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마 오베스트 북벽
그랑드 조라스 북벽
그랑드 조라스 초등을 끝내고 돌아오는 캐신 일행
아우론조 산장
이탈리아의 국민적인 클라이머 에밀리오 코미치(산장내부에 걸린 초상화)
<신간 리뷰>
『등반 50년』 리카르도 캐신 저. 김영도 번역. 하루재 클럽 발행. 2017년
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 이용대
1975년 리카르도 캐신은 생애 최초로 로체 남벽 원정에서 패배감을 맛본다. 그 후 귀국 행 군용비행기 안에서 자서전을 쓸 생각을 했다. 하필 패배자로 생애 처음 좌절을 맛봤던 그 때 자서전을 쓸 생각을 했는지 동기자체가 아이러니하다고 했다. 그토록 철저히 준비한 로체 남벽원정에서 패배한 것은 인간은 온전한 의지만으로 한계상황을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로체 패배 이후 오랫동안 침잠해 있다가 50년 등반인생을 되짚어보는 회고록을 썼다. 카신의 등반활동이 빛을 발하는 바로 그 책이 『등반 50년』(50Years of Alpinism)이다.
이 책은 이탈리아 알피니즘의 대부 리카르도 캐신(Cassin, Riccardo 1909-2009)이 남긴 등반 50년의 회고록이다. 사람들은 그를 “대장장이 캐신”이라 불렀다. 이런 별명이 붙여진 배경은 그가 1947년부터 피톤, 카라비너, 해머 등 금속제 장비 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 그가 직접 제작한 ‘캐신’이란 상품명의 암벽 장비가 우리나라에도 널리 보급되었다. 한국 산악인들에게 캐신(현지에서는 ‘카신’으로 불린다.)이란 이름이 익숙한 것은 1970-80년대 그가 제작하여 보급한 하켄. 아이젠. 피켈 해머. 카라비너와 같은 ‘캐신 브랜드’ 때문일 것이다. 내가 캐신이란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일본 출장에서 돌아온 후배가 선물로 사다준 캐신 록 해머 때문이다.
캐신은 2차 세계대전 전후세대를 연결하는 이탈리아 등반계의 중심인물이다. 그는 세계 등반 사에서 1930년대 북벽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알피니스트로 평가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은 곧 전설이며, 등반의 역사에 기록된 중요한 초등 몇 개는 곧 그의 이름과 동의어다.
캐신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레코(Lecco)에 살면서 그리냐(Grigna)의 석회암장에서 1926년부터 등반을 시작했다. 그는 ‘이탈리아 신 등반 그룹(New Italy Climbing Group)을 결성하고 이를 주도하면서 서부 알프스와 돌로미테 등지에서 6급의 암벽 등반 시대를 열어 나갔다. 1934년 이탈리아의 국민적인 클라이머로 추앙 받는 인공등반의 마술사 에밀리오 코미치를 처음 만나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인공등반의 신기술을 전수 받아 돌로미테의 거벽을 차례로 정복해나간다. 그는 코미치를 만나기 전 까지는 압자일렌 하강기술도 모르는 상태였으며 바위에서 양손으로 줄을 잡고 하강할 정도로 기술적으로 미숙한 상태였다.
코미치를 만난 후 그의 등반기술은 일취월장한다. 언제나 디렛티시마(direttissima)를 추구한 코미치는 “정상에서 물 한 방울을 떨어뜨린 다음, 그 선을 따라 오르고 싶다”라는 말로 자기의 등반 스타일을 표현했다. 캐신은 코미치 특유의 이런 등반 철학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말했다.
내가 2010년 등산학교 동료강사들과 돌로미테의 트레치메를 찾았을 때 일이다. 거벽 아래에 있는 아우론조(Auronzo)산장에서 몇 일간 머문 일이 있었다. 산장식당의 벽면에는 거대한 크기의 에밀리오 코미치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내가 짐짓 모른 체하며 산장관리인에게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는 양어깨를 으쓱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1933년 치마그랜드 북벽에 직선으로 이어진 900여 미터의 디렛티씨마를 실현한 코미치의 초등 흔적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등반은 알프스 북벽등반의 전환점이 된다. 이탈리아에서 코미치의 인기는 그가 간지 7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는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 받고 있었다.
