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경건주의 운동과 한국 교회 지형은(독일 Bochum대학 신학박사, 성락교회 담임)
1. 머리말
경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를 다루어야 한다. 경건주의는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가장 크게 오해를 받아온 운동 가운데 하나기
때문이다.[1]) 서구에서 경건주의를 보는 시각을 살피자. 박사 학위 논문에서 경건주의를 다룬 데일 브라운은 자신의 다른 책에서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이렇게 단적으로 말한다.
“20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은 ‘경건주의’라는 말을 바람직하지 못한 신학적 경향들을
공격하는 모욕적인 말로 사용했다.…… 20세기 신학 용어로서 경건주의는 감정주의, 신비주의, 합리주의, 주관주의, 금욕주의, 정적(靜寂)주의,
신인협력주의, 천년왕국주의, 도덕주의, 율법주의, 분리주의, 개인주의 및 내세 지향주의 등과 같이 부정적 의미로 취급되고 있다.”[1])
경건주의가 시작되어 한참 진행되던 17,18세기에 경건주의를 반대하며 공격한 정통주의는 경건주의를 다음과 같은 경향들로 보았다.
도나티스트파, 펠라기우스파, 슈벵크펠트파, 바이겔주의자들, 오시안더파, 혼합주의자, 마욜주의자. 퀘이커파, 열광주의자…. 경건주의를 비난하는
17세기와 20세기의 비난에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부정적인 신학과 신앙의 흐름을 다 찾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다른 쪽에 경건주의에 대한 찬사도 있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을 이은 두 번째 종교개혁운동이며 근대 선교 운동이 경건주의에서
시작되었다. 경건주의는 제도화와 고착된 교리화 때문에 죽어가던 정통주의적 기독교 신앙에 활력을 불어넣은 운동이었다. 경건주의 운동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계몽주의가 몰려오는 가운데 내적인 생명력과 따뜻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경건주의를 이해하는 것도 서구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으로 무조건적인 찬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정확하지 않는 피상적인 지식에 근거한 오해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이
경건주의를 개인주의적이며 내세 지향적인 신앙으로서 사회적인 문제나 이웃을 향한 사랑에는 무관심한 신앙유형으로 판단하며 비난한다. 그리하여
경건주의가 개혁과 새로움을 거부하고 종교 체제를 유지하는 낡은 틀이라고 본다. 한편, 가부장적이며 제도 편향적인 보수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경건주의가 가진 이런 특성 때문에 경건주의적 신앙을 좋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분별한 비난과 지나친 찬사는 모두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이다. 될 수 있는 대로 객관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논문의 목적은 17세기의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의 본질을 살피고 그것을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연관시켜 생각해보는 것이다.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로 한정하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발생 초기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에 발생해서 18세기에 절정에 이른 운동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와 연관시키는
논의는 그저 짤막하게 다룰 것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어느 정도는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으리라본다. 경건주의는 그 본질상 갱신 운동인데 이런 면에 초점을 맞추고
경건주의를 살펴 나가다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와 연결되는 점이 상당 부분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두 번째는 이 발제를 준비하는 나의 한계
때문이다. 5년만에 담임 목회 현장에 돌아와서 6개월 정도 지났는데 한국교회 현장을 신학적으로 분석할 여력이 없었다.
경건주의가
무엇인가를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경건주의가 오해받아온 까닭은 살펴야 한다. 다음으로 시대 흐름과 배경을 뜯어본다. 특히 경건주의가
일어난 17세기의 시대 흐름과 배경은 경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어느 사상이나 운동도 그 시대의 영향을 초월한
것은 없다. 사상이나 운동 또는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언제나 ‘시대의 아들’이다.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 문제, 시대 흐름과 배경 문제를
사리면서 벌써 경건주의에 대한 통속적인 지식이 많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작업에 이어서 경건주의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살피되
17세기, 그러니까 경건주의의 초기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그 본질로 보아서 경건주의가 갱신 운동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와 연결되는 점을 간략하게 토론거리를 제시하는 식으로 언급할 것이다.
