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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院 생산활동의 再生을 위한 提言
김호동(영남대 교수)
1. 머리말
성호 이익은 놀고먹는 좀 여섯 마리 가운데 하나로 중을 들었다. 조선시대 불교가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인륜에 어긋난다는 것도 있지만 나라와 백성의 살림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해만 끼친다는 것도 중요한 이유였다. 만약 모든 사람이 불교의 교리대로 산다면 남녀가 교합하지 못하니 인구가 늘지 않을 것이요, 남은 사람도 일하지 않고 빌어먹으니 결국은 모두 굶어 죽어 사람의 씨가 마를 것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군대도 가지 않아 나라에 보탬이 되지 않으니 중들은 한마디로 천하의 큰 좀(大蠧)이라는 것이다. 승려들은 일하지 않고 놀고먹었는가?
‘일하지 않고 빌어 먹는다’는 것은 승려들이 탁발하는 행위를 빗댄 것이다. 탁발은 불교에서 행하는 불교의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범어로는 ‘Pindapa-ta’이며, ‘걸식(乞食)·걸행(乞行)’ 등으로도 번역된다. 원래 동냥이란 말도 작은 종을 흔든다는 動鈴에서 나온 것이다. 고려 때 중들이 마을을 돌아다니며 양식을 얻어가는 것을 동령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천한 구걸을 뜻하는 말로 바뀌고 만 것이다, 손에 바루〔鉢盂〕를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을 구하는 행위를 말한다. 탁발은 출가자가 가장 간단한 생활태도를 갖도록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한편 我執과 我慢을 버리게 하는 수행법이 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보시(布施)하는 자에게 福德을 길러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원
우리나라에서도 전통적으로 승려의 탁발을 널리 시행하였으나, 현대에 이르러 탁발로써 생계를 삼는 사이비 승려가 많이 등장하게 됨에 따라 대한불교조계종 등에서는 모든 승려의 탁발행위를 일체 금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어린 시절 승려의 모습을 기억하면 ‘탁발승’의 모습이었고, 동냥한다는 생각과 함께 무서워했던 것 같다. 이제 ‘탁발승’들을 거의 볼 수 없다. 그러나 사원과 교회, 성당 등은 넘쳐나고 건물의 증축과 신축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주일 헌금이 몇 억이나 되는 교회 등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다시 환생하여 그것을 두고 ‘일하지 않고 빌어먹는다’고 욕하는 것보다 더 심한 말들을 하지 않을는지?
사실 승려들이 놀고먹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절에서의 일과 중에 울력(運力)이라고 하는 공동 노동이 있었다. 마당을 쓸고, 채소밭을 일구고, 또 다리를 놓아 越川功德을 쌓기도 하였다. 그것이 깨달음의 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승려들의 일상 삶이었다. 일찍이 당나라 百丈禪師는 ‘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 하여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는 스스로도 90세까지 농사일을 놓지 않았다. 지금의 불교사원 가운데에서도 자급자족을 위한 노동의 생활화가 이루어지는 예가 있다.
중국 역사상의 불교와 경제를 다룬 연구에서 불교사원이 풍부한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많은 토지와 노동인구를 장악하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시에 사원이 그 잉여재산으로 농공상업의 영리사업에 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사원경제를 다룬 연구에서는 “어느 종교처럼 기부금이나 헌금이 제도화되지 않았으며, 일정한 권역의 民人을 신도로 확보해 단월로 삼지 않았다. 이것은 불교사원이 더욱 안정적인 경제기반을 필요로 한 요인이다. 토지의 경영이라던지 고리대 운영, 그리 상업활동 등 자체의 경제활동이 고려 사원에서 더욱 중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불교는 대부행위를 죄악시하지 않았으며 생산을 강조하지 않는 관념이 있는데, 이것은 사원경제의 특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대신에 보시를 권장하는 논리가 크게 발달하여 사원의 경제운영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경제활동에서도 매우 중요한 이념으로 작용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고려시대의 사원의 경제적 기반과 상업활동을 보는데 있어서 한 가지 간과된 것은 고려시대의 경우 관혼상제의 일상 예절이 불교적 의식에 의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원에서 그 소요물품을 생산 내지 조달하였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사원은 목조건축, 석조탑이나 금속공예품, 인쇄술, 초상화 등의 회화 등의 발달을 견인하여 갔다. 그 과정에서 승려들은 ‘一人一技’를 갖고 생산활동에 종사하기도 하고, 또 그 물품의 조달을 인근 마을에서 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寺下村의 생성을 가져왔고, 고려시대 ‘재가화상’은 그런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 정수가 대장경의 각성으로 나타났다. 팔만대장경은 그간 익혀왔던 인쇄술과 제련기술, 회화와 공예기술 등 사찰의 생산활동의 기술과 지혜를 총결집한 것이다. 그것의 각성을 통해 사원의 인쇄술 등의 수공업생산기술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상제례가 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원은 왕실과 개인의 구복을 비는 경향이 강하였고, 사원은 이에 인연하여 보시를 권장하는 논리가 크게 발달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종교가 개인의 구복을 구하는 경향이 강하고 상대적으로 사회적 기능이 약한 경향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고려말 조선초 유불교체에 따른 상제례가 사원에서 개인의 집으로 옮겨감에 따라 불교의 생산활동은 크게 위축되어 갔다. 마찬가지로 현재 한국의 교회와 사찰이 신자들의 시주와 헌금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 속에서 여말선초 유불교체와 같은 위기, 즉 IMF를 뛰어넘는 미증유의 위기를 겪게 되었을 때 자체 생산활동 기반을 갖지 않은 종교계가 얼마만큼 생명력을 가질지 의문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상 불교의 생산활동을 살펴보고, 그것의 재생을 위한 방안을 강구해보자는 의도에서 <寺院 생산활동의 再生을 위한 提言>으로 제목을 잡았다.
2. 중세 사원의 생산활동 개관
어떤 여승(尼)이 충렬왕의 왕비인 제국대장공주에게 흰 모시를 바쳤는데 가늘기가 매미의 날개 같으며 꽃무늬도 놓여 있었다. 공주가 저자의 상인에게 보이니 이전에도 보지 못하던 물품이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그래서 여승에게 그 출처를 물어 본즉 “제가 데리고 있는 여종 하나가 이것을 짤 줄 압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공주가 그 여종을 자기에게 주는 것이 어떠냐고 요구하였다. 여승은 깜짝 놀랐으나 하는 수 없이 여종을 공주에게 바쳤다라고 하는 일화처럼 사찰에서는 베옷을 짜는 수공업 활동도 했다. 그렇게 짠 것을 사찰 식구들이 입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밖에 내다팔기도 했다. 자급자족을 위한 가내수공업 단계를 벗어나 점차 전문적인 수공업 단계로 발전하였을 것이다. 개경에서는 20승 황마포 등 고급직물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는데 이런 고급품은 아마도 호부가나 사찰의 솜씨 좋은 織妃가 생산하여 시장에 공급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사원의 상업활동에 관한 연구인 『고려후기 사원경제 연구』(이병희, 경인문화사, 2008)에 의거하여 사원의 상업활동을 가능하게 한 생산활동을 살펴보면서 필자의 견해를 곁들이기로 한다.
고려시대의 사원은 다량의 물품구매자였으며 동시에 판매자였다. 사원은 건축시의 자재, 불구제작을 위한 재료, 불교행사에 필요한 물품, 승려들의 필수품 등을 필요로 하였고,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한 양을 구매에 의해 조달하였다. 그리고 사원이 소유한 잉여물품, 가공품을 판매하였고, 직접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 상품을 생산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사원이 교역활동을 통해 판매하고 있는 품목은 다양하였는데 그 상당수는 자체 생산된 물품이었다. 생활필수품이었던 소금이나 기름·벌꿀 등을 생산하여 판매하는가 하면 차는 물론 마늘·파 등도 포함되어 있다. 파나 마늘은 승려가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농작물인데도 재배하고, 나아가 판매까지 하고 있어 자주 문제가 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관혼상제의 일상 예절이 사찰에서 이루어지면서 사원에는 항상 속인이 드나드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사원의 토지는 장생표를 경계로 할 정도로 농장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상당한 규모의 미곡을 수취하였고, 그 잉여곡물을 직접 매각하거나 아니면 가공하여 판매하기도 하였다. 곡물이 가공되어 판매되는 사례로는 술(酒)이 있다. 사원의 釀酒는 고려 현종대부터 문제가 되고 있었다. 현조종 원년 8월에 僧尼의 양주행위가 금지되었고, 12년 6월에 승려의 음주작업이 문제가 되기도 했고, 다음 달에는 재차 양주행위가 금지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그러한 조치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현종 18년 6월에 경기도의 楊州 莊義寺·三川寺·靑淵寺가 쌀 360여 석을 양주하여 처벌받은 예에서도 보다시피 사원은 계속해서 양주를 하고 있었다. 인종대에는 만불향도가 술을 파는 것이 보이는 것에서도 사원이 가공한 술은 사원에서의 행사에 쓰이는 부분도 없지 않았겠지만 판매를 위한 생산의 목적하에 지속적으로 생산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원의 가공품에는 두부도 한 몫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절은 두부공장 노릇을 했다. 왕릉 근처의 원찰도 재를 올릴 때에 두부를 만들어 대는 造泡寺 역할을 겸했다. 지금은 콩나물과 함께 두부가 서민들의 요긴한 찬거리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두부는 흔치 않은 별미였다. 그래서 사대부들도 두부를 먹을 때에는 벗들을 불러모아 ‘泡會’라고 부르는 두부 파티를 하곤 했다. 그때마다 양반들은 종을 데리고 말에다 콩을 싣고서 절에 올라가 두부를 만들어내라고 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오희문이 쓴 일기 『쇄미록』에도 섣달 그믐에 종에게 콩을 주어 두부를 만들어 오라 했는데, 중들이 거절하면서 불손한 말을 했다고 하여 분한 나머지 수령에게 일러바쳐 중들을 잡아들여 발바닥을 때리는 대목이 나온다.
