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에 잠든 창공의 영웅 ◇
This dicument was updated at 2003. 11. 7

* [파시스트당]의 잔인한 행동대장 이탈로 발보
이탈리아공군에도 공군 창설초기부터 타고난 하늘의 영웅으로서 명성을 드높이며 공군을 위해서라면 모든 정열을 다 바쳐 일하고 이탈리아 공군의 정신적인 아버지로 불리던 사나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이탈로 발보였다.
그는 1차대전 당시 약관 20세의 나이에 소위 계급장을 달고 참전해 많은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대위로 진급해서 제대했던 터프가이었다. 이후 전쟁이 끝나자 잠시 평범한 은행직원으로 일하다가 이무렵 이탈리아를 휩쓸고 있었던 국수주의에 심취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당에 입당했다.
혈기 왕성했던 이탈로 발보는 파시스트당의 젊은 청년들을 모아 행동부대를 조직해서 이끌고 다니면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파시스트당의 해결사로서 전면에 나섰다. 그가 이끌고 있었던 행동부대는 그들이 술집에 모여 모의를 할때 주로 마시던 체리브랜디의 이름을 따서 '첼리바노'라는 별명이 붙여 있었다.
이무렵 이탈로 발보의 첼리바노는 파시스트당에 반대를 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그가 누구던간에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고 심지어는 반대파를 납치해 고문을 일삼고, 암살까지 하기도 했다. 이때까지 그는 잔인한 첼리바노의 우두머리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었으며 파시스트당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에게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이탈로 발보라는 인물은 주먹을 앞세우고 폭력을 일삼는 정치깡패로 세상에 알려졌을뿐,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 영광의 자리에 올라서다
그러나 무솔리니가 집권하자 그동안 자신이 저지른 폭력에 회의를 느끼게된 이탈로 발보는 첼리바노를 해체하고 이탈리아 군대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이무렵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웠던 그의 공로를 높이사서 1926년 그를 공군차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때까지 비행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었던 이탈로 발보는 곧 비행기의 매력에 빠진나머지 스스로 비행술을 정열적으로 배웠으며 곧 능숙한 조종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그가 공군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추진하는 열정적인 인물로 변신했으며 공군의 독립을 열정적으로 주창하고 추진했다. 곧 그의 공군에 대한 애정에 감복한 공군내의 모든 장교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으며 그는 불도저같은 추진력으로 얼마안가 공군의 상징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그리고 1928년 이탈리아공군이 '레지아 아에로노띠까'라는 이름을 달고 독립하자 공군에 대한 그의 열정과 공적을 높이산 무솔리니는 1929년 그를 공군장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이탈로 발보는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는 인기인이 되어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탈리아 항공기술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자랑하기 위해서 대규모 편대로 이루어진 대륙간비행팀을 결성했고, 곧 실행에 옮겼다.
1930년 그는 직접 사보이아 마르께티 S.55X [수상기] 12기의 편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출발해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까지 총 12000km에 이르는 장거리 비행을 성공시켰다. 이 장거리 비행이 성공하자 이탈리아의 신문들은 온통 그의 이야기로 도배를 했으며 이탈리아의 항공기술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 큰 성과를 올렸다며 자축했다. 하지만 이것은 작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3년뒤 이탈로 발보는 이번에는 24기의 S.55X 수상기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를 출발해 미국의 [시카고]로 날아갔다. 이 거리는 무려19000km에 달하는 먼 거리로서 어느나라에서도 이런 대규모 편대가 비행을 성공시킨적이 없는 거리였지만 그가 이끄는 대륙간비행팀은 단 한 대도 쳐지지 않고 무사히 대서양을 건너 시카고의 미시간호수에 착수했다.
때마침 시카고에서는 축제분위기속에서 세계 발람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가 이끄는 24기의대형 수상기들이 멋진 편대비행을 하며 시카고 상공에 나타나자 시카고 언론들은 그의 업적을 시카고의 세계 박람회를 축하하러 온 평화의 사절로 소개하며 연일 그의 이야기를 1면에 실었다. 그는 뉴욕 시장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뉴욕을 방문했고 이때 뉴욕시민들은 그의 카 퍼레이드를 열렬한 환영행사로 맞이했다. 심지어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점심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이탈리아를 넘어서 전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으며 이탈리아 공군의 위상도 하늘을 찌를 듯하게 솟아 올랐다.
