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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너리 오코너 지음 / 고정아 옮김 / 현대문학
1. 작가소개
- 지은이 : 플래너리 오코너
조지아주 서배너 출생. 아일랜드계의 가톨릭 집안에서 자라 1945년 조지아주립여자대학, 1947년 아이오와주립대학 학사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후 얼마동안 뉴욕에 나와 있었으나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다. 25세경부터 악화되기 시작한 불치의 병인 홍반성낭창(紅斑性狼瘡)과 싸우면서 “나에게 인생의 의미는 그리스도교에 의한 구제라는 한 점에 귀결된다”고 지적한 바와 같이 시종 일관한 신념으로 다작은 아니지만 감상을 극도로 억제한 뛰어난 작품을 발표하였다. 등장인물과 사건의 괴이성은 같은 남부 작가인 포크너에게 통하고, 그 괴이성이 일상적이란 점에서 작가의 세계는 포크너의 그것보다 더욱 리얼하다고 하겠다.
중편 《현명한 피 Wise Blood》(1952), 단편집 《착한 사람은 찾아 보기 어렵다 A Good Man is Hard to Find》(1955), 장편 《끝까지 공격하는 자는 그것을 얻는다 The Violent Bear it Away》(1960), 또 하나의 단편집 《오르다 보면 모든 것은 한 곳에 모이게 마련이다 Everything That Rises Must Converge》(1965)를 통하여 신과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문제에 확고하고도 새로운 빛을 비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현대 미국문학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옮긴이의 말에서
오코너의 작품이 그리 편하게 읽히는 것이 아닌데도 몇십 년이 지나도록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p742)
플래너리 오코너의 인생을 지배한 키워드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나는 그녀가 태어난 미국 남부 지방, 둘째는 그녀가 가졌던 가톨릭 신앙, 셋째는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간 루푸스병이다. (p742)
1950년 12월에 루푸스병이 발병해서(오코너의 아버지도 오코너가 열다섯 살 때 이 병으로 사망했다) 오코너는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농장에 지내며 글을 썼다. 몇 년 후부터는 루푸스로 인해 걷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작품 활동은 멈추지 않았고 1955년에 첫 번째 단편집 『좋은 사람은 드물다 외』를, 1960년에는 두 번째 장편소설 『힘쓰는 자들이 차지한다』를 발간했다. 오코너는 서른아홉 살이던 1964년에 결국 루푸스 합병증으로 죽었고, 그 다음 해에 두 번째 단편소설집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외』가 유고로 출간되었다. (p743)
오코너는 흑인과 백인이 건널 수 없는 장벽으로 나뉘고 백인 가운데에도 토지 소유자와 가난한 일꾼이 나뉘는 남부의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계시」와 「심판의 날」에는 그 엄격한 사회적 구분이 어지럽게 뒤엉키는 상황까지 보여 준다. (p744)
윌리엄 포크너, 테네시 윌리엄스 등을 주요 작가로 꼽는 남부 고딕 문학은 주로 심각한 결함이나 뒤틀린 성품을 지닌 인물들이 나와서 쇠락하고 기괴한 상황을 배경으로 격렬한 사건을 일으킨다. 여기에 남부의 복합적 사회적 문제들이 결합된다. 오코너의 작품 역시 이런 남부 고딕 소설들의 특징을 공유한다.
그녀의 소설에는 평범하고 속물적인 사람들도 다수 등장하지만, 비현실적으로 여겨질 만큼 섬뜩한 기벽을 지닌 인물들이 더욱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양측의 갈등은 대체로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p744)
비극은 대체로 느닷없이 ‘반전’처럼 찾아오고, 거기에 많은 독자들이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p744)
이런 갈등은 대개 계급의 요소를 품고 있지만, 오코너가 집중한 것은 사회적인 측면이 아니라 그런 격렬한 사건의 형태로 드러나는 신비와 영성이다. (p744-745)
오코너가 담고자 한 신비주의와 상징과 영성은 바로 가톨릭 신앙의 그것이다. 오코너는 가톨릭 신자‘인’ 작가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로서’의 작가였다. (p745)
우리는 매우 특이한 형태의 예언자들을 본다(「좋은 사람은 드물다」의 부적응자,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의 시프틀릿 씨,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의 루퍼스 존슨 등). 이들은 대체로 평온한 일상 중에 찾아와서 자기만족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인생을 뒤틀어 버린다. 눈앞에 보이는 이 세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세계가 다가 아니라는 것,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신비가 있다는 것을 오코너의 작품은 더할 수 없이 강렬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보여 준다.
기만적인 평화를 뒤흔드는 섬뜩한 계시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p745-746)
그녀가 만들어 낸 이 그로테스크한 비극의 세계는 지난 몇십 년 동안 놀라울 만큼 무수한 논문과 평론을 낳았고, 대중적으로도 이 글의 서두에서 말한 열광을 얻었다. (p746)
오코너는 자기 말대로 특수하고 고립된 경험 영역을 지닌 작가였다. 하지만 그 좁은 영역을 통해 펼쳐 보인 세계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수많은 사람에게 충격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너는 지금 네가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p746)
- 옮긴이 : 고정아
역자 고정아는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옮긴 책으로 『오 헨리』『내 책상 위의 천사』『오만과 편견』『전망 좋은 방』『하워즈 엔드』『순수의 시대』『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노 맨스 랜드』『천국의 작은 새』『토버모리』 외 다수가 있다. 2012년 제6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2. 간추림 또는 내 마음에 다가온 구절및 느낌
제라늄
그 집 창가의 제라늄을 보면 영감은 소아마비에 걸린 고향의 그리스비 소년이 생각났다. 사람들은 매일 아침 소년을 휠체어에 데리고 나갔고 소년은 햇빛 속에 가만히 앉아 눈을 깜박였다. (p7)
몸이 아팠고, 딸이 그 망할 자식 된 도리에 사로잡혀 그를 꾀었다. 딸이 애초에 왜 거기 내려와서 자기를 괴롭혔는지 그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잘 지내고 있었다. 연금이 끼니를 해결해 주었고, 하숙비는 품일로 댈 수 있었다. (p9)
그녀는 아버지가 여생을 낡은 하숙집에서 머리를 떠는 노파들과 보내지 않고 가족과 함께 보내도록 하고 있었다. 자식 된 도리를 행하고 있었다. 다른 형제자매는 그러지 않았다.
(p12)
아파트는 너무 좁았다.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부엌은 화장실과 통하고, 화장실은 다른 모든 곳과 통하고, 어디를 가도 금세 제자리였다. 고향 집에는 2층이 있고 지하실이 있고 강도 있고 프레이저스 앞의 시내도 있었다. (p13)
딸은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아마도요. 그리고 아버지는 엉뚱한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사람하고 절대 엮이면 안 돼요.”
딸은 정확히 그렇게 말했다. 그가 아무런 분별력도 없는 것처럼. 하지만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딸을 꾸짖었다. 자신의 분명한 생각을 딸에게 이해시켰다. “나는 너를 그런 식으로 키우지 않았다!” (p15)
그게 딸아이였다. 어깨를 둥글리고 고개를 숙여 경건한 척하는 모습. 마치 그가 바보라는 듯이. 그는 북부 양키들이 검둥이를 집에 들이고 소파에 앉히고 한다는 걸 알았지만, 제대로 교육시킨 자신의 딸이 기꺼이 검둥이 옆집에 살 줄은 몰랐다. (p15)
그는 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제라늄은 꽃 같지 않았다. 그것은 고향의 병든 소년 그리스비 같았고, 색깔은 할멈들이 있는 응접실의 커튼 색깔 같았으며, 거기 묶인 종이 리본은 루티샤가 일요일에 입은 제복의 등에 달린 것과 비슷했다. (p16)
입이 벌어지고 혀가 입안에서 굳었다. 무릎 아래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발이 삐끗하더니 그는 계단 세 칸을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p19)
그 망할 검둥이가 자기 등을 두드리고, 자신을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신을. 좋은 곳 출신인 자신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곳. (p21)
영감의 눈과 눈구멍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눈이 점점 부풀어 올라 눈구멍이 좁아질 것 같았다. 그가 갇혀 지내는 이곳은 검둥이들이 자기를 ‘어르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계속 갇혀있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영감은 조여든 목을 펴기 위해 의자 등받이에 대고 머리를 굴렸다. (p21)
한 남자가 영감을 보고 있었다. 골목 건너편 창문에서 한 남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우는 것을 보았다. 제라늄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속셔츠 바람의 남자가 앉아서 그가 우는 모습을 보며 그의 목이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p21)
더들리 영감도 남자를 보았다. 제라늄이 나와야 했다. 그곳은 그 남자가 아니라 제라늄의 자리였다. “제라늄은 어디 있소?” 더들리 영감이 조여든 목구멍으로 외쳤다. (p21)
“제라늄은 어디 있소? 거기엔 그게 있어야 해요. 당신이 아니라.” 더들리 영감이 목소리를 떨었다. (p21)
"영감님과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p21)
"전부터 영감님을 봤어요.“ 남자가 말을 이었다. ”날마다 그 의자에 앉아서 우리 창문을 보고, 우리 집 안을 들여다보시더군요. 내가 내 집에서 뭘 하건 왜 상관하시죠? 사람들이 내 집을 들여다보는 건 원치 않습니다.“ (p23)
꽃은 골목길에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쓰러져 있었다. (p23)
칠면조
한번은 아버지가 왜 룰러는 그렇게 혼자서만 노느냐고 물었는데, 어머니가 자기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자기만 좋다면 혼자서 노는 게 무슨 문제냐고 대꾸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자기는 걱정이라고 말했고 어머니는 당신 걱정이 그게 전부라면 그만해도 좋다고 말했다.(p66)
다음 날 아버지가 룰러에게 요새 뭘 하느냐고 묻자 룰러는 “혼자 놀고 있어요”라고 말한 뒤 다리를 저는 것처럼 걸어갔다. 아버지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가 어깨에 칠면조를 메고 가면 아버지는 감탄할 것이다. (p66)
그가 칠면조를 어깨에 메고 가면 식구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세상에나, 룰러를 봐! 룰러를! 어디서 그 야생 칠면조를 잡았니?”하고 소리쳤을 테고, 아버지는 “그거야말로 진짜 새로구나!” 하고 말했을 것이다. 그는 발치의 돌맹이를 툭 찼다. 이제 칠면조는 보이지 않았다. 잡지도 못할 칠면조를 애초에 본 게 잘못이었다. (p68)
목사님이 오늘날 젊은이들이 떼를 지어 악마에게 갈 거라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온유한 길을 버리고 사탄의 길로 간다고, 그들은 후회할 거라고, 목사님은 말했다. 슬피 울며 이를 갈 거라고. “슬피 울며.” 룰러가 중얼거렸다. 남자는 슬피 울지 않는다. (p71)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아이 같았다. 그래서 칠면조가 온 것 같았다. 그는 목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어쩌면 칠면조는 그가 나쁜 물이 들지 않게 하려고 온 것일지 모른다. 어쩌면 하느님은 그가 나쁜 물이 들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p72)
하느님도 자신이 특이한 아이라고 생각할 지 궁금했다. 그럴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빨개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고, 그러지 않으려고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p73)
하느님, 제게 거지를 보내 주세요. 그는 기도했다. 제가 집에 도착하기 전에 하나 보내 주세요. 그는 이전까지 혼자 기도하는 일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건 좋은 생각이었다. 하느님은 칠면조를 보냈다. 거지도 보내 줄 것이다. 그는 하느님이 거지를 보내 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p76)
거지가 온다면 하느님이 특별한 수고를 기울였다는 뜻일 것이다. 거기에 각별한 관심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갑자기 거지가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공포심이 들었다. 아주 강력한 공포심이었다. (p76)
올 거야. 그는 생각했다. 내가 아주 특별한 아이니까 하느님은 나한테 관심이 있어. 그는 계속 길을 걸었다. (p76)
어쨌거나 노파는 거지였다. 룰러는 더 빨리 걸었다. 그리고 얼른 건네기 위해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심장이 가슴 안쪽에서 쿵쿵거렸다. 그는 자기가 말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소리를 내 보았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자 그가 손을 내밀고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 (p77)
아이들은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앞쪽의 한 명이 침을 뱉었다. 룰러가 힐끔 내려다보니 담뱃진이 섞여 있었다! “칠면조 어디서 났어?” 침 뱉은 아이가 물었다.(p77-78)
“숲에서 잡았어.” 룰러가 말했다. “한참 추격했더니 죽어서 쓰러졌어. 날개 아래 총을 맞았어.” 그가 어깨에서 칠면조를 내려서 아이들 눈앞에 들었다. “두 방 맞은 것 같아.” 그가 날갯죽지를 들어 올리며 신이 나서 말했다. (p78)
칠면조 머리가 그의 얼굴로 날아들더니 침 뱉은 아이가 그것을 훌쩍 들어 올려서 자기 어깨에 둘러메고 돌아섰다. 다른 아이들도 함께 돌아서서 온 길을 되짚어 달려갔다. 칠면조가 침 뱉은 아이의 등에 볼록했고 새의 머리는 아이의 걸음에 따라 천천히 원을 그리며 흔들렸다. (p78)
아이들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집을 향해 돌아섰다. 네 블록을 걸은 뒤에는 날이 어두워진 것을 깨닫고 뛰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속도를 붙였고, 집과 이어진 도로에 올랐을 때에는 심장도 다리만큼이나 빨리 뛰었다. 무시무시한 어떤 것이 팔에 힘을 주고 손가락을 구부린 채 자신에게 달려든다고 그는 확신했다. (p78)
행운
예전에 그녀는 ‘암’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가 바로 털어 버렸다. 자신에게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으므로 그런 공포를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통증과 함께 그 말이 돌아왔지만 그녀는 마담 졸리다와 함께 그걸 토막 내 버렸다. 그것은 결국 행운이 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토막 내고 또 토막 내서 결국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작은 조각들로 만들었다. (p144)
그녀는 다시 몸을 세우고 발목을 바라보았다. 발목이 부어 있었다! 나는 병원에 안 가. 아무데도 안 가. “안 가. 병원에는 안 가…… ” 그녀가 중얼거렸다. (p145)
“병원에 가야 한다니까.“
“싫어.”