2. 오해와 과제
위에서
우리는 무분별한 비난과 지나친 찬사를 포함하는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의 단면을 보았다. 그러면 경건주의에 대한 이런 오해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오해의 원인을 무엇보다도 먼저 경건주의란 개념의 혼란에서 찾을 수 있다.[1]) ‘경건주의자’란 말은[1]) 대략 1674년 즈음에 필립야콥
스페너를[1])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처음 쓰였다. 경건주의 운동을 구체적으로 시작했던 스페너 목사는 그 당시 독일 마인 강변에 있는
도시 프랑크푸르트의 수석 목사였다. 1689년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를[1]) 중심으로 라이프찌히 에서 일어난 각성 운동 때문에 ‘경건주의’란
말은[1]) 독일 전역에 쓰이게 되었다. 19세기가 한참 지나도록 경건주의는 주로 스페너와 프랑케에 연결된 신앙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진젠도르프 백작이 이끌었던 헤른후트파 운동도 경건주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알브레히티 리츨이 결정적으로 경건주의의 범위를
넓혔다. 세 권으로 된 경건주의 연구서에서[1]) 리츨은 경건주의의 본질을 신비주의적이며 세상 도피적인 신앙 경향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경건주의, 분파주의, 신비주의, 헤른푸트파 사이에 있는 구별이 모호해지고 이 모든 경향이 경건주의라는 이름에 포함되었다. 네델란드를 중심으로 한
“두 번째 종교개혁 운동”[1])이 경건주의에 포함된 것도 이런 정황에서였다. 리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국의 청교도 운동까지 경건주의에
집어넣는 견해도 있었다.[1]) 리츨의 견해는 후대의 경건주의 연구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리츨 이후에 경건주의의 범위에 대한 리츨의
견해를 반박하고 범위를 좁게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경건주의 연구는 대체로 리츨의 견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경건주의의 범위 확대가 가져온 결과 중의 하나는 경건주의라는 현상 안에 다양한 교파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16세기말과
17세기에서 본다면 루터파뿐 아니라 개혁파도 경건주의에 포함되었다. 개혁파 가운데서도 네덜란드의 경건주의는 정통주의 족에 많이 가까운데 비하여
‘영국의 경건주의’(청교도 운동)는 훨씬 더 저항적이며 개혁을 지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파 안에서도 스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가
루터파의 종파적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데 비하여 진젠도르프의 경건주의는 초교파적인 성격이 강하다. 여기에다(뒤에 논하게 될 것이지만)
시대적 범위가 늘어남에 따라 17세기의 감리교 운동도 경건주의에 포함되는 것이다. 경건주의의 범위가 넓어진 것은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서 개념의 혼돈스러움과도 연결된다.
개념의 넓이와 다양함, 그리고 혼돈스러움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는 것이 경건주의가 포괄하는 지역적 범위가 넓다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지역적으로 거의 서구 전체를 포괄한다. 17세기 초엽 경건주의가 발생할
때 그 중심이었던 독일과 네델란드와 영국을 비롯하여 로마 카톨릭이 강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쪽에도 신비주의적 경건주의 흐름이 있었다. 개혁파
흐름의 스위스, 루터파가 주된 경향이었던 동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경건주의 운동에 포함된다. 그 당시에 새로운 대륙이었던 북아메리카도 예외도
아니었다. 지역적인 넓이는 자연히 경건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입장 차이를 초래한다. 각 나라나 서로 다른 문화권의 연구자는 대개는 자신의
입장에서 경건주의를 보게 마련이다. 무의식적인 이러한 입장 차이는 때로는 의도적인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1])
지역적인
범위가 넓은 것 말고도 시간적인 광범위함도 오해의 원인이 된다. 경건주의의 시대적 출발을 일찍 잡는 견해를 따른다면 경건주의는 16세기 후반에
벌써 시작된다. 이 때는 종교개혁 시대 직후며 개신교 정통주의가 시작되는 즈음과도 같다. 끝나는 시기에 대해서 말한다면, 경건주의는 시작한 때는