사원은 농산품의 생산과 가공의 중심적 위치에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수공업제품의 생산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所나 관청수공업장이 전체 수공업 생산 분야의 중심이지만 사원도 자체의 필요에 의해서 수공업 제품의 생산에 종사하였다.
사원은 불상이나 대장경 등의 경전과 佛具를 제작하였기에 목공기술·금속가공기술과 인쇄술, 제지술을 소지한 장인을 다수 거느리고 있었다. 사경화가 발달한 고려시대의 全英甫는 帝釋院의 奴로서 金薄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고, 琉璃瓦를 훌륭하게 구워 만든 六然이라는 승려도 있었다. 불경의 편찬으로 인해 사원은 인쇄술의 발달을 견인하면서 종이가 사원에서 많이 만들어졌다. 조선 후기에 종이 만드는 造紙署가 황폐해져서 그 일을 남쪽 지방 절에다 떠넘김으로써 조선 후기의 종이 대부분은 절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관아에 종이 바치는 일도 벅찬데 서원, 향교를 비롯하여 지방에서 힘깨나 쓴다는 양반토호까지 가세하여 종이 상납 을 강요하였다. 양반들은 닥나무 껍질을 말에 싣고 절에 가서 종이를 만들게 한 일이 여반사였다. 김삿갓의 시에 얽힌 이런 일화가 있다. 어떤 문중에서 족보를 간행하기 위해 김천 직지사에다가 종이를 만들어내라고 하자 절에서 문중 사람들을 초청하여 종이 만들 일을 의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한 기골이 장대한 중이 “某氏 가문 譜紙는 천하에 좋은 커다란 보지이니 우리가 정성껏 해주지 않으면 해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하며 은근히 야유하자 문중 사람들이 제대로 항변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일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종이 다음으로 절에서 만들어 대었던 물건이 볏짚으로 만든 짚신(草鞋)과 삼으로 만든 미투리(麻鞋)였다. 이미 신라 문무왕대에 蒲鞋를 업으로 하면서 사는 광덕이라는 승려가 보일 정도이다. 이처럼 사원에 속한 노비가 수공업 기술을 소유하기도 하엿지만 승려 스스로가 탁월한 기술을 가지기도 하였다. 사원은 수공업 기술을 가진 노비나 승려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다량의 물품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였으며, 자체 소비되고 남은 것은 판매하였을 것이다. 때로는 판매를 겨냥하고 생산하는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사원이 판매해서 잉여를 축적하는 것 가운데 鹽盆이 있다. 이미 신라시기에도 사원이 염분을 소유하고 있는 예가 보이며, 고려시대에도 사원이 염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충선왕 원년(1309)에 榷鹽法이 실시되어 사원이 소유하고 있던 염분이 몰수되었지만 長安寺는 그 후에도 염분은 소유하고 있었다. 이의민의 어머니가 연일의 옥령사 婢였는데 그 남편, 즉 이의민의 아버지가 소금을 팔았다는 것은 사원이 소유한 소금을 파는 일을 맡아 행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원에서는 수공업제품 등의 생산활동을 하였다. 다만 고려시대의 경우 불교는 국교의 지위에 있으면서 왕실과 일반 민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혼상제의 일상 예절이 불교적 의식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막대한 보시가 이루어졌고, 상제례에 인연한 생산활동이 과도하게 이루어짐으로써 ‘一日不作 一日不食’과 탁발의 정신, 절약과 청빈, 검소를 놓아버리고 이익을 붙좇다가 결국 주자학에 스러지게 되었다. 향적 스님이 프랑스 수도원인 삐에르-끼-비에서 수행하면서 깨달은 것은 “종교는 청빈했을 때 비로소 대중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고 한 대목을 고려말의 승려들은 놓쳐버렸다. 결국 청빈을 모토로 한 성리학자들에 의해 승려는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좀으로 간주되었다. 승려들은 사원의 유지와 자신의 생활방편을 위해 탁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다수의 승려와 장인들이 다 떠나버리고 난 뒤 남은 절과 승려들에게 온갖 잡일의 하나로서 각종 생산활동이 강요되었고, 그것은 승려에게 고역이었다.
아래의 혜원 신윤복의 ‘路上托鉢’ 그림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음미할 대목이 담겨져 있다.
「路上托鉢」은 거리에서 길 가는 사람들에게 탁발을 하기 위해 법고를 치는 모습이다. 위 ‘노상탁발’ 그림에 승려 일행은 네 사람이다. 법고를 두드리는 사람만 깍은 머리이고, 목탁을 치는 사람은 탕건을 쓰고, 꽹과리를 치는 사람은 패랭이를 썼다. 고깔을 쓰고 고개를 숙여 절하는 사람은 손에 부채, 혹은 부적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이들은 광대같이 북과 징을 울리며 입으로 염불을 외우면서 부적 같은 것을 팔기도 했다.
(신윤복, 『혜원전신첩』 「路上托鉢」 28.2×35.6cm, 간송, 국보 135호)
조선시대에 억불이 가해지면서 사찰들이 갖고 있었던 田民은 속공되거나 향교, 서원, 양반의 경제적 기반으로 바뀌어 갔다. 그 못지않게 불교의 경제적 기반의 와해는 유불교체에 따른 제사권의 교체에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관혼상제의 일상 예절이 불교적 의식에 의해 치루어졌다. 특히 상제례의 경우 사찰이 그 주재자였다. 고려말 조선초 주자성리학이 수용, 보급되면서 상제례는 사찰에서 개인의 집으로 들어갔다. 사원이 갖고 있었던 제사권이 개인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성리학은 유학의 단계를 넘어 명실상부한 유교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불교의 경제적 기반의 와해의 상당 부분, 그리고 생산활동의 위축은 이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사찰들은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으나 승려들은 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위 그림처럼 성문 밖 길가에서 탁발을 하였다. 조선시대의 풍속화에는 勸善을 위해 길가에 나온 승려들, 그리고 방갓을 쓰고 목탁을 두드리며 깊숙이 고개 숙여 절을 하면서 여인을 맞는 모습이 그려진다.
(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1』 119에서 재인용)
상제례를 주관하면서 그에 인연하여 흥청망청하다가 도덕적 청빈을 내세우는 유교에 제사권을 빼앗겨버리고 권선과 탁발을 통해 사원을 유지하기 위해 고단한 모습의 승려들의 모습이 풍속화로 그려진 것이다. 상제례가 절에 이루어진 시기에는 아마도 이와는 전혀 다른 풍속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절간에서 머리 들고 군림하는 승려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종교 가운데 불교신자가 가장 많다고들 한다. 생산활동이 거의 없는 불교사원은 신도들의 시주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스님들은 탁발하지도 않으니 我執과 我慢에 빠질 가능성이 많다. 간혹 사찰을 방문할 때 스님이 군림한 자세로 꼿꼿이 않은 모습에, 신도들이 머리 숙여 조아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모두들 개인의 구복과 이 세상을 구제한 고승들 만은 아닐 것이다.
3. 보시를 넘어, 생산활동을 통한 자급자족하는 사원을 그리며
필자는 올해 1학기에 【고려 불교 문화의 이해】라는 강좌를 강의하였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서점에 나가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가 『향적스님의 가톨릭 수도원 체험기 프랑스 수도원의 고행』(향적, 금시조, 2009)을 발견하고 사들고 들어와 읽었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소개도 했다. 오늘 발표에 그걸 다시 소개하고자 한다.
향적 스님이 삐에르-끼-비 프랑스 수도원을 체험하게 된 계기는 프랑스에 머물렀던 호진스님으로부터 자급자족하는 프랑스 수도원의 시스템을 듣고 수도원 운영을 신도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꾸려가는 이야기가 매혹적으로 들렸고, 기회가 있으면 꼭 체험을 해보고 싶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향적 스님은 책에서 “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동서양의 문화는 다르지 않다. 가톨릭은 서양의 종교이지만 분명 배울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불교계도 자급자족하며 수행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14쪽)고 적고 있다. 그후 향적은 프랑스 수도원 생활을 체험하면서 출판사에 나가 책 정리를 하고, 도자기 요에서 일했고, 치즈 만드는 공장에 가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도원에서 만드는 치즈는 수도원에서 식사 때 먹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다 팔아 그 수익금을 수도원 운영에 보탠다. 치즈뿐 아니라 도자기와 인쇄물은 수준급이어서 프랑스에서 알아준다. 내가 만든 도자기는 한국스님이 만들었다는 이류로 수도원을 방문한 프랑스인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적고 있다(82~83쪽). 수도원을 떠나며 한 ‘송별사’에서 향적은 “가톨릭 신자들의 성금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갖추어 기도와 묵상으로 수행하는 것을 배웠습니다”(89쪽)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한국 불교계의 문제점이 신도들의 보시에만 의존한 채 생산활동을 통한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상의 글에 느낌이 있어 수업시간에 소개하였고, 오늘 이 자리에서 그걸 다시 끄집어내게 되었다.
한국의 불교계 뿐만 아니라 기독교 등의 제 종교들은 자급자족의 시스템이 부족하고 신도들의 성금과 보시에 의존한다는 점이 문제점이다. 그러다보니 신도들의 복을 빌어주는 기복신앙이 강하고 상대적으로 종교의 사회적 기능이 부족하다. 받는 것에 너무 길들어진 사회는 희망이 없다. 이제 향적 스님이 말했듯이 우리나라의 불교계도 자급자족하며 수행해야 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여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원이나 승려들이 ‘一人一技’, ‘一寺一技’를 지녀야만 할 것이다.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개최를 계기로 ‘僧市’를 되살려 사원이 생산활동의 한 장이 되어야만 한다. 그때의 승시에는 불교용품을 기능적으로 대량생산하는 회사의 제품이 아니라 ‘一日不作 一日不食’에 충실하여 기도와 묵상의 기운이 깃든 승려들의 상품이 진열되어야만 한다. 그런 제품이 판로를 뚫을 수 있을 것이고, 승시의 성패로 이어져 2011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만의 ‘승시’로 그치지 않고 생명력 있는 시장으로 남을 것이다.