“가 보기는 했어?”
“열 살 때 사람들이 데려간 적이 있어. 하지만 나는 달아났어. 세 명이 잡고 있어도 소용없었어.” 루비가 말했다. (p147)
암은 아닐 것이다. 마담 졸리아는 그것이 행운을 가져다줄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겨우 한 칸인데.” 그리고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무턱대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다 여섯 번째 칸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손이 난간을 주르륵 미끄러져서 바닥에 떨어졌다. (p150)
그녀는 숨을 몰아쉬고 눈을 감았다. 아냐. 아냐. 아기일 리 없어. 내 안에서 꾸물거리면서 내게 죽음을 쌓아 주는 건 싫어, 빌 힐은 실수하지 않았어. 그는 그것이 확실한 것이라고 말했고, 여태껏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럴 리 없었다. 그녀는 몸을 떨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얼굴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둘은 사산되고 하나는 첫해에 죽고 하나는 바짝 마른 노란 사과처럼 치여 죽었고, 어머니는 겨우 서른넷에 늙어 버렸다. (p150)
계속 난간을 붙들고 앉아 있으니 숨이 눈곱만큼씩 돌아오고 계단의 시소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어두운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까마득히 오래전에 오르기 시작했던 계단의 맨 아래쪽을 “행운.” 그녀는 공허한 목소리로 말했고, 그 소리는 동굴 같은 계단의 모든 층에 울렸다. “아기.”
“행운, 아기.” 두 마디 말이 조롱하듯 메아리쳤다.
그런 뒤 그녀는 무언가 배 속을 가볍게 구르는 느낌을 다시 받았다. 그것은 자기 배 속에 없는 것 같았다. 그것은 알 수 없는 어느 곳에 있고, 시간이 아주 많아서 꾸멀거리고 또 꾸물거리는 것 같았다. (p151)
이녹과 고릴라
이녹은 운명이 그에게 발길질을 하려고 준비할 때 정신을 다른 데 두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네 살 때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주석 상자를 가져다주었다. 주황색 상자는 바깥에 땅콩 과자가 그려져 있고 녹색 글씨로 ‘놀라운 땅콩!’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녹이 그것을 열자 눌려 있던 용수철이 튀어나와서 앞니 두 개를 깨뜨렸다. (p153)
이녹에게 희망이란 3분의 2의 막연한 느낌과 3분의 1의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p157)
그는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지금의 상태를 개선하고 싶었다. 언젠가 사람들이 자신과 악수하려고 줄을 서게 만들고 싶었다. (p157)
좋은 사람은 드물다
“좋은 사람은 참 드물어요.” 레드 세미가 말했다. “모든 게 험악해지고 있어요. 외출하면서 집에 빗장도 안 걸린 시절이 있었는데 그런 시절은 갔죠.” (p170)
아기도 울음을 터뜨렸고, 존 웨슬리가 의자 등받이를 하도 세게 차서 베일리는 콩팥이 흔들릴 지경이었다. (p171)
베일리는 두 손으로 고양이를 떼어 내서 창밖의 소나무를 향해 던졌다. 그런 뒤 자동차 밖으로 나가서 아이들 엄마를 찾았다. 그녀는 빽빽 우는 아기를 안고 붉은 도랑벽에 기대앉아 있었지만, 얼굴이 한 곳 베이고 어깨가 부러졌을 뿐이었다. “사고가 났어요!” 아이들이 신이 나서 소리쳤다. (p173)
할머니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남자를 노려보았다. “당신, 그 부적용자지! 바로 알아봤어!”
“맞습니다.” 남자는 자신이 유명하다는 사실이 어쩔 수 없이 기쁜 듯 살짝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여러분 모두를 위해 사모님이 저를 못 알아보는 편이 좋았을 것입니다. (p176)
"설마 숙녀를 쏠 것 아니겠죠?“ 할머니가 말하고 소맷부리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서 눈자위를 찍었다.
부적응자는 구두코를 땅속에 박아 작은 구멍을 냈다가 다시 메우고 말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p176)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절대 평민이 아니에요!“ 할머니가 필사적으로 말했다. (p178)
숲에서 탕 총소리가 나고 이어 다시 한 방이 울렸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노부인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p179)
할머니는 그에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입을 여러 번 벌렸다 닫았다. 마침내 할머니가 한 말은 “예수님, 예수님”이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당신을 도와줄 거라는 뜻이었지만, 그 말투는 한탄하는 것 같았다. (p181)
두 발의 총성이 더 울렸고 할머니는 목이 말라 물을 찾는 칠면조처럼 고개를 쳐들고 심장이 으스러지는 듯 소리쳤다. “베일리, 내 아들! 베일리!” (p182)
황혼의 대적
그는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 그것과 다시 마주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p187)
그의 인생은 별로 흥미롭지 않았다. 두 다리는 이제 완전히 죽었고, 무릎은 낡은 경첩처럼 되었으며, 신장은 작동하고 싶을때만 작동했지만 그래도 심장은 악착같이 뛰었다. 그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똑같았다. 과거는 잊었고 미래는 떠올리지 못했다. (p191)
그는 고양이보다 더 죽음을 잘 피했다. 해마다 남군 추모일이 되면 그는 온몸을 싸매고 주 의회 박물관에 가서 옛날 사진, 군복, 대포, 역사 문서 등을 전시한 퀴퀴한 방에 1시부터 4시까지 전시되었다. (p191)
그녀는 보이 스카우트 대원인 조카 존 웨슬리 포커 새시에게 장군의 휠체어를 밀게 했다. 노인이 남군 용사의 회색 군복을 입고 깨끗한 보이 스카우트 단복을 입은 어린 소년과 함께 있으면 참 보기 좋을 것 같았다. 그것은 지난 시대와 새 시대를 나타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p192)
그는 역사에 아무 관심 없었다. 그때 일어난 일은 지금 살아있는 사람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고, 그는 지금 살아 있었다. (p195)
모든 것이 끝나고 햇빛 쏟아지는 강당 밖으로 나왔을 때, 그녀는 친척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그늘 속 벤치에 앉아서 존 웨슬리가 노인의 휠체어를 밀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 영악한 스카우트 대원은 뒷길로 그를 덜컹덜컹 밀고 나가서 포석 덮인 길을 빠른 속도로 달린 뒤 시체와 함께 코카콜라 앞의 긴 줄에 합류해 있었다. (p197)
당신이 지키는 것은 어쩌면 당신의 생명
시프틀릿 씨는 이 세상의 문제는 사람들이 신경을 안 쓰거나 수고를 들이지 않아서라고 했다. 자신이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또 오랜 수고를 들이지 않는다면 루시넬에게 말을 한 마디도 가르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p205)
“다른 말도 가르쳐 봐.” 노인이 말했다.
“무슨 말을 가르치고 싶으신가요?” 시프틀릿 씨가 물었다.
노부인의 합죽이 미소는 은근했다. “‘자기야’라는 말을 가르쳐 봐.”
시프틀릿 씨는 진작부터 부인의 속마음을 알았다. (p205)
"말을 못하는 여자는 말대꾸도 안 하고 욕도 안 해.“ 부인이 말했다.
“자네한테는 바로 그런 여자가 필요해. 비로 저기.” 그리고 부인은 의자에 책상다리로 앉아 두 손으로 두 발을 잡고 있는 루시넬을 가리켰다.
“맞습니다. 루시넬은 제게 어떤 괴로움도 끼치지 않을 겁니다.” 그가 인정했다. (p207)
어둠 속에서 시프틀릿 씨의 미소가 불가에서 깨어나는 지친 뱀처럼 몸을 폈다. (p208)
이른 오후는 맑고 넓고 하늘은 푸르렀다. 자동차의 속도는 시속 50 킬로미터에 그쳤지만, 시프틀릿 씨는 차가 오르막길과 내리막길과 굽잇길을 눈부시게 달린다는 상상으로 오전의 괴로움을 잊으려고 했다. 그는 늦어도 해 질 녘에는 모빌에 도착하고 싶었기 때문에 속도를 올렸다. (p210)
청년이 음식을 내기도 전에 루시넬은 부드럽게 코를 골았다.
“여자분이 잠에서 깨면 음식을 주세요. 돈은 지금 드리죠.” 시프틀릿 씨가 말했다.
청년은 고개를 숙이고 루시넬의 붉은빛 도는 금발 머리와 반쯤 감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시프틀릿 씨를 보고 말했다. “하느님의 천사 같네요.”
“히치하이커예요. 깨어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네요. 터스컬루사까지 가야 하거든요.” 시프틀릿 씨가 말했다.
청년은 다시 고개를 숙여 손가락으로 그녀의 금빛 머리를 살살 만졌고 시프틀릿 씨는 떠났다. (p211)
"아들한테 어머니만큼 좋은 게 없지.“ 시프틀릿 씨가 말을 이었다. ”어린 시절 기도를 가르쳐 주고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사랑을 주고,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고, 아들이 올바로 살게 하니까. 친구, 내 인생에서 어머니를 떠난 그날만큼 서글픈 날이 없었어.“ (p212)
“우리 어머니는 하느님의 천사였어.” 시프틀릿 씨가 조여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느님이 어머니를 천국에서 보내 주셨는데, 내가 어머니 곁을 떠났지.” 그의 눈이 눈물로 흐려졌다. 차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p212)
강
소년은 코닌 부인을 만난 것이 행운으로 느껴졌다. 다른 보모들은 집에 앉아 있거나 공원에 데려가는 게 전부였는데 코닌 부인은 이렇게 나들이를 데려갔다. 집을 떠나면 많은 걸 배울 수 있다. 소년은 오늘 아침에 벌써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목수가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배웠다. 전에는 슬레이드월이라는 의사가 만들 줄 알았다. (p222)
“저는 전에 선생님이 어떤 여자를 고치는 걸 봤습니다! 절뚝거리며 걸어온 여자가 벌떡 일어나서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사람들 틈에서 누가 소리를 높이 외쳤다.
설교자는 한 발을 들었다 내리고 다른 발을 들었다 내렸다. 그의 표정은 미소에 근접했지만 미소는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을 위해 왔다면 집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가 말했다. (p225)
"주여.“ 설교자가 말했다.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병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네 어머니가 입원해 계시니? 많이 아프시니?“ 그가 물었다.
아이는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안 일어났어요. 술병이 났거든요.” 아이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높여 말했다. 공기가 조용해서 햇빛 조각들이 물을 때리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설교자는 분노하고 당황한 것 같았다. 얼굴에서 붉은 빛이 빠져나가고 눈에 비친 하늘이 어두워졌다. 강둑에서 폭소가 터지면서 패러다이스 씨가 소리쳤다. “하! 술병으로 고통받는 여자를 고쳐 주시오!” 그리고 주먹으로 무릎을 때렸다. (p230)
아이는 새것을 얻으려면 옛것을 망가뜨려야 한다는 걸 알았다. (p234)
아이는 햇빛 속에 미소를 지었다. 아이는 다시 설교자들한테 장난칠 생각은 없었지만 스스로에게 세례를 주고 강물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천국을 찾아갈 작정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즉시 머리를 물에 담그고 앞으로 걸어갔다. (p236)
아이는 즉시 물에 뛰어들었고 이번에는 물이 길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잡아서 아래로 끌고 갔다. 잠시 아이는 놀라움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몸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고 자신이 어딘가로 간다는 걸 알았기에 분노와 공포를 다 버렸다. (p237)
불 속의 원
코프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런 재난 이야기에 익숙했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피곤하다고 말했다. 반면에 프리처드 부인은 다른 사람의 재난을 보는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50킬로미터 바깥도 찾아갈 사람이었다. 코프 부인은 언제나 화제를 유쾌한 쪽으로 바꾸었는데, 그러면 프리차드 부인의 기분만 나빠진다는 걸 아이는 전부터 알았다.(p239)
코프 부인은 언제나 산불을 걱정했다. 밤에 바람이 세게 불면 아이에게 말했다. “산불이 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렴. 바람이 너무 강해.” 그리고 아이는 책을 든 채 투덜거리거나 아예 대답하지 않았다. 부인이 바람 소리를 너무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p239)
프리처드 부인이 숲을 보았다. “제가 가진 건 뿌리가 곪은 이빨 네 개뿐이네요.”