있지만 끝난 때는 없는 운동이라는 주장을 고려할 때 경건주의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운동이기도 하다.[1]) 제아무리 역사적인 연속성을 갖는
신앙운동이나 신학적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시대적인 배경 구조가 변하면 그 신앙 운동과 신학의 강조점도 바뀌게 마련이다. 같은 표현을 쓴다고
하더라도 담고 있는 속뜻이 달라지게 된다. 같은 의미를 담기 위해서 시대에 따라 표현이 달라질 수밖에 없게도 된다. 경건주의가 일어나던 초기인
1600년 즈음과 칼 바르트와 에두아르 투르나이젠이 경건주의를 심하게 비판하던 20세기전반은 매우 다른 시대 배경을 가지고 있다. 바르트와
투르나이젠이 비판하던 ‘경건주의’는 좀 더 세밀한 표현으로 말한다면 각성운동이며, 그것도 자유주의 신학에 밀려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굳어진
각성운동의 뒷물 정도였다. 300년이 훨씬 더 넘는 기간의 신앙 흐름을 경건주의라는 한 개념 안에 포괄하는 것이 무리임을 이런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흔히 정통주의란 말이 역사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꽉 막힌 보수주의자를 가리키는 말로 쉽게 쓰이고, 자유주의란 단어가 기존 제도나 관습을
반대하는 진보주의자 모두를 뭉뚱그려 나타낼 때 쓰이는 경우에 우리는 개념의 포괄성이 끼치는 위험을 본다. 그런데 경건주의는 정통주의나
자유주의라는 말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에 경건주의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규명하지도 않은 채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학사 안에서 그 대표적인 경우를 잠깐만 짚어
보자.[1]) 먼저 우리는 알브레히트 리츨에게서 그런 오해를 본다. 리츨은 세 권으로 된 경건주의 역사에 대한 저술에서 경건주의를 로마 가톨릭적
신비주의에 뿌리를 둔 흐름으로 보았다. 리츨의 신학적 전제로 볼 때 이런 흐름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윤리 도덕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있는
리츨 신학의 전제로 볼 때 경건주의는 교회를 갱신한 운동이 아니라 교회를 퇴보시킨 운동이었다.[1]) 리츨 당시에 경건주의에 대하여 리츨보다 더
정확하게 본 학자들이 많았다. 사료에 근거하여 더 객관적으로 경건주의를 평가한 연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신에 리츨은 워낙 걸출한 ‘신학적
스타’였다. 대중적 인식은 흔히 사실적인 것보다 통속적인 유행을 더 따를 때가 많은 법이다. 그리하여 리츨 이후에는 리츨의 견해가 교회사 통사의
서술이나 일반적 인식을 지배하였다. 경건주의를 곡해하는 데 기여한 신학사의 매듭은 ‘또 한 사람의 신학적 스타’와 연관되어있다. 20세기 신학의
거봉인 칼바르트다. 인간적인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을 강조한 바르트와 그의 동료 투르나이젠이 보기에 경건주의는 인본주의며
혼합주의였다. 경건주의에 대한 바르트 계열의 비판은 경건주의를 역사적으로 차분히 평가할 기회를 또 한 번 박탈해 버린 셈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경건주의 연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경건주의가 종교개혁이후에 있었던 개신교 각성 운동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깊게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친 교회와 사회 갱신 운동임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특히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연구는
경건주의에 관한 이전의 연구를 많은 부분에서 수정하고 넘어설 수 있는 결과를 내었다.
모든 시대 사조가 다 그렇듯이 경건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운동이 일어난 시대흐름과 배경을 알아야 한다. 무릇 본질론은 상황론과 떼어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그리고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흐름과 시대 배경을 살피는 것은 그래서 매우 유용하다. 특히 이런 작업에서 중세에서 계몽주의에
이르는 큰 포물선을 그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런 맥락을 주로 경건주의와 관련되는 범위 안에서만 살펴보자.