불교적인 『고려사』회에서 주자학적인 조선사회로 바뀌면서 불교적 상제례가 유교적 상제례로 바뀌어 갔었다. 현대사회에 이르러 소가족, 나아가 핵가족으로 변모되면서 대가족과 정착 농경을 바탕으로 한 유교적 상제례, 집안 위주의 상제례를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그 틈새를 기독교나 불교 등의 종교계가 비집고 들어가면서 종교의 상제례 기능이 강화되어가는 추세이다. 불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와 관련한 상제례 용품을 통한 생산활동을 다시 되살려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불교와 가톨릭의 경우 비구와 비구니, 신부와 수녀들은 기독교의 목사와 다르다. 목사들은 결혼을 하며 가정을 가진다. 그들은 퇴임목사가 되더라도 노후생활을 자식들에게 의지할 수 있다. 독신 수도자의 감소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가정을 갖는 목사에 비해 불교와 가톨릭의 수도자들은 독신이다보니 그들이 힘이 다하여 뒷방으로 물러날 때의 생활이 문제가 된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양로 기능 등이 만들어져야 하지만 가톨릭에 비해 불교는 그 조직이 거의 갖추어지지 않고 있다. 흔히들 승려만큼 ‘늙어서 돈 없으면 서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다보니 승려들은 뒷날을 걱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시에 익숙한 한국 불교계는 사회적 기능이 부족하다. 사원의 생산활동 기능을 재생시켜 그 수익을 ‘寶’로 만들어 뒷방에 물러난 승려들의 노후생활을 보장하는 비용으로 사용한다면 승려들은 훨씬 청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권선을 통한 보시와 달리 ‘一日不作 一日不食’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의 수익은 바로 자신들의 노후생활을 위한 보장으로 이어질 때 불교는 번창할 것이다.
지금의 사원은 수행공간과 세속인의 보시를 끌어내기 위한 공간만이 즐비하다. 이제 사원의 생산활동이 가능한 공방이 만들어지고, 승려들이 ‘一人一技’의 능력을 가질 때 사원은 자급자족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보시에 의존하지 않고, ‘一日不作 一日不食’에 충실하여 청빈과 검소로 생활하는 스님들이 있는 한 그 사회는 희망이 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사회를 지탱하는 인간의 집단이 있게 마련이며,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것이 바로 불교이길 염원한다. 그 길의 하나가 생산활동을 통한 자급자족의 시스템을 불교계에서 하루 빨리 갖추는 것이다라고 제안하면서 오늘의 발표를 마치고자 한다.
고려시대 사원의 佛事와 交易場
한기문(경북대 교수)
머리말
1. 고려 사원의 수와 분포 양상
2. 고려 사원의 정기 儀禮 및 승려대회와 교역품
3. 송대 廟市와 고려 사원의 交易場 형태
맺음말
머리말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던 만큼 사원과 승려가 제도적 기반 속에서 확고한 승단이 성립되었다. 고려 말에는 사원이 민가와 섞여 있고 내 옆과 산곡에는 사원이 아닌 곳이 없다거나 인구의 반이 승려라는 문인의 글에서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승단이 유지, 운영되기 위해서는 사원과 승려들의 사회적 역할이 있었다. 그러한 것 중에서 사원의 불사나 승려의 교리 연구 대회 등이 상례적으로 열렸다. 이에 따른 사원 불사와 승려에 필요한 물품의 교역이 정기적으로 있었음을 물론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고려 이후 성리학적 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승단의 위축과 자료가 인멸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폐사지의 입지나 당대 금석문 자료에 단편으로 보이는 기록과 고려시기와 비슷한 승단을 형성한 송대 사례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고려시기의 사원의 교역장으로서의 기능을 살펴보려 한다. 먼저 사원의 분포와 사원간의 조직망을 정리하여 사원의 교역장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해 볼 것이다. 그리고 사원의 각종 불교 의례의 내용을 국가적, 세시적 상설의 양상을 정리하고, 각 종단의 승려대회의 상설 문제도 검토하여 정기적 교역의 필요성과 물품을 살펴보려 한다. 송상을 통한 서적, 향 등의 교역의 가능성도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송대 묘시 사례와 고려 사원의 교역장의 모습과 형태를 사례를 통해 그려 보고자 한다.
고려시기 사원의 교역장으로서의 역할이 정리된다면, 고려 전기 사회의 본관과 거주지가 일치되었던 지역간 고립 폐쇄적 사회에서 사원의 교역장을 통한 물적 교류로 그 보편성의 일면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고려 사회의 다원적 성격의 하나를 확인할 수도 있을 것이다.
1. 고려 사원의 수와 분포 양상
고려시기 전체 사원의 수적 추산은 조선 초의 기사로 역산해 볼 수 있다. 세종 원년에 ‘我國則前旣革去寺社田民僅存十一’ 이라 하여 사원수가 1/10 수준으로 남게 되었다고 하였다. 세종시 사원전이 1만결이었다는 기록에 따르면 고려말 10만결 사원전의 1/10 수준임을 알 수 있어, 사원 역시 태종때 정리된 242寺를 역산하면 2420寺 정도로 추산된다. 이는 성종시 ‘道詵設三千裨補’ 라 한 기사와 대략 비슷한 규모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佛宇조, 古跡조 그리고 고려시기 각종 금석문, 문헌 자료에 나온 사명을 종합하면 2286寺가 조사된다. 따라서 고려 말경에는 2000-3000 정도의 사원이 존재하였다고 추산된다.
고려 초부터 사원의 증가 추이는 다음과 같다. 王室에서 조영한 사원에 관해서는 비교적 『高麗史』에서 파악이 가능한데 이를 정리한다. 고려전기까지 왕실에서 창건한 사원 수는 42사나 된다. 이들 사찰은 왕실의 願堂으로 造營된 성격인 만큼 규모가 크고 工期가 수년에 걸쳐 이루어진 사원이었다. 개경 주위에는 인종대에 방문한 宋의 徐兢이 남긴 『高麗圖經』에 나타난 사원을 정리하면 51사가 확인된다. 그리고 『宋史』 高麗傳에는 70사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전기 車天輅의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 개경 성내에는 명찰만 300개가 있고 그 가운데 演福寺가 으뜸이라고 하였다. 이로 보면 개경의 사원 수의 증가가 태조대 25사에서 고려말 300여 사로 폭발적인 증가 추세를 알 수 있다.
사원 수를 현존하는 고려시기 寺院址를 엄밀히 조사하면 보다 정확한 사원의 수가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모두 조사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石塔을 조사하면 사원 수의 대략적 추세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탑의 수는 1,000여 基가 있는데, 그 가운데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석탑과 조선시대의 석탑은 모두 약 150여 기에 머물러 있고, 그 나머지인 대다수의 석탑은 모두 고려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려시기에 신라나 조선시기에 비해 어느 정도의 사원이 존재했던가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고려시기 인구는 대략 250만에서 300만으로 추정된다. 대략 300만으로 잡고 고려시기 사원 수 3,000을 대비하면 사원 1개당 인구 1,000명의 밀도를 가졌다는 계산이 가능하다. 사원은 기본적으로 出家僧의 수행공간이기 때문에 사원에 상주하는 승려들이 있기 마련이다. 출가승이 어느 정도인가를 통해서도 사원이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좀더 구체적 표현으로 현종대 10만 飯僧의 사례는 당시 전국적으로 僧籍을 소유한 승려 수를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송사』 고려전에는 고려 인구의 1/3이 승려라는 표현도 있다. 고려말 李穡은 “지금 머리를 깎고 무리를 지어 떠도는 자가 나라에 반이나 된다” 라 하여 수많은 승려의 존재를 시사한다. 이색이 표현한 무리를 지어 떠도는 자 속에는 사원의 예속민을 포함한 隨院僧徒를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로 보면, 고려 중기의 승려가 인구의 1/3 수준에서 고려말에 승려 수가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시기 재정규모 중에서 총 토지 결수 60 萬結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중 寺院田이 약 10만결이라고 한다. 따라서 사원이 차지한 국가 재정은 1/6을 점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에서 분급한 사원전은 개경의 대사찰의 경우 1000결 정도가 지급되었고, 지방의 중요 사원의 경우 500결 정도가 대개 지급되어 있었다. 이 이하의 소규모 사원에도 다소의 사원전이 분급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고려에 비해 사원전이 1만결로 축소되었다고 하였다. 많은 사원전이 屬公이라는 절차를 밟아 조선 왕조의 다른 재정으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10만결에서 1만결로의 사원 재정 규모의 축소 역시 公認 사원 수의 1/10 축소라는 것과 부합한다.
이상에서 고려시기 사원이 차지했던 수적인 비중은 신라말 300여 사원수에서 고려시기 3,000여 사원 수로 조선초 공인 사원 1/10으로 축소되었으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략 1,700여 사원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조선말 읍지에 반영된 사원 수 1,900여 사원 수가 있어 수적 증가는 정체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구대비를 통해 사원이 차지했던 비중을 감안하면 인구증가 대략 신라에서 고려, 그리고 조선시기로 각각 배수의 증가를 상정하면 사원 수는 10배의 증가와 공인 사원 수만 의미하면 1/10의 축소라는 사원의 수적 추이를 추정할 수 있다.
사원 분포는 어떠했을까. 읍기의 정비와 관련하여 각 행정단위에 중심 사원이 있었을 것이다. 우왕 9년 9월에 ‘大設鎭兵法席于中外佛寺 共一百五十所’ 라 하여 151소의 사원에서 진병법석이 열렸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지리지 서문에 나타난 지방단위 수인 京4, 牧8, 府15, 郡129를 합친 156과 대략 일치하므로 진병법석이 전국지방 단위를 망라하여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 읍기의 정비와 함께 이러한 중심 사원이 정비되었을 것이다.
