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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 - 마라
(룻기 1장 19절 - 22절)
지금으로부터 약 70년 전의 일이다. 어느 한 마을에 큰 경사가 났다. 일본 동경으로 유학가는 학생이 생긴 것이다. 지금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지만 그때만 해도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더욱이 외국에 유학가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그 당시에 외국 유학에 합격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그 마을뿐만 아니라 그 원근의 마을들까지도 다 기뻐하며 축하하였다. 그런데 학비가 문제였다. 가난한 농부의 부모로서는 그 엄청난 학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인심 좋은 이웃들이 너도나도 돈을 모아 그를 일본으로 보냈다. 부모들은 아들이 졸업하고 돌아오면 큰 인물이 된다고 5년 동안 아들의 학비를 장만하느라 소를 팔고 땅을 팔고 마지막에는 집까지 팔아가면서 고생하여 아버지는 끝내 아들이 돌아오기 반년 전에 과로로 피를 토하고 세상을 떠났다. 늙은 어머니는 그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등이 휘어지고 몸은 몰 모양 없이 망가지었다. 기나긴 5년이란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이 일본에서 돌아온다는 소식이 왔다. 이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동네사람들도 마치 경사가 난 듯 큰 잔치가 벌어졌다. 어머니는 너무도 기뻐서 동네사람들과 함께 부두 가에 마중을 나갔다. 부두 가에는 마중 나온 사람들로 북적이었다. 일본 배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목을 길게 빼들고 5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졸업하여 금의환향하는 이 아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학생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마중 나온 사람들은 자기 아들딸들의 이름을 부르며 만나니 그러안고 뛰면서 좋아 야단이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이제 나올 사람이 없다고 할 그 때에 그 아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멋진 양복을 입고 나타날 줄 알았던 이 아들이 머리는 덥수룩하고 얼굴은 췌췌한데 두 손은 포승에 결박되어 나오는데 아들은 얼굴도 들지 못한 채 경찰에게 이끌리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니 이게 웬일인가? 사람 잘못 잡은거 아닌가? 후에 알고 보니 이 아들은 일본에 가서 첫해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이듬해부터는 부모들이 부쳐온 돈으로 술집에 다니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돈을 탕진하고 학교에도 잘 나오지 않아 여러 번 경고처분을 받다가 졸업을 앞둔 두 달 전에 술집 빚을 갚으려고 밤에 나가 강도질 하다가 잡혀서 끝내는 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고 수갑을 차고 경찰에 이끌리어 귀국 하게 되었다. 5년공부 공든 탑이 무너지었다. 모든 꿈이 사라지고 모든 기쁨이 절망이 되었다. 그날 밤에 어머니는 기절을 하고 넘어지셨는데 그 길로 세상을 떠났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면서 5년의 그 어려움을 다 겪으면서 견디던 어머니가 그 마지막 소망이 끊어지는 순간 그 생명도 끊어지고 만다. 나는 여기서 이 아들이 포승에 꽁꽁 묶이어 고향으로 돌아올 때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다. 오매불망의 고향 내가 나서 자라난 곳, 내 부모님이 계시고 내 정든 땅이 있는 그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 아들의 마음, 5년 전 고향을 떠나갈 때는 큰 포부를 안고 부모님들과 고향 사람들의 크나큰 기대를 안고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떠났는데 이제 열매를 맺을 계절이 되어 돌아오는 이 아들이 열매는커녕, 성공은커녕, 귀한 세월을 허송하고 아까운 기회를 다 흘려 버리고 내 멋대로 내 정욕대로 살다가 이제 실패와 절망을 안고 포승에 묶이어 돌아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사연인가? 이제 배가 부두 가에 도착하여 그 큰 희망과 기대를 안고 마중 나온 부모님들과 고향 사람들은 내가 이 모습을 가지고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 들어가고 싶고 강물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번 잘못된 결단이 일생의 후회를 가져다 준 것이다. 만일 인생을 다시 살수만 있다면 내가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난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간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때문에 그토록 사랑하던 부모님들은 이미 다 세상을 떠나셨다.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그 큰 상처 아물지 않고 평생의 한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오늘은 룻기서 강해 네 번째 시간이다. 나오미의 귀향의 사건이다. [이에 그 두 사람이 행하여 베들레헴까지 이르니라](19절상) 성경은 간단히 요약하여 기록하였지만 내가 그 때의 장면을 소설처럼 역어보려 한다. 잘 살아 보겠다고 정든 고향 떠나 모압으로 떠나갔다가 십년 동안 남편 잃고 억대같은 두 아들을 다 잃고 재산 다 날리고 이제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는 이 나오미의 그 마음을 우리가 한 번 생각을 해보자 비록 새로운 결단을 내리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지만 자기가 당한 현실의 비극은 고향이 가까오면 가까올수록 마음은 점점 더 무겁게만 된다. 