불퇴전의 용기로 돌로미테 거벽에 새 역사를 쓴 ‘대장장이’
캐신은 1934년 치마 피콜리시마 북벽(Cima Piccolissima. Kleinste Zinne). 1935년 치마 오베스트 북벽(Cima Ovest ,North Face. 2974m)과 1937년 피츠 바딜레 북동벽(Piz Badile, N.E. Face. 3308m)을 초등한다. 그의 생애 최대 업적은 1938년 단 한 번의 시도로 이룩한 그랑드조라스 워커릉(Grandes Jorasses Walker Spur) 초 등반을 꼽을 수 있다. 치마 오베스트 북벽과 그랑드 조라스 워커스퍼 초등은 ‘세계 등반사 100대사건’에 꼽히는 대기록이다.
그는 어떠한 곤경 속에서도 굴할 줄 모르는 투혼을 지닌 인물이다. 그가 이룩한 역사적인 등반에는 이런 특성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는 천재성을 지닌 암벽 등반가로 어떤 열악한 기상조건에서도 불굴의 투지로 밀어 붙이는 과감한 등반을 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네 친구들은 미쳤어, 이제 끝장이야!!”
치마 오베스트(Cima Ovest. 2974m)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극적인 등반이었다. 낙뢰와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이틀 동안 비박을 감행하며 불굴의 투혼으로 500미터의 오버행 벽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당시 캐신의 과감한 등반 모습을 지켜보던 독일의 클라이머들은 바위 밑에서 기다리던 캐신의 동료에게 “네 친구들은 미쳤어, 이제 끝장이야! 너 혼자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그는 이 등반을 성공시킨 후 이탈리아의 영광을 이룩했다는 자부심으로 감격했다.
피츠 바딜레 북동벽 초등 당시 캐신 일행은 52시간 동안 등반하였으며, 등반 중 눈. 비. 우박. 낙석. 낙뢰 등이 12시간동안 지속되는 가운데 눈보라를 뚫고 정상에 섰으나. 두 사람이 폭풍설에 노출되어 사망한다. 두 사람은 등반 중에 우연히 만난 다른 팀의 동행자였다. 등반에는 성공했지만 비극으로 얼룩진 대 등반이었다. 이후 피츠 바딜레는 12년 동안 재등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1938년 독일 오스트리아 등반대에 의해 알프스 최후과제라 불리던 아이거 북벽이 초등되자 이벽의 초등을 노리고 있던 카신은 실망한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같은 산악인으로서 아이거 북벽 초등 소식을 듣고 기뻐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기대가 무너진 것에 대해 몹시 실망했다. 그래서 몇 번 정도 듣기만 했던 그랑드조라스를 선택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유럽 최강의 등반가들이 이 벽을 노렸으나 모두 패퇴했지만 그는 단 한 번의 시도로 그랑드조라스 워커 슈퍼를 깔끔하게 돌파한다. 그랑드 조라스 등정은 국민주의 산악운동이 강하게 작용한 단순한 동기에서 출발했지만 지금까지도 세기적인 대 등반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이 등반의 성공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탈리아의 영광이 될 만한 업적을 이룩했다는 자부심으로 감격했으며, 이탈리아를 일거에 산악 강국으로 부상시킨다.
당시 유럽 산악계의 분위기는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의 등반가들이 자기 조국의 영예를 걸고 경쟁적으로 미등의 벽에 초등의 흔적을 남기던, 등반에도 국가 간의 내셔널리즘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대였다. 이 기습적인 쾌거는 이 벽을 노리던 수많은 등반가들을 실망시켰으며, 독일 게르만 민족의 아이거 북벽 승리에 대한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으며, 알프스 3대 북벽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마지막 과제를 해결한 쾌거였다.
그랑드 조라스는 프랑스 산악인들이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무명의 이탈리아의 촌뜨기 세 명이 소리 없이 해치운 것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카신 일행이 레쇼 산장에 도착하여 등반을 준비 할 때 그곳에 있던 프랑스 산악인들은 비웃으며 조롱했다.
카신의 천재성은 루트에 대한 정확한 판독에 있다. 세기적인 대 등반으로 평가받는 워커 스퍼 초등이 이를 입증했다. 그는 자연스러운 선을 따르면서 디렛티시마(直登)를 추구하였다. 동부 알프스의 암벽에만 익숙해있던 그는 워커 스퍼 등정 후 “알피니즘의 본류는 빙.설.암의 어려운 조건을 추구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4대륙에 남긴 위대한 궤적들.
