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은 신산(神山)이다. 산봉의 형태가 닭의 머리를 닮았고 아래는 용의 비늘처럼 보인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부터 신령스럽다. 산의 범상치 않은 몸통은 수많은 풍수학적 신화를 양산했다. 백두대간에 흐르는 천하의 지맥이 응축되는 곳이라 조선의 도읍지 후보로도 심각하게 거론됐고 <정감록>은 나를 구할 영웅이 계룡산에서 태어날 것이라 예고했다. 모든 산엔 신이 있었고 그 가운데 계룡산 산신을 으뜸으로 쳤다. 무당들조차 계룡산에서 며칠 굶어 본 이력이 있어야만 당당하게 명함을 돌릴 수 있다. 신원사(神元寺)는 계룡산 4대 사찰 가운데 하나다. 동쪽의 동학사 서쪽의 갑사와 더불어 계룡산의 남쪽을 지키는 절이다. 북쪽의 구룡사는 소실됐다. 신원사엔 중악단(中嶽壇)이란 전각이 있다. 산신을 위한 제단이다.
중생 七情 어루만진 ‘불교’ - ‘抑佛’ 거센 파고 뛰어넘다
사찰 내 산신제단, 왕권의 보신 열망 산물
유교의 탄압 속 민중과 소통의 끈 이어가
‘영험함’ 입소문에 긴 세월 민심 사로잡아
<사진설명> 신원사 중악단. 조선 태조가 개국에 성공한 후 산신을 모신 전각이다.
조선의 건국을 암시하는 태조 이성계의 꿈은 유명하다. 그는 꿈속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불이 난 집을 탈출하는 자신을 봤다. 이성계의 든든한 책사였던 무학대사는 그것이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길몽이라고 해석했다. 화택(火宅)은 멸망을 목전에 둔 고려를, 각목 세 개를 등에 들쳐 맨 이성계는 왕(王)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달콤한 해몽을 고이 간직하고 있던 이성계는 개국에 성공한 후 자신의 나라를 확실히 후견해줄 신들을 청했다. 나무를 일렬종대로 들었다는 점에 착안해 남북 방향으로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에 산신을 위한 제단을 세웠다. 상악단 중악단 하악단으로 1394년의 일이다. 상악단과 하악단은 한국사의 부침과 함께 사라졌고 중악단(中嶽壇)만 살아남았다. 장수한 덕분에 보물 제1293호라는 훈장도 얻었다.
중악단은 절 안에 있지만 절과는 사뭇 다른 건물구조를 지녔다. 왕궁의 축소판이다. 구릉지의 동북과 서남을 축으로 대문간채, 중문간채, 중악단을 일직선상에 대칭으로 배치하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1.5m 남짓 높다란 돌기단 위에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의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는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의 특징적인 수법이다. 각 지붕 위에는 각각 7개씩 조각상을 배치했다. 궁궐의 전각이나 도성의 문루에서 사용하던 기법 그대로다.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에 단묘(壇廟) 건축의 전형적인 격식과 기법을 엄격하게 적용했음을 보여준다. 중악단 내부 중앙 뒤쪽에 단을 설치하고 단 위에 나무상자를 두어 그 안에 계룡산신의 신위와 영정을 모셨다. 왕권의 보신에 대한 열망이 꽤 이물스러운 건물을 절 안에 들여앉힌 셈이다. 하긴 살벌한 숭유억불 체제 속에서 ‘부정 탄다’며 절을 폐사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태조가 착수해 9대 임금 성종 대에서야 편찬 시행된 조선의 국법 <경국대전>은 성리학적 질서의 완성이었고 위정자들은 그 법을 가차 없이 실현했다. 새로 짜여진 법적 권력의 지형도 위에서 남성과 유교는 살판이 났고 여성과 불교는 최소한의 지위마저 박탈당했다. <경국대전>은 남자만이 집안의 제사를 주재할 수 있다고 선을 그었다. 이후 적장자 중심의 제사상속관행이 일반화되면서 딸은 제사와 재산분배에서 제외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재혼한 여성의 자손은 벼슬길이 원천적으로 막혔다. 여성과 더불어 비주류의 양대 산맥이었던 불교는 사회악으로 간주됐다.
<경국대전>은 사찰에 다녀온 부녀자들에게 곤장 100대를 치도록 명시했다. 국가 이데올로기는 불교에 대해 초법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경국대전> 도승조(度僧條)는 3년에 한번씩 승과고시를 통해 30인의 승려를 선발하도록 규정했지만 중종 조부터 승과고시가 실시되지 않았다.
