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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싱 여행14 - 서시하 운하에 라이브 카페 구경후 관제묘에서 소주 한산사를 떠올리다!
10월 25일 우전 乌镇(오진) 에 도착해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10여분을 걸어
오후 2시가 넘어 서책 남문 西柵 南門(서책남문) 으로 입장해
西栅大街(서책대가) 를 걸어서 大剧院(대극원) 과 희명호 를 거쳐
운하들이 만나는 3거리에 이르러 오른쪽 望津河(망진하) 운하를 구경합니다.
주랑을 건너 升莲广场(승련광장) 으로 넘어가 白蓮塔(백련탑) 에 올라 서책경구내
운하와 다리며 집들에다가 건너편 京杭大运河(경항대운하) 를 지나가는
배들 까지 조망하고 백련탑을 내려와 升莲广场(승련광장) 에서 민찬객잔
이라는 여관을 지나 그토록 찾아 헤메던 맥주집 으로 들어가서는 맥주를 시킵니다.
인테리어는 아주 훌륭하건만 오후 4시 반으로 아직 시간이 이른 탓인지 손님은 없습니다.
혼자서 안주도 없이 맥주 한 병을 비우고는 나와 望津河(망진하) 운하를 따라 큰
길로 나가니 西市河(서시하) 라는 큰 운하와 합쳐지는 부분에 작은 광장에 다리가 있으니...
望津河(망진하) 운하에 걸린 다리는 通济桥(통제교) 이고 큰 운하인 西市河
(서시하)에 걸린 다리는 仁济桥 (인제교) 인데..... 여긴 인파가 넘쳐
흐릅니다. 通济桥(통제교) 를 지나서 우회전을 하니 오른쪽 白蓮街
(백련가) 에는 "라이브 공연을 하는 카페(酒 Bar)" 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조금 전에 모퉁이 저편 맥주집 과는 달리 여기 카페들의 안과 밖에는 엄청난 인파 로
붐비는데 들어가 맥주 한잔을 하며 라이브 음악도 듣고 싶은데 마눌은 방금
전에 맥주를 마셔 놓고는 왠 술타령이냐? 라는 눈치라.... 슬프지만 참을 수밖에 없네요!
文昌閣(문창각) 을 지나니 관우를 모시는 "關帝苗(관제묘)" 로 중국 각 지방에서 볼수 있데
관제묘(關帝廟) 는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으로 중앙에 관우
의 위패를 두고 그 좌우에 관평(관우의 아들)과 주창(관우의 심복장수) 의 위패를
두는데..... 주창은 실존하는 인물은 아니고 삼국지연의 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관제묘(關帝廟) 는 17세기후 중국 각지에 세워졌으니 중국인들의 관우 사랑 은 대단한데
조선 시대에는 개성에 도교(道敎) 의 대청관 을 세웠는데 이후 한성으로 이전하니
삼청전(三淸殿)에는 도교의 태청(太淸)· 상청(上淸)· 옥청(玉淸) 3청(三淸) 의 초재 제사를
나라의 관청인 소격서(昭格署) 에서 맡았다는데 오늘날 서울 삼청동, 동 이름의 유래 입니다.
임진왜란 전란으로 불타 없어진후 파병된 중국 장수들에 의해 남대문과 동대문 바깥에
관제묘(關帝廟) 가 세워졌으니 동묘(東廟) 는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에 있으니...
중국 명나라가 망해버린 나라 조선을 다시 일으켜 세워준 “再造之恩(재조지은)”
큰 은혜를 갚기 위해 조선 선조 1601년에 지어진 건물로 보물 142호 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일본 고베 관제묘(神戶關帝廟) 와 요코하마 관제묘(橫浜關帝廟) 는가 아주 유명하며
그 외에도 관제묘로는 보기 어려우나... 일본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시 숭복사
(崇福寺) 경내에도 관우의 좌상을 모시고 있으며 일본 하코다테시 에도 소규모의
관제묘가 있어 홋카이도 유일의 관제묘로 일컬어지는데 중국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명나라 병사들이 이여송의 지휘하에 평양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공격할때 중국 남부지방
병사들로 구성된 화포 부대와 장창 부대가 큰 역할을 했으니 그 기원을 살펴보면...
