매우 두려운 말씀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망의 목소리로 내뱉었던 말들과 거기에 따른 패역한 행동에 대해 스스로 그 책임을 지도록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앞에 2절에 보면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그들은 애굽에서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말대로 29절에 보면,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32절에서도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려질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35절에서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선포하셨습니다.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단단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내 뱉었던 말이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무시하고 원망과 불신의 말을 함부로 하다가 그것이 그들의 인생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침륜: 서서히 몰락하는 것, 히10:39)
성경은 히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몰락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말에는 위력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말 자체가 능력이요 그것이 행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말씀의 능력입니다.
사55:11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헛된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형통케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적대할 수 있겠습니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말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신의 말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말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고 그대로 그 백성들에게 적용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삶은 말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한사람의 인격도 그 사람의 말에 의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이 있기에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도 말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책을 보면 그 책을 쓴 사람이 어떤 사람인 지 알 수 있습니다. 말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나타내 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말을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의 여자 속옷을 만드는 사업가가 새로운 제품을 내 놓으면서 치수를 정하는데 큰 치수를 빅 사이즈, 더블 빅 사이즈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몸이 큰 사람들이 사가질 않더랍니다. 사업이 걱정스러울 정도로 되었는데, 고민 고민 하는 가운데 한가지를 깨닫고, 빅 사이즈라는 말 대신에 퀸 사이즈라고 붙이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너무 잘 팔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만 바꾸었는데 대박을 터트린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하되, 믿음의 말, 감사의 말, 축복의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선한 말로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복된 삶이 충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출애굽 하여 계수받은 20세 이상 되었던 장정60만명의 불신앙은 그들 후손들에게도 해를 끼쳤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탐방한 40일이 40년이 되어 광야에서 지내다가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죄로 인하여 20세 이하와 광야에서 태어났던 자들도 광야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어른들의 죄가 어린 자녀들에게까지 미치게 되었습니다.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피곤한 삶, 방랑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 보시게에 합당한 말을 사용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생활에 필수적이며 아주 유용하지만, 잘못 사용을 하게 될 경우에는 커다란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불이나 물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심던지 심는 그대로 거둔다고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농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동일하게 적용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말과 격려하는 말과 상대방을 이롭게 하는 말을 많이 하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자기에게 좋은 것으로 돌아오고, 반대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비판하고 정죄하며 흉보는 사람들은 또한 그대로 자기도 남에게 그런 대접을 받게 됩니다. 그러한 우리의 말을 통해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사람은 멀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과 교회의 지체들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을 통해서 내 가족과 내 지체가 상처를 받거나 낙심하기도 하고, 또는 용기와 힘을 얻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주고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말을 다 듣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날에는 우리들이 어떠한 말을 했는가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마12:36-37).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나온 후에 광야를 지나면서 늘 하나님을 대하여 원망과 불평과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 말들을 하나님께서는 다 들으시고, 그들에게 심판을 행하십니다(29).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긍정적인 보고를 했지만 백성들은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온갖 기적들을 보여주시면서 지금까지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망각해버리고는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말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말한 그대로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하시고 맙니다. 이것은 사람이 한 말은 씨가 되어서 그대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롭게 예수를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은 말을 고쳐야 합니다. 올바르고 냉정하게 평가를 하되 원망과 질책보다는 격려와 용기를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우리들이 말을 할 때 명심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참된 말, 진실한 말을 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의 진위를 분명히 알고서 말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지금 이 장소에서, 이 시간에 꼭 필요한 말인가를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말이 진실하면서도 꼭 필요한 말이더라도 반드시 친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그 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할 수도 있고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가정에서 자녀들을 훈계할 때 상처를 주지 않고 훈계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상처를 주는 말보다는 초달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그 후에는 반드시 아이의 마음으로 사랑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마음이 건강한 자녀로 자라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천국시민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대의 말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더러운 말이나 욕은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말, 은혜를 끼치는 말을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가장 가까운 자식이나 부부 간일수록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의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권세입니다. 이 권세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고 땅 속에 묻어두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축복된 약속의 말씀들을 주장하고 말의 권세를 사용하면서 여러분들의 마음과 생각뿐만 아니라 주변환경, 생활과 그리고 연약한 육체까지도 건강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귀에 들린대로