유생들은 불교 말살을 목표로 죽도록 상소를 올렸고 연산군은 비구의 결혼을 강요하고 비구니는 몸종으로 삼을 것을 권장했다. 불교 복권을 시도한 문정왕후와 허응보우는 기어이 악녀와 요승으로 치부된 채 생을 마감했다. 사찰 토지 몰수, 승려 축출, 출가 금지는 당대 가장 위대한 개혁 가운데 하나로 상찬됐다. 조선 중기는 멸불과 함께 시작됐다.
산 속으로 쫓긴 불교는 민간신앙과 결속해 근근이 연명했다. 산중 여기저기에 숨은 자잘한 신들과 손을 잡고 다른 자리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민중과 소통했다. 사찰 안의 칠성각과 산신각은 이때부터 번성했다. 조선의 공권력이 특별히 신경 쓴 것은 음사(淫祀)의 금지였다.
국가는 여성이 절에서 산신에게 기도하는 일을 음란하다고 취급했다. 아낙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나라와 임금의 안녕이 아니라 거의 건강과 득남을 빌었다. 스스로도 이기지 못할 만큼 거대한 윤리로 무장한 주류의 관점에서 보면 사적이고 경박한 혹은 사적이어서 경박하다고 여겨지는 여성의 신앙은 죄라 할 만 하다. 이러한 이유 탓에 산신각에 해당하는 중악단도 퇴출 위기를 당한 적이 있다. 효종 2년(1651) 미신 타파를 명목으로 철거되기도 했다. 쓰러진 신전을 다시 세운 인물은 명성왕후였다(1879년).
신원사는 나머지 전각은 걸어 잠그더라도 중악단만은 24시간 개방하고 있다. 새벽에도 중악단을 찾는 참배객들을 위한 배려다. 매월 음력 16일 산신제를 지내며 계룡산 산신의 생일로 암묵적으로 정해진 음력 3월16일엔 공주시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생신잔치’를 연다. 불교식 유교식 무속식 제례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사진설명> 사천왕문이 보이는 신원사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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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천황봉 쌀개봉 관음봉 문필봉 연천봉으로 이어지는 길지(吉地)의 끄트머리를 찍고 선 중악단은 특히 출세에 영험이 좋은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이성계는 국조 이전에 쿠데타에 성공한 군인이었다.
중악단은 그의 대망이 예언되고 임재한 공간이다. 곧 진급을 꿈꾸는 고급 장교들은 한번쯤 귀가 솔깃할 만한 인과관계다. 인사 시즌인 10월과 11월엔 더욱 발길이 잦다. 달전에도 소장(小將) 두 명이 중악단에 인사를 드리고 간 뒤 동시에 별을 하나 더 달았다는 풍문이다. 누구나 미신을 부정하지만 미신으로부터 자유롭기는 힘들다. 불확실한 미래와 확실한 죽음에 몸이 매여 있는 한 어쩔 수 없다.
역사적으로 가장 생명력이 강했던 이데올로기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처세론이었다. 그 비루하고 치사한 정신상태를 기꺼이 껴안은 종교는 시대의 호황과 불황에 관계없이 살아남았다. 최소한 명맥은 유지했다. 그렇지 않았던 종교는 강퍅한 체제와 함께 막을 내렸다. 종교도 결국 탈 많은 인간의 발명품이고 민심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태조의 권속들은 흩어지고 호주제마저 폐지됐다. 유생들의 이상이 백지화된 자리에 지금은 사찰과 교회가 경쟁을 벌이며 들어서는 상황이다. 혹자들은 유교가 급격하게 몰락한 까닭을 민중들에게 내세에 대한 희망을 부여하지 못했던 탓이라고 지적한다.
기독교는 사후(死後) 낙원에 대한 환상의 극대화로 교세 확장을 이뤘다. 불교는 무아(無我)라는 강력한 교리를 지녔지만 인간의 칠정(七情)에 인색하지 않았고 윤회에 대한 사사로운 기대에 숨통을 틔워줬다. 내세는 삶의 연장이고 인생역전을 기약할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선이다.
행복해지고 싶다는 동물적 본능을 배반하면 어떤 종교와 이념, 인문도 살아남기 어렵다.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세상의 눈으로 부처님을 봐야 할 경우도 있다. 그래야만 중생을 부처님 눈 닿는 곳에라도 붙들어 놓을 수 있으니. 중악단 대문으로 검은 동복 차림을 한 수녀가 들어갔다. 왜 들어갔는지는 모른다. 다만 푸근한 색감은 보기 좋았다.
첫댓글 니무 지장보살 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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