이들 사원은 군현의 資福과 관련된다 하여 資福寺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태종 6년 3월 禪敎各宗合流寺社를 정할 때 ‘新舊都各寺, 各道界首官, 各官邑內資福, 邑外各寺’ 라 하여 각관 즉 군현 단위의 邑內 곧 치소 가까이에 자복사가 위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태종 7년 12월 의정부의 요청을 허락한 諸州資福寺에 대해 山水勝處 大伽藍으로 亡廢사원을 대체한다는 것에서 諸州의 자복사가 대체로 읍기의 중심부의 치소와 가까이 위치하였으나 亡廢한 경우는 山水勝處의 사원으로 대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각관 읍내의 사원이 폐사가 진행되고 있는 조선초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지만, 고려시기에 각 행정 단위에 자복사가 존재했음이 짐작된다.
교통의 요지에 사원이 건립된 예가 많았음은 崔瀣의 글에서 알 수 있다. “배와 수레가 이르는 곳에 탑묘가 서로 바라보고 있다” 라고 한 것이나 “사원이 민가와 섞여 있고 내 옆과 산곡에는 사원이 아닌 곳이 없다” 라는 표현들은 이를 말해 준다. 황해도와 평안도 경계선에 있었던 慈悲嶺의 羅漢堂이나 금강산 서북 고개의 험함과 휴식처가 없는 곳에 설치된 금강산 都山寺, 상주와 충주 고개길에 위치한 하늘재에 위치한 大願寺, 문경 견탄가에 설치한 犬灘院 등의 예는 고개길에 위치한 사원의 예이다. 임진강가의 慈濟寺의 過橋院, 벽란강가의 普達院, 대동강가의 永明寺, 낙동강가의 元興寺 등은 나루에 두어진 사원 예이다. 그리고 현종대 직산현 주변의 교통 요지에 설치한 弘慶寺, 개경에서 동남방으로 가는 길목의 파주 惠陰寺 등도 그러한 예이다.
이처럼 사원과 그 부속의 원은 기존 교통 시설인 역의 보완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驛은 22역도에 525 역이 정비되었으나 교통 시설로서 모든 편의를 만족시키지 못한 것 같다. 權近이 쓴 「견탄원루기」에는 “국가에서 역을 두어 사명을 전달하고, 원을 두어 商旅들을 혜택보게 하니, 공사의 분별과 상하의 분별이 분명한 일이다” 라 하여 국가의 공식적 교통 시설로서 사명을 위해 역이 성립되었으나 상인이나 일반인, 승려의 순례를 위한 시설의 필요성 때문에 점차 늘어난 것으로 생각된다.
2. 고려 사원의 정기 儀禮 및 승려대회와 교역품
고려시기 사원에는 정기적인 불교행사가 설행되었다. 정월 연등회, 3월 경행, 4월 불탄절, 7월 우란분재, 11월 팔관회 등이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개경과 전국적으로 동시에 행해진 불교행사이다.
정월 燃燈會에는 대회일과 소회일 이틀에 걸쳐 행하여졌다. 그런데 소회일 저녁에는 국왕이 위의를 갖추어 奉恩寺 太祖眞殿에 행향하였다. 이 때 궁성에서 십자로를 거쳐 태조진전에 이르기 까지 행렬을 하고 공연이 펼쳐졌으며 연도에서 개경민이 구경하였다. 이 십자로 길은 개경의 京市 長廊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월 봉은 행향시에 매년 상행위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요컨대 봉은사 정기 시장이 성립된 것이다. 정월 연등회는 개경에만 설행된 것이 아니고 서경에도 설행되고 전국 향읍에도 열렸다.
3월 經行은 개경과 제주, 부, 군, 현에도 해마다 행하여졌다. 이 의식을 치르면서 外吏가 聚斂할 때 많은 폐단이 있어 이를 금하고 娛樂之事도 아울러 금한다는 기사는 중앙과 지방에서 동시에 개최된 의식이었고 이에 따른 경비를 보시 받았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매년 경행에 따라 각 지방의 중심 사원에는 시장이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도록 오락지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장이 서는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
4월 佛誕節 연등은 각 사원에서 행사하고 농한기를 맞아 농민이 참여하면서 민간행사로 널리 행하여졌다. 이 때도 각 지역 중심 사원에는 시장이 열렸을 가능성이 높다.
7월 盂蘭盆齋는 조상천도재인데 백가지 꽃과 과일을 부처님께 공양한다고 하여 백종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관인의 급가 규정에도 이 때 3일간 휴가가 주어졌다. 조상 천도를 위한 재를 지내기 위한 물품을 마련하는 등의 교역을 위한 장이 사원 마다 섰을 가능성이 높다.
11월 팔관회는 연등회와 함께 국가 2대 제전이었다. 10월에는 서경에서, 11월에는 개경에서 개최되었다. 11월 팔관회가 중심이었다. 이 때 관리에 급가 3일이 있었다. 팔관회는 팔관재계를 지키는 의례에서 시작하였으나 고려에서는 천신, 산신, 천신, 용신 등 여러 토속신에 대한 제사도 아울러 겸하고 있었다. 개경 궁궐에서 百戱 공연이 이루어지고 관민이 어울어진 의식이었다. 이때 지방관이 파견한 자들의 奉表朝賀, 外國人朝賀 등이 있었다. 개경의 궁궐에 있는 法王寺가 중심이 되어 그 앞에서 지방과 외국의 물산이 교역되는 전국시장이자 국제시장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예에서 매년 정기적인 대규모시장이 개경과 지방의 중심 사원을 중심으로 개설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원의 승려대회에는 많은 승려들이 일시에 밀집하고 수일에 걸쳐 숙식하면서 불교교리를 토론하는 모임이다. 이 때 세속인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사례를 종단별로 대략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개경 사원 普濟寺에서 개최되는 談禪會는 지방 선승들의 모임을 중앙으로 수렴하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談禪法會는 3년에 1회 개최되는 정기적인 법회로 당해년의 봄에 열리며 고려 초부터 최씨 무인정권 이전에는 주로 普濟寺에서 열렸다.
보제사에서 개최되는 國談禪齋에 참여하기 전에 지방 산문에는 예비적 법회인 叢林이 개최되었다. 李奎報의 글에 “談禪大會를 京師에서 열었으니 … 九山 승려들이 이 대회가 있기 1년 전에 각기 그 山門으로써 외방의 伽藍을 점유하고는 법회를 열어 겨울을 보내는데 이를 叢林이라 하였다” 라 하여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무인정권기에 활동한 이규보의 글이지만 각 산문의 총림을 거쳐 격년에 보제사에서 전국의 선승들의 대회가 定例的으로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승려들에 필요한 서적, 문방구, 불구 등이 교역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승려 대회는 敎宗에도 있었다. 921년(태조 4)에 海會를 열고 승려를 선발하였는데 이 때 선발된 莊義別和尙은 곧 광종대에 국사가 된 화엄종 고승 坦文이었다. 비록 정기적인 대회인지는 미상이지만 화엄승을 선발하는 대회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21일 간 연 開泰寺 華嚴法會 역시 화엄종의 결집을 위한 승려대회였을 것이다. 1131년(인종 9) 興王寺에서 21일 간 연 화엄법회는 瑜伽宗에 의해 지방으로 퇴거한 戒膺과 그 학도 160인을 초청하여 澄嚴이 주관한 화엄종의 종세 회복을 축하하는 대회였다.
유가종단의 중심 사원인 玄化寺에서도 韶顯이 그 수리를 주청하여 繕理宮을 설치하고 役事를 주관하고 1096년(숙종 1)에 준공하였다. 중외의 각지에 산재해 있는 본 종의 모든 사찰에 淨財를 시납케 하여 매년 양회에 걸쳐 법회를 여는 것을 年例化 하였다고 한다. 유가종단의 승려 대회가 현화사에서 연례적으로 매년 두 번이나 열렸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유가종단의 단합을 위한 정기 승려대회이며 유가종 사찰과 승려들 간에 필요 물품도 교역되었을 것이다.
1097년(숙종 2) 國淸寺의 창건시에 모인 5대 사원에서 이름 있는 학승들이 왕명에 따라 회합하였는데 義天 문하로 곧 바로 들어 온 제산문의 이름 있는 학승은 300여 명이었고, 5대 사원에서 온 학승이 무려 1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천태종단의 대회가 왕명으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1198년(신종 1)에는 개경 천태종 高峯寺에서 개최된 법회에 了世가 참가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실망하여 백련사를 열게된 계기가 되었다. 충선왕대 丁午가 國統에 오르면서 국청사를 중수하고 1316년(충숙왕 3) 六山의 名德 3000여 명을 불러 經席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처럼 고려 전기 각종의 중심 사원이 정비되면서 승려 대회를 통해 종단의 단합과 교리의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사상교류의 장으로서 기회를 제공하여 새로운 사상운동의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중앙 종단의 위기를 지방 사원에서 그 세력을 확산하는 계기로서 승려 모임이 있기도 하였다. 그래서 종단의 중심 사원만이 아니라 지방의 개별 사원에도 이러한 승려 모임으로 확산되고 여기에 세속 단월도 참가하는 경향이 점차 두드러졌다.
화엄종의 경우 義天의 嫡嗣로 알려진 戒膺은 태백산에 돌아가 覺華寺를 창건하고 법시를 여니 사방의 학자가 폭주하여 날마다 천백명은 되어 法海龍門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기적인 것은 아니라 하여도 대규모 승려의 토론과 불법의 연구라는 모임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날마다 사방 학자 천백명의 모임에 승려만이 아닌 세속인도 있다면, 여기서의 여러 물품 조달의 필요성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寥一이 1197년(명종 27) 興王寺에 주석하다 高靈의 盤龍寺에 내려와 결사를 주도하여 學佛者가 자포자기하지 않도록 화엄신앙을 진작한 예나, 화엄 승려 大孤가 신종, 강종 연간에 固城 水嵓寺 화엄결사를 주도하고 고성 지방관 朴文備의 도움과 국왕의 제가 등으로 모임이 지원된 예도 앞의 각화사와 마찬가지로 소요 물품 조달 필요성이 늘 있엇을 것이다.
