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촌공사를 처갓집보다 더 고맙게 생각하고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귀농과 관련된 교육은 안 받아본 게 없을 정도다.
농촌공사에서 주관한 전업농교육도 교육생 1호다.
전북도청에서 주관한 귀농자교육과 일주일 과정의 원예작물교육 등
귀농을 결심한 뒤에는 관공서 문턱이 닳토록 드나들었다.
권오상(52세)씨는 IMF 후폭풍으로 번창하던 사업이 쇠락하고 설상가상 아내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생하게 되자, 눈물을 머금고 아내를 설득해 고향 순창으로 돌아왔다.
빚만 6,000만원. 7년 동안 축사 내 목사(牧舍)에 기거하며 절치부심했다.
배우고 또 배웠다.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났다.
깨져도 다시 부닥쳤다.
귀농 후 9년이 지난 지금 그는 연 소득 6,000만원을 올리는 안정된 농업인이 됐다.
자신의 귀농 성공담을 강의하러 다니기도 한다.
인생역전이다.
자식교육 때문에 떠났던 고향, 빚만 안고 돌아와
그는 순창에서 태어나고 순창에서 학교를 다녔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한 권오상씨는 1974년 고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가
농산물유통사업 회사를 다녔다.
매우 흥미 있는 일이었지만 사정이 있어 오래 다니지 못했다.
1979년 군대에서 제대한 뒤 집안 농사일을 도왔다.
3년 후인 1982년에는 순창 동계초등학교 동창인 김점옥씨(52)와 결혼했다.
아내는 당시 전주의 한 고등학교 행정실에 근무했다.
결혼 후 부부는 10년 동안 고향에서 농사일에 매달렸다.
그리고 전주로 나가 농산물 유통업을 하게 되었다.
"서울서 잠시 경험했던 농산물 유통사업을 20년 만에 전주에서 하게 돼 무척 기뻤습니다.
사업도 번창했어요.
초기 3년가량은 슈퍼마켓도 함께 운영했지요.
그때만 해도 제 선택에 후회는 없었고, 장차 어떤 어려움이 찾아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때입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 월 수입 250만원을 벌었으니 먹고 살기에 크게 모자라지 않았다.
권오상씨 부부가 고향을 떠나 전주로 온 데에는 생계 수단보다는 '자식 교육' 문제가 더 컸다.
연년생으로 공부를 잘했던 두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더 큰 도시로 나간 것이다.
맹모삼천지교처럼.
"우리 가족에게도 IMF는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아팠고, 사업은 갈수록 매출이 줄어들어 결국은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나
청산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권씨가 아내를 설득해 고향 순창으로 내려온 건 2000년이다.
그해 아내는 고관절 수술을 받았다. IMF로 가세가 기울자, 내려오기 직전에는 일용직 노가다를 뛰기도 했다.
지금은 전북대 의대 졸업반인 둘째 세혁(25)이 고3 때의 일이다.
첫째 승혁(26)이는 현재 부산교대를 다니고 있다.
"빚 6,000만원을 안고 7~8년만에 돌아온 고향에는 어머니 혼자 논 3,000평을 힘들게 경작하고 계셨습니다.
농사일을 그만 둔 지 10년 가까이 돼 어떻게, 어디서부터,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했습니다.
하루하루 방황 속에 시간을 보내다 힘들게 사는 어머니 모습을 보고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 있던 내게 손을 내밀어준 친구
권오상씨는 평남리 구남마을 산비탈에 있는 목사(牧舍)에 둥지를 틀었다.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업에 대한 미련, 아내의 관절염, 어머니의 노환, 아이들의 학교생활 부적응 등으로
매일 고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번뇌의 나날이 계속됐다.
농사지을 변변한 땅이 없어 강변에 콩과 보리를 심었다가 불어난 물에 잠기는 바람에 몽땅 날려버렸다.
귀농정착자금 2,000만원으로 산에 감나무를 심었다가 경험 부족으로 절반이 고사했다.
다행히 그 다음에 심은 밤나무는 성공했다.
좌충우돌, 우왕좌왕한 시기였다.
그때 '귀인'을 만났다.