캐신의 행적을 살펴보면 세계의 고산과 거벽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활동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활동반경은 유럽의 동. 서 알프스. 아시아의 히말라야. 북미의 알래스카. 남미의 안데스에 이르기 까지 세계의 산을 상대로 지구의 4대륙을 섭렵하는 굵직한 궤적을 남긴다.
그는 유럽동부알프스의 돌로미테와 서부알프스의 그랑드 조라스. 피츠 바딜레를 초등한 후. 1953년 이탈리아 정부 지원의 K2 원정대 아르디토 데시오 대장과 K2를 정찰했으나 대장과 불화가 생긴 가운데 스키 사고로 발목 부상을 입어 1954년 K2 초등대에 합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는 1953년의 정찰 대원이었지만 대장 데시오 교수의 견제로 캐신이 고소 환경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본대에서 탈락시킨다. 카신의 탈락은 건강 문제보다는 등산가로서 카신의 명성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다. 이 점은 산악인과 학자간의 주도권 쟁탈전의 문제였다. 정상 등정자 라체델리는 “만일 카신이 원정에 참가했다면 언론의 관심은 대장 데시오 교수보다는 등반가인 캐신에게 더 쏠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K2 원정대 탈락의 설욕전
1957년 가셔브룸 IV봉(7925m)원정 대장으로 참가한 캐신은 마우리와 발터 보나티의 등정으로 초등정을 성공시킨다. 이 산은 8000미터에서 불과 75미터가 모자라는 산이지만 8000미터 못지않은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는 산에서도 몸소 실천하는 리더 싶을 발휘하는 대장이었다. 가셔브룸 IV봉 원정에서는 포터들 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8일 동안 카라반을 하며 대원들에게 솔선수범의 본보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가셔브룸 IV봉의 성공은 K2 초등 대에서의 배제당한데 대한 멋진 설욕전이었다. 이 점은 K2에서 선배 라체델리의 기만과 배신으로 정상등정의 기회를 잃고 억울한 누명에 시달렸던 보나티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1954년 이탈리아 K2원정대는 초등에 성공했지만 후일 동료애 부재의 추악한 단면을 드러낸 등반이었다. K2에서 귀국 후 라체델리는 보나티는 자신의 명예를 얻고자 등정조와 경쟁을 하며 초등정을 방해 했다고 거짓말을 유포하여 보나티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당시 보나티는 8100미터 지점의 9캠프 까지 셀파 마디와 함께 무거운 산소통을 운반하여 정상등정을 성공시켰으며, 날이 어두워진 가운데 최종 캠프의 텐트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자 비박장비도 없이 고소에서 설동을 파고 맨 몸으로 비박을 한 후 하산했다. 라체델리는 정상을 얻기 위해 동료를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었다. 당시 장비로는 8100미터에서의 비박은 상상을 초월하는 끔직한 일이었다. 그 결과 세르파 마디는 동상으로 양 발가락 절반을 잃는다. 이렇듯 보나티는 선배 라체델리의 배신에 치를 떨었지만 K2 초등이라는 국가적인 위업에 피해가 될까봐 침묵하다가 후일 『내 생애의 산들』이라는 자서전에서 진실을 밝힌다.
그는 K2를 다녀온 다음해(1955년)에 프티드류 남서필라를 단독으로 완등해 등산계를 놀라게 했다. 이 등반은 K2정상 공격 조에서 자신을 제외시킨데 대한 시위적인 성격의 등반이었다.
1961년 캐신은 52세의 나이로 북미 최고봉 매킨리를 원정하여 사우스 버트레스 루트를 초등정 했다. 이 루트는 초등자 캐신을 기려 ‘캐신 리지’로 명명되었다. 이 초등을 축하하기 위해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과 이탈리아 그론치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 그의 공적을 크게 치하했다. 1969년 캐신은 페루 중부 안데스의 히리샹카 서벽(Jirishanca West face. 6126m)을 초등한다.