“그러면 다섯 개가 아니라는 데 감사하세요.” 코프 부인이 말하고 풀 한 뿌리를 등 뒤로 던졌다. “허리케인이 닥쳐서 우리 모두를 쓸어 버릴 수도 있어요. 나는 언제나 감사할 거리를 찾을 수 있어요.” (p242)
"저 아이들은 어제 오후 내내 말을 탔어요. 마구 보관실에서 고삐를 훔쳐서 안장도 없이 말이에요. 홀리스가 봤대요. 홀리스가 어젯밤 9시쯤에 헛간에서 내쫓았고 오늘 아침에는 우유실에서 내쫓았는데, 아이들이 우유 통에 직접 입을 대고 마신 것처럼 입가에 우유가 묻어 있었대요.“ (p253)
프리처드 부인은 보고할 재난이 없어서 우울한 얼굴로 왔다. “오늘의 고통은 제 얼굴에 있어요.” 그녀가 그나마 건질 수 있는 재난에 매달려서 말했다. “치아 하나하나가 종기처럼 아파요.” (p259)
추방자
당신은 사람을 부리고 또 자르지, 쇼틀리 부인은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말로 옮기지는 않았다. (p276)
단어들이 어지럽게 돌진하고 서로 드잡이를 했다. 더럽고 잘난 척하고 개혁되지 않은 폴란드 단어들이 깨끗한 영어 단어에 진흙을 던져 서로 똑같은 진창이 되었다. 그들의 단어와 그녀의 단어가 모두 흙투성이로 죽어 뉴스 영화에서 본 벌거숭이 시체처럼 방안에 산더미를 이루었다. 오 하느님, 추악한 악마에게서 우리를 구원하소서! 그녀는 말없이 탄원했다.
(p284)
신부의 방문은 그녀를 점점 더 화나게 했다. 지난번에 신부는 바닥에 떨어진 깃털들을 주었다. 공작 깃털 두 개와 칠면조 깃털 몇 개, 갈색 암탉 깃털 하나를 주어 꽃다발처럼 들고 떠났다. 하지만 쇼틀리 부인은 그런 어리숙해 보이는 행동에 속지 않았다. 그 사람은 외국인들을 남의 땅으로 몰고 와서 분란을 일으키고 검둥이를 내쫓고 의인들 가운데 탕녀 바빌론을 심으려고 했다! 그가 농장에 올 때마다 그녀는 한구석에 숨어서 떠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p285)
늙은 케루빔 천사의 얼굴에 검은 모자를 쓰고 작은 체구에 검은 웃옷을 두른 부인은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하지만 심장은 어떤 내적 폭력이라도 당한 것처럼 쿵쿵 뛰었다. 부인은 다시 눈을 크게 뜨고 온 들판을 바라보았고, 넓어진 시야에 들어온 트랙터 운전사는 메뚜기만 했다. (p304)
"그 사람이 애초 여기 온 게 잘못이에요.“ 부인이 한 마디 한 마디를 강조해서 다시 말했다.
노신부는 멍하니 웃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러 왔습니다.” 신부는 그렇게 말하고 차분하게 손을 뻗어 부인과 악수하더니 그만 가 보겠다고 인사했다. (p307)
폴란드인은 언제나처럼 맹렬히 일했고 자신이 해고될 낌새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매킨타이어 부인이 그렇게 빨리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본 일들이 척척 이루어졌다. 그래도 그를 해고하겠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작고 빳빳한 몸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은 부인에게 농장에서 가장 보기 싫은 광경이 되었고, 부인은 노신부가 자신을 속였다고 느꼈다. (p309)
노신부는 지난 방문 때의 사건에 겁을 먹은 듯 한동안 농장과 거리를 두었지만, 추방자가 해고되지 않은 것을 보고는 용기를 내서 지난번에 못다 한 가르침을 재개하기 위해 찾아왔다. 부인은 가르침을 받을 생각이 없었지만, 그는 어쨌건 가르쳤고, 상대가 누구건 상관없이 모든 대화에 성사와 교리를 욱여넣었다. (p310)
그러던 어느 날 밤 다시 꾼 꿈에 신부가 찾아와서 말했다. “사모님은 마음이 고운 분이니 그 불쌍한 사람을 내쫓지 못하실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수천수만 명이라는 걸 생각해 보세요. 소각로와 화물열차와 수용소와 병든 아이들과 우리 주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세요.”
“그 사람은 외부인이고 여기 질서를 파괴하고 있어요.” 부인이 말했다. “나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여자고, 여기는 소각로도 없고 수용소도 우리 주 그리스도도 없고 그자는 여길 떠나면 돈을 더 벌 거예요. 제분소에 취직해서 자동차를 살 거예요. 나한테 말 걸지 말아요.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동차뿐이에요.”
“소각로와 화물열차와 병든 아이들, 그리고 우리 주.” 신부가 느릿느릿 말했다. (p313)
그의 장화는 갈라지고 진흙이 묻어 있었다. 그는 한쪽 무릎을 들었다 내리고 몸을 약간 돌렸다. 부인이 그에게 가진 불만 중에 가장 큰 것은 그가 제 발로 농장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p317)
그는 트랙터를 소형 트랙터 쪽으로 움직이더니 약간 경사진 곳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트랙터에 뛰어내려 창고로 돌아갔다. 매킨타이어 부인은 귀작씨의 다리가 이제 땅에 납작하게 붙은 것을 보았다. 그러다 대형 트랙터의 브레이크가 미끄러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그것이 계산된 경로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부인은 깜둥이가 자기를 묶고 있는 땅속의 용수철이 풀린 것처럼 말없이 자리를 비킨 일과 쇼틀리씨가 어처구니없을 만큼 느린 동작으로 고개를 돌리고 어깨 너머를 말없이 바라보던 일과 자신이 추방자에게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한 일을 기억했다. 부인은 자신의 눈길과 쇼틀리 씨의 눈길과 깜둥이의 눈길이 한 순간 영원한 공모의 표정으로 얼어붙었다고 느꼈고, 트랙터의 바퀴가 폴란드인의 등뼈를 부러뜨릴 때 그가 작은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두 남자가 도우러 달려갔고 부인은 기절했다. (p317-318)
귀작 씨의 몸 위로 아내와 두 아이가 몸을 굽히고 있었고, 검은 옷 차림의 사람이 그 위를 굽어보며 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처음에 부인은 그가 의사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짜증 속에 그가 신부임을 깨달았다. (p318)
신부는 구급차와 함께 와서 다친 남자의 입에 무언가를 넣어주고 있었다. 잠시 후 신부가 일어서자 부인은 그의 피 묻은 바지를 보았고, 이어 부인은 외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대의 풍경처럼 쓸쓸하고 표정없는 그의 얼굴을 보았다. (p318)
부인은 시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원주민이고 자신은 낯선 나라에 와 있는 듯한 느낌 속에 죽은 자가 구급차로 실려 가는 모습을 외부인처럼 보았다. (p318)
인조 검둥이
자명종은 고장 났지만 그는 잠을 깨는 데 기계의 도움이 필요없었다. 그의 반응은 60년 세월에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의 육체적 반응은 도덕적 반응과 마찬가지로 강한 인격의 인도를 받았고, 그것은 그의 이목구비에 뚜렷이 드러났다. (p339)
그들은 할아버지와 손자였지만 형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닮았고, 그것도 나이 차이가 그렇게 많지 않은 형제 같았다. 헤드 씨는 낮에 보면 젊어 보였고, 아이는 이미 세상 모든 것을 알고 그것을 잊고 싶은 듯 나이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p341)
"여기 왔었잖아요! 할아버지가 길을 아시는 거 맞아요?“ 소년이 소리쳤다.
“잠깐 길을 잃었어.” 헤드 씨가 말하고 다른 길로 돌아들었다. (p352)
얼마 후 흑인 손님이 있는 가게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검은 얼굴 속의 검은 눈동자가 사방에서 그들을 보았다. “그래, 여기가 네가 태어난 곳이야. 검둥이들이 바글대는 여기가.”
넬슨은 인상을 쓰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길을 잃은 것 같아요.” (P353)
얼마 지나지 않아 다행히 백인들이 다시 보였고, 넬슨은 길가의 건물 벽에 기대앉으며 말했다. “좀 쉬고 싶어요. 할아버지는 도시락도 잃고 길도 잃었어요. 저는 여기서 좀 쉬고 싶으니까 기다려 주세요.” (P356)
넬슨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있어야 할 곳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소년은 몇 바퀴를 빙글빙글 돌더니 고개를 젖히고 미친 조랑말처럼 길을 달렸다. 헤드 씨는 쓰레기 통에서 뛰어내려 아이를 따라갔지만 아이는 금세 사라졌다. (P358)
넬슨은 두 다리를 벌리고 앉았고 그 옆에 노부인이 쓰러져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길 위에는 장 본 물건들이 흩어져 있었다. 여자들이 정의가 실현되는 현장을 보러 모여들어 있었고, 길에 쓰러진 노부인의 성난 외침이 헤드 씨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내 발목, 네가 내 발목을 부러뜨렸어. 네 아빠가 배상해야 돼! 한 푼도 남김없이! 경찰! 경찰!” 몇몇 여자가 넬슨의 어깨를 잡아당겼지만 아이는 혼이 빠져서 일어설 수 없는 것 같았다. (P358)
“당신 아들이 내 발목을 부러뜨렸어요! 경찰!” 노부인이 소리쳤다.
헤드 씨는 뒤에서 경찰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탈출을 가로막는 장벽처럼 앞에 모여든 여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에요. 처음 보는 아이입니다.”
넬슨의 손가락이 그의 몸에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P359)
그는 고개를 돌리기 두려웠다. 그러다 마침내 어깨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5~6미터 뒤에서 작은 두 눈이 작살이라도 꽂을 듯 자신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은 용서를 잘하는 성품이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번에 처음으로 용서할 것이 생겼다. 헤드 씨는 이전까지 이렇게 수치스러운 일을 한 적이 없었다. 두 블록을 더 걸은 뒤, 그는 고개를 돌리고 필사적으로 명랑한 목소리를 띠고 외쳤다. “어디 가서 코카콜라를 사 먹자!”
(P360)
헤드 씨는 차츰 자신의 발뺌이 얼마나 깊은 상처를 만들었는지를 느꼈다. 그들이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그의 얼굴에는 깊은 골이 푹푹 패였다.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전차 선로를 놓쳤다는 것은 알았다. (P360)
넬슨은 기차에서 종이컵으로 물을 마신 후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지만 할아버지와 같은 곳에서 물을 마시는 게 싫어 수도꼭지 앞을 그냥 지나갔다. 그 사실을 깨닫자 헤드 씨는 모든 희망을 잃었다. (P361)
그는 이전까지와 전혀 다른 낯설고 어두운 곳, 그러니까 존경을 잃은 긴 노년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P361)
넬슨의 정신은 할아버지의 배신을 얼음으로 꽁꽁 싸서 최후의 심판 때까지 보존해 두려는 것 같았다. 소년은 곁눈질도 하지 않고 걸었지만 이따금 입이 움찔거렸는데, 그것은 몸속 깊은 곳에 있는 어떤 수수께끼의 존재가 뜨거운 손을 뻗어 얼음으로 싸 둔 그것을 녹이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였다. (P361)
그는 사람이 죽을 때 창조주 앞에 가지고 갈 것은 그것뿐이라는 걸 알았고 자신에게 그것이 그렇게 적다는 데 뜨거운 수치를 느꼈다. 그는 경악 속에서 하느님의 철저함으로 자신을 판단했고, 자비의 행위는 불꽃처럼 그의 자부심을 감싸서 태워 버렸다. 그때까지 자신이 대단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 보니 자신의 진정한 악행은 그가 절망하지 않도록 감추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아담의 죄를 품은 태초부터 불쌍한 넬슨을 모른 척한 오늘까지 계속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죄라고 인정하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죄는 이 세상에 없었고, 하느님은 용서하는 만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순간 그는 낙원에 들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p364-365)
좋은 시골 사람들
그들은 좋은 시골 사람이었다. 부인이 그들 부부가 신원보증인이라고 알려 준 남자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프리먼 씨는 훌륭한 일꾼이지만그 아내는 세계에서 가장 시끄러운 여자라고 일러 주었다. “모든 일에 끼어들어요. 시끄러운 현장에 그 여자가 안 나타난다면 아마 죽은 걸 겁니다." (p368)
'완벽한 것은 없다‘는 것은 호프웰 부인이 좋아하는 말 가운데 하나였다. 또 하나 ’그런 게 인생이다!‘라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하나는 ’사람들 생각은 다 다른 법이다‘였다. (p368)
딸아이는 철학 박사였고, 그 일은 호프웰 부인에게 몹시 당황스러웠다. “내 딸은 간호사예요”라거나 “내 딸은 학교 교사예요”라거나 더 나아가 “내 딸은 화학공학자예요”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내 딸은 철학자예요”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리스와 로마에서 끝난 것이었다. (p374)
그는 사랑한다는 둥, 처음 봤을 때부터 사랑했다는 등 중얼거렸지만, 그것은 졸리지만 자기 싫은 아이가 엄마가 잠을 재워서 짜증을 내는 소리같았다. (p388)
그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어디부터 의족인지 보여 줘.”