瑜伽宗의 경우 1123년(인종 1)과 1126년(인종 4) 사이에 津億이 智異山 五臺寺를 중수하여 水精社를 건설하였다. 이 모임의 목표는 자신 뿐 아니라 타인도 해탈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진억은 玄化寺의 혜덕왕사에게 수학한 유가종승이다. 이 수정사 건설에 협조한 海印寺 주지 翼乘은 石塔을 세우는데 협조하였다. 해인사는 화엄종 사원으로 익승은 화엄승으로서 수정사 결사에 협조한 것이다. 禪師 永誠은 대장경을 수집하는데 협조하였다. 禪講院의 고승과 일반신도로서 社에 들어오고자 하는 사람이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수정사는 유가종이 중심이지만 여러 종파의 협조가 있었다. 이는 사상적 교류와 공감도 있었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세속의 일반 신도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수정사는 승려와 세속, 그리고 유가종 외의 종파와의 불교 사상은 물론 소요 물품의 교류도 가능할 정도의 결사체였다.
天台宗의 지방 사원에서의 승려 모임은 功德山 東白蓮社의 성립에서 잘 알 수 있다. 1199년(신종 2) 경부터 精通師가 공덕산에서 백련사를 결사했다는 사실은 이규보의 글에서 알 수 있다. 그 후 1241년(고종 28) 尙州 목사로 부임한 崔滋에 의해 60여간 규모로 중수되어 일신되었으며 1243년(고종 30)에 법석을 주맹하도록 왕명을 받아 이듬해 天頙이 이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1280년대 천태종 丁午가 머물렀고, 1390년(공양왕 2) 李穡이 함창에 유배되었을 때 백련사 詩會에 참석한 기록도 있어 승려뿐 아니라 세속 신자와 어울리는 모임이 정기적으로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종에도 개경의 보제사 외에 지방 사원에서 시행되는 談禪도 있었다. 그러한 실례로서 1173년(명종 3)에 祖膺이 法主로서 주관한 金州 安國寺 50일 談禪會가 있었다. 또한 1179년(명종 9) 조응은 龍門寺를 중수하고 九山 學徒 500인을 모아 50일 담선회를 개최한 바도 있다. 이 때는 斷俗寺 禪師 孝惇을 청하여 傳燈錄, 楞嚴經, 仁岳集, 雪竇拈頌 등을 교습하였다. 예종대 國師로 책봉된 曇眞의 손제자인 祖膺이 龍門寺의 중수와 명종의 胎藏所의 지정을 계기로 혜조국사의 禪風을 진작 시키고 선종계를 주도하였다. 또한 교종승의 초청과 같은 사상 교류의 기회를 열었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는 담선회였다. 1199년(신종 1) 進禮郡에서 禪會를 열어 주관승으로 천태종의 志謙을 초청하기도 하였다.
정기적인 불교 의례와 정기적 대규모 승려 대회에서 필요한 물품은 다양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원에는 여러 수공업 제품이 생산되기도 하였다. 고려시기 사원은 농장을 구비하여 차, 먹, 자기, 불구 제작 등의 사원 수공업과 농작물의 생산과 축적도 상당하며, 이의 운영을 위한 存本取息의 寶를 운영하기도 한다. 농장 경영의 사례는 通度寺, 修禪社 등의 구체적 사례가 있다. 통도사의 茶所와 사방 장생표석, 수선사의 존본취식을 여러 사원에 分穀長之한 예가 있다. 동화사 부근에 기와 窯가 운영되고 거기서 동화사의 이칭인 ‘桐藪’명 기와가 발견된 예 등은 그러한 사례이다.
『보한집』에 따르면 時義가 歸正寺에 주지할 때 그 사의 寺莊에 陶工이 있었다. 이 때 安戎 태수가 각종 도기를 구하고자 하자 주지 시의가 구해주면서 시를 붙인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사원에는 寺莊을 두고 거기에 농작물은 물론 도공이 있는 곳에는 기와, 술통, 항아리 등의 수공업품도 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연산부곡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낙동강 東 5里에 있고 鹽倉이 있다 라 하였다. 이규보의 일정으로 보아 선산 가덕부곡에 위치한 원흥사에서 영산부곡을 거쳐 다시 낙동강을 지나 龍巖寺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영산부곡은 연산부곡으로 추정된다.
영산부곡은 가덕부곡과 함께 원흥사의 지배하에 있었을 것이다. 원흥사가 가덕부곡에 있다 한 것으로 미루어 가덕부곡은 원흥사 寺莊의 범위 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영산부곡도 ‘緇衣吏’ 가 원흥사에서 간 이규보를 손맞이에 놀라 분주한 모습에서 원흥사 지배하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緇衣는 僧服을 의미한다. 영산부곡리는 승려 복장을 한 것이다. 이는 영산부곡이 원흥사에 예속되어 있었던 것을 말한다. 따라서 원흥사는 연산부곡을 지배하고 거기에 있는 鹽倉 운영도 하였을 것이다.
고려시기에도 고급 향류는 송에서 수입되었다. 침향과, 정향, 목향, 안식향 등은 고려 자생이 아닌 향으로 수입된 근거가 『고려사』에 나온다. 침향은 나무 벌채 수지의 수집한 것으로 가장 귀한 향이면서 한방 약재로도 사용된 것인데 주요 산지는 베트남이다. 정향은 정향수의 꽃 봉오리를 말린 것으로 부패방지, 살균, 입안 냄새 제거에 사용된다. 주요 산지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군도이다. 향의 수입과 함께 향탁, 향구 등도 수입된 예가 있었다.
고려시기 내내 외교 관계와 별개로 송상의 활동은 활발하였다. 이들에 의해 사원에 필요한 물품 특히 香이나 佛敎典籍, 佛具, 陶磁器 등이 사원을 중심으로 교역되었을 것이다.
사원 자체의 수공업품과 농작물, 염창 관리 등으로 보아 사원을 거점으로 교역장을 형성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이상의 교역 가능성을 바탕으로 다음 절에서는 구체적 교역장을 그려 보고자 한다.
3. 송대 廟市와 고려 사원의 交易場 형태
불교교단이 성장할 당시 인도의 사정과 관련하여 신흥자본가의 적극적 후원에 의하였고, 교단의 조직도 상공업자의 조합과 비슷한 僧伽라 불러 상업에 대해 죄악시하지 않았다.
중국 宋代의 경우 상품 교역 장소를 ‘廟市’ 라는 용어를 쓴다. 이는 道觀 등도 포괄한 것이다. 촌락 공동체의 토지신이나 불교, 도교 등 사묘의 제례에 부수하여 개최된 묘시가 다수 존재하였다. 이 묘시는 당시 공동체의 토지 등 祭神 제사 및 同好者의 社交, 戱藝의 조합 등의 社會가 존재하여 여기에는 사묘, 도관의 제례의 기회를 빙자하여 期日에 다수의 사람이 모이고 오락, 사교에 수일을 보내고 香燭, 齋具, 百貨의 市가 서고 상업이 영위되었다. 도시만이 아닌 지방에도 있었다. 승려간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닌 대민과 상인간의 거래까지 포함한다.
중국 송대 강남이나 사천 각 지방에는 특히 도교, 불교의 법회가 성행하였는데 水陸齋會, 水陸道場, 燃香會, 諸神聖誕會 등의 이름의 회가 무수히 존재하여 집회를 기회로 齋具나 百貨의 市가 성립되었다. 특히 福州 神光寺 盂蘭盆會, 紹興府 開元寺의 燈市 등이 대표적 예이다.
묘시는 지방도시와 농촌에 다수 존재하였다. 그런데 이 묘시는 모두 근거리 교역을 초월한 넓은 범위의 고객을 대상으로 하고 취급 상품도 특산품이나 특수 수공업품 등 원격지 무역의 유통품이 주체였으며 일반 村市와는 구별이 되었다.
이와 같은 송대 묘시의 사례를 염두에 두고 고려 사원의 교역장 형태를 중앙과 지방, 주요 교통로를 중심으로 그 유형과 형태를 정리하고자 한다. 고려에서의 사원과 관련된 교역장은 도심 사원일 경우이다. 개경의 경우 앞서 살펴 본대로 상원 연등회때 봉은사에 이르는 길에 교역장도 아울러 열렸을 것이며, 팔관회 때는 법왕사 인근에서 지방봉표조하자로 온 향리들과 송, 동서번, 탐라국의 외국인 조하자들과 상인들이 교역장을 열어 사원과 관청, 기타 개인적 물품을 교역하였을 것이다. 그 외 개경의 보제사, 현화사, 흥왕사, 국청사 등은 각기 조계종, 유가종, 화엄종, 천태종단의 승려 대회가 매년 정기적으로 열려 종단내의 중앙과 지방 사원 소속의 승려들 간의 수요 물품교역이 있었을 것이다.
지방의 경우 치소 가까이 자복사가 위치하고 앞 절에서 살핀 각종 지역 중심의 불교 정기 의례 곧 연등회, 경행, 우란분재, 불탄절, 팔관회 등이 행하여지고 있어서 자복사를 중심으로 교역의 장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 자료를 제시하면 상주 계수관에 상주 관내 사원 관계자의 모임이 있었고 그 모임은 상주 관청 법석에 참여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후기 了圓의 『法華靈驗傳』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승 망명이 상주 소사에 머물렀는데 항상 음양점복으로 閭里에 출입하였는데 남녀가 모두 환영하였다. 화복을 묻고 댓가로 의식을 제공하였다. 하루는 관청에서 연 법석에 상주내의 諸寺의 典香者가 모두 모였는데 망명은 비록 참여하였지만 다만 음양승으로 말석에 있었다. 모두 소홀하기를 풀과 같이 하였다. 야반에 이르자 등촉이 꺼지고 거의 잠든 무렵에 홀연히 광명이 등화와 같았다. 무리가 모두 놀라 일어나 찾으니 망명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黑業을 부끄러이 여겨 내면으로 참회하고 단지 蓮經을 외우기를 여러 해 하였다고 하였다. 여러 승이 모두 탄복하고 공경하였다고 한다.