민 14:26-28절 2007/ 3/ 20(화)
14: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14: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옛 속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병원에서는 이런 속담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을 벌어들인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병원에 환자가 왔을 때 환자와의 상담과 스피치가 병원의 수입과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학병원이나 대형병원 중심으로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직원과 스텝들을 대상으로 하는 스피치, 상담 교육이 성행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통해서 사람들은 많은 정보를 얻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고급음식점일수록 메뉴에 대한, 그리고 음식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좀더 맛있게 먹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찾기보다는 질병에 대해서 자세하게 잘 설명해주고 환자와 친절하게 대화해 주는 그런 의사를 요즘 사람들은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질병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의사를 실력 있는 의사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좀 커서 병원과 좀 멀지만 3-4년 전만 해도 하루걸러 하루 병원에 출입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단골로 다니던 병원이 신기촌 시장에 있는 한 소아과입니다.
한 번 진료를 받으려면 1-2시간은 기다려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병원입니다.
보통 인내심으로는 버티기 힘든 그런 병원입니다.
그런데도 그 소아과를 엄마들이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원장선생님의 친절한 설명 때문입니다.
부모가 안도할 만큼 자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 원장님의 말을 듣고 있으면 다 완치된 느낌이 들 정도로 마음이 안심이 됩니다.
신뢰가 갑니다. 그래서 또 찾게 되고 소아과 하면 꼭 그 소아과를 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규림한의원을 운영하는 김상호 원장님이라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입술은 건강의 바로미터’
입술의 상태를 통해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집에 가서 한번 체크해 보시길 바랍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 간기능이 떨어졌다.
입술주위에 뾰로지가 난다 - 자궁, 방광의 혈액순환 장애
입술이 잘 갈라진다 - 위장에 열이 많다
입술에 핏기가 없다 - 빈혈을 의심
입술이 지나치게 붉다 - 몸에 열이 많다
이것을 우리 신앙에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그 사람의 영적인 상태를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그의 입술의 말, 혀의 말을 들어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늘 불평하고 남을 비방하고 그리고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말만 내뱉으면 이미 그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반면에 힘들고 억울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찬양이 흘러나오고 항상 감사가 넘치면 그 사람의 영적건강은 청신호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민감한 것이 바로 우리 입술의 말 이라는 것입니다.
입술의 상태를 보고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알 수 있듯이 사람의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의 영적 건강을 체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14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4: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哭)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도록 원망의 통곡을 합니다.
14: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14: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차라기 죽는 게 낫다는 것이지요.
더 늦기 전에 서둘러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영적 건강상태는 빨간색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들의 원망과 불평이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드디어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 그저 말로만 듣던 그 가나안 땅이 이제는 현실 앞에 다가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딪치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정탐꾼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 땅은 도저히 넘볼 수 없는 그런 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고 믿고 왔는데 완전 속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원망이 솟아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여기서 죽자. 아니다 죽기 전에 애굽이라도 돌아가자.’
여기저기서 원망이 솟아지는 것입니다.
그 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26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14: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14:28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얼마나 무서운 말인 줄 모릅니다.
귀에 들린 대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어떻게 됩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원망한 그대로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말이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기도생활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우리 기도대로 또 우리 믿음의 말대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아마 이런 고민 한 두 번 정도는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믿습니다. 아멘’으로 고백해도 그 믿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중에 내 뱉는 부정적인 말 때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막말 때문에 말장 도루묵이 된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 한 마디 내뱉는 것으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귀에 들린 대로 행하시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귀에 좋은 것이 들릴 수 있도록 말을 가릴 줄 아는 그런 성숙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