척계광 이 중국 남부를 휩쓴 왜구에 대항해 1556년 부터 1567년까지 절강성과 복건성
및 광둥성에서 장창과, 낭선, 당파를 이용해 원앙진 을 펼친데서 유래한다고 할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임용한의 전쟁사에“칼을 이긴 나무껍질”이란 칼럼이 있는데...“하이에나 떼는 암사자
만 있는 무리에게는 겁 없이 덤벼든다. 하지만 대장 수사자 가 나타나면 도주한다.
이 광경을 보면 군대는 양보다 질 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대장 수사자도
메뚜기 떼의 공격을 받으면 살아날 수 없다. 양과 질의 문제는 전쟁사에 영원한 고민이다.”
“저장성에 파견된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 은 질에 대한 양의 무력감을 절감하고 있었다.
숫자만 많았지 오합지졸인 명나라 군대는 직업전사인 소수의 왜구 에게 무참하게
패하고 있었다. 명나라군은 훈련도도 낮았지만 군사비 문제도 심각했으니 대병력을
운용하려면 많은 무기와 장비를 생산해야 하니 비용도 높아지고, 생산시간도 오래 걸린다.”
“척계광은 미얀마 주민들이 죽창과 나무껍질로 만든 방호구 를 들고 명군에 저항했던
기억을 되살려 그들의 자연산 무기 에서 커다란 아이디어를 얻었다. 가지가
주렁주렁 달린 생대나무 는 의외로 칼과 창을 막는데 효과적이었다. 등나무 껍질 을
감아서 만든 방패 는 질기고 아무리 강력한 일격에도 절대로 한 번에 쪼개지지 않았다.”
“척계광 에 의해 낭패와 등패 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 무기는 일본도의 공격을 막는데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무엇보다도 값이 싸서 빠르고 쉽게 대병력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척계광은 여기에 몇 가지 아이디어를 더해
원앙진 이란 새 전술을 창안했고, 이 전술로 왜구를 격퇴해 명나라의 영웅 이 됐다. ”
“양도 질이 받쳐줘야 하고 질도 양이 따라줘야 하니 적절한 균형 이 필요하다. 전쟁사를
보면 간혹 양이 안 되니 질로, 질이 안 되니 양으로라는 식으로 대응하는 경우가 있다.
왜구에 대한 명군의 초기 대응이 물량공세 로 질을 이겨 보자는 식이었다. 어렵다고,
보기 싫다고 해서 하나를 배제하고 하나를 강화해서 이겨 보자는 식으로 싸우면 필패다.”
왜구 는 신라시대에도 수십차례나 침범해 신라 수도 서라벌이 3차례나 포위 되었는데 그중
3번째인 399년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내물왕은 고구려에 노객이 되겠다며 읍소하니
광개토대왕은 5만 대군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는데 왜구는 3년후 황해도를 습격해 보복합니다.
신라를 통일한 문무왕 은 땅에서 편안하게 영면하지 못하고 저들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며...
바닷속에 몸을 뉘였으니 수중왕릉 인데, 잠잠하던 왜구는 1223년 고려 고종때 김해를
약탈한걸 시작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극성을 부리니 해안가에는 사람이 살수 없었습니다.
이후 공민왕 (1352~1374) 때는 경상, 전라도는 물론이고 멀리 함경도와 평안도 에 까지
출몰하며 황해도에 상륙해 개경을 노리니 수도를 철원등 내륙으로 천도 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는 데... 20년간 무려 100회 가 넘는 침입으로 고려는 쑥대밭 이 됩니다.
우왕 (1375~1388) 때를 보면 14년간 왜구의 침략 횟수는 370회 나 달했으니 강화가 함락되고
수도 개경이 왜구에게 위협 당했으며 고려 강산은 산산히 찢어져 피로 얼룩지는데...
해안 지방은 사람의 자취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무인지경으로 변해 황폐화 되니 조선
태종은 울릉도에 공도령(空島令) 을 내려 주민들이 먼 섬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
울릉도는 고려시대 전기에는 함경도 에 천여년전 부터 거주하며 숙신- 읍루- 말갈 을 거쳐
"여진" 이라고 불리던 주민들이 해적 이 되어 강원도 동해안과 일본 서부해안에 심지어
규슈까지 해적질을 다니는 "도중에 들르는 섬" 이라 사람이 살수 없었는데, 고려시대
후기에는 왜구들의 침탈이 끊이지 않는지라 조선이 서고도 나라가 지켜줄 수가 없었습니다.