위는 망명의 법화경 영험 사례를 말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상주가 명시되고 이 지역을 다녀간 天頙의 저술로 지금은 전하지 않는 『해동전홍록』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험 사례 자체를 제외한 상황 설명은 사실로 보아도 될 것이다. 여기서 관청 주관 법회는 아마도 인왕도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법회는 『고려사』에 따르면 문종대부터 3년 1회 열렸는데 이 때 毬庭에서 1만의 반승을 하였고, 外山名寺에도 3만의 반승을 하였다. 외산명사는 外山諸寺, 諸名寺, 州府, 혹은 中外 등으로도 표현되고 있는데 아마도 주요 지방 행정단위의 사원 모두를 지칭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상주에서 시행된 관청 법석은 바로 인왕도량에 따른 반승 모임에 상주내의 諸寺 典香者 곧 주지들이 참여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규모 반승이 수반되는 법석의 많은 수요품은 물론 기타 교역도 가능한 교역장이 자복사를 거점으로 열렸을 것이다.
고려후기 지방 결사체로 유명해진 각화사, 수정사, 반룡사, 동백련사 등은 학승과 세속인이 참여하여 그 규모가 매일 수백에서 수천이 모였다는 것으로 보아 그 교역장 역할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국사, 용문사 등의 50일 등의 기일을 정한 담선대회의 경우도 부정기적이지만 교역장 성립의 가능성은 있다.
산지 사원일 경우는 사원의 속원이 도심에 진출하거나 교통의 요지에 설치되어 물자의 교역에 참여했을 것이다. 예천 용문사의 경우 예천 치소 가까이 교통 요지에 頭川院을 경영한 예는 물자 교역의 창구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정집』에 따르면, 금강산 長安寺의 사원 재산은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성열, 인의, 부령, 행주, 백주, 평주, 안산 등지에 1050결의 전지가 분산되어 있고, 염분도 통주, 임도현, 개성부 등 세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그와 아울러 市廛에 있는 점포를 남에게 세준 것이 30간 있다고 한다. 이로 보아 금강산 장안사는 여러 곳에 분산된 전토와 염분을 소유하고 있고 그 생산물의 일부는 개성부의 시전 점포를 통해 교역했을 가능성이 크다. 장안사의 경우는 직접 시전 점포를 소유한 예이다.
수로나 고갯길의 교통 요지에 성립된 院의 경우 사원간 혹은 민간의 유통 사업에도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낙동강변의 원흥사는 1196년 이규보가 방문하고 거기서 읊은 시에서 원흥사 앞에 상선이 모여들고 왁작지껄한 분위기를 묘사한 것으로 보아 상선의 중간 기착지로서 교역의 장이 섰을 가능성이 높다.
원흥사가 강가에 위치하고 여기에 많은 배가 모여 들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푸른 물결 머리에서 한가히 옛 절을 찾았네 / 떠들썩한 문밖에는 수많은 배가 모이고’ 라 하여 원흥사가 낙동강의 많은 물류를 담당한 商船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한 사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낙동강에 상선이 다닌 사실은 詩序에도 ‘상선의 피리 소리 멀고 가까운 데서 서로 들린다’ 고 한데서 알 수 있다. 龍潭寺에서 犬灘 龍源寺로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지은 다른 시에도 ‘저기 가는 저 외로운 상선 / 아득히 어느 곳으로 가는 고’ 라 하여 낙동강을 이동하면서 만난 상선을 말하였다. 같은 시에서 ‘뜰엔 솔과 대 중들은 부귀하고’ 라 하여 중간 기착지로서 또는 교역지로서 원흥사가 부유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한다.
海路의 안녕을 기원했던 비보사사 知靈山 安波寺나 莞島의 法華寺의 예가 있다. 이들 사원에는 해외 상인 특히 남송 상인들이 개경으로 가던 길목이었고 여기서도 중간 교역을 하였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맺음말
고려시기 사원의 여러 기능 중에 교역장 역할을 정리하고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에 관한 직접적 자료는 거의 없다. 사원의 수와 분포양상, 사원에서의 정기적 의례, 대규모 승려 대회, 사원에 필요한 품목의 종류 등을 정리하면서 사원 교역장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방법으로 그 부족을 메꾸었다. 사원의 교역장 유형과 형태를 알아보았다.
고려시기에는 신라말과 조선시기에 비해 사원당 인구수가 가장 낮을 정도로 밀집되었다. 또한 분포 양상도 개경은 물론 지방 행정단위마다 중심 사원이 분포되어 있었으며, 명산은 물론 고개, 수로, 해로 등의 교통 요지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원수와 분포망에서도 이들 사원이 교역장으로서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사원 교역장의 성립 가능성의 여부는 사원에서 이루어지는 대규모 집회의 정기성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가늠할 수 있다. 전국적 대규모 정기 의례는 정월 연등회, 3월 경행, 7월 우란분재, 11월 팔관회 등과 3년 1회의 인왕백고좌도량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3년 1회의 조계종의 담선대회가 보제사에서, 유가종단의 매년 2회의 정기대회가 현화사에서, 화엄종단의 정기 승려대회 역시 흥왕사에서, 천태종단의 승려 대회는 국청사 등에서 열렸다. 이 때 종단내의 승려들이 모여 사상적 교유만이 아닌 물적 교역도 했을 것이다. 대규모 승단의 유지를 위한 사원의 寺莊에는 전토와 염분 등의 재산만이 아닌 도공과 차, 먹, 종이 제작기술자, 각수 등의 수공업 기술자들을 보유하여 여기서 생산되는 잉여분은 사원을 통해 교역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내 조달이 어려운 불교전적, 향, 불구, 도자기 등은 송상을 통해 수입되어 사원 의례나 개인 승려의 수행과 생활에 소요되었다.
宋에서는 方志 자료에 구체적으로 서술된 廟市가 있다. 고려에서도 사원의 교역장은 개경의 경우 정월 연등회의 燈夕 의례때 황성에서 봉은사에 이르는 길에 있는 長廊이 교역장이 되었을 것이다. 그 외 법왕사 앞은 팔관회 때 지방과 외국에서 온 상인과 조하객이 교역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그 외 종단의 중심사원 곧 보제사, 현화사, 흥왕사, 국청사 등에서는 정기 승려 대회시에 교역장이 섰을 것이다. 지방의 중심 사원 이른바 資福寺는 그 지역 사원의 승려들이 모여 인왕경도량 때 부수된 반승이 정기적으로 있어서 교역장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 외 고개, 수로, 해로 등 교통 요지에 위치한 사원과 부속 원은 원격지 교역장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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僧市(중장)에 대한 고찰
김태형(전 관문사성보박물관 학예사)
I.들어가는 말
역사에 있어서 항상 史書에 존재하는 것만이 正史가 아니라는 것은 이미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正史에 기록되지 않고 口傳과 傳說로 전해져 오는 일들이 史實로 규명되어 공인되기 이르기까지는 숱한 연구와 조사가 뒤따라야 한다.
초조대장경 간행 천 년을 기념하고 2011년 세계육상대회 겨냥하여 열리는 팔공산 부인사 僧市 재연 사업에 있어서도 그동안 구전으로만 기록되어온 鄕土史料를 史實로 인정하느냐의 문제는 이번 사업주체는 물론 이를 연구해온 연구자들에게는 하나의 話頭였다.
그동안 僧市라는 단어 정립 자체가 없다가 최근 초조대장경 간행 천년과 2011년 대구세계육상대회와 맞물려 지역 문화사업의 새로운 콘텐츠로 혜성처럼 등장했다는 문제제기도 있었다. 역사적 고증에 대한 문제제기는 앞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正史가 아닌 구전과 전설이 史實로 인정되는 과정에서 항상 겪어야 되었던 통과의례였다.
『三國遺事』를 쓴 一然스님은 유사를 지음에 있어 여러 史書와 함께 鄕傳도 또한 빠뜨리지 않고 모두 기록해두었다는 것은 반드시 正史만이 역사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자 함 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계에서는 이러한 鄕傳 즉 口傳자료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이번 僧市시연문제에 있어서도 口傳에 대한 사료적 가치를 저평가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우려도 들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구전이 아닌 사실로 이를 증명하는 것 또한 지난 500여년간의 억불과 전란, 사회상의 변화, 사료의 散失 등에 따른 한국불교사의 잃어버린 한 편린을 다시 되찾는 단초가 되길 기대해 본다.
II.본론
僧市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구전에 전하는 衆場(혹은 僧場, 中場 등)이 바로 승려들이 장을 보던 常設 혹은 非常設 장터로 승시를 정의 할 수 있다.
승시와 관련된 구전과 지명유래 등을 통해 그와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 단어들 중에는 중장, 중터, 승장, 중촌, 승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중장의 경우 충남 태안군 안면도 中場里의 경우처럼 마을의 중앙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붙은 지명으로 승시와의 관련성이 없는 것도 있다.
승려들의 인적 물적 교류가 이루어진 승시에 대해서는 전북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와 대구 팔공산 부인사, 전남 화순 운주사 등에서 구전되는 내용이 있을 뿐 문헌기록으로 남아 있는 곳은 찾기 어렵다.