헐가는 짧은 비명을 질렀고,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 제안의 뻔뻔함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때로 수치심에 빠졌지만 교육을 받으면서 훌륭한 외과 의사가 암을 절제해 내듯 수치심의 마지막 자취까지 없애 버렸다. 그녀는 성경을 믿지 않는 만큼이나 그가 묻는 것에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공작이 꼬리에 예민하듯 의족에 예민했다. 그녀 자신 말고는 아무도 거기 손을 대지 못했다. (p390)
그녀는 거의 탄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그냥 좋은 시골 사람 아니었어?” (p392)
"내 다리 내놔.“ 그녀가 말했다.
그는 발로 의족을 더 멀리 밀더니 구슬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이래, 이제 재미있게 놀아야지. 우리는 아직 서로를 잘 모르잖아.”
“내 다리 내놔!” 그녀가 소리치고 그리 몸을 던지려고 했지만 그는 손쉽게 그녀를 찍어 눌렀다. (p392)
"내 다리 내놔!“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그가 어찌나 재빠른 동작으로 뛰어 일어났는지, 그녀는 그가 카드와 파란 상자를 성경 책 속에 쓸어 담고 그걸 가방에 넣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다리를 집어 드는 것을 보았고 이어 그것이 가방 속 성경 책 두 권 사이에 비스듬히 들어가는 것을 잠시 멍하니 보았다. 그는 가방 뚜껑을 탕 닫고 손잡이를 들어 올려 구멍 아래로 내리더니 그 자신도 가방을 따라 내려갔다. (p393)
후프웰 부인과 프리먼 부인은 뒤편 목초지에 양파를 캐다가 그가 잠시 후 숲에서 나와서 초원을 지나 간선도로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저 사람은 우리 집에 성경 책을 팔러 온 그 착하고 멍청한 젊은이 같은걸.” 호프웰 부인이 눈을 찌푸리고 말했다. “저 쬭에 사는 깜둥이들한테 성경을 팔러 갔던 모양이야. 순진하기도 하지. 그래도 우리 모두가 저렇게 순진하다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거야.” (p394)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다
세상을 떠난 날 아침, 노인은 평소처럼 부엌에 내려와 아침 식사를 준비했지만 그 음식을 한 술 입에 넣기도 전에 죽었다. (p397)
타워터는 노인의 진동이 자신을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노인에게 손을 대지 않고도 그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고, 우울하고 당황스러운 느낌 속에 시체를 앞에 두고 식사를 마쳤다. (p398)
노인은 오랜 시간을 들여 상자를 만들었고 상자가 완성되자 뚜껑에 ‘메이슨 타워터 하느님의 품에’라고 썼다. 그런 뒤 그것을 뒷문 툇마루에 놓고 한동안 그 안에 들어가서 누워 있었는데, 지나치게 발효된 빵처럼 상자 위로 불룩 솟는 배밖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이 상자 옆에 서서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이 흡족하게 말했다. “우리 모두 이렇게 끝나지.” 그의 꺼칠한 목소리가 관 속에서 진실하게 울렸다. (p400)
“노인이 좋은 분이었던 건 맞아.” 그의 새 친구가 말했다. “하지만 네 말대호 죽은 사람보다 불쌍한 사람은 없어. 노인은 자기 운명을 받아들여야 해. 그분의 영혼은 이제 지상을 떠났고, 그분의 몸은 꼬집어도 몰라. 불이 붙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 (p409-410)
그린리프
잠자는 동안 부인은 무언가 집의 벽을 먹어 치우는 듯 씹는 소리를 들었다. 부인의 의식 속에서 그것은 부인이 거기 살기 시작한 뒤로 계속 먹었다. 울타리 띁에서 시작하여 집까지 모든 것을 먹으며 와서는 이제 변함없이 차분하고 꾸준한 리듬으로 집 안으로 들어와 부인도 먹고 아들들도 먹고 그린리프가(家)를 뺀 모든 것을 먹고 또 먹어서 한때 부인의 소유였던 농장에서 남은 것은 자기들의 작은 섬이 있는 그린리프가뿐일 것이다. (p420)
그는 게을렀기에 다른 일을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둑질을 할 만한 의욕도 없었고, 부인이 서너 차례 같은 지시를 내리면 어쨌건 그 일을 했다. 하지만 암소가 병에 걸리면 수의사를 불러도 소용없을 때가 돼서야 말을 했다. 만약 농장 창고에 불이 나면 먼저 아내를 불러 불구경을 시킨 다음에 불을 끄려고 할 것이다. (p422)
그린리프 부인은 정원을 가꾸거나 빨래를 하는 대신 자칭 ‘기도 치유’라고 하는 것에 빠져 살았다.
그녀는 매일 신문에 나는 온갖 우중충한 기사를 모았다. 강간당한 여자, 탈옥한 죄수, 불에 타 죽은 아이, 탈선한 기차와 추락한 비행기, 영화배우들의 이혼, 이런 기사를 숲에 가져가서 구멍을 파고 묻은 다음 그 위에 쓰러져서 한 시간 정도 중얼거리며 두꺼운 팔을 몸 아래에 넣고 앞뒤로 흔들다 밖으로 뺐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그냥 오래 누워있었고, 메이 부인은 그녀가 흙 위에서 잠을 잔다고 생각했다. (p425)
"예수님, 제 심장을 찌르세요! 제 심장을 찌르세요!“ 그린리프 부인이 소리치더니 다시 흙 위로 철퍼덕 쓰러져서 두 팔과 두 다리로 땅을 끌어안을 듯 사지를 넓게 벌렸다.
메이 부인은 아이에게 욕설을 들은 것처럼 화가 나고 답답했다. “예수님은 그런 자네를 부끄러워하실 거야.” 부인이 몸을 펴면서 말했다. “예수님이라면 당장 일어나서 아이들 옷을 빨아 주라고 하실 거야!” 그리고 부인은 돌아서서 얼른 그 자리를 떠났다. (p426)
"O.T와 E.T는 좋은 애들이야. 그 애들이 내 아들이 되었어야 해.“ 부인이 말했고, 그 끔찍한 생각에, 눈물이 왈칵 솟아 웨슬리의 모습이 부예졌다. 보이는 것은 그의 그림자가 식탁에서 일어나는 모습뿐이었다. ”너희 둘, 너희가 그 여자의 아들이 되었어야 해!“ (P431)
스코필드는 부인에게 버터를 건네주고 말했다. “어머니, 이 집 암소들에게 잡종 피를 약간 섞어 주는 것 알고 아무 짓도 안 한 늙은 소를 쏴 죽이는 게 부끄럽지 않으세요? 아무리 봐도 어머니랑 같이 살면서 내가 이렇게 착하게 자란 건 기적같아요!” (P439)
부인은 차에서 내려 잠시 걷다가 앞 범퍼에 앉았다. 피곤해서 고개를 보닛에 대고 누워 눈을 감았다. 아직 오전인데 왜 이렇게 피곤한지 이상했다. 눈을 감고도 하늘 위에 빨갛게 타오르는 태양이 느껴졌다. 눈을 살짝 떠 보았지만 하얀 빛에 다시 눈을 감아야 했다. (P446)
뒤를 돌아다보니 황소가 고개를 숙이고 자신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부인은 꼼짝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아니라 황당함에 얼어붙었다. 부인은 거리 감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소의 의도가 뭔지 판단하지 못하는 것처럼 검은 짐승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고, 황소가 격렬한 애인처럼 부인의 가슴을 뚫었고, 다른 뿔은 옆구리를 감싸 돌아서 부인을 꽉 붙들었다. (P448)
숲의 전망
아이는 아홉 살이었다. 노인처럼 작고 뚱뚱했으며, 노인처럼 흐린 청색 눈동자였고, 노인과 같은 돌출 이마였으며, 그와 같이 찌푸린 인상에 붉은 안색이었다. 또한 내면도 노인과 같았다. 지성과 강한 의지와 추진력이 놀라울 정도로 할아버지와 비슷했다. 두 사람은 비록 나이는 일흔 살 차이가 났지만, 정신적 거리는 아주 가까웠다. 노인이 가족 중에 조금이라도 인정하는 사람은 메리 포천뿐이었다. (P451)
그녀는 피츠란 이름의 얼간이와 결혼해서 아이를 일곱 낳았다. 모두 제 어미 같은 멍청이들이었지만 막내인 메리 포천만은 예외였다. (P452)
아이는 노인과 마찬가지로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듣지 않는 버릇이 있었고, 그것은 노인이 직접 가르친 기술이었기에 아이가 그것을 실행하는 방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이가 나이가 들면 그 기술이 아주 유용할 거라고 예견했다. (P456)
포천씨는 그가 아이를 때리는 건 자신이 그들을 따라가서 그 일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노인은 30미터 정도 떨어진 바위 뒤에서 아이가 소나무에 매달리고 피츠가 낫으로 덤불을 치듯 허리띠를 규칙적으로 휘둘러서 아이 발목을 때리는 모습을 보았다. 아이는 뜨거운 스토브에 올라선 양 펄쩍펄쩍 뛰면서 매 맞는 개처럼 칭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P457)
이것은 피츠가 자신에게 복수하는 방식이었다. 피츠가 매질을 하려고 데리고 나가는 게 자신인 것 같았고, 거기 굴복하는 것도 자신인 것 같았다. 노인은 처음에는 아이를 때리면 식구들을 농장에서 쫓아내겠다는 말로 그의 구타를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랬더니 피츠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쫓아내면 아이도 함께 나가야 돼요. 그렇게 하세요. 그 아이는 내 아이니, 나는 1년 365일 언제라도 마음 내키는 대로 때릴 수 있어요.” (p458)
노인은 아이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자동차 옆으로 돌아갔다. “네 아비 송아지가 어디서 풀을 뜯는지 내가 신경을 쓸 것 같으냐? 송아지들에 매여 사업을 망설일 것 같아? 그 얼간이의 송아지가 어디서 풀을 뜯건 내가 반 푼어치라도 신경을 쓸 것 같아?” (p460)
붉게 달아올라 머리카락보다 색이 더 진해진 아이의 얼굴은 노인의 현재 표정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다. “자기 형제를 바보라고 부르는 사람은 지옥 불에 떨어진다고 했어요.” 아이가 말했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너희도 비판하지 말라고 했어!” 노인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아이의 얼굴보다 붉은 빛이 조금 더 진했다. “너는 네 아비가 마음 내킬 때마다 널 때리게 하고 반항 한 마디 없이 울고 펄쩍펄쩍 뛰기만 하잖아!” (p460)
불도저가 아래로 지나갔다. 두 사람은 30센티미터 간격의 얼굴에 똑같은 표정을 담고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노인이 말했다. “너 혼자 집으로 걸어가라. 난 이제벨을 태우고 가지 않겠다!”
“저는 탕녀 바빌론의 차에는 타지 않아요.”아이가 말하고 차 반대편으로 내려가서 목초지를 걸어갔다.
“탕녀는 여자야! 네가 아는 게 겨우 그 정도지!” 노인이 소리쳤다. 하지만 아이는 고개를 돌려 대답하지 않았고, 작고 단단한 몸이 노란 들꽃 가득한 들판을 지나 숲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자니 그는 아이에 대한 자부심이 새 호수 위의 잔물결처럼 돌아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p461)
아이가 피츠에게 맞서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이 불만스러운 반대 기류였다. 아이가 자신에게 맞서는 만큼 피츠에게 맞서도록 가르칠 수만 있었다면, 아이는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대담하고 강인한 완벽한 아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이 성격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노인을 닮지 않은 유일한 지점이었다. (p461)
“저긴 내 땅이야. 그렇지? 내가 내 땅을 파는데 네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 거니?” 노인이 물었다.
“잔디밭이니까요.” 아이가 말했다. 눈물과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지만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고, 아이는 혀로 눈물을 핥았다. “도로 저편을 볼 수 없게 되니까요.” (p466)
"숲을 못 보게 되잖아요. 그리고 저긴 잔디밭이고 아빠의 송아지들은 저기서 풀을 뜯어요.“ 아이가 말했다.