떠날 때는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웃고 떠들면서 앞날의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이 길을 떠났는데 이제 그 사랑하던 남편은 저 모압 땅에 묻어 놓고 떠날 때 그처럼 천진란만하던 두 아들도 제 명에 살지도 못하고 그 저주의 땅에 묻어 놓고 나갈 때 가지고 갔던 그 풍족한 재물도 다 이방 땅에 버려둔채 이제 홀로 돌아오는 이 나오미의 마음은 얼마나 후회되고 얼마나 부끄럽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때 내가 남편을 말렸더라면, 좀 더 기도해보자고 했더라면, 교회를 좀더 열심히 다니면서 주님의 뜻을 깨달았더라면 내 남편은 떠나지 않았을 것이요 남편이 죽지도 않았을 것인데, 그곳에 가서도 남편이 돌아갔을 때라도 깨닫고 회개하고 인차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더라면 두 아들은 잃지 않았을 건대, 그까짓 돈이 무엇이길래, 그까짓 자존심이 무엇이길래 그것 때문에 결단내리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두 아들까지 잃고 만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남편도, 두 아들도 다 나 때문에 죽었구나 내가 그들을 죽였구나 미안하고 원통해 남편의 이름을 불러보고 땅을 치고 통곡하며 두 아들의 이름을 불러봐도 남편도 아들도 아무 응답이 없고 하늘도 고요하고 땅도 잠잠하다. 인젠 죽구 싶어도 곁에 룻이 라는 며느리가 지키고 있다. 정말로 한번 실수가 돌이킬 수없는 평생의 한이 된 것이다. 내가 무슨 낯을 들고 고향사람들을 만난단 말인가? 내가 그들에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하나님 나는 어찌 하랍니까? 피발린 이 나오미의 호소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 먼나라로 가서 잘 살겠다고 떠난 이 둘째 아들이 이제 모든 재산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의 그 찹착한 심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 나오미는 이처럼 무거운 마음을 안고 베들레헴에 도착한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22절) 가까이 올수록 들판에는 오곡백과 무르익고 끝없는 밀밭에는 알알이 여문 곡식들이 고개를 숙이고 추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길가에는 농부들의 풍년으로 인한 기쁨에 벙실거리며 처처에서 처녀들의 풍년을 맞이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양소리가 울려퍼지는데 마치 나오미네 일행을 환영하는 듯하다. 모압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는데](6절) 이제 그 아름다운 풍경을 자기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풍경이 그들을 위로하여 주고 있다. 모압에서 베들레헴의 거리가 약 100KM 가량된다. 지금으로 말하면 먼 거리가 아니다. 심천에서 동관까지 보다 좀 더 먼 거리이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 마음의 고통을 지닌채 천신만고를 거쳐 룻을 이끌고 이제 베들레헴 성읍에 들어선다.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을 인하여 떠들며 이르기를 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19절하) 사람들은 한창 추수준비로 바쁜데 사람들은 성문에 두 사람이 비칠거리며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보니 늙은 할머니가 젊은 여자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는데 사람들은 그들의 입은 옷을 보고 본 지방 사람이 아니라 이방 사람인 것을 인차 알아보았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 대하여 거의 거래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상관이 없다고 여기고는 다시 자기 일에 바삐 보내고 있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하지 않았고 알은척하지도 않았다. 나오미는 지쳐서 물길러 온 사람들에게 물을 얻어 마시려고 우물가로 갔는데 그들이 오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한 나이 많은 여자가 갑자기 손가락으로 나오미를 가리키며 소리를 지른다. [이가 나오미냐]고. 이 한마디에 온 베들레헴이 떠들썽하였다. 나오미 하면 이 베들레헴 사람들 그 누구나 잘 아는 처지이다. 그처럼 착하고 예절 밝고 젊고 예쁘고 품위가 있고 존경받던 그 나오미, 당시 그 동갑내기 여자들이 다 시집 잘갔다고 부러워하던 그 나오미가 이제 십년만에 옛날의 아름다움, 그 품위, 그 젊음, 그 예쁨 다 잃어버리고 사지를 바로 스지 못하는 늙은 할머니가 되어 돌아 왔단다. 잘 살아보겠다고 반드시 성공하고 돌아오겠다고 장담하며 떠나가던 그 나오미가. 뭇 사람의 부러움을 안고 웃으면서 떠나가던 그 나오미가, 그 착한 남편은 어디에 두고 그 씩씩한 두 아들은 어디에 두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집 팔고 땅 팔고 짐승팔고 그 많은 양까지 다 팔아먹고 풍성한 재산을 이끌고 떠나갔던 이 나오미가 그 재산을 다 어디에다 묻어 두고 이처럼 늙은 할머니가 되어 이처럼 빈 털터리가 되어 이처럼 홀몸으로 돌아 왔단 말인가? 동네 여자들이 모여 들기 시작한다. 오는 사람마다 나오미를 바라보는 순간 다 놀라서 소리지른다. [이가 나오미냐]고. 사람마다 혀를 두른다. 사람마다 놀라서 바라본다. [아니 설마 이럴 수가 있나] 마치 그처럼 존경받고 신앙좋은 욥이 하루 아침에 거지가 되어 온 몸에 악창이 나서 벌거벗고 잿더미에 앉아 기와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는 것을 바라온 욥의 세 친구가 그 광경을 보고 너무나도 놀라서 일주일 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그 곁에 앉아 있던 것처럼, [사단이 이에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서 욥을 쳐서 그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게 한지라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그에게 이 모든 재앙이 임하였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처소에서부터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상약하고 오더니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욥2:7-13)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나이 사십된 사람에게는 십년이 지나도 거의 그 모습 그대로이다. 크게 변하지 않는다. 베들레헴에 있던 사람들 특히 나오미의 동갑내기들은 십년이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인데 유독 나오미는 완전히 상상할 수 없게 망가지었다. [이가 나오미냐] 이 말은 나오미에 대한 비웃음 보다는 그에 대한 동정과 긍휼의 마음과 그가 당한 처지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들이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마음들이다. 세상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이 잘 되었다고 하면 은근히 배 아파하고 잘 못되었다고 하면 은근히 깨고소해 한다. 