1.僧市에 대한 정의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에서는 조선시대 승려들의 商行爲에 대한 기사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들이 물건을 거래하는 장소가 저자의 시장이었는지 아니면 부인사에 있었던 승시와 같은 개념의 장소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고 승시와 같은 유형의 장소가 없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선조실록』을 보면 동왕 32년(1599) 윤4월 14일 명나라의 유격 허국위가 평양 광법사를 찾아가 예불을 하면서 승려들과 담화를 나누고 장삼과 고깔을 각기 하나씩 산 뒤에 은 5냥을 내어 승려들에게 나누어 주고 갔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여기서 고깔과 장삼은 일반 저자의 시장에서는 구입하기 어려운 僧家의 물건인데 이를 구입하여 승려들에게 나눠주었다는 것은 廣法寺에 승려들이 사용하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가 있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또한 정조 9년 6월 21일 ‘낙산사 貢納과 관련된 서정수의 장계’에는 “國初 襄陽의 洛山寺에서 배와 미역을 明禮宮에 바치는 일이 있었으나 배나무와 미역밭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먼 곳에서 交易하여 바치므로 僧徒들이 지탱해 나갈 수 없다.”고 하였다. 공납물품을 마련하고자 낙산사 승려들이 遠行의 교역을 마다하지 않고 이를 수행할 수 하였다는 점도 당시 사찰과 연계된 일정한 교역의 창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僧市와 유사한 개념의 단어로 僧場을 들 수 있는데 이는 僧市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말기의 관리 李晩燾(1842~1910)의 『향산일기』 중 1872년 8월 11일부터 13일 일기를 보면 健陵(正祖의 능)으로 제향을 오가던 중 ‘僧場坪(僧坪)’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승장평의 위치는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지만 健陵의 위치와 과거왕실의 제향 기록을 종합해 보면 동작진에서 과천을 거쳐 화성에 이르는 구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中火’ 즉 점심을 먹었다는 점인데, 승장평이 단순히 넓게 열린 평지가 아니라 길목의 하나로 이곳에 客店 혹은 酒幕 등의 시설이 있어 이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건릉 인근에는 이 陵의 원찰인 龍珠寺가 자리 잡고 있다. 용주사는 18세기에 승려의 기강을 바로잡고 전국의 사찰을 관할하여 불교업무를 처리하기 위한 五糾正所 중 한 곳이었다.
따라서 용주사 인근은 전국 승려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곳으로 인근에 승려들의 교류를 위한 장이 있었음을 승장평이란 명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서울 봉은사의 경우 명종 때 僧科를 치렀던 곳으로 승과를 치렀던 절의 앞 벌판을 僧科坪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 절 또한 오규정소 중 한 곳이다.
이처럼 승려들의 교류의 장으로서 僧場 혹은 僧市는 현재까지 문헌상 구체적인 규모나 역할 등이 확인되지는 않고 있지만 향후 지속적인 연구와 조사를 가감한다면 그 실체와 정의를 내리는 데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2.조선시대 승려의 교역과 승시
숭불의 시대였던 고려에서 억불의 시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당시 불교계는 과거와는 다른 많은 활동의 규제를 받게 된다. 이러한 배경에는 승단의 기강문란 등이 원인이 되었지만 새로운 정치권력의 희생양으로 불교가 지목된 것이다. 고려 불교가 가지고 있는 경제, 사회, 문화적 기반이 새로운 왕조의 앞길에 크나큰 장애의 요인이 되므로 이를 와해시켜 철저한 통제와 억압을 통해 재편된 권력의 영향력 안에 두고자했던 것이다.
비록 고려와 같이 권력의 중앙에서는 아니지만 왕실과 일부 사대부 후원에 힘입어 승단은 지속적으로 법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제적 기반이 심각하게 타격을 입은 당시 불교계로서는 새로운 활로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 때도 사찰의 고리대금업, 각종 상업 행위가 비난의 대상이었지만 경제적 기반이 와해지경이 이른 상황에서 이는 그 나마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당시의 승려들의 상업관련 상황을 보면,
-.태조실록 제12권. 6년(1397) 7월 7일 : 임금이 도당에 명했다.......지금 각 절의 주지들은 산업을 힘써 경영하고....
-.태종실록 제 11권 6년(1406) 4월 18일 : 승려들이 압록강을 건너가서 장사를 하는 것을 금지 시키라고 명했다. ....도내의 한잡한 승려들이 초막을 지어 놓고는 발원문을 써서 지니고 자주 와서 모입니다. 그리하여 인삼을 모아두었다가 얼음이 얼 때가 되면 강을 건너 들어갔다가 오는 자도 있고 ........
-.세종실록 제28권. 7년(1425) 6월 23일 : 전 판나주목사 정수홍의 진언 “어떤 승려는 장사를 해서 이익을 취하고, 목면을 가꾸어 이익을 취하는 등 재물을 모으기 급급.....
-.세종실록 제57권. 14년(1432) 8월16일 : 한성부에서 아뢰었다. “승려의 무리들이 서울 안팎으로 물건을 팔기 위해 이리저리 다니면서 군역을 면하려고 하니....”
-.성종실록 제 10권 2년(1471) 5월 11일 : 사헌부 지평 金首孫이 아뢰었다. “社長(社倉의 곡식을 나눠주고 거두어들이는 일을 맡은 관리)들이 승니들을 민간에 모아놓고 염불을 일삼으므로 온 나라에 염불소리가 가득차고....이를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
-.성종실록 제 10권 2년(1471) 6월 8일 : 사헌부 대사 韓致亨의 疎. “社長들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미혹시키는 것을 금지시켜야 함. 장사하는 것이 그들의 업이고...... ”
-.성종실록 제 35권 4년(1473) 10월 2일 : 사간원 대사간 鄭佸의 疎 : “...승려들 중 생선과 소금을 팔아 이익을 취하는 자도 있으며......”
-.성종실록 제 50권 5년(1474) 12월 1일 :일본국 대마주 태수 종정국의 종사교로 온 源勝과 源繁의 글 중 원번의 글 : “이보다 앞서 승려 性竺이 전라도 임피현 守心寺에 살았는데, 계해년(세종25. 1443)에 같이 살던 승려 38명과 함께 장사를 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제주로 가려고 하다가 바람을 만나, 일본국 오도인 옥포로 떠밀려 갔다.”
-.성종실록 제 113권 11년(1480) 1월 23일 : 同知事 李承召가 아뢰었다. “전라도의 변산에는 소나무가 가장 무성한데도, 근래에 승려들이 사찰을 건축하거나 혹은 판매하는 일로 인하여 이를 벌채하여서 거의 없어졌으니,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청컨대 사찰을 모두 철거하도록 하십시오.”
-.성종실록 제 161권 14년(1483) 12월 29일 :경상도 김천 직지사에 살고 있는 學祖의 병이 위중함에 성종이 內醫를 보낸데 대한 사신의 논평: 학조는 세조조의 三和尙 중 한명으로 널리 산업을 경영하였으므로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폐해를 끼쳤다.
-.성종 실록 229권, 20년(1489) 6월 5일 : 刑曹에서 平安道觀察使 李克墩의 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중들의 무리가 役이 없는 것을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서 마음대로 興販(한번에 많은 물건을 흥정하여 매매함)하고 다른 道에서도 모두 그러하니, 軍額이 감손되는 것은 오로지 이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청컨대 그곳에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잡아 고하게 하여 그 물건으로써 賞을 주도록 하소서.”
-.성종 229권, 20년(1489) 6월 27일 : 閔師騫은 아뢰기를,
“신이 지난해에 忠淸道都事가 되어 槐山 지경을 지나는데 어떤 중이 소와 말 10여 필을 가지고 行商을 하면서 길가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僧人의 興販이 매우 성하게 유행하니, 금하는 것이 온당합니다.”
-.중종 70권, 25년(1530) 12월 3일(기미) : 남행·천둥·어사 파견·중이 장사하는 것 등에 대한 논의
근사는 아뢰기를,
“신은 들으니 양민(良民)들이 부세를 피하고 놀고 먹기 위해 모두 중이 되는 것은 各道가 모두 똑같으나, 그중에도 전라도가 더욱 심하여 중들이 道場에서 나와 시장에 가서 魚肉을 가지고 장사를 한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반드시 무리를 지어 도둑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장차 견제할 수 없게 될 것이오니 즉시 글을 내려 금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조 20권, 9년(1785) 6월 21일 : 낙산사 공납의 감소에 대한 原春道觀察使 서정수의 장계
“國初 襄陽의 洛山寺에서 배와 미역을 明禮宮에 바치는 일이 있었으나 배나무와 미역밭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먼 곳에서 交易하여 바치므로 僧徒들이 지탱해 나갈 수 없습니다. 청컨대, 감면해 주소서.”
이상의 기사를 통해 조선시대 승단에서 상업과 산업에 관여하여 이득을 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성종 연간의 기사에서 대규모 교역을 의미하는 興販이 평안도 뿐만 아니라 다른 도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당시 승단에서 운영하는 흥판이 상설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성종실록에서 이보다 앞서 전라도 임피현 守心寺에 살았던 승려 性竺이 계해년(세종25. 1443)에 같이 살던 승려 38명과 함께 장사를 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제주로 가려고 하다가 바람을 만나, 일본에 표류하였다는 기사는 몇몇 소수의 승려들이 무리를 지어 장사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수 십 여 명씩 집단을 이루어 장사에 나섰고, 이를 위해 내륙은 물론 바다 건너 제주까지 왕래하였다는 사실은 구전으로 전해오는 승시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처럼 승려들의 상행위가 정부의 규제 대상이었다면 官의 공인된 시장에서의 거래보다는 사찰을 驛站으로 이용하여 무리를 지어 다니며 일정한 장소에서 장사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비공인 상행위 외에 승려를 각 驛에 驛子로 배치하는가하면, 또 歸厚署에서 幹事僧이 私貿易을 맡게 하였던 점으로 미뤄 당시 승려들의 상업 진출이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을 전후에 상업에 종사했던 吳希文이 쓴 일기 『쇄미록』을 보면 직접 사찰을 찾아가 거래를 했던 흔적이 나타난다. 오희문은 1600년 3월과 1607년 12월 그의 노비 德奴를 시켜 평강 浮石寺에서 생산한 미투리를 구입하여 서울에서 팔아 큰 이문을 남기지만, 이미 부석사에는 그 말고도 많은 상인들이 왕래하면서 미투리를 서둘러 구입해가 낭패를 보기도 했다.