3. 시대 흐름과 배경
경건주의가 발생한 작은 배경을 든다면 종교개혁에서 정통주의를 거쳐 게몽주의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경건주의는 이 가운데에서 정통주의와 계몽주의 사이에 자리를 잡는 다고 볼 수 있다. 좁게 볼 때 경건주의는 이른바 ‘죽은
정통주의’를 반대하면서 일어났다.[1]) 경건주의자들이 보기에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이 일어난
100여 년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정통주의는 화산처럼 폭발한 종교개혁이 정착하면서 제도화되고,
이론적으로 정리되면서 신학화하는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자연히 종교개혁의 중요관점들이 현실적인 삶에서 멀어지면서 이론적 영역에만 머물게도
되었다. 이런 상황은 종교개혁 후 기독교 안에 형성된 종파 사이의 교리 논쟁과 깊은 관계가 있다.[1])
종교개혁 후에 생긴
기독교 안의 세 종파 곧 루터파와 개혁파와 로마 카톨릭은 1555년까지 서로 무력으로 싸웠다. 그러다가 1555년에 아우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가
열리고 여기에서 루터파와 로마 카톨릭이 화해하였다. 이 회의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로
가장 처음으로 서로 다른 기독교 종파가 공존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이 회의를 통하여 마련된 것이다. 오직 하나의 진리만을 인정했던 중세의
단일 구조가 깨지고 진리는 둘 이상일 수도 있다는 길이 열렸다. 1555년을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가 시작된 때로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각
종파는 무력대신 논리로 싸웠다. 교리 논쟁이 극심해졌다. 이런 가운데 교리 논쟁을 위해서 논리적이며 개념적 수단이 필요해졌고 이런 필요성 때문에
루터가 앞문으로 쫓아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슬그머니 다시 뒷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수많은 교리 논쟁을 통하여 교파마다 신조를
만들었고 이로써 거대한 교리 체계가 생겼다. 중세의 스콜라 사상 체계와 비교할 수 있는 ‘개신교 스콜란 신학’이 건축된 것이다.
1600년 즈음에 신앙적 정체성이 불확실해지는 상황 곧 ‘경건성의 위기’가[1]) 생긴 것이 이런 흐름에서였다. 경건성의 위기
현상은 이 시기에 유럽전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경건성의 위기는 매우 중요하다. 경건주의의 발생은 이 현상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에 형성되는 객관적인 거대한 교리 체계가 개인에게 주관적 확신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신앙
정체성이 흔들린 것이다. 이 즈음의 개신교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문제 의식과 정통주의 시대의 교리 논쟁을 잘 알고 또 이해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공감할 수 없었다. 이런 위기 가운데서 이것을 넘어서고자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다. 영국의 청교도 운동, 네델란드의 개혁파 정통주의 안에 있던
‘두 번째 종교개혁운동’, 독일 루터파 정통주의 안의 갱신적 움직임, 프랑스 카톨릭의 얀센주의 운동, 동유럽 유대교 안의 하씨디즘 운동 등이
1600년 즈음의 경건성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신앙적 흐름들이었다.
정통주의는 바른 교리 또는 정통 교리가 무엇인지를 확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 또는 경건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1]) 교리에서 삶으로 강조점을 옮긴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정통주의를 살의 실천과 변화를 무시한 ‘죽은 정통주의’로
보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경건주의가 교리나 신학을 무시하고 체험만 강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교리를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경건주의자들에게 종교개혁과 그 이후에 이루어진 개신교적 교리는 기본적으로 전재된 것이었다. 그들은 교리와 삶을 두고
양자택일하지 않았다. 다만 무게 중심을 삶에 두었던 것이다.