그 말에 노인이 일어서면서 대꾸했다. “너는 포천가가 아니라 피츠가 사람처럼 행동하는구나.” 그는 이전에 아이에게 그런 심한 말을 한 적이 없고 그 말을 한 순간 바로 후회했다. 그 말은 아이보다 노인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다. (p467)
아이는 고개를 돌리고 노인을 빤히 바라보더니 느리지만 격렬한 목소리로 말했다. “잔디밭 때문이에요. 우리 아빠 송아지들이 거기서 풀을 뜯어요. 우리는 이제 숲을 볼 수 없을 거예요.”
노인은 최선을 다해 화를 참으며 소리쳤다. “네 아비는 너를 때려! 그런데 너는 그 아비 송아지 풀 뜯는 곳을 걱정하는 거냐!”
“아무도 날 때리지 않았어요! 누가 날 때린다면 그 사람을 죽여 버릴 거야.” 아이가 말했다.
일흔아홉 살 남자가 아홉 살 아이에게 당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아이의 표정처럼 결연하게 굳었다. “너는 포천가 사람이냐? 아니면 피츠가 사람이냐? 어느 쪽인지 정해” 노인이 말했다.
아이는 낭랑하고 확고하고 전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메리 … 포천 … 피츠예요.”
이에 대해 아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기에, 아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p471)
“내가 너에게 매를 들겠다!” 그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크고 공허했으며, 그 떨림은 소나무들에 가로막혀 숲 위로 나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는 아이를 때리다가 비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 말했다. “빨리 나무를 붙잡고 서.” 그리고 허리띠를 풀었다. (p475)
아이는 정확히 한 걸음 물러서더니 그의 눈을 빤히 보면서 안경을 벗고 그것을 그가 가리킨 나무 옆 바위 뒤에 놓았다. “할아버지도 안경 벗어요.” 아이가 말했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 노인이 소리치고 허리띠로 아이의 발목을 어색하게 때렸다.
그러자 아이가 그에게 어찌나 빨리 달려들었던지, 그는 자신이 가장 먼저 받은 공격이 무엇이었는지, 그러니까 아이의 단단한 몸 전체의 무게였는지 발길질이었는지 가슴을 때리는 주먹질이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노인은 공중에 허리띠를 휘둘렀지만 때려야 할 곳을 모르고 아이를 떼어 내려고만 하다가 마침내 아이 몸을 잡았다. (p475)
"저리 가! 저리 가!“ 노인이 소리쳤다. 하지만 아이는 사방에서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는 아이 한 명에게 당하는 게 아니라 갈색 학생 구두를 신고 돌덩이 주먹을 지닌 작은 악마 일당에게 당하는 것 같았다. 그의 안경이 옆으로 튀어 올랐다.
“벗으라고 했죠.” 아이가 멈추지 않고 소리쳤다.
노인은 무릎을 잡고 한 발로 서서 춤을 추었으며, 그의 배에 주먹세례가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아이가 붙잡은 상박은 다섯 개의 갈고리 발톱이 박힌 것 같았고, 아이의 발은 그의 무릎을 뻥뻥 찼으며, 그를 잡지 않은 주먹은 그의 가슴을 계속 때렸다.(p475-476)
그는 바닥에 쓰러져서 불이 붙은 사람처럼 굴렀다. 아이는 즉시 그의 몸에 올라타서 그와 함께 구르며 계속 발길질을 했고, 두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나는 노인이야! 저리 비켜!” 그가 소리쳤지만 아이는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그의 턱에 새로이 공격을 가했다.
“그만! 나는 네 할아비야.” 그가 숨을 헐떡였다. (p476)
아이는 멈추었다. 아이 얼굴은 그의 얼굴 바로 위에 있었다. 창백한 눈이 자신과 독같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제 됐어요?” 아이가 물었다.
노인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 얼굴은 승리감과 적의에 차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때렸어요.” 아이는 그리고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순수한 피츠예요.” (p476)
깊은 오한
부인이 볼 때 사람은 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능력이 줄어들었다. 아이들 아버지는 교실 한 개짜리 학교를 8년 다닌 게 전부였지만 못하는 것이 없었다. (p483)
그는 차에서 내렸고, 짐도 잊은 채 정신이 몽롱한 듯 집으로 걸어갔다. 누나도 차에서 내리더니 문 옆에 서서 눈을 찌푸린 채 그의 구부정하고 흔들리는 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가 현관 계단을 올라갈 때 놀란 얼굴로 입을 살짝 벌렸다. “저 애 정말 문제가 있는 거 맞네, 나이가 백 살은 돼 보여요.” (p487)
어머니가 그것을 읽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그가 그것을 쓰는 것은 때로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어머니를 마주하기 위해 자신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집의 노예 같은 분위기를 피해서 여기 왔어요.’ 그는 썼다. ‘자유를 찾아, 내 상상력의 해방을 찾아, 새장에 갇힌 매 같은 상상력을 빼내서 “넓어지는 소용돌이 속으로”(예이츠) 보내려고. 그런데 제가 뭘 발견했는지 아세요? 그 새는 날 수 없었어요. 그 새는 어머니에게 길들어서 새장에 뚱하니 앉아 나오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다음 말에는 밑줄을 두 번이나 그었다. ‘저는 상상력이 없어요. 재능이 없어요. 저는 창조할 수 없어요. 저한테 있는 건 그런 것들에 대한 열망뿐이에요. 왜 그것도 죽이지 않으셨나요? 어머니, 왜 내 날개를 꺾었나요?’
이 글을 쓰면서 그는 절망의 수렁에 빠졌고, 어머니가 그것을 읽으면서 최소한 자신의 비극과 거기서 어머니가 수행한 역할을 감지할 거라고 생각했다. (p488-489)
“그 사람은 어떻게 자기 엄마를 그렇게 욕하는 거죠?”
“어렸을 때 안 맞아서 그래.” 랜들이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집 생활을 견딜 수가 없어서 예정보다 이틀 먼저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의 인생은 거기서 이미 죽었고, 문제는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느냐였다. 끝을 당길 수는 있지만 자살은 승리가 될 수 없었다. 죽음은 그에게 합당하게, 온당한 결과로, 인생의 선물로 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최고의 성취였다. (p496)
신부들은 고대 제도의 보호를 받기에 냉소적일 수 있고, 중간에 관망할 수도 있다. 자신은 죽기 전에 교양있는 사람과 이야기할 것이다. 이 사막에서도! 게다가 그보다 더 어머니를 짜증스럽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일을 왜 더 일찍 생각하지 못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너는 그쪽 교회의 신자가 아니잖아.” 폭스 부인이 말했다. “가톨릭교회는 30킬로미터 밖에 있어. 신부를 보내 주지 않을 거야.” 어머니는 이걸로 그 일이 마무리되기를 기대했다.
(p498)
“어머니, 저는 이제 곧 죽어요.” 그는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망치질하듯 어머니 머리에 때려 넣으려고 했다.
부인은 약간 창백해졌지만 눈을 깜박거리지는 않았다. “너는 내가 여기 앉아서 너를 죽게 둘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부인이 화를 내며 말했다. 부인의 눈은 멀리서 보는 산맥처럼 단단했다. 그는 처음으로 마음에 의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p499)
그가 부르르 떨며 깨어 보니 침대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는 어둠 속에 일어나 앉아 몸을 떨며 이제 끝이 며칠 남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는 죽음의 분화구를 내려다보고 현기증 속에 베개 위로 쓰러졌다. (p502)
기도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가족과 함께 기도하세요. 가족과 함께 기도하십니까?
“그럴 리가.” 에스버리가 중얼거린 뒤 소리쳤다. “우리 어머니는 기도할 시간이 없고 누나는 무신론자예요.” (p504)
“신부님, 저는 가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그게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된다고 봅니까?” 노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에스버리는 침대 속으로 몸을 약간 내리고 소리쳤다. “저는 죽음을 앞두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 안 죽었어요!” 신부가 말했다. “그리고 하느님과 대화도 안 해 보고 어떻게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기를 기대합니까?” (p505)
폭스 부인이 뛰어 들어와서 소리쳤다. “그만하세요! 아픈 아이한테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시나요? 신부님은 제 아들을 힘들게 하고 계십니다. 가셔야겠습니다.”
“이 불쌍한 젊은이는 교리문답도 몰라요.” 신부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고 부인은 아드님에게 매일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부인은 어머니의 의무를 게을리했습니다.”
(p506)
그는 자신이 찾는 무언가가 있다고, 그가 가져야 하는 무언가, 죽기 전에 해야 하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마지막 경험이 있다고, 그의 지성으로 스스로를 위해 할 일이 있다고 느꼈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의존했고, 거룩한 존재에 칭얼거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p507)
그는 베개에 머리를 털석 얹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팔다리는 여러주 동안 열과 오한에 시달려 감각이 없었다. 그의 옛 인생은 소진되었다. 그는 새 것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오한이 시작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특이한 오한이었다. 너무 가벼워서 깊고 차가운 바다를 건너가는 따뜻한 잔물결같았다. (p513)
그는 남은 평생 동안 자신이 허약해졌지만 질긴 몸으로 정화(淨化)의 공포와 마주하고 살게 될 것을 알았다. 마지막 소용없는 항변이 가녀린 비명으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성령의 불 대신 얼음을 입고 잔혹하게 내려오고 또 내려왔다. (p513)
가정의 안락
어머니와 어린 탕녀가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둔하고 느리고 어색하게 나왔고, 어린 탕녀는 원피스를 무릎 위로 들고 약간 휜 길쭉한 다리를 내밀었다. 그녀는 꺅꺅 웃음을 터뜨리며 개에게 달려갔고, 개는 기쁨에 떨며 그녀를 맞으러 뛰어갔다. 토머스의 육중한 몸 전체에 분노가 군중에 모여들듯 고요하고 불길하고 강렬하게 밀려들었다. (p514)
그는 아침에 분명하게 말했다. “그 여자애를 다시 집에 데려오시면 제기 나갈 거예요. 어머니가 선택하세요. 여자애인지 나인지.”
그리고 어머니는 이렇게 자신의 선택을 보여 주었다. 강렬한 고통이 토마스의 목을 조였다. 그의 서른다섯 생애에 처음이었다. (p515)
토마스는 어머니 역시 물리쳐야할 짐승인 듯 의자를 계속 앞에 두고 서 있었다. “여자애가 내 방에 들어오려고 했어요.” 그가 어머니를 윽박질렀다. “잠에서 깨 보니 여자애가 내 방에 들어오려고 하고 있었어요.”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고 성이 나서 외쳤다.
“저는 더 이상 못 참아요! 하루도요!” (p516)
어머니의 행동은 한결 같았다. 그것은 좋은 의도로 세상의 미덕을 우롱하는 것, 미덕을 너무도 생각없이 추구해서 거기 얽힌 모든 사람이 바보가 되고 미덕 자체도 빛을 잃게 만드는 것이었다. (p516)
"내가 어떻게 그 애를 내보낼 수 있겠니? 오늘 아침에 그 애는 또 자살하겠다고 했어.“ 어머니가 말했다.
“다시 감옥에 돌려보내요.” 토머스가 말했다.
“너라면 내가 감옥으로 돌려보내겠니. 토머스.” 어머니가 말했다. (p517)
어머니가 약간의 머리가 있었다면, 그는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과도한 미덕은 칭송받지 않았다는 것을, 선행을 절제해야 악행도 절제된다는 것을, 이집트의 안토니우스가 로마에 남아 누나를 돌보았다면 악마에게 당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을 설득할 수 있었으리라. (p518)
어머니가 지금처럼 미덕을 남용하면, 그는 자기 안의 악마를 느꼈다. 그것은 토머스나 어머니의 정신적 기벽이 아니라, 독자적인 인격을 갖춘 거주민이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었고, 언제라고 비명을 지르거나 냄비를 흔들 수 있었다. (p518)
토머스는 한숨이 나왔다. 어머니가 떠들었지만, 여자는 들은 척도 않고 그를 훑어보았다. 그녀의 눈길은 손가락이라도 달린 듯 그의 무릎을 만졌다가 목을 만졌다가 했다. 그 눈빛은 조롱으로 반짝이는 것이 자신이 그녀를 역겨워한다는 걸 스스로도 아는 게 분명했다.
(p523)
“그 여자는 어린 탕녀일 뿐이에요. 어머니 등 뒤에서 어머니를 비웃어요. 어머니는 무언가를 뜯어낼 대상일 뿐 그 여자애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p527)
“사람들은 저를 원하지 않아요.” 세라 햄이 계속 말했다. “감옥에서도 나를 원하지 않아요. 내가 자살하면 하느님은 나를 원할까요?”
“해 보면 알겠죠.” 토머스가 말했다.