1975년엔 히말라야 3대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던 등반 고도 3500미터에 이르는 난공불락의 요새 로체 남벽원정에 대장으로 참가하였으나 그의 등산 인생에서 최초의 패배를 맛본다. 그는 이곳에서 7500미터를 얻은 후 베이스캠프를 휩쓸어버리는 눈사태와 강풍의 횡포 앞에 결국 전의를 상실한 채 무릎을 꿇는다. 그는 이 원정을 위하여 젊은 등반가 라인 홀드 메스너를 포함한 강력한 등반대를 조직했다. 그는 로체 원정 실패 후 로체 남벽을 가리켜 수시로 눈사태와 낙석. 낙빙을 쏟아내는 ‘걷고 있는 산’이라고 불렀다. “아마 20년 후에 누군가 이 벽을 오를 수 있을지 모르나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20년 후 누군가 오른다 해도 행운이 따르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 하다.” 라는 말을 남겼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백전노장의 저력
그는 로체 남벽에서 패퇴했으나 그의 알피니즘은 끝나지 않는다.
1987년 78세의 나이로 자신이 50년 전에 초등한 피츠 바딜레를 10시간 만에 재등하여 백전노장의 저력을 과시하며 지칠 줄 모르는 등반능력으로 전설적인 위상을 획득한다. 그는 등반을 끝낸 뒤 “등반을 즐기면 50, 60, 80세까지도 등반이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자신이 건재함을 입증했다. 그는 같은 나이 또래의 등반가들이 오래전에 집안 안락의자의 편안함에 안주했지만 그는 여전히 한계에 도전하여 젊은 등반가들의 롤 모델 역할을 했다. 그가 100세까지 장수한 것은 등산을 통해 단련해온 건강 때문일 것이다.
그는 등산경력 못지않게 삶 자체도 매우 다채로웠다. 젊은 시절에는 단순 취미를 넘어선 국가대표 급의 권투를 했고,50번이상의 경기를 치르며 이탈리아 챔피언 자리까지 넘볼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벽돌공장 직공 일을 했고, 레코에서 전기 공장의 감독으로 일하였다. 전쟁 중에는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되어 대독 항전에 참여한다.
전 후에는 후진지도와 산장 복원 사업에 주력했고 자신의 이름을 상표로 한 등반장비를 제작 보급하기도 했다. 그는 1999년 이탈리아 최고 명예인 ‘대십자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2009년에는 영국의 알파인 클럽 명예회원으로 위촉되기도 한다. 등산의 역사를 바꾼 위대한 산악인 리카르도 캐신은 2009년 8월 6일 고향 레코에서 101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캐신의 50년 등반활동은 그것이 곧 세계등산사이며 250년 알피니즘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귀중한 기록이다. 돌로미테에서 부터 데날리 초등까지 상세한 정보와 많은 사진자료들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우리산악인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해 줄 것이라 믿는다.
도전을 통해 얻은 깨달음.
17세에 등반을 시작한 캐신은 80세가 넘도록 도전의 영역을 탐미하며 50여 년 동안 매달렸던 등반의 세계를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한다.
“클라이머들은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산에 갈 권리가 있다. 그렇다고 생각 없이 단순하게 등반만 하거나 편의성만을 추구하는 식으로 타락하지 말자. 바위와 얼음에 맞서 극한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하는 것은 성공여부에 관계없는 것이다. 때로는 힘들지만 위험한 도전을 통해 건강한 기쁨과 정신적인 수양을 고취하면 등반은 성취감과 어떤 형태의 보상을 해 줄 것이다.”
고산. 거벽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헤르만 불의『8000미터의 위와 아래』. 하인리 하러의 『하얀거미』. 리오넬 테레이의『무상의 정복자』.가스통 레뷔파의『별빛과 폭풍설』.발터 보나티의『내 생애의 산들』등 세계대전 전후의 유명 등반가의 명저들이 이미 출간된바 있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가장 좌장격인 캐신의 저서가 지금까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우리 등산문화의 후진성을 여실히 드러낸 일이라 할 수 있다.
올해는 알프스 6대 북벽 중 하나인 피츠 바딜레가 캐신에 의해 초등 된지 80주년을 맞는 해다.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이제 그의 회고록 출간으로 한국독자들은 뒤늦게나마 위대한 산악인과 만나는 경사를 누리게 됐다.
첫댓글 멋지네요~^^*
다양한 유명 클라이머들의 전기를 읽게 되서 기쁩니다.
어서 빨리 받아보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고문님 리뷰만 읽었는데 감동이 전해집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