조선인의 울릉도 거주를 금하고 3년에 한번씩 순시선을 보냈는데 1407년 대마도주 종정무는
평도전을 보내 무릉도(울릉도)에 왜인들이 이주하기를 청원하므로 불허했고 광해군때인
1614년 2차 청원도 거부했으며, 1884년 순시선이 불법 거주한 왜인 150명 을 적발하자
고종은 공도정책을 포기 하고는 조선인들을 울릉도에 이주 시키니 현재 주민들의 조상입니다.
명나라도 고려에 못지 않았으니.... 왜구 들이 중국 해안을 휩쓸기를 수십년에 이르자
중국인들도 가담하기 시작했는데, 이칭일본전 (異稱日本傳) 에 보면 왜구
중에는 무역상을 하던 중국 상인들이 상당수 참가했으니 왜인은 열에 두어명 에
불과하고 유구인이 2명, 영파와 소흥인이 4명에 복건인이 2명 꼴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요부코 조타로도 왜구를 진왜(眞倭)와 가왜(假倭) 로 구분하는데 이 둘은 따로 행동한게
아니라 대개는 섞여서 함께 약탈을 다니는지라 두 부류 두목중에 대만을 본거지로
정하고 일본 이름 고라(甲羅)라 칭한 안진천 에 서해, 진동, 엽명이 유명한데 그 중에
두각을 나타낸 이는 일본, 필리핀, 베트남, 태국, 말레이와 밀무역하던 왕직(王直) 입니다.
왕직(王直) 은 오봉(五峰) 을 규슈 히라도에 보내 마쓰우라(松浦) 일당과 교섭후 근거지를
정하고 휘왕(徽王) 으로 불리며 마쓰우라 36개섬 왜구 를 거느리니 중국배에다가 서양의
무역선까지 내항한 히라도 에는 사카이등 상인들이 모여들어 국제항구 로 흥청거렸다고
하니 일본이 200개 국가로 갈라져 전란으로 날을 지샌 센고쿠시대 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환(朱紈) 이 절강총독으로 부임해 밀무역을 단속하자 왕직은 마쓰우라의 왜구 를
끌어들여 연합군을 결성해 침탈을 개시하니 명나라 관리들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백성들도 대거 참가 하는데, 이는 예전에 왜구가 물러간후 뒤늦게 도착한 관군 들이
공을 세우고 아울러 사욕을 채우려고 왜구 보다 훨씬 가혹하게 수탈해 왔기 때문입니다.
1555년 8월 침입한 왜구는 100명 에 불과했지만 중국인들이 가담 하니 항주를 함락 하고
엄주와 휘주를 돌아 남경을 위협 했는데... 다음해 절강총독에 부임한 호종헌 은
일본 마쓰우라에 거주하던 왕직을 회유 하니 그가 귀국해 귀순하자 그의 부하로
주산열도에 웅거한 중국인 서해 일본인 진동, 마엽을 이간질해 토벌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이 무렵인 1556년 부터 등장한 인물이 바로 척계광 이니 한 해 전에 왜구는 바다에서
수천리나 떨어진 깊숙한 내륙 지역인 쑤저우(蘇州 소주) 까지 침입했으니....
고소성(소주) 은 옛 오나라 수도요, 당나라 시대에는 장계 의 "풍교야박" 시로
알려졌으며 지금 졸정원과 유원, 호구와 풍교며 한산사 등 유명 관광지가 된 도시입니다.
"달지고 까마귀우는 어두운밤, 찬서리 하늘에 가득한데
강가의 단풍, 고깃배의 불빛에 시름안고 잠드네
고소성 밖 한산사에서 들려오는
야밤중 종소리 나그네 뱃전까지 들려오네"
당나라때에 과거에 낙방하고 돌아오던 선비 장계 가 배 안에 앉아 한산사 앞 풍교 를
지나면서 읊은 시라는데, 이 때는 일본인 승려들도 이 땅을 많이 찾아왔었으나
세월이 흐르고 명나라때 왜구가 한산사 절에 있던 큰 종을 떼어 가져갔기로
훗날에 일본 총리대신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새 종을 주조해 절에 기증했다고 합니다.
남방에서 왜구가 설치기 시작하던 무렵인 1550년 6월에 몽골 투모터부의 알탄칸 은
중국을 침략해 대동을 거쳐 고북구를 함락하고 북경에 이르니 명나라군은 겁을
집어먹고 대적하지 못하는지라.... 세종 가정제는 오랑캐에게 대동에서 무역
을 허락하겠다고 사정하니 저들은 수도 인근을 실컷 약탈을 자행한후에 철수합니다.