권씨의 구세주는 다름 아닌, 농업경영전문인 고향 친구였다.
그 친구의 권유로 농업기반공사(현 한국농촌공사)에서 실시하는 쌀전업농육성사업 등 영농 정보에 눈을 떴다.
2002년에는 쌀전업농으로 선정돼 전업농교육, 선진농업교육 등을 받았다.
차츰 자신이 왜 시행착오를 겪었는지 알게 됐다.
'정보의 세례'를 받은 것이다.
"2003년부터 땅을 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군에서 연리 3%의 소득금고자금 3,000만원을 받아 논 1,500평을 샀습니다.
농촌공사에서도 대출을 받아 땅을 매입했습니다.
당시 제 조건으로는 대출을 받기 어려웠는데, 그 친구가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준 덕에 가능했습니다."
농촌공사 대출금은 20년 상환 조건인데다 자부담이 10%밖에 안돼
모아놓은 돈이 별로 없는 권오상씨 같은 이들에겐 '가뭄에 단비'였다.
그 길을 안내해준 게 바로 그 친구였다.
권씨는 지금까지도 절망에 빠져있던 자신에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어주었던 친구의
진심어린 배려를 잊을 수가 없다.
시간만 나면 면사무소, 농협, 지도소를 찾아간다
"일단 물꼬가 트이니까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는 관공서를 처갓집보다 더 고맙게 생각하고 자주 방문하게 됐습니다.
면사무소, 농촌지도소, 농촌공사, 농협 등 눈에 띄는 대로 부닥쳤습니다.
모르는 농사기법을 묻기도 하고, 대출지원 상담도 하고.
전혀 방법이 없을 것 같았는데도 길이 생기더군요."
친구가 권오상씨에게 준 선물은 '용기'였다.
부닥치고 또 부닥칠 수 있는. 그러다가 쓰러지면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주고.
권오상씨가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었던 성공 비결은 쉽게 포기하지 않고,
칠전팔기로 쓰러져도 일어나는 그 '용기'에 있었다.
친구가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실천하는 건 결국 본인의 몫이었다.
권씨는 모든 걸 행동으로 옮겼다.
권오상씨가 현재 가입한 작목반만 3개다. 적성면 고품질벼작목반, 밀작목반, 보리작목반이 바로 그것.
과거 임원이었거나 현재 임원일 정도로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도 그럴 것이 3개 작목반 모두 설립 때부터 권씨가 주도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내게 큰 도움을 주었던 친구가 회장을 하면 내가 총무, 내가 회장을 하면 그 친구가 총무를 맡는 식이었어요.
" 한마디로 '찰떡궁합'이었다.
농촌지도자 순창군지회 적성면 부회장, 순창군 농업경영인회 회원,
순창군 4-H연맹 적성이사, 농업농촌혁신대학 수료 등. 권씨는 주눅들지 않고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 속에서 사람들과의 끈끈한 네트워크를 씨줄날줄로 엮었다.
농사나 농촌일은 '독불장군'으론 해낼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빚 6,000만원 갚고 땅 1만8천 평을 마련하다
빚 6,000만원을 안고 9년 전 순창으로 내려온 권오상씨.
그는 3년 전에 새 집으로 이사하면서 기나긴 목사 생활을 끝냈다.
맨 손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3만3천 평 규모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이 가운데 1만8천 평이 본인 소유다.
권씨는 벼농사와 밀, 보리 농사를 지으며 1년에 1억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다.
연 소득은 매출의 절반가량인 6,000만 원가량.
이 가운데 2,000만원이 두 아들의 교육비로 나가고 빌린 돈의 이자와 생활비를 빼도 전혀 쪼들리지 않는다.
빌린 돈의 원금 상환과 이자로 1년에 1,500만 원 정도 나가지만,
내년이면 얼추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농협 등에서 "필요하면 돈을 갖다 쓰라"고 먼저 이야기할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탄탄해졌다.
격세지감이라 할만하다. 그래서 동네 어르신들이 권씨를 볼 때마다 "자네, 용 됐네"라고 감탄한다.
"겨울철에 이모작으로 생산한 밀과 보리는 전부 순창장류단지에 보내지는 계약 재배입니다.