여자는 비명을 지르듯 웃었다. 그러더니 웃음을 멈추고 입을 오므린 채 몸을 떨었다. “가장 좋은 건 자살하는 거예요.” 그녀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그러면 아무에게도 방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나는 지옥에 갈 테니 하느님에게도 방해가 안 될 거예요. 악마도 나를 원하지 않을 거예요. 악마가 나를 지옥에서 쫓아낼 거예요. 지옥에서도 나는…… ” 그녀가 울부짖었다. (p532)
세라 햄의 웃음소리가 복도에서 그의 방으로 달그락거리며 들어왔다. “톰시는 알게 될 거예요. 나는 자살할 거고, 톰시는 나에게 잘해 주지 않은 걸 후회할 거예요. 나는 톰시의 총을 쓸 거예요. 진주가 박힌 톰시의 연-발-권-총!” 여자는 소리치고 영화 속 괴물을 흉내 낸 뒤 뒤틀린 웃음을 크게 웃었다. (p534)
코 고는 소리가 멈추었고, 소파 스프링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빨간 핸드백을 잡았다. 피부 같은 감촉이 들었으며, 그것을 열자 세라의 냄새가 역력하게 났다. 그는 찌푸린 얼굴로 거기 총을 넣고 물러섰다. 그의 얼굴은 암적색으로 타올랐다.
“톰시가 내 가방에 뭘 넣은 거예요?” 여자가 소리쳤고, 여자의 흡족한 웃음이 계단을 튀어 내려왔다. 토머스가 돌아섰다. (p540)
"원래 이 가방에 있었어요! 이 더러운 범죄자 탕녀가 내 총을 훔쳐갔어요!“ 토머스가 소리쳤다.
어머니는 그 목소리에 든 다른 사람의 그림자에 깜짝 놀랐다. 어머니의 무녀같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기 있었다고, 맙소사!” 세라 햄이 소리치고 핸드백을 가지러 왔지만, 토머스는 아버지에게 인도를 받듯 자신이 먼저 그것을 잡아서 총을 빼냈다. 여자는 광란하여 토머스의 목으로 달려들었고, 어머니가 그녀를 보호하려고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실제로 그의 목을 잡았을 것이다. (p541-542)
토머스는 쏘았다. 그 소리는 이 세상의 악을 끝내려는 소리처럼 울렸다. 토머스에게 그것은 어린 탕녀의 웃음을 끝장낼 소리로 들렸고, 마침내 모든 비명이 잦아들자 완벽한 평화를 깨뜨릴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p542)
부인의 시체 위에서 살인자와 탕녀는 서로의 품으로 쓰러질 것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보안관은 고약한 사건을 보면 바로 알았다. 그는 기대에 못 미치는 현장에 들어서는 데 익숙했지만, 이번에는 기대에 잘 들어맞았다. (p542)
오르는 것은 모두 한데 모인다
줄리언은 어머니가 이기적인 사람이었으면, 술을 마시고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는 할망구였다면,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순교 중에 신앙을 잃은 듯 우울함에 잠겨 길을 걸었다. (p546)
버스를 타는 것에 더해 이렇게 기다리기까지 하는 답답함이 뜨거운 손길처럼 목덜미를 더듬었다. 어머니가 고통스러운 한숨으로 자신의 존재를 들이밀었다. 그는 황폐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p549)
버스는 절반쯤 차 있었다. 모두 백인이었다. “버스 안에 우리뿐이네요.” 어머니가 말했고, 줄리언은 몸을 움찔했다. (p551)
신문을 든 줄리언은 평소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자기 마음 안쪽으로 멀찌감치 물러갔다. 그곳은 그가 주변의 일을 견딜 수 없을 때 조용히 들어가 앉는 정신적 캡슐 같은 공간이었다. 그는 거기서 밖을 내다보며 판단할 수 있지만 바깥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그곳은 주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어머니는 그곳에 들어온 적이 없지만 그는 그곳에서 어머니를 아주 또렷하게 보았다. (p552)
어머니는 그가 우울한 것은 아직도 성장 중이기 때문이라고 보았고, 급진적인 견해를 품은 것은 현실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어머니는 그가 아직 ‘인생’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아직 현실 세계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고 말했지만, 그는 쉰 살 남자만큼이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p553)
그중에 가장 큰 기적은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눈이 먼 어머니와 달리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눈이 멀지 않고 어머니에게서 정서적으로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지배되지 않았다. (p553)
빨강-하양 샌들의 여자는 깜둥이가 앉는 순간 자기 좌석에서 일어나서 버스 뒤편으로 가더니 방금 내린 여자가 앉았던 곳에 앉았다. 어머니는 고개를 내밀고 그 여자에게 잘했다는 표정을 보였다. (p554)
줄리언은 통로를 건너가서 샌들을 신은 여자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거기서 어머니를 고요하게 건너다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분노로 벌게졌다. 그는 모르는 사람 같은 눈길로 어머니를 보았다. 갑자기 긴장이 사라지는 것이 자신이 어머니에게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라도 한 것 같았다. (p554)
그는 깜둥이와 대화를 하고 싶었다. 예술이건 정치건 무엇이건 거기 있는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남자는 신문 뒤에 숨어 있었다. 남자는 사람들이 자리를 옮긴 일을 모른 척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줄리언이 그에게 공감을 전달할 방법은 없었다. (p554)
그는 어머니가 병으로 위독할 때 다른 의사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깜둥이 의사를 데려온 경우를 상상했다. 그는 몇 분 동안 즐거이 그 상상을 하다가 자신이 흑인 시위에 동조자로 참여하는 순간적인 상상으로 넘어갔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는 그 생각을 오래 하지는 않았다. 대신 궁극의 공포에 다가갔다. (p556)
흑인의 혈통이 의심되는 아름다운 여자를 집에 데려가는 것이다. 마음의 준비를 하세요, 어머니. 이건 어머니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나는 이 여자를 선택했어요. 똑똑하고 품위 있고 거기다 착해요. 여자는 고통 받았고 그걸 즐겁게 여기지 않아요. 이제 우리를 괴롭혀 봐요. 여자를 내쫓아 봐요. 그러면 저도 내쫓겨 될 거예요. 그는 눈이 가늘어졌고 마음속에 일어난 분노를 통해 맞은편의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자주색 얼굴, 덕성의 크기에 따라 난쟁이처럼 작아진 모습으로 그 어처구니없는 모자를 깃발처럼 쓰고 미라처럼 앉아 있었다.
(p556-557)
"꼬마야!“ 줄리언의 어머니가 소리치고 빠르게 걸어 가로등을 바로 지난 곳에서 그들을 따라잡았다. ”여기 반짝이는 1센트짜리 새 동전이 있어.“ 그리고 침침한 빛 속에서 황동색 동전을 내밀었다. (p561)
거구의 여자가 돌아서더니 잠시 가만히 서서 줄리언의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어깨가 올라가고 얼굴은 분노로 얼어붙었다. 그러더니 여자가 한순간 과부하 받은 기계처럼 폭발했다. 줄리언은 검은 손이 빨간 핸드백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찡그린 채 여자의 외침을 들었다. “우리 아이는 1센트 동전 따위 필요 없어요!”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여자는 아이를 들쳐 메고 길을 갔고, 아이는 여자의 어깨 위에서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줄리언의 어머니는 길에 주저앉아 있었다. (p561-562)
줄리언은 뒷짐을 지고 어머니를 따라 걸었다. 어머니가 받은 교훈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것도 좋을 듯 했다. 방금 일어난 사건을 어머니가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것도 괜찮은 일 같았다. “깜둥이 여자가 건방져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흑인들 전체가 어머니가 동정하며 건네는 동전을 받지 않을 테니까요. 그 여자는 말하자면 흑인판 어머니였어요. 그 여자도 어머니랑 똑같은 모자를 쓸 수 있고, 거기다 어머니보다 더 잘 어울리던걸요.” 그는 불필요하게 덧붙였다. (p563)
“세상이 끝난 것처럼 그러지 마세요. 세상은 안 끝났어요.” 그가 말했다. “이제부터 새 세상에 살면서 이전까지 외면하던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세요. 기운 내시고요. 큰일 아니에요.”
(p563)
어머니는 그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 걸어갔다. 그는 앞으로 걸어가 어머니의 팔을 잡아 세웠다. 그리고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할아버지를 불러. 여기 와서 나를 데려가시라고 해.” 어머니가 말했다. (p564)
그는 당황해서 어머니의 팔을 떨구었고, 어머니는 비틀거리며 다시 걸었는데, 마치 한쪽 다리가 다른 쪽보다 짧은 것 같았다. 그가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기다려요!” 어머니는 길에 털썩 쓰러졌다. (p564)
“여기서 기다려요. 기다려요!” 그가 소리치고 일어나서 도움을 구하려고 먼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 “도와줘요. 도와줘요!” 그가 외쳤지만 그 목소리는 실처럼 가늘었다. 그가 달려갈수록 불빛은 더 멀리 떠갔고, 그의 발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마비감 속에 비틀거렸다. 어둠의 물결이 그를 다시 어머니에게 밀고 가면서, 그가 죄와 슬픔의 영토로 들어서는 것을 자꾸 미루는 것 같았다. (p564)
파트리지 축제
“이 강인하고 고귀한 분은 오늘의 파트리지를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여섯 명의 시민이 총에 맞아 죽었는데 이렇게 축제 분위기가 달아오른 데 대해서요? (p567)
그는 그 광인을 옹호할 글을 쓸 생각이었고, 그 글로 자신의 죄의식을 달랠 수 있기를 바랐다. 싱글턴의 순수한 빛에 그의 이중생활, 그의 그림자가 평소보다 더 어둡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p570)
그는 사람없는 벤치에 앉았다. 법원 계단 옆에 구경꾼들이 싱글턴이 염소와 함께 갇혔던 ‘감옥’을 감탄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싱글턴이 겪었을 상황의 비애감이 그에게 강렬한 공감의 물결로 밀려들었다. 그 자신이 옥외 화장실에 갇히고 밖에 자물쇠가 딸깍 잠기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썩은 판자 틈새로 바깥에서 소리치며 까부는 바보들이 보였다. (p575)
코가콜라 병에 혀를 말아 넣은 백인 소녀가 그의 발치에 있는 모래땅에 앉아서 초연한 눈길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이의 눈은 병 색깔 같은 녹색이었다. 맨발에 머리는 곱슬기 없는 흰색이었다. 아이는 퐁 소리를 내며 병에서 혀를 빼고 말했다. “나쁜 아저씨가 총을 쐈어요.”
(p575)
"사람들이 그 아저씨한테 잘해 주지 않았어.“ 그가 설명했다. ”그 아저씨한테 잘못했어. 냉혹하게 대했어. 사람들이 너를 냉혹하게 대하면 넌 어쩔 것 같니?“
“총을 쏴 버려요.” 아이가 말했다.
“그래. 그 아저씨가 바로 그렇게 한 거야.” 캘룬이 얼굴을 찌푸리고 말했다. (p576)
"싱클턴은 지금 고통 받고 있어요. 그 사람은 희생양이에요. 공동체의 죄를 짊어지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의 죄에 희생됐어요.“
이발사의 손이 멈추더니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러더니 잠시 후 약간 존경을 담은 목소리가 말했다. “목사님, 그 사람을 잘못 알고 계십니다. 싱글턴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어요.”
청년은 얼굴이 빨개져서 말했다. “저도 교회에 다니지 않습니다.” (p579)
이곳의 누구도 퀸시의 더러운 병동에 누운 싱클턴에게 연민을 품지 않았다. 캘론은 이제 그의 무고함을 더욱 확신했고,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을 제대로 보여 주려면 길이가 꽤 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p581)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었다. “당신은 싱글턴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여자는 고개를 들더니 그의 몸을 관통해서 그 뒤쪽을 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리스도 같은 인물이라고 봐요.”