계몽주의는 경건주의와 더불어 정통주의를 반대하고 나온 운동으로
인식된다. 교리적 편협성을 반대하고 인간 이성의 자유로움과 가능성을 신뢰한 사상인 것이다. 신이 아니라 인간, 계시가 아니라 이성,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것을 향한 믿음 등은 계몽주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데카르트의 말에서 우리는 이런 경향의 고전적
표현을 볼 수 있다.[1]) 계몽주의는 이러한 믿음 아래 이성을 토대로 하여 미래를 낙관했다. 계몽주의와 경건주의는 처음에 서로를 동지로
생각했다. 그러나 곧 서로가 같이 걸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독일에서 1720년대 이후에 본격화된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사이의 갈등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사이의 일시적 연대와 곧 이은 갈등은 이 둘 사이에 차이점뿐만 아니라 공유점도 있으리라고
추측하게 만든다. 먼저, 쉽게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정통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두 사조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인간 편의
경험과 인식을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에서 각기 다른 구조로 인식되기는 한다.
계몽주의에서는 이성을
중시하고 여기에 근거를 둔 인간 정신 작용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 나타나고, 계몽주의에서는 교리적인 믿음보다는 개인의 체험과 경험에
근거한 믿음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다. 정통주의가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이제는
예수의 재림만 남은 것으로 보면서 미래를 닫힌 것으로 생각한 데 반하여 계몽주의와 경건주의는 미래를 열린 것으로 인식했다. 물론 여기서도 두
흐름이 딛고 선 토대는 달랐다.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의 가능성을 근거로 미래를 낙관했고 경건주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경의 약속과 교회사적
사례를 토대로 하여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 배경과 흐름에서 작은 배경을 살폈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흐름에는 작은 배경과 큰 배경이 있다.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 흐름에서 더 큰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세에서 근세의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변화다.
중세에서 신앙은 개인적인 확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일하고 보편적인 교회와 단일한 진리를 구현하고 있는 제도적인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구원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신앙은 구원의 제도에 소속되는 것이며 이것을 체계화한 것이 성례전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과
그 결과 발생한 르네상스 시대를 시작으로 중세가 해체되기 시작했고 삶과 신앙의 틀이 바뀌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오늘날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구조틀의 변화’[1])에 버금가는 지각변동이 그 당시에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제도적 교회가 그렇다고 인정한 객관적 신앙
구조로는 더 이상 만족 할 수 없게 되었다. 내 자신에게 확신으로 와 닿아야만 했다. 주관적 신앙확신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집단적 소속감보다 개인적 인격성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이동하는 이런 변화는 중세에서 계몽주의로 이전하는 과정을
대표하는 경향이다. 경건주의는 크게 보아 이런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적 현상이라고 파악해야 한다.
시대 흐름과 연관하여 하나 더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중세는 교회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이 분리되지 않은 사회였다. 교회와 국가, 신앙과 세속의 삶은 늘 하나로 짜여 있었다.
이 두 영역이 본격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계몽주의에서다. 그러니까 경건주의는 교회적 영역과 세속 사회가 분리되기 전 마지막 시대에 일어난
운동이다. 바야흐로 이 두 영역이 나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던 때였다. 경건주의가 사회적 영역을 무시하고 개인의 내면으로만 침잠한 운동이라는
통념이 잘못된 것임은 이 본격적 배경 구조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경건주의 운동에서 ‘교회를 갱신하자’는 것은 동시에 ‘사회를 갱신하자’는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경건주의 운동이 교회와 세속 영역 모두에 영향을 끼친 것은 경건주의가 일어난 이러한 시대 특징 때문이기도 한다.
그러면 중세에서 근대의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큰 흐름 속에서 정통주의를 반대하며 신앙과 삶의 갱신을 외치며 일어난 경건주의 본질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4. 경건주의 본질
경건주의는 본질상 갱신 운동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갱신
운동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경건주의 말고도 많았다. 경건주의가 추구한 갱신의 구체성과 독특성을 파악하는 일은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와 관련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경건주의의 범위를 좁혀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말고도 앞서 말한 경건주의 개념의 폭넓음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흐름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그 운동이 일어나는 초기에 그 운동의 진행을 규정할 본질적인 요소가 이미 배태되어 있고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건주의 본질 논의에서 초기에 초점을 맞추는 까닭이 이것이다.
