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자가 보는 관점에서 고려는 신라의맥을 이었고 발해와 거란이 고구려의 맥을이어 금과 청으로 계승된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 거란과 동이족의 화두는 누가 더 고조선과 고구려의 적통인가에 관심이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운영자 주)
▶ 고려사절요 권2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계사 12년(993), 송 순화 4년ㆍ거란 통화 11년
煕曰,非也,我國,卽高勾麗之舊也,故號高麗,都平壤,若論地界,上國之東京,皆在我境,何得謂之侵蝕乎,且鴨綠江內外,亦我境內,今女眞,盜據其間,頑黠變詐,道途梗澁,甚於涉海,朝聘之不通,女眞之故也,若令逐女眞,還我舊地,築城堡,通道路,則敢不修聘,將軍如以臣言,達之天聰,豈不哀納,辭氣慷慨,遜寧,知不可强,遂具以聞,丹帝曰,高麗,旣請和,宜罷兵,煕,留丹營,七日而還,王,大喜,出迎江頭,卽遣侍中朴良柔,爲禮幣使,入覲,煕,復奏曰,臣,與遜寧約,盪平女眞,收復舊地,然後朝覲可通,今纔收江內,請俟得江外,修聘未晩,王曰,久不修聘,恐有後患,遂遣之。
서희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바로 옛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다. 그런 까닭으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땅의 경계를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의 지경(地境)에 있는데, 어찌 우리가 침식했다고 이르느냐. 더구나 압록강 안팎 또한 우리나라의 경내인데, 지금 여진이 그 사이에 점거하여 교활하고 변덕스럽게 길을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어렵게 되었으니, 조빙이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 버리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 주어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한다면,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신(臣)의 말을 귀국의 황제에게 알린다면 어찌 딱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
서희가 다시 아뢰기를, “신이 소손녕과 약속하기를, '여진을 소탕하여 평정하고 옛 땅을 수복한 후에 조빙을 통하겠다.' 하였는데 이제 겨우 압록강 안쪽만 수복하였으니, 청컨대 강 바깥쪽까지 수복하기를 기다렸다가 조빙을 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오래도록 조빙을 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렵다." 하고 마침내 박양유를 보내었다.
☞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서기 993년에 이미 압록강 안쪽은 수복하였고, 바깥쪽에 대한 수복을 논하고있는 것으로 보아 ‘서희 수복 6주’와 6성이 압록강 안과 밖에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6성 내용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갑오 13년(994), 송 순화 5년ㆍ거란 통화 12년
命平章事徐煕,率兵攻逐女眞,城長興歸化二鎭,及郭龜二州。
평장사(平章事)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여진을 공격하여 쫓아내고, 장흥진(長興鎭)ㆍ귀화진(歸化鎭)두 진과 곽주(郭州 )ㆍ귀주(龜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고려사절요 제2권
성종 문의대왕(成宗文懿大王) 을미 14년(995), 송 지도(至道) 원년ㆍ거란 통화 13년
是歲,命平章事徐煕,帥兵,城安義興化二鎭。遣李知白,如契丹,貢方物。
이해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안의진(安義鎭)ㆍ흥화진(興化鎭) 두 진에 성을 쌓게 하였다.
▶ 속자치통감 卷第三十 宋紀三十
己未,高麗王詢遣刑部侍郎田供之奉表於遼,稱病不能朝。遼主怒,命取興化、通州、龍州、鐵州、郭州、龜州六城。기미, 고려왕 순(詢)이 형부시랑 전공을 시켜 요에 표를 보내, 병을 빙자하여 입조할 수 없다고 하였다. 遼主가 노하여 화주,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귀주 6성을 취하도록 명하였다.☞속자치통감에도 ‘서희 수복 6주’가 압록강의 동쪽이라는 기록은 없다.
▶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東寧路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居平瓖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元至元六年,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為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鎮隸婆娑府.本路領司一,餘城堙廢,不設司存,今姑存舊名.錄事司.土山縣.中和縣.鐵化鎮.都護府,自唐之季,地入高麗,置府州縣鎮六十餘城,此為都護府,雖仍唐舊名,而無都護府之實.至元六年,李延齡等以其地來歸,後城治廢毀,僅存其名,屬東寧路.定遠府.郭州.撫州.黃州.領安岳、三和、龍岡、咸從、江西五縣,長命一鎮.
원사/지/권59 지제11. 지리2/요양등처행중서성/동녕로
동녕로, 본 고구려 평양성. 장안성이라고도 함. 한이 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토군을 두었는데, 이곳에 낙랑을 두었다. 진 의희 이후 고구려 왕 고련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여 평양성을 함락한 이후 그 나라는 동으로 옮겨갔다. 압록수 동남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 평양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을 서경으로 하였다. 원나라 지원 6년, 이연령, 최탄, 현원열 등이 부주현진 60성을 들어 항복하였다.
8년 서경을 동녕부로 고치다. 13년.(..) 현재도 옛 명칭 그대로다(今姑存舊名). 토산현, 중화현. 철화진. 도호부. 당나라 말에 고려에 편입되어 부주현진 60여성을 두고 이곳은 도호부가 되다. 당의 명칭을 그대로 쓰다(雖仍唐舊名).(...) 이연령 등이 항복한 뒤 성의 치소가 훼손되었으나 그 이름은 그대로 남아있고(僅存其名) 동녕부에 속하다. 정원부(定遠府), 곽주(郭州), 무주, 황주는 안악, 삼화, 용강, 함종, 강서의 다섯 개 현과 장명진을 관할하다.☞ 따라서 고려사, 요사, 원사 등에 기록된 지명과 관할하는 현의 지명은 원래 위치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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