하지만 1567년에 알탄칸이 투먼부와 연합해 다시 장성을 넘어 침입을 개시하자 명나라는
왜구를 물리쳤고 "기효신서" 라는 병서를 지은 척계광 과 광서총독 유대유 를
부르니 복건총독 척계광은 북경으로 올라가 계진총독 이 되어 척가군을 이끌고
힘든 싸움 끝에 1570년에 이르러 몽골군을 물리치니..... 비로소 남북이 안정됩니다.
하지만 1592년 2월 부패한 명나라 환관과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해지자 내몽골 서부
영하에서 몽골족 출신 장군 보바이 가 오르도스 지방의 몽골인들을 규합해
난을 일으키니 진압에 실패한 명나라는 요동의 이여송 에게 진압을 명하니 그는
요동병을 이끌고 2천리를 달려서 영하에 도착해 힘든 전투 끝에 9월에야 진압 합니다.
5개월 전인 4월에 임진왜란 이 일어나니 명나라의 조승훈 이 5천 기병으로 평양을 공격하다
패하자 명나라는 영하에서 전쟁중인지라 심유경을 보내 속임수로 시간을 버는데, 사위
대마도주 소씨를 통해 조선과 무역에서 이익을 얻던 전쟁 반대론자 고니시 유키나가 가
평양에서 더 진격하지 않고 평화교섭을 갈망했기 때문에 속았으니, 명나라는 시간을 법니다.
심유경을 평양에 보내 속임수로 시간을 번 명나라는 영하에서 보바이(발배)군을 진압
하느라 격렬한 전투로 지친 이여송에게 3천리나 떨어진 조선 구원을 명하자
이여송은 3천리를 달려와 북병에 절강성 남병을 합친 4만3천 으로 평양성을 탈환하니
놀란 선조가 그 비결을 묻자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를 익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선조는 역관을 시켜 몰래 입수한 병서 기효신서 를 유성룡에게 주었으나 알지 못하는지라
천문지리와 병법에 밝은 한교 에게 주었으나 그도 해독하지 못하였는데 이여송 휘하의
참장 낙상지(駱尙志) 가 의리 가 있어 오히려 먼저 유성룡에게 제의하니 한교등
70명 조선군은 낙상지 휘하 절강군 10여명의 교관으로 부터 창과 검에 낭선 을 익힙니다.
낙상지 는 조선군에게 사(射), 포(砲), 감(砍 창) 등 삼수기법을 훈련시켰으며 1595년
에는 명나라 유격장군 호대수 가 직접 조선의 삼수군(三手軍) 을 훈련시킵니다.
한교 는 명나라 유격장군 허국위 에게 물어서 기효신서 중에 살수제보(殺手諸譜) 를
번역하니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무예지인 무예제보 (武藝諸譜) 인데...
척계광의 6기(六技) 는 조선에서 영조때 18기로 늘어나고 정조때 무예도보통지 가 됩니다.
유성룡의 징비록 에 학문과 도덕을 숭상하는 군자의 나라 조선의 문화를 흠모해 투항한
항왜 사야가 등은 조총부대 를 만들고 조선병사에게 창과 검을 훈련 시키는데...
유성룡이 물으니 조선군의 창칼 실력은 도저히 왜군 상대가 되지 않는다 고 말하니
이는 무과에 병서와 기마술 및 활쏘기 3가지 종목만 있을뿐 창이나 칼 대련이 없습니다?
신립 이 탄금대에서 고니시군에게 돌진한 기마대는 기수는 물론 말에도 갑옷을 입은 창을
갖고 적진을 돌파하는 중기병 이 아니고, 경기병 이니 갑옷 없이 적진으로 다가가 활을
쏘고는 돌파 대신에 방향을 틀어 물러나는데 조총은 사거리가 백미터에 활은 이백미터
이고 조총은 재장전에 시간이 걸린다는걸 노렸는데, 3단 연속 사격술에 무느진 것 입니다!
고3도 수능과목이 아니면 공부하지 않듯이... 무장은 평생 창,칼 한번 잡지 않고도
무과에 장원급제 하던 조선의 제도 때문 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전술은
들판에서 육박전을 하는게 아니고 멀리서 활로 적을 쏘아 죽이며....
수군도 멀리서 대포를 쏘아 적선을 격침시키는 원거리 전술 때문인가 합니다!
첫댓글 관제묘(關帝廟) 는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군요.
중국인의 관우사랑은 엄청나더군요.
관우장군이 억울하게 죽은 최후
때문에 더욱 그러한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