중국속담에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는 말이 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야비하고 비열한 사람들이다. 남이 넘어지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보다 더 야만적이고 악한 사람은 없다. 만약 우리에게 나오미같은 이런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할까? [내가 뭐라고 하던가 떠나가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가더니 보라][보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서 저주를 받은 것이니 빨리 회개나 하라][그전에 잘 살던 때는 으쓱 대더니 이제 꼴 좋다] 등등 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잘 살펴야 한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는가를!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5: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들의 되지 못하고 된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1-3)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칭하느뇨 하니라](20,21절) 이 나오미의 말은 오늘 말씀의 중심이다. 나오미의 자신의 당한 일에 대한 평가이다. 첫째는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라]이다. 나오미란 기쁨, 즐거움이란 뜻이다. 그의 이름은 나오미었다. 그가 베들레헴에 있을 때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라고 고백하며 살 때이었다. 그때 그는 믿음직하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사랑하는 남편도 곁에 있었고 날마다 기쁨을 주는 사랑하는 두 아들도 함께 있었으며 그들의 생활을 윤택케하는 푸른 초장 삶의 터전들도 아주 풍족하게 있었다. 그는 확실히 행복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나오미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나갈 때 까지는 풍족하였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한마디로 그가 떠날 때에 먹을 것이 없어서 살길을 찾아 떠난 것이 아니었다. 좀 더 잘 살아 보겠다고 떠난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하나님을 버리고 신앙을 버리고 물질을 따라 떠난 것이다. 그 증거는 베들레헴의 다른 사람들은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나를 마라라 칭하라]이다. 베들레헴을 떠날 때는 나오미로 떠났지만 돌아올 때는 마라가 되어 돌아온다. 마라는 쓰다. 괴롭다, 슬프다 이다. 하나님의 품을 떠나니 나오미가 마라가 된다. 기쁨과 즐거움이 변하여 괴로움과 슬픔이 되는 것이다. 나오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떠난 고통이 무엇인지를 간증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십년 동안에 나오미가 마라가 된 것이다.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고 재산도 다 잃고 기쁨도, 즐거움도 다 잃고 이제 괴로움과 슬픔을 한 가슴 안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게 된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 나를 박대하시면 나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위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 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찬송 338장)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하나님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21절) 나오미의 이 고백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나 하나님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떠나니 모든 것이 헛것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전능자를 떠나니 내가 괴롭게 되었고 나는 풍족하게 나갔으나 여호와를 떠나니 나는 비어 돌아오게 되었고 여호와를 떠남 그 자체가 내게 징벌이 되었고 전능자를 떠남이 곧 나의 괴로움이 었다는 것이다. 남편을 의지하고 두 아들을 바라보고 재물을 더 얻으려고 하나님을 떠나니 남편도, 두 아들도, 재물도 다 헛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을 떠나고 나면 재물이 더 이상 내 재물이 아니다. 내 남편도 더 이상 내 남편이 아니다. 내 아들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내가 돈으로 옷을 사도 내가 입지 아니하면 내 것이 아니요 내가 밥상을 차렸어도 내 입에 들어오지 않으면 그 밥상이 내 것이 아니다. 내 남편이 평생을 나와 함께 살지 않으면 그는 내 남편이 아니요 내 아들도 내 곁에 없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품에 들어오면 내 것이 아닌 것이라도 내 품에 들어와 내 것이 된다. 보라 나오미의 아들 말론이 룻과 결혼하였다. 그런데 그 아들 말론이 죽었다. 떠나간 말론은 더 이상 나오미의 아들이 아니다. 그러나 곁을 떠나지 않은 룻은 여전히 나오미의 며느리이다. 그가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나오미에게로 가져오니 그 아들이 오벳인데 성경은 오벳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에 보아스가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와 동침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로 잉태케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자부가 낳은 자로다 나오미가 아기를 취하여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주되 나오미가 아들을 낳았다 하여 그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비인 이새의 아비였더라](4:13-17) 하나님의 품을 떠난 나오미가 마라가 되어 다시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니 또 기쁨과 즐거움의 나오미로 회복 된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법칙이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신2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