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년 9월 14일 | 주영숙
수로, 그녀의 성씨는?
김해 김씨(金海 金氏)시조는 김수로왕(金首露王)이다.
가락국전지(駕洛國傳誌)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기 42년(중국 후한 광무황제 건무18) 3월 계욕일(禊浴日:음력 3월3일, 즉 삼짇날에 액막이의 의미로 목욕하고 여럿이서 음료수를 마심會飮)에 가락국의 아홉 촌장들이 수빈(水瀕: 바닷물이나 강물 등의 가장자리)에서 놀다가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나라를 다스릴 군장(君長)을 얻고자 하늘을 향해 의식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라고 한 구지가)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자줏빛 줄이 내려와 땅에 닿아있었다. 달려가 보니 금으로 만든 상자에 해처럼 둥근 여섯 개의 황금 알이 들어있었다. 여섯 개의 알에서 여섯 동자가 태어났는데, 그 중의 제일 먼저 나온 동자가 김수로. 금합, 금란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을 김(金), 세상에 처음 나타난 가장 높은 사람이라 하여 이름을 수로(首露)라 지었다. 가락국은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지명도 여러 명칭으로 변해왔다. 금주(金州) ‧ 금녕부(金寧府) ‧ 금주목(金州牧) 등으로 부르다가, 고려 충선왕 때 금해부(金海府)가 설치됨으로써 수로의 후손들이 본관을 김해(金海)로 정하였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의 수로부인은 누구일까?
수로부인의 성은 수씨였다고 억측해볼 수 있다. 인명사전에서 옛사람들을 찾아보면 남성들은 법명이나 아호, 또는 직위명이 맨 앞에 기록되는데 반해 여성들은 여왕이 아니고서는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이의 예와 같이 대개 그 성씨가 먼저 기록되어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수로부인이 수씨(水氏)였을 것이라는 가정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수씨(水氏)시조는 누구인지 문헌에서 찾기 힘들다. 성씨사전을 보면 수씨(水氏)는 중국 오흥(吳興 : 삼국유사 지을 당시의 절강성 전당도)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명(明)나라 장렬왕(莊烈王)때 어사를 지낸 수가윤(水佳允)을 후손으로 전한다.
본관(本貫)은 운제(雲梯:고산지방)와 김해(金海), 강남, 강릉이 있다. 수(水)씨 본관에 대하여 2000년의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강남 수씨가 9가구에 41명, 김해 수씨가 4가구에 17명, 강릉 수(水)씨가 12가구에 46명이고, 고산(운제) 수(水)씨가 3가구에 11명이었다. 2000년에 한국에 생존한 수(水)씨는 총 4개의 본관에 30가구, 124명이었다. 1985년의 조사로는 역시 30가구에 총113명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15년 동안에 가구 수는 전혀 늘지 않은 상태에서 인구수만 11명 는 셈으로써 희성 중에 희성이다.
『삼국유사』에서 경흥우성(憬興遇聖)이란 글을 일부 발췌한다.
신문왕(31대 681~) 때의 고승(高僧) 경흥(憬興)의 성은 수씨(水氏)로서 웅천주(熊川州) 사람이다. 18세에 중이 되어 삼장(三藏:경經 ‧ 율律 ‧ 론論)에 통달하니 명망이 한 시대에 높았다. 개요(開耀) 원년(681), 문무왕이 장차 세상을 떠나려 할 때 신문왕에게 부탁했다.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 신문왕이 즉위하여 국로(國老)로 책봉하고 삼낭사(三郎寺:경주에 있던 절)에 살게 했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한 달이나 되었다. 이때 여승 하나가 와서 그에게 문안하고 <화엄경> 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 준다’고 하면서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 인해 생긴 것이니,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러고서 (지팡이로:2007년에 나온 김원종 역 삼국유사에는 ‘탈’이라 해석하였지만 문맥상 적확하지 않다. 그 즉시에서 열한가지 탈을 만든다는 것도 불합리하지만, 탈을 가지고 높이 솟아올랐다가 줄어들었다가 했다는 해석도 어울리지 않는다. 1997년에 나온 이민수 역 삼국유사의 해석에는 그것이 탈이라는 주장 대신 지팡이라는 암시를 준다. 탈을 만든 게 아니라 손오공이 털을 뽑아 여러 명의 손오공을 내놓듯이 지팡이 한 개로 열 한 개의 지팡이를 만든 것이다.) 열한 가지 모습을 지어 저마다 각각 우스운 춤을 추게 하니, 그 모습은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 듯도 하여 그 변하는 형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모두들 우스워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에 법사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러고 여승은 문을 나가 남항사(南巷寺:경주에 있던 절)에 들어가서 숨었고, 그(여승)가 가졌던 지팡이는 새로 꾸민 불화(佛畵) 십일면원통상(十一面圓通像:부처 ‧ 보살의 불상을 말함. 즉 부처 ‧ 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의 경계에 나가는 것.) 앞에 있었다.
그 지팡이는 예사 지팡이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냥 흔한 지팡이라면 사람들을 그토록 웃겼을 리가 없다.
인물사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경흥, 그의 성이 바로 수씨(水氏)였다.
[이때 여승 하나가 와서 …(중략)…모두들 우스워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라고 하는 삼국유사의 글은 성덕왕(33대 702~)시대 수로부인 설화의 해가(海歌;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을 앗아간 죄 그 얼마나 크랴, 네 만일 거역하고 내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잡아 구워먹으리)를 연상시킨다. 더욱이 여승이 지팡이를 변신시켜 춤을 추어보인 것과 한 노인이 이르기를 그 해가를 부르면서 지팡이로 해안을 치면 부인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권고를 비추어보면 해가(또는 구지가)는 고시가(古詩歌)이면서 주술(呪術)에 해당하며 지팡이는 그 주술(병을 낫게 하거나 액을 물리치게 하기 위한)에 있어서의 중요한 도구였다는 입증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나무로 만들었기 십상인 옛날 옛적의 그 지팡이는 과연 어떤 모양일까?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 그것은 혹 남근모양이 아니었을까? 거북의 머리가 남근모양 아닌가? 그런 억측을 해보면 수로부인 이야기는 또 다른 해석을 낳는다.
경흥우성과 그 여승의 사이에 난 무남독녀가 수로부인이었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참 재미있는 내용이네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원래 이야기를 가지고 억측에 억측을 더해가는게 재밌죠 ㅋㅋ 사람은 각자 생각이 다르니까요.
원래의 설화 내용을 좀더 신빙성있게 접근하여 하나의 가설을 세우고 거기에 치중하여 여러 조사를 하다보면 놀라운 발견을 할 수도 있지요. 다 하고나서는 "처음에는 억측이었지만 알고보니 나의 그 억측이 들어맞았다."...하하하~ 본문 말미를 약간 보완할 테니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