* 창공의 영웅 지중해에 잠들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 하늘을 찌를 듯한 인기를 얻게되자, 이때까지 그를 아끼던 무솔리니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심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된 이탈로 발보를 못마땅하게 여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질투심에 있어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무솔리니에게 있어서 이탈리아내에 그보다 더 인기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이탈로 발보가 미국에서 귀환하자 무솔리니는 속내를 숨기고 전국민적인 환영행사를 개최한후 공식석상에서 그에게 뜨거운 환영의 포옹을 했지만 속으로는 어떻게 하면 그를 영광의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곧 무솔리니는 이탈로 발보에게 공군원수의 표지인 황금독수리 기장을 수여한후 이제 공군내에서는 그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으니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리비아]를 더욱 개발해 조국에 이바지하라며 그를 리비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누가 봐도 그를 사막으로 유배보내는 것과 다름없는 말도안되는 처사였지만 조국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던 이탈로 발보는 순순히 무솔리니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당시 그는 울먹이며 분개하는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군인이 아닌가, 그저 명령에 복종할 뿐이다."
하지만 점점 무솔리니의 능력에 회의를 느끼게된 발보는 그가 물러선뒤 이탈리아공군이 점점 시대에 뒤쳐지는 것과 그의 조국 이탈리아가 [히틀러]의 전쟁에 빠져들 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솔리니의 정책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무솔리니가 히틀러와 동맹을 추진하자, 그는 즉시 로마로 날아가 무솔리니를 찾아가서는 서슴없이 말했다.
"이런 비굴한 동맹을 맺다니, 당신은 마치 히틀러의 구두닦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국민에게 인기인으로 자리잡은 이탈로 발보가 공공연하게 무솔리니의 정책을 비난하자, 난처해진 무솔리니는 이탈로 발보를 안방에서 뒹굴며 배만부른 돼지같은 인간이라며 비난하면서 그를 격하시키기 시작했다. 무솔리니의 마음속에 발보의 존재는 눈엣가시같은 것이 되어 버렸고, 리비아로의 유배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이 기회에 그를 제거해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이탈로 발보 역시 는 조국의 운명에 대해서 진정으로 걱정하고 있었으며 부하들과 모인자리에서 더 늦기전에 무솔리니를 끌어내리고 조국 이탈리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0년 6월 무솔리니가 영불 연합군에게 선전포고를 해 버리자 그는 리비아에서 곧 영국군과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군이 사막에 잘적응된 영국군과 싸워서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된 이탈로 발보는 이탈리아군을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매일같이 스스로 비행기를 조종하며 리비아 연안을 비행하며 이탈리아 군의 준비상황을 분석하면서 전술을 연구했다.
그러나 1940년 6월 28일, 무솔리니가 선전포고를 결행한지 18일째가 되는날에 직접 S.79 폭격기를 조종하며 리비아의 [토브룩] 상공을 시찰하던 이탈로 발보는 갑작스런 대공포 사격을 받았으며, 이내 그의 비행기는 화염에 휩쌓여 추락했다. 그리고 이것으로 창공의 영웅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날 그에게 발사된 대공포화는 영국의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군의 것이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사건조사를 빨리 마무리짓고 공식적인 발표를 했는데, 그것은 당시 토브룩항에 정박하고 있었던 순양함 산 죠지오의 대공사수가 그의 비행기를 내습해오는 영국군의 블렌힘 폭격기로 오인하고 대공포 사격을 가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오인사격이 아니라 무솔리니의 지시에 의해서 치밀하게 계획되고 저질러진 일종의 암살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의 허무한 죽음은 전 이탈리아를 슬픔속에 빠뜨렸다. 영광의 자리에서 순식간에 추락한 이탈로 발보의 죽음은 이탈리아공군 전체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가 예언한 대로 그가 사랑하던 이탈리아 공군은 얼마후 영국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막속에서 소멸해 버렸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후 그의 죽음의 진실에 대해서 많은 조사가 이루어 졌지만 증거가 불확실해서 그의 죽음속에 숨겨진 진실은 밝혀지지 못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이탈리아국민들은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애도했으며, 아직까지도 분명 무솔리니가 암살을 지시했다는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그 뜻을 펼펴보지도 못하고 영원히 하늘로 올라갔지만, 이탈로 발보는 이탈리아공군의 영광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인물로 아직도 이탈리아 국민들에게는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출처: 디펜스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