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댐을 기준으로 호서와 호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麗末鮮初이다. 금강 상류에 미륵원이라는
원이 있었다. 경상도에서 서울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미륵원의 주인은 懷德 黃氏인 황수
라는 이물이었는데, 재산이 넉넉한데다가 손님 대접을 잘해서 많은 학자와 문인들이 미륵원에 모여서 놀다가
가곤 하였다. 卞季良(변계량), 李穡(이색), 鄭以吾(정이오) 등이 미륵원에 모여서 한담을 나누다가 그 자리에서
이색이 [彌勒院記(미륵원기)]를 쓴다. 여기에서 호서와 호남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영은 산을, 호는 물을 가리
킨다. 영남은 背山(배산)으로, 호서와 호남을 臨水(임수)로 해석할 수 있다. 산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든든하게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면 물은 움직이면서 많은 妙用(묘용)을 일으킨다.
미륵대원지
충주 미륵대원지는 1963년에 고고미술사학회(현 한국미술사학회)에 의해 고려 석실[돌방] 사원지로 소개되었고,
1965년에는 경주 석굴암 복원을 위한 자료로 제시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5월 24일에 오층석탑과 석불입
상이 각각 국보 제166호와 제167호로 지정되었고, 1963년 1월 21일에 각각 보물 제95호와 제96호로 지정되었
다. 그런데 당시 석실 사원이 위치하였던 상모면(현 수안보면)은 행정 구역상 괴산군에 속하여 문화재 지정 명칭
은 ‘괴산 미륵리 오층석탑’과 ‘괴산 미륵리 석불입상’이다. 충주 미륵대원지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 조사는 1977년
부터 시작되어 2차, 3차, 4차, 5차의 발굴조사와 석실에 대한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들 조사를 통하여 고려시
대의 사찰 이름으로 대원사(大院寺)가 확인되었고, 대원사지 동쪽에서 원지(院址)가 발견되어 『삼국유사』에 나오
는 ‘미륵대원(彌勒大院)’이 이곳에 있었고, 많은 출토 유물을 통하여 상당한 규모의 사찰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
였다. 이 같은 발굴 성과를 통하여 1987년 7월 18일 사적 제317호로 지정되어 국립공원 월악산과 함께 중요한
자원으로 이해되고 있다.
충주 미륵대원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1976년 9월에 수안보온천과 연계한 문화 유적 관광지를 조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주변 정비 과정 중에 재대석, 장대석, 초석 및 건물지로 보이는 유구와 유물들이 노출되면서 시작하게
되었다. 제1차 조사는 1977년 8월 10일부터 10월 8일까지 이루어졌다. 조사 기관은 청주대학교박물관으로,
1978년에 『미륵리사지 발굴조사보고서』를 간행하여 중원 미륵리 사지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같은 1차 조사를 바탕으로 석굴 실측조사가 실시되었고, 1979년 2월 15일에 석굴 실측 조사 보고서가
간행되었다. 제2차 조사는 1978년 9월 15일부터 1978년 12월 30일까지 실시되었다. 조사 기관은 청주대학교박
물관으로, 보고서는 1979년 8월 20일에 간행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석불입상이 있는 석실의 앞쪽으로부터 석등,
오층석탑, 시도유형문화재 제269호인 귀부(龜趺), 당간지주, 중문지에 이르는 사지의 중심 지역과 하천 서쪽의
건물지 등 가람 배치에 있어서 중심권에 해당하는 지역을 발굴하여 유구의 현상을 파악하였다. 제3차 조사는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담당하여 1982년 11월 18일부터 1982년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고, 보고서는 1983
년 1월 15일 간행되었다. 당시 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안말마을 입구였다. 조사 결과 새로 조성된 마을의 지하에
서도 상당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사찰의 권역을 추정하는 단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에 대한 발굴조사
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연차적으로 토지 매입과 정비 계획이 추진되었고, 안말마을은 1986년에 현재의 점말마을
로 이주하게 되었다. 제4차 조사는 1990년 7월 16일부터 1990년 11월 30일까지 청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다시 실시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안말마을 지역과 사지 중심 지역의 동쪽 구릉지, 그리고 당시 사찰 권역 내에
있던 세계사 주변 지역에 대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안말마을 지역에서 원지(院址)와 관련된 유구를 찾는 성과를 이루었다. 이에 대한 결과 보고서는 1992년 6월 30일에 간행되었다. 제5차 조사는 제4차 발굴조사의 연장
선상에서 진행되었다. 조사 기관은 청주대학교박물관이고, 조사 기간은 1991년 7월 30일부터 11월 22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조사에서는 제4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담장지 유구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모두
유실되어 찾지 못하였다. 한편 석실 금당의 서쪽에 있는 개울 건너편에 해당하는 지역에 대한 전면 조사가 이루어