이처럼 사찰에서 생산되는 각종 수공업상품들은 오희문의 경우처럼 상인들이 직접 찾아와 구매하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성종실록』에서처럼 승려들이 집단을 이루어 상단을 형성하는 예도 있었다.
성종 11년(1480) 1월 23일의 기사에서 전라도 변산의 무성한 소나무를 승려들이 사찰을 건축하거나 혹은 판매하는 일로 인하여 이를 벌채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은 구전으로 청림사 僧市場이 盛市를 이루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청림사 인근의 승시장은 社倉 근처에서 盛市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실록에 나오는 성종2년 5월 11일 조의 내용과 附合되고 있어 승시장의 형성 장소를 유추할 있게 한다. 즉 社倉을 관리하는 社長들의 본업이 장사라고 규정된 점으로 미뤄 청림사 승시장이 社倉을 중심으로 이뤄진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동지지』등의 지리지를 보면 충청도 공주와 경상도 칠곡, 평안도 정주에 僧倉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 같은 승창의 역할은 바로 환곡으로 정조 연간에는 남한산성에 잡곡이 2천여석이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승창이 있었던 북한산성의 경우에도 정조 18년(1794)에 이르러 한창 환곡으로 인한 폐해가 극심해지자 이를 혁파하지만 승창의 경우 總攝을 시켜 그대로 주관하도록 했다.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승단의 산업 활동과 관련된 기사를 통해 승시의 존재 여부에 대해 파악해 보았다. 승시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개념을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면 승창 혹은 사창과 주요 길목에 위치한 사찰을 중심으로 승려들의 크고 작은 상행위로 여기에는 승려뿐만이 아니라 일반상인들도 가담했음을 알 수 있다.
3.口傳으로 전하는 僧市
승시와 관련된 대표적인 구전은 팔공산 부인사와 함께 전라도 화순 운주사, 그리고 전라도 부안의 청림사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승시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없어 지금도 고증되지 않은 단서로 牽强附會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중국의 경우에는 실제 사례가 있어 주목된다.
연암 박지원의『熱河日記』를 보면 북경의 報國寺와 隆福寺 두 곳에서 매월 특정한 날을 정해 장을 연다고 했다. 보국사는 매월 15일(음력), 융복사는 매월 1일, 11일, 21일 세 번에 걸쳐 선다고 한다.
먼저 보국사의 장날을 살펴보면 보국사는 ‘宣武門 밖으로부터 북으로 1리쯤에 있으며, 매월 15일에 장이 서는데 국내의 온갖 財貨가 몰려든다. 佛殿은 세 채가 있고, 행랑채가 빙 둘러 있으나 절에 거처하는 승려들은 얼마 되지 않고 모두가 북경 밖에서 몰려든 행상들로서 절이라는 곳이 시장터와 같다.’
다음은 융복사의 장을 살피면 ‘융복사는 동ㆍ서 패루의 북쪽, 도성의 동북 모퉁이에 있으니, 바로 큰 저자이다. 먼저 금수와 화초를 구경한 다음 늘어 있는 가게에서 음식, 의복, 보물, 패물, 비단으로 꾸민 假物形, 假傀儡 등을 구경하였는데 없는 물건이 없으며, 그 화폐[泉貨]의 종류는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융복사는 법당 사면을 계단으로 두르고 廊室의 안팎에는 모두 가게를 열었는데 물건은 모두 자질구레한 잡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유희와 재주를 부리는 자들도 여기서 재주를 팔고 있었다.’
『熱河日記』외에 『실록』에는 정조 4년(1780) 11월 4일 서장관 조정진이 열하의 실정을 보고하면서 북경성 안에 ‘佛鋪子’가 있는데, 물건을 서로 사고 팔았다. 조정 신하들이 이것을 이용하여 물건을 바쳤고 황제도 이것을 사용하여 귀한 신하들에게 상을 하사하였다. 千秋節 새벽에 進貢이 있었다. 架子에 누런 수건을 덮고 거기에다 금불상 하나를 담았는데, 그 길이가 몇 자쯤 되었다. 여기서 ‘鋪子’는 가게를 의미하는데 아마도 불교용품을 파는 전문 상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경우는 이처럼 사찰에 직접 장이 서는 예가 확인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 실체를 확인하기 어렵고, 다만 구전으로만 승시에 대한 얘기가 전해온다.
-.전남 화순군 중장터마을(中場)
龍江里의 지명은 龍江里 마을의 명칭을 취하여 이름하였는데 현재는 용강리 가 하룡마을과 상룡마을로 나뉘어 있다. 용강리에는 하룡마을, 상룡마을, 추동마을, 중장터마을 등 4개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중장터는 말 그대로 승려들의 장터라는 의미로 쓰였는데 매월 15일에 전라도 경상도 스님들이 나주장을 보았는데 조선초에 이르러 배불정책으로 나주에 있는 장으로 가지 못하자 장터를 이곳으로 옮겨 여기서 장을 보았다고 전한다.
-.전라도 부안 상서면 靑林寺 승시장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변산에는 四大寺刹을 포함하여 八萬九庵子가 있었다고 하고 수많은 승려들을 상대로 하는 僧市場이 牛膝峙 밑 靑林과 楡亭峙:호벌치 너머 社倉 근처에서 盛市를 이루었다고 한다.
-.대구 팔공산 부인사
신라 선덕여왕대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1203년 무신정권에 반기를 든 僧徒의 亂이 일어나기도 했으며, 홍건적을 佛力으로 물리치고자 만든 초조대장경이 봉안되었된 곳이기도 하다. 한때 2천여명의 스님들이 수행하고 있었으며, 僧市가 열렸다고도 전해진다.
지금까지 확인된 세곳의 승시가 구전으로 전해오지만, 보다 구체적인 문헌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17세기 말 정시한이 쓴『山中日記』를 통해 僧市와 같은 기능을 가진 時空間이 있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1686년 4월 22일(함양 묘적암) ‘군자사 승통 법안 스님과 함께 온 천정 스님이 무명 한 필을 백미 다섯말, 皮紙 세권 열장, 백지 한 권으로 바꾸어 왔다.’
-.(동년)6월 10일(함양 금류동암) ‘명학 스님은 갓을 팔지 못하고 저녁에 빈 손으로 돌아 왔다.’
-.(동년)6월 23일(함양 금류동암) ‘늑삼, 탄변 스님이 대나무 젓가락을 팔고 돌아 왔다.’
-.1688년 7월 14일(동화사 염불암) ‘경숙이는 큰절(동화사)에 내려가 담뱃대(煙竹) 한 개와 부채 한 자루를 팔아서 黑冊紙 한 장을 사가지고 돌아 왔다.’
정시한의 『山中日記』에서 보듯이 당시 스님들이 사찰에서 수공업품을 만들어 시장에서 팔고 온 것으로 보이는데 과연 그 시장이 일반저자의 시장이었는지 아닌지 알 수 는 없지만 승려들의 가공 물품이 소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688년 7월 14일 일기에서 큰절에 내려가 담뱃대와 부채를 팔아 흑책지를 사가지고 왔다는 사실은 동화사 혹은 인근에 場市가 개설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같은 가능성은 『山中日記』곳곳에서 발견되는데 동화사 외에도 그가 거쳤던 사찰들 중에는 매월 13일부터 17일 사이에 객승과 각종 물품이 왕래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1687년 7월 17일, 8월 14일 함양수령이 콩과 소금 등을 보내왔으며, 10월 14일에는 私家의 편지가 도착했다. 또 이듬해 1월 14일에는 경숙이 큰절에 가서 반찬과 종이를 가져왔다는 사실로 미뤄 매월 보름을 기점으로 사찰에서 각종 물품이 가장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으로 승시와 같은 시장의 개설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III. 결 론
구전만으로 전해오는 僧市에 대해 그 존재 여부를 규명한다는 것은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잡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과거 場市의 성격상 대규모 건물을 지어 그곳이 시장임을 알리는 특별한 시설을 한 것도 아니라서 더욱 그러하다.
조선시대 육의전과 같은 정부에서 관리 감독하던 곳이라도 시장의 특성상(상품의 이동성) 만약 역사적 기록이 전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면 후대의 발굴조사를 통해 그 用處를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도 시골의 장터를 보면 특별한 시설물 없이 천막에 의지하여 물건을 팔고, 파장을 하면 물건을 되가져가는 상황에서 과거의 장터 유적을 찾는 것은 육의전과 같은 유적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어렵다.
특히 승려들의 사적인 상업이 일부를 제외하고는 정부로부터 금지와 규제의 대상이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실물로서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지금처럼 구전으로 전해 오거나 당대의 사회상을 기록한 개인 문집, 여행기 등의 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다.
자금까지의 조사를 종합해 보면 僧市 혹은 僧場은 驛站과 社倉(僧倉)을 배경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과 지역별로 열리는 地方場市에 특정한 날을 정해 한 달 혹은 분기별로 승려들이 생산한 물품을 거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정시한의 『山中日記』 곳곳에서는 그가 가지고 있던 綿布로 절에서 쌀과 바꾸는 광경이 목격되는데, 이러한 형태로 보아 당시 사찰이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물물거래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화사에서 머무르는 동안 있었던 물품거래는 寺中內 시장 형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로 僧市의 한 단편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평강 부석사에서처럼 상인들이 직접 사찰에 와서 물품을 구매해가는 경우와 승려들이 직접 물건을 팔러 나가는 경우 그 거래의 장이 어디였나를 밝혀내는 것은 앞으로의 지속적인 연구 과제로 남는다.
끝으로 승시에 대한 고찰을 통해 ‘僧市’라는 단어 그 자체는 확인 할 수 없었지만 『실록』을 비롯한 여러 문헌 자료를 통해 그 존재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 의의를 둔다. 앞으로 지속적인 자료수집과 연구가 병행된다면 구전으로 전하는 僧市의 실체에 한 발 더 가까이 접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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