청년은 깜짝 놀랐다. (p584)
싱글턴을 보러 간다는 일은 자기 혼자서는 생각도 해 보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 될 테지만, 구원이 될 수도 있었다. (p587)
그는 싱글턴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자꾸 그것을 피했다. 그는 퀸시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쓰고자 하는 게 소설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소설을 쓰겠다는 그의 열망은 하룻밤 새 구멍 난 타이어처럼 바람이 빠져 버렸다. (p588)
“우리가 거기 서서 한 남자가 십자가에 달리는 걸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럴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해야 돼요.“ 여자가 말했다. 여자가 말했다. ”그 사람과 함께 그 일을 겪어야 해요. 밤새 그 생각을 했어요.“ (p589)
캘룬은 무력하게 앉아 있었지만, 차는 스스로의 의지를 가진 듯 병원 입구로 돌아들었고, 그들은 ‘퀸시 주립병원’이라는 글씨를 새긴 콘크리트 아치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여기 들어오는 모든 이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여자는 중얼거렸다. (p591)
"아가씨하고 나는 같은 종류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급이 달라. 아가씨는 여왕이야. 나는 아가씨를 꽃마차에 태울 것야!“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손목을 확 풀고 여자에게 달려들었지만 두 직원이 즉시 달려들었다. 메리 엘리자베스가 캘룬에게 달라붙어 몸을 웅크릴 때, 노인은 소파를 훌쩍 뛰어넘어 방안을 달리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그를 잡으려고 두 팔을 넓게 벌리고 양쪽에서 달려들었다. 그들이 거의 잡으려고 하는 순간 그가 신발을 툭 차서 벗어 던지며 탁자 위로 뛰어올랐고, 그 바람에 빈 꽃병이 떨어져 박살이 났다. ”날 봐 아가씨!“ 그가 소리를 지르며 환자복을 머리 위로 벗으려고 했다. (p596)
캘룬에게 여자의 얼굴은 벌거벗은 하늘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그는 절망 속에 그녀를 향해 몸을 숙이다가 그녀의 안경에 조그맣게 비친 자신의 모습에 우뚝 멈추었다. 둥글고 순진하고 벽돌담의 벽돌 하나처럼 아무 특징 없는 그 얼굴은 인생의 재능이 미래로 달려 나가 축제에 축제를 일으키는 얼굴이었다. 그것은 판매의 달인처럼 오래전부터 그를 데려가려고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p597)
절름발이가 먼저 올 것이다
“루퍼스가 소년원을 출소할 때 나는 그 애한테 이 집 열쇠를 주었어. 그 아이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고, 그애가 아무 때라도 우리 잡에 와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루퍼스는 아직 그 열쇠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쓰게 될 것 같아. 그 애는 나를 봤고, 또 배를 곯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애가 열쇠를 쓰지 않으면 내가 그 애를 찾아서 데리고 올 거야. 어린애가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을 뒤지는 일을 가만두고 볼 수는 없어.”
아이는 인상을 썼다. 자기 생활이 위험에 놓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p600)
셰프드는 시청 소속 레크리에이션 지도사였다. 토요일마다 소년원에서 카운슬러 일을 했는데, 보수는 없지만 모두가 외면하는 소년들을 돌본다는 자부심을 얻었다. 존슨은 거기서 만난 소년들 가운데 가장 똑똑하고도 가장 불운한 소년이었다. (p601)
“그 애는 못 가졌는데 네가 가진 것들을 생각해 봐!” 셰퍼드가 말했다. “네가 쓰레기통에서 먹을 것을 찾는다고 생각해 봐. 한쪽 발이 퉁퉁 부어 있고, 길을 걸을 때 몸 한쪽이 기운다면?”
아이는 그런 일을 상상할 수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이었다. (p601)
"네가 천 달러를 받았다고 하자. 그걸 너만 한 행운을 얻지 못한 아이들에게 쓰는 건 어떻겠니? 고아원에 그네와 공중그네 같은걸 선물해 주는 게 어떻겠니? 불쌍한 루퍼스 존슨에게 새 신발을 사 주는 건 어떻겠니?“
아이는 식탁에서 물러섰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접시 위에 입을 벌렸다. 셰프드는 다시 끙 소리를 냈다. 아이는 모든 것을 토했다. 케이크, 땅콩버터, 케첩이 달콤한 곤죽이 되어 쏟아졌다. 아이는 우욱거리며 접시에 음식을 토했고, 이제 심장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는 듯 입을 벌리고 기다렸다. (p603)
그는 접시를 싱크대로 가지고 가서 물을 틀고 물에 씻겨 내려가는 오물을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존슨의 여위고 불쌍한 손이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동안 이기적이고 둔감하고 탐욕스러운 자기 아이는 음식을 토할 지경으로 먹었다. (p604)
“너의 많은 일들을 내가 차근차근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존슨은 그를 차갑게 보면서 대꾸했다. “저는 아무 설명 필요 없어요. 제가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이미 잘 알아요.”
“그래 좋구나!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지 말해 주겠니?” 셰퍼드가 물었다.
소년이 눈에 검은 광채를 번득이며 말했다. “악마가 시켜요. 악마가 저를 사로잡고 있어요.”
(p606)
이 소년이 인생에 대해 질문을 했을 때 거기 대답을 해 준 것은 길거리에 걸린 광고판들이었다.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나요?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구원자십니다.” 소년이 성경을 읽었건 안 읽었건 그 내용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답답함은 분노로 이어졌다. “그게 무슨 헛소리니! 우리는 우주 시대에 살고 있어! 그건 너같이 똑똑한 애가 할 만한 대답이 아니야.” (p606)
오렌지를 다 먹은 뒤에는 시트로 손을 닦고 노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노턴의 서비스에 마음이 누그러든 것 같았다. “그 아저씨 아이가 확실해. 멍청하게 생긴 게 똑같다.”
아이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것처럼 둔하게 서 있었다.
“그 아저씨는 자기 오른손 왼손도 구별 못 해.” 존슨이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는 소년의 얼굴 약간 옆쪽의 벽을 바라보았다.
“쉼 새 없이 떠들지만 쓸 만한 말은 하나도 없어.” 존슨이 말했다.
아이는 윗입술이 약간 올라갔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p611)
“아빠는 좋은 분이야. 사람들을 도와줘.”
“좋은 분이라고!” 존슨이 사납게 말하더니 고개를 내밀고 소리쳤다. “그 아저씨가 좋은 사람이건 말건 상관없어. 하지만 틀린 소리만 해!” (p611)
"엄마 빗 내려놔!“ 아이가 말했다. 아이는 문 앞에 서서 성소의 신성모독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존슨은 빗을 내려놓고 솔빗을 들어 그걸로 머리를 쓸었다.
“우리 엄마는 돌아가셨어.” 아이가 말했다.
“나는 죽은 사람 물건 안 무서워.” 존슨은 맨 위 서랍을 열고 그 안에 손을 넣었다.
“그 더러운 손으로 우리 엄마 옷 만지지 마!” 아이가 목에 메어서 소리를 질렀다. (p613)
그는 벽장문을 열고 옷걸이를 꺼냈다. 아내의 낡은 회색 겨울 코트가 아직도 거기 있었다. 그것을 옆으로 미는데 그것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옷을 떼어 내려고 거칠게 단추를 풀다가 고치 안의 애벌레라도 본 것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노턴이 그 안에 서 있었다. 얼굴이 붓고 창백했고, 멍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p615)
"아빠 말은 다 헛소리라고 그랬어요!“ 아이가 소리쳤다.
존슨의 얼굴에 교활한 기쁨이 떠올랐다.
그 말은 셰퍼드에게 타격을 주지 않았다. 그런 모욕은 아이의 방어 기제의 일부였다. "어떠니, 루퍼스? 한동안 우리하고 같이 지내 줄 수 있겠니?“ (p616)
그가 나가자 존슨이 고개를 들고 노턴을 보았다. 아이는 쓸쓸한 표정으로 소년을 보았다. 존슨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어떻게 이런 걸 참고 사냐?” 분노로 얼굴이 굳었다. “자기가 무슨 예수 그리스도인 줄 알아!” (p618)
소년은 신발을 마련해 주기도 전에 자신을 실망시켰다. 신발은 내일 찾을 예정이었다. 그의 모든 후회가 갑자기 신발로 향했다. 존슨을 보는 짜증이 배가 되었다.
“아저씨는 저를 완전히 믿는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소년이 말했다.
“믿었던 건 맞아.” 셰퍼드가 말했다. 그의 얼굴은 계속 딱딱했다.
존슨은 경찰과 함께 돌아섰지만, 그 전에 그 눈구멍에서 순전한 미움의 빛이 셰퍼드를 향해 번득였다. (p626)
셰퍼드는 집에 들어가서 어두운 거실에 앉았다. 그는 존슨을 의심하지 않았고, 의심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만약 존슨이 또다시 그가 자신을 의심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p629)
그는 존슨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둘러말하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머릿속으로 연습하고 일어나서 소년의 방으로 갔다. (p629)
셰퍼드는 숨이 목에 걸렸다. 소년이 자신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존슨이 감사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그를 인정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멍청하게 웃으면서 이 순간을 간직하려고 했다. (p631)
“멋지구나! 정말 멋져.” 셰퍼드가 말했다. 자신이 소년의 등뼈를 바꿔 준 것 같았다.
존슨이 돌아섰다. 입술이 얇고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의자로 돌아와 신발을 벗었다. 그러더니 다시 낡은 신발을 신고 끈을 묶었다.
“집에 가져가서 어울리는지 먼저 보려고?” 점원이 물었다.
“아뇨. 저는 그거 안 신어요.” 존슨이 말했다.
“왜, 무슨 문제가 있니?” 셰퍼드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는 새 신발이 필요 없어요. 그리고 필요한 건 내가 알아서 구해요.” 소년의 얼굴은 딱딱했지만 그 눈에는 승리의 빛이 있었다. (p633)
셰퍼드의 얼굴은 분노로 암적색이 되었다. 그는 눈앞에 있는 의수달린 가죽 코르셋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점원이 다시 물었다.
“포장해 줘요.” 셰퍼드가 말하고 존슨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이가 아직 생각이 없어서 그걸 신을 준비가 안 되었네요. 그동안 좀 철이 든 줄 알았습니다.”
소년이 비웃으며 말했다. “아저씨는 처음부터 전부 틀렸어요.” (p634)
셰퍼드는 손수건을 천천히 도로 넣었다. 그리고 소파에 주저앉아 발밑의 깔개를 보았다. 소년의 내반족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땜질투성이 신발이 존슨의 얼굴로 그를 보고 웃는 것 같았다. 그는 소파 쿠션 끄트머리를 손마디가 하얘지도록 꽉 붙들었다. 싸늘한 미움이 밀려왔다. 그는 그 신발이 밉고, 발이 밉고, 소년이 미웠다. 셰퍼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움이 목을 조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p637)
“아저씨는 나를 구하지 못해요. 아저씨는 나한테 이 집을 떠나라고 할 거예요. 지난 두 번의 사건도 다 내가 한 일이에요. 첫 번째 사건도 그렇고, 내가 영화관에 있는 척하면서 저지른 두 번째 사건도요.”
“나는 너한테 나가라고 하지 않아. 나는 너를 구해 낼 거요.” 셰퍼드가 말했다. 그 목소리는 단조롭고 기계적이었다. (p638)
소년은 떠나지 않을 것이다. 셰퍼드의 눈이 빛을 잃었다. 그 눈은 소년의 충격적인 고백이 이제야 의식의 중심에 닿는 듯 밋밋하고 생기 없었다. “제발 떠나 주었으면, 알아서 나가 주었으면.” 그가 중얼거렸다. (p638)
왜 그냥 나가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실패를 인정해. 하지만 존슨을 다시 마주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집혔다. 소년은 셰퍼드를 죄인으로, 그를 도덕적 타락자로 여겼다. 그는 딱히 오만이 아니라도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에게는 질책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존슨에 대한 감정은 이제 자발성을 잃었다. 그는 소년에게 연민을 느끼고 싶었다. 소년을 도울 능력을 갖고 싶었다. 집에 자신과 노턴만 있던 시절이 그리웠다. 싸울 것이라고는 아이의 단순한 이기심과 자신의 외로움뿐이던 시절이. (p640)
"왜 잡히려고 했니? 왜 일부러 잡히려고 한 거니?“ 기자가 존슨 옆에 가려고 이리저리 뛰면서 물었다.
기자의 질문과 셰퍼드의 모습은 소년을 분노에 빠뜨리는 것 같았다. “저 대단한 예수님한테 보여 주려고요!” 존슨이 셰퍼드한테 발길질을 했다. “저 사람은 자기가 하느님인 줄 알아요. 저 사람 집에 사느니 차라리 소년원에 살겠어요. 교도소에 살겠어요! 저 사람은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어요. 자기 오른손 왼손도 구분할 줄 몰라요. 멍청한 아들하고 똑같아요!” 그러더니 잠시 멈추었다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저 사람은 저한테 더러운 말을 했어요!”