졌다. 그 결과 중요한 건물지 유구는 확인되지 않았고,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의 기단 석렬만이 확인
되었다. 또한 동향으로 된 요사 1동의 유구가 완전하게 확인되었다. 5차까지 진행되었던 발굴조사를 요약하여
정리하면, 미륵대원지에는 석실과 석조물이 있는 하천의 동쪽 면을 중심으로, 하천 서쪽의 평지에는 부속 건물인 요사(寮舍)와 승방(僧房)이 있고, 후대의 건물인 세계사가 있던 언덕과 그 서쪽의 구릉지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소규모의 건물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사지의 외곽으로는 동서의 산 능선에 돌담장을 설치하여 사역을 둘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석실 상부의 목재구조는 남아 있지 않고, 하부 석실 중심에 미륵대불(보물 제96호)이 위치하고 있다. 그 앞쪽
엔 석등을 비롯하여 미륵리 오층석탑(보물 제95호), 돌거북,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 많은 석조물이 남아 있어 창건
당시의 사격을 말해주고 있다. 현재 사적 제31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미륵대원지는 석조와 목구조를 합성시킨 석굴사원 터로 석굴을 금당으로 삼은 북향의 특이한 형식을 취한 유일
한 유적이다. 현재 석실 상부의 목구조는 남아 있지 않으나 석실 구조물 중앙에는 주존불인 미륵여래(彌勒如來)가
봉안되어 있으며 1977년 발굴에 의해 전실(前室)에 해당되는 구역에서 초석들이 발견되어 평면의 구조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발굴조사 때 ‘미륵당(彌勒堂)’, ‘명창삼년금당개개와(明昌三年金堂改蓋瓦)’ 등의 명문와(銘文瓦)가
출토되어 1192년(명종 22) 금당의 기와를 새로 수리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석굴과 전실의 목구조가 소실
된 것은 13세기였다. 그 후 곧 복원되었다가 조선 전기에 다시 중수하였고, 임진왜란을 거쳐 18세기에 다시한번
중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법등이 끊긴 것은 1936년에 있었던 큰 수해가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원지로는 유일하게 북쪽을 바라보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절터로서, 그 자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찰은 미륵신앙과 관련되어 있어 충주 미륵대원지로 불리고 있는데, 창건 시기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이나
유적·유물이 전하지 않아 분명한 것은 알 수 없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가 나라가 망함을 슬퍼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에 누이 덕주
공주는 송계계곡의 북쪽 끝 미륵대원과 마주보이는 벼랑에 마애불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이 절의 미륵신앙과
연관하여 신라부흥의 전초기지였다는 가설이 설득력을 가질 수는 있지만, 날개 잃은 마의태자에게 그만한 재력과 여유가 있었을 까닭도, 옛 집권새력의 부흥운동을 방치할 만큼 호락호락한 왕건도 아니었다. 비운의 왕족에
대한 민중들의 보상심리로 단지 전설로만 그친다.
후삼국시기 군사적⬝경제적 요충지였던 이 지역을 가장 먼저 점령한 궁예에 의해 미륵신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
고, 고려가 건국된 후 충주 유씨세력들이 왕건의 지원을 받아 석굴을 쌓고 여러시설들을 조성하여 대대적인 사원
으로 확장 중창했다는 것이 설득력있는 창건의 역사가 될 것이다.
이 절에 얽힌 또 한 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고구려의 온달장군이다. 미륵대원 보주탑이 바로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던 공깃돌이라는 것이다. 신라의 마지막 마의태자와 고구려의 온달장군은 중도에 좌절된 회한의 인물들이다.
어쩌면 폐허가 된 미륵대사원의 미완성과 닮았으리라.
옛 기록에 전하는 계립령과 충북과 경북을 연결하고 있는 하늘재 사이의 분지에 남북향으로 펼쳐진 미륵대원지.
여기에 일찍이 석굴사원이 경영되었으나 오래전에 소실되어 현재는 석조물만 남아 있다.
♣ 미륵대원지 터 석재에 바위구멍이 있다.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었으니 – 하늘재와 미륵대원지
신라 천년 사직이 고려로 넘어가자 망국의 한을 품고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하늘재 너머
에서 히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그날 밤 마의태자 꿈에 관세음보살이 나타나 ‘이곳에서 서쪽 고개를 넘으면 절을
지을 만한 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영봉에 마애불을 조성하면 억조창생에게 자비
를 베풀 수 있으니 포덕함을 잊지 말라’고 이르고는 사라졌다. 꿈에서 깬 마의태자가 꿈 이야기를 하자 덕주공주
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매는 하늘재(계립령)를 넘어서 마의태자는 미륵석불입상을 덕주
공주는 월악산 에 마애미륵불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미륵석불입상과 마애미륵불이 마주 보고 있는데
국가에 큰일이 일어나면 두 부처님 보옥에서 불빛이 비치는데 그 불빛이 어찌나 밝은지 밤중에도 개미가 기어가
는 것이 보인다고 한다.
거란이 침입했을 때, 몽고가 침입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근래에는 한국전쟁 때도 빛을 발했다고 하지
만 미륵불의 영험함을 믿고 싶어하는 중생들의 간절한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