경건주의의 발생을 말할 때 우리는 뚜렷하게 드러난 한 사람을 접하게
된다. 경건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스페너다.[1])경건주의를 교파에 따라 나눈다면 루터파 경건주의와 개혁파 경건주의로 나눌 수 있는데
경건주의가 후대에 인식되고도 경건주의적 흐름이 주로 이어졌던 것은 루터파 중심으로였다.[1]) 스페너를 초점으로 경건주의 본질을 다루는
변명이다. 스페너가 쓴 중요한 책 한 권이 또 경건주의 발생의 중심에 위치한다. 『경건한 요청』이란 책이다.[1]) 경건주의의 출발에서
1675년은 매우 중요하다. 이유는 이 해에 『경건한 요청』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기획서다. 스페너는 처음에는
1675년 봄에 발간된 요한 아른트의 복음서 설교집 서문으로 이 글을 썼다. 그런데 독자들의 요청 때문에 이 서문이 같은 해 가을에 『경건한
요청』이란 제목을 달고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경건주의 연구자들은 이 책을 ‘경건주의의 방향 제시서’(Die Programmschrift des
Pietismus)라고 부른다. 이 책은 교회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책의 출판을 통하여 경건주의가 본격적으로
불타올랐고, 이 책 안에 그 이후로 진행되는 경건주의 운동의 중요한 관점이 거의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경건주의 전반을
시야에서 잃지 않으면서 그러나 주로 경건주의가 발생한 17세기 초점을 맞추어 스페너의 『경건한 요청』을 중심으로 경건주의 본질을 다루어 본다.
1) 갱신해야만 하는가?
이 물음을 다르게 표현하면 ‘갱신은 필요한가?’ 곧 갱신의 필요성을 묻는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은 갱신이 시급하고 절박하다고 보았다. 갱신하려는 열망은 그 이전에 위기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현재의 상태를 위기로
진단하고 이를 심각하게 깨닫는 정신적이며 영적 각성 상태가 먼저 있어야 갱신을 향한 움직임이 이는 것이다. 1618-1648년의 30년 전쟁을
겪고 나서 황폐해진 17세기 독일에서 갱신은 일반적인 주제였다. 그러나 갱신의 필요성을 느끼는 강도에서 구체적인 갱신운동으로 이어질 정도로
강했던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 곳 가운데 하나가 개혁파 교회가 주류를 이루었던 로스토크였다. 이곳의 성직자 테오필 그로쓰게바우어는
1661년에 『황폐한 시온에서 외치는 파수군의 소리』란 책을 썼다.[1]) 그로쓰게바우어는 이 책에서 당시의 설교를 비판한다. 그렇게 설교가
많은 데도 신앙적 회심과 구원의 열매가 적은 것을 지적했다. 설교는 많이 하는데 교회가 영적으로 더 피폐해가고 신앙이 타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면서 거듭남을 강조했다.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스페너는 1662년에 튀빙엔에 머물 때 그로쓰게바우어의 책을 읽었다. 스페너는
자서전에서 교회의 타락과 갱신의 필요성을 보는 눈을 이 책을 통해서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스페너는 『경건한 요청』에서
교회의 타락한 현실과 그 위기 상황을 절박하게 인식하고 있다. 크게 서문과 본론으로 나눌 수 있는 『경건한 요청』에서 본론은 다시 셋으로
나뉘는데 그 첫 번째 덩어리가 타락한 교회 현실에 대한 진단이다.[1]) 스페너가 보기에 타락은 바닥까지 미쳤다. 스페너가 서문의 처음을
예레미야 9:1의 통곡[1])으로 시작하는 것도 타락의 심각성을 깊게 인식한 때문이다. 위기를 각성하는 것은 비교 대상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경건주의자들이 그 당시의 교회와 시대 상황을 위기라고 진단한 것은 무엇에 비교했기 때문인가? 가깝게 종교개혁이며 멀게는 초대교회였다. 경건주의
운동은 미완성인 종교개혁을 완성하려는 운동이었다. 교리면에서는 완성되었지만 그 교리를 삶의 현장에 실천하지 못한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하여
종교개혁 정신을 구현함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경건주의 운동이 목표로 삼은 또 다른 초점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급진적 경건주의
운동 집단에서 초대 교회의 이상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경건주의 운동은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2) 갱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갱신은 가능한가?’ 곧 갱신의 가능성을 묻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위기를 각성하기는 했지만 현실 교회나