지난해 1만2천 평에 겉보리를 심고, 6천 평에 밀을 심었습니다.
재작년에는 밀을 시범적으로 조금 심었다가 많이 늘린 겁니다.
둘 다 '순창 고추장'의 재료로 쓰입니다."
밀과 보리는 순창군에서는 적성면만 심고 있다.
겉보리는 엿기름 만들 때 맥아로, 밀은 발효시킬 때 효모로 쓰인다.
순창에서 생산된 밀은 장류단지 수요량의 10% 정도.
겉보리의 가격은 완만한 하락 추세고, 밀은 가격이 괜찮아서 내년부터는 겉보리보다
밀을 훨씬 더 많이 심을 계획을 갖고 있다.
같은 농사일을 하더라도, 발 빠르게 움직이는 판단력과 적응력이 권오상씨의 또다른 성공 비결이다.
권씨는 내년으로 예상되는 대량 밀 생산 이전에 시범 단계와 확대 단계를 거쳤다.
또한 곡물 가격의 중장기적인 시세, 장류단지의 수급 상황, 다른 마을과의 경쟁조건 등을 두루 살펴본 뒤
시기와 재배 면적을 판단한 것이다.
순창 고추장이 지리적표시 농산물로 등록되는 것도 그에게는 밀 생산을 확대하기 위한 유리한 조건이다.
'페이스 메이커' 권오상씨가 예비 귀농자들에게
"무조건 들락거려라. 발품을 팔아라."
권오상씨가 어려웠을 때 도움을 줬던 신월리 친구가 그에게 귀에 목이 박히도록 한 말이다.
'귀농을 꿈꾸거나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했더니 권씨는 친구가 자신에게 해주었던 조언을
그대로 돌려준다.
왕도가 없다는 것이다.
귀농자들이 대개 실패하는 건, 그 지역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해서이다.
인간관계 면에서도 그렇고, 정보의 소통에서도 그렇다.
"귀농자들이 얼마 못 버티고 포기하거나 되돌아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텃새' 때문이라고 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텃새로 느껴지는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예전과는 달리 농촌 관련 단체나 기관에서도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친절하게 맞이해줍니다.
결국 본인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데 자기 틀 안에 갇혀 있으면 실패할 수밖에 없지요."
권씨는 난감할 때는 한 마디만 거들어줘도 큰 힘이 된다는 걸 겪어봤다.
그 누구보다도 실패와 좌절의 쓰라림을 맛봤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직접 겪어본 사람에게서 나온 이야기는 신뢰의 무게가 다르다.
"나도 처음에는 깜깜하고 막막했습니다. 보증을 서주는 사람도 없고,
'도시에서 망해서 내려왔다'는 따가운 시선도 느꼈습니다."
권씨는 그 벽을 넘어섰다. 42.195km의 마라톤을 뛸 때 흔히 사점(死點)을 경험한다.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고통의 지점과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그 사점은 끝까지 완주하려는 사람의 의지를 결코 뛰어넘지 못한다.
마라톤의 사점은 포기하는 사람에게만 거대한 장벽인 것이다.
몇 차례의 사점을 넘어 꾸준히 달리고 있는 권오상씨의 사례는 어찌보면 처음 마라톤을 배우는
'예비 귀농자'에게는 '페이스 메이커'일 수도 있다.
IMF 외환위기 때 사업 실패의 여파로 귀농한 권오상씨.
그는 2000년 귀농 당시 부지런히 발품을 팔며 여러가지 영농 교육을 받았다.
그게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준 밑거름이기도 하다.
9년이 지난 지금 그는 당당히 성공한 귀농인으로서 예비 귀농자들을 만난다.
수강생 신분에서 강사 신분으로 바뀐 것이다.
그는 종종 농촌공사나 순창군 귀농자반에서 마련한 교육 프로그램에서
9년 전 자신과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을 본다.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장 무서운 건 자신의 마음속에 스스로 만들어놓은 포기와 좌절의 벽"이라고.
"그 벽과 맞서 싸워 이겨야 한다"고.
첫댓글 여기가 한때는 우리동내 였었는데 왠지 친근감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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