셰퍼드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는 문틀을 꽉 붙들었다. (p646)
존슨이 몸을 앞으로 던지며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예요! 내가 거짓말하고 도둑질하는 건 그걸 잘하기 때문이에요! 발은 아무 상관 없어요! 절름발이가 먼저 오는 법이에요! 절름발이가 다 모일 거예요. 내가 구원받을 준비가 되면 예수님이 날 구원해 주실 거예요. 저 더러운 무신론자가 아니라 …… ” (p647)
자신의 행동은 이타적인 것이었다. 그의 목표는 존슨을 구해서 번듯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평판도 희생했고, 자기 아이보다 존슨에게 더 정성을 기울였다. 불쾌감이 악취처럼 공중을 떠돌았고, 마치 자기 입 냄새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나한테 질책할 건 아무것도 없어.” 그가 다시 말했다. 그 목소리는 건조하고 까칠했다. “나는 내 아이보다 그 아이에게 더 많은 정성을 기울였어.” 그는 갑자기 공포에 사로 잡혔다. 소년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는 악마에 사로잡혀 있어요. (p648)
그의 얼굴에서 천천히 색깔이 사라졌다. 백발 머리에 둘러싸인 얼굴이 거의 잿빛이 되었다. 그 문장이 머릿속에 울렸고, 음절 하나하나가 둔중한 타격처럼 그를 강타했다. 입술이 튀틀렸고, 그는 깨달음에 눈을 감았다. 노턴의 쓸쓸한 얼굴이 떠올랐다. 슬픔을 있는 그대로 다 볼 수 없다는 듯 왼쪽 눈동자가 바깥으로 살짝 기운 모습, 그는 자신에 대한 명백하고 강렬한 혐오로 심장이 조여들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공허를 채우기 위해 폭식가처럼 거기 선행을 욱여넣었다. 스스로에 대한 환상을 충족하기 위해 자기 아이를 방치했다. 그는 심장을 측정하는 명석한 악마가 존슨의 눈으로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에 대한 이미지가 쪼그라들어서 모든 것이 캄캄해졌다. 그는 마비감과 공포감에 휩싸여 앉아 있었다. (p648)
만원경을 보느라 등과 귀밖에 보이지 않던 노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는 마구 손을 흔들었다. 아이를 향한 고통스러운 사랑이 밀려들면서 그에게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 것 같았다. 아이의 얼굴이 달라졌다. 구원자의 이미지, 눈부신 빛의 이미지였다. 그는 기쁨에 신음했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갚아 줄 것이다. 다시는 아이를 힘들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나 아이의 방으로 달려갔다. 아이에게 입을 맞추며 사랑한다고 다시는 너를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p648-649)
노턴의 방은 불은 커져 있지만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는 돌아서서 다락방으로 올라갔고, 계단 꼭대기에서 구덩이에 빠질 뻔한 남자처럼 비틀거렸다. 삼각대는 쓰러지고 만원경은 바닥에 뒹굴었다. 그 몇십 센티미터 위의 그림자 정글 속에 아이가 매달려 있었다. 아이는 거기 매달린 채 우주로 여행을 떠났다. (p649)
이교도는 왜 분노하는가?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제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지금까지 본 바로는 사소한 것이 아닌 어떤 일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큰 건을 기다리면서, 다른 일은 중간에 그만둘 게 뻔하니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사람 같았다. (p654)
계시
터핀 부인은 자신이 상냥한 부인과 눈길을 주고받을 때마다 못생긴 처녀의 특이한 눈길이 자신에게 계속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았고, 다시 대화로 돌아가는 데 어려움을 느꼈다.
(p665)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은 그녀 인생의 원칙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흑인이건, 쓰레기건 아니건 자신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감사하는 모든 일 가운데 이 점이 가장 감사했다. (p668)
그분은 자신을 검둥이로도, 백인 쓰레기로도, 못생긴 여자로도 만들지 않았다! 그분은 자신을 지금의 자신으로 만들고 모든 것을 조금씩 골고루 주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자신의 축복을 헤아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82킬로그램이 아니라 55킬로그램인 것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p669)
"지금의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걸 생각하고 또 지금 제가 모든 걸 조금씩 골고루 갖고 게다가 좋은 성격까지 가진 걸 생각해 보면 ‘지금 제가 누리는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예수님!’하고 소리치고 싶어요. 이 모든 걸 못 누릴 수도 있었으니까요!“ 우선, 클로드가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됐을 수도 있다. 그 생각을 하면 그녀는 감사가 넘치고 짜릿한 기쁨이 온몸을 꿰뚫었다. ”아, 고맙습니다. 예수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녀가 소리쳤다. (p672)
그때 터핀 부인은 책으로 왼쪽 눈 위를 맞았다. 책은 그녀가 여학생이 그걸 던지려고 한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 바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녀가 무슨 소리를 낼 겨를도 없이 거친 얼굴이 고함을 지르며 그녀를 향해 테이블을 건너왔다. 여학생의 손가락이 그녀의 부드러운 목에 꺾쇠처럼 박혔다. 그녀는 여학생의 어머니가 지르는 비명 소리와 클로드가 “이봐!”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한순간 터핀 부인은 지진이 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p672)
"나한테 할 말이 있니?“ 그녀가 갈라진 목소리로 묻고 계시를 기다리듯 가만히 기다렸다.
여학생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터핀 부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줌마 고향인 지옥으로 가요. 더러운 흑돼지.” 여학생이 속삭였다. 목소리는 낮지만 또렷했다. 그녀의 눈은 자기 메시지가 과녁에 명중한 것이 기쁜 듯 한순간 빛났다. (p674)
"나는 지옥에서 온 흑돼지가 아니야.“ 터핀 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 부정에는 힘이 없었다. 여학생의 눈도 말도, 심지어 낮고 또렷하고 그녀 자신만을 겨냥했던 그 어조마저 부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기실에는 그 말을 들어 마땅한 쓰레기 여자도 있었지만 그 메시지가 겨냥한 사람은 터핀 부인이었다. 그 사실의 깊은 의미가 이제 비로소 그녀를 강타했다. 그 방에는 자기 아이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여자가 있었지만 그 여자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다. 그 메시지는 점잖고 성실하고 신앙심 깊은 루비 터핀을 겨냥했다. 눈물이 말랐다. 이제 그녀의 눈은 분노로 타올랐다. (p676)
“왜 나한테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 거죠?” 그녀가 낮고 사납게 말했다. 크기는 속삭임 정도였지만 응축된 분노는 고함 소리 같았다. “내가 어떻게 동시에 돼지이면서 나일 수 있나요? 또 내가 지옥에서 왔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는 건가요?” 호스를 들지 않은 손은 주먹을 쥐었고, 호스를 든 손은 물줄기를 늙은 암퇘지의 눈에다 마구 쏘았다. 성난 암퇘지의 비명 소리는 그녀에게 들리지 않았다. (p682)
“왜 나예요?” 그녀가 외쳤다. “여기서 백인 쓰레기건 흑인 쓰레기건 내가 도와주지 않은 자는 하나도 없어요. 나는 또 날마다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일해요. 교회에도 가요.” (p682)
“내가 어떻게 돼지예요? 내가 어떻게 저놈들하고 같아요?” 그녀가 말하고 물줄기로 새끼 돼지들을 찔렀다. “거긴 쓰레기가 많았어요. 굳이 내가 지목될 필요가 없었어요. 나보다 쓰레기가 더 좋다면, 쓰레기한테 가세요.” 터핀 부인이 악을 썼다. “당신은 나를 쓰레기로 만들 수도 있었어요. 검둥이로 만들 수 있었어요. 쓰레기를 원했다면 왜 나를 쓰레기로 만들지 않았나요?” (p683)
“그래요. 나를 돼지라고 불러요! 나를 다시 한 번 돼지라고 불러요. 지옥의 돼지, 지옥의 흑돼지라고 불러요. 밑바닥이 꼭대기가 되게 하세요. 그래도 세상에는 위와 아래가 있을 거예요!”
뒤틀린 메아리가 돌아왔다.
마지막 분노의 파도가 밀려오자 그녀는 부르짖었다. “당신이 대체 뭔데요?” (p683)
파커의 등
아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남자가 주인인 농장도 얼마든지 있어. 꼭 여자 주인 밑에서 일할 필요는 없잖아.”
“가끔은 입 좀 다물어 봐.” 파커가 말했다.
아내가 자신이 일하는 농장의 주인 여자를 질투하는 거라면 기뻤겠지만, 아내는 그와 그 여자가 서로 좋아했을 때 생겨날 죄를 걱정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p687)
그는 얼마 후 최초의 문신을 했다. 대포에 앉은 독수리였다. 그 지역 문신사가 했다. 별로 아프지 않았다. 파커에게는 할 만하다고 느껴질 만큼의 통증뿐이었다. 그것 또한 특이한 일이었다. 이전까지는 아프지 않은 일만이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690)
그녀는 그의 문신이 허영 중의 허영이라고 말했고, 그가 욕하는 소리를 들었고, 또 구원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자기는 구원받을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는데도 그를 좋아했다.
(p697)
세라 루스는 결혼 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았고, 파커는 더없이 우울해졌다. 아침마다 그는 이제 충분히 참았다고,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그는 매일 밤 집에 돌아갔다. 견딜 수 없다는 느낌이 들 때마다 그는 문신을 새로 새기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공간은 등뿐이었다. (p698)
“심판의 날에 예수님이 이렇게 물어보실 거야. ‘너는 평생토록 온몸에 그림을 새기는 것 말고 무슨 일을 했느냐?” 그녀가 말했다. (p698)
파커의 불만이 너무 커져서 문신 말고는 담아낼 것이 없었다. 그것은 등에 새겨야 했다. 그 일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 속에 모호한 아이디어가 천천히 생겨났다. 세라 루스가 거부할 수 없는 주제, 그러니까 종교적인 주제의 문신을 하는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p699)
골프공만 한 태양은 규칙적으로 그의 앞에 있다 뒤에 있다 했지만, 그는 뒤통수에도 눈이 있는 것처럼 앞에서도 뒤에서도 다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나무가 그에게 가지를 뻗었다. 쿵 소리가 그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고, 그는 자신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하느님!” (p700)
"구원받은 여자하고 결혼했어요. 그건 잘못이었어요. 여자를 떠나야 했어요. 그런데 결혼했고 임신 중이에요.“ 파커가 말했다. (p706)
파커가 문신을 보았고 얼굴이 하얘져서 물러섰다. 거울에 비친 그 눈이 그를 바라보았다. 고요하고 또렷하고 엄격하고 침묵에 잠긴 눈이,
“파커 씨가 고른 겁니다. 다른 걸 권해 드릴 걸 그랬나 봅니다.” 문신사가 말했다. (p707-8)
파커는 오랫동안 당구장 뒷골목에 주저앉아서 자기 영혼을 살펴보았다. 그의 영혼은 사실과 거짓이 뒤얽힌 거미줄 같았다. 그것들은 자신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필요해 보였다. 이제 그가 등에 새긴 눈은 복종을 바쳐야 하는 눈이었다. 그 점은 그 무엇 못지않게 분명했다. 파커는 평생토록 이런 본능이 찾아오면 투덜거리건 욕을 하건 두려움을 느끼건 열락을 느끼건 거기 복종했다. (p709)
“아, 제발. 이건 그냥 하느님의 그림이야.” 파커가 한숨 쉬며 말했다.
“이건 우상숭배야! 우상숭배!” 세라 루스가 소리쳤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우상을 탐하고 있어! 나는 거짓말과 허영은 참을 수 있지만 이 집에 우상숭배자는 원하지 않아!” 그러더니 빗자루를 들고 그의 어깨를 때리기 시작했다.
파커는 너무 놀라서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만히 앉아서 빗자루를 맞았고, 마침내 정신이 혼미해지고 문신한 그리스도의 상 위로 흉터가 부풀어 올랐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현관으로 걸어갔다. (713)
심판의 날
“태너씨는 여기 살 권리가 없어요. 나는 태너 씨를 내쫓을 수 있어요.” 박사가 말했다.
태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판을 바라보았다. (p726)
박사가 말했다. “태너 씨처럼 늙은 아버지를 모시고 싶지 않을걸요. 말로는 그렇다고 해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p727)
그는 언제라도 검둥이를 위해 일하는 하얀 검둥이가 될 수 있었다. 뒤쪽에서 딸이 부엌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p727)
그는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쪽지만 남겨 둘 생각이었다. 수표가 오면, 택시를 타고 버스 터미널까지 가서 길에 오를 것이다. 그 일은 자신뿐 아니라 딸에게도 기쁜 일이 될 것이다. 그녀는 우울한 아버지가 불편했고, 자식 된 도리가 버거웠다. 그가 몰래 빠져나가면 딸은 어쨌건 노력했다는 홀가분함과 그런데 아버지가 배신했다는 만족감을 얻을 것이다.
(p729)
그는 곧 사람들이 기차에서 관을 내려 짐수레에 싣느라 몸이 기울어진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 소리를 내지 않았다. 기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떠났다. 잠시 후 짐수레가 그를 싣고 덜커덩덜커덩 역 한쪽으로 갔다. 발소리들이 다가와서 그는 사람들이 모여든다고 생각했다. (p738)
딸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그를 발견했다. 모자가 얼굴 앞에 내려와 있고 머리와 팔은 난간 살 사이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의 다리는 차꼬를 채운 것처럼 계단 위로 덜렁거렸다. 그녀는 정신없이 그를 끌어내다가 경찰서로 달려갔다. 그들은 톱으로 난간을 잘라 그를 빼내고 그가 죽은 지 한 시간쯤 됐다고 말했다. (p739)
그녀는 그를 뉴욕 시에 묻었지만 그러고 났더니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밤마다 뒤척거리며 잠을 못 자니 얼굴에 주름이 깊어졌다. 그래서 결국 그를 파내서 시신을 코린스로 보냈다. 그러자 밤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 아름다운 용모도 돌아왔다. (p739)
3. 이 책에 대한 간략한 나의 느낌 또는 소개
소설이라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곧 혼돈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에 기괴한 상황, 잔혹한 내용들로 인하여 자주 읽기를 멈추었고, 개인적인 다른 일들도 겹쳐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4월에 시작한 읽기가 악천고투 끝에 재독을 하니 10월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