사회의 갱신 가능성을 포기하고 은둔하거나 사회를 등진 운동이나 집단도 많았다. 경건주의자들은 전반적으로 갱신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건주의 안의 여러 집단에서 갱신 가능성의 강도는 각각 다르다. 갱신의 가능성을 가장 적게 가진 집단은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갱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한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은 기성 교회에 구원이 없다고
생각한 급진적 경건주의자들로서, 제도적 교회가 갱신될 가능성은 부정했지만 사회의 갱신 가능성은 인정했다. 이들은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들만의
집단을 만들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작은 모임들을 만들었다. 가장 긍정적으로 갱신의 가능성을 인정한 사람들은 교회적 경건주의
자들이었다. 이들은 교회가 타락했지만 하나님이 아직도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치료하고 사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갱신 가능성에 대한 강도는
달랐지만 경건주의 전반에 걸쳐서 갱신의 가능성은 분명한 주제였다. 스페너의 『경건한 요청』 본문의 두 번째 덩어리에서 교회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낙관론을 편다.[1]) 하나님이 분명히 교회에 더 나은 상태를 허락하시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건주의가 낙관적인 역사관을 가진 것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이 땅에 희망의 시대가 온다는 기대는 역사의 발전을 믿는 그 당신의 일반적인 계몽주의적 사상 구조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경건주의는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에서 낙관론을 가졌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경건주의 안에 그 당신의 역사관 구조를 감싸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통주의는 현재에서 예수의 재림이 오기까지 희망적인 시대가 있을 것을 믿지 않았다. 말하자면 종말론에서
정통주의가 전 천년설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서 경건주의는 후 천년설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래가
희망적이라는 확신이 있는 곳에서 실천의 동력이 생기는 법이다. 급진적 경건주의 집단에서 나타나는 강력한 헌신은 이런 사고 구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스페너도 교회의 미래를 낙관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이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실천과 행동을 강조한다. 믿음을 말할
때도 이 믿음은 언제나 실천과 뗄 수 없이 연관된 하나임을 강조하는 것이 경건주의의 독특한 믿음 이해다. 믿음을 삶의 현장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의 실천을 벌써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이런 견해는 『경건한 요청』의 서문 전체를 꿰뚫고 있다. 스페너는 서문에서 실천이
중요하다고 거듭 힘주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교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약과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교회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스페너의 목적이 아니었다. 독자들을 교회 갱신에 참여하도록
호소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스페너는 서문의 삼분의 일 분량을 “우리 같이 …합시다”라는 표현으로서
세운다.[1]) 경건주의가 보는 신학은 그래서 철저하게 실천 지향적이며 목회 현장을 겨냥하고 있다. 당시 정통주의에서 신학이 목회 현장과
멀어지고 현학적으로 흐르는 것을 비판하면서 스페너는 신학 교육의 갱신을 제안했다. 스페너의 이 제안은 스페너의 후원과 영향으로 할례 경건주의를
이끌었던 할례의 교육 제도에서 현실적으로 실현되었다.[1]) 그렇다면 이렇게 실천을 강조한 경건주의는 인간의 자기 노력을 근간으로 하는
인본주의적 실천 체계인가? 갱신의 주체는 누구인가?
3) 누가 갱신하는가?
갱신의 주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경건주의적 사고와 계몽주의적 사고가 구분된다. 갱신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경건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입장이었다. 스페너는 갱신을 교회와 사회전반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갱신과 좁은 영역에서만 가능한 부분적인 갱신으로 나누었다.[1]) 일반적인
갱신은 세속 정권의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이 추진해야 마땅한 것인데 이 두 계층이 타락하여 갱신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현재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부분적이다. 영적으로 각성한 사람들을 모아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스페너의 생각에서 갱신의 주체는 하나님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행동하는 참여자며 담당자다.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오고야 맙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릴 뿐입니다.”[1])
사람은 갱신의
주체인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 또는 담당자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위탁을 받아 갱신을 담당하는 ‘위탁된 주체’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주체인 동시에 개인의 객체이기도 하다. 경건주의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변화시키려던 운동이었다. ‘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자’[1])는
것이 경건주의 중요한 관점이었다. 변화하지 않고는 갱신에 참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경건주의의 갱신론은 제도의 갱신이나 제도적인 조치를
통하여 교회와 사회를 갱신하려고 했던 정통주의의 갱신론과 뚜렷이 구분된다.
사람 변화의 핵심에는 경건주의의 구원론이 자리잡고
있다. 경건주의는 마틴 슈미트가 말한 대로 중생론을 그 핵심에 품고 있다. 중생은 그리스도인의 출발이며 기초다. 이것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갱신될 수 있다. 이렇게 갱신되는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다.[1]) 이러한 구원의 모든 과정은 참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Der wahre lebendige Glaube.)이란 표현은 스페너가 삶의 실천이 없는 그 당시의 신앙 형태를 비판하면서 그런
믿음과 구별하면서 쓴말이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믿음과 열매, 믿음과 행함, 믿음과 윤리가 같이 있다. 이 둘은 하나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생-갱신-성화의 구원 과정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경건주의 운동은 성화론에 강조점을 둔
신앙 운동이며 신학 체계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이런 성화론 강조는 루터가 말한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과 충돌하지 않는다. 경건주의자들은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루터파 안에서 경건주의자들은 끊임없는 갱신과 성화를 강조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생각이 루터의
믿음이해를 따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의 저 유명한 로마서 서문은 경건주의의 구원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일부 사람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인간적인 환상이나 꿈일 뿐이다. 그들은 믿음에 대해서 많이 듣고 말해서 익숙하지만 삶의 변화도 없고 선행도
따르지 않으며 오류에 빠져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행을 해야 경건해지며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요한복음 1장에 있는 것처럼 우리를 변화시키며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한다. 옛
아담을 죽인다. 우리를 마음과 기분과 정서와 모든 세력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성령이 임하게 한다. 오! 이런 믿음은 살아있으며
활동하며 일하며 강력한 것이다. 믿음이 선행을 중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은 선행을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묻기
전에 믿음은 벌써 선을 행하며 또 언제나 선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더듬거리고 두리번거리며 믿음과 선행을 찾는다. 그러나 믿음과 선행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믿음과 선행에 대하여 장황한 말로 설교하며
지껄인다.”[1])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거듭남과 갱신을 통한 성화를 강조하는 경건주의는 평신도 운동을 지향하고 있다. 개인의 신앙
강화를 강조하는 곳에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평신도의 활동이 살아날 수밖에 없다. 진젠도르프가 이끌었던 헤른후트파 운동에서 이점이 특히
두드러진다.[1])
이 지반에서 평신도 선교사들이 독일 안의 다른 지역뿐 아니라 해외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경건주의 운동
안에서 특히 여성의 지도력이 강화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여성의 활동은 교회적 경건주의에서보다는 급진적 경건주의 집단에서 훨씬 더
강했다.[1]) 평신도 지도력의 강조는 사회적 갱신과도 연결된다. 사회의 여러 구조 속에서 구체적인 직업을 가지고 사는 평신도가 영적으로
각성되면 자연히 사회의 각 현장에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실례 가운데 하나를 할례 경건주의에서 본다.[1]) 프로이센 제국의 엘리트
교육을 담당했던 할례의 교육 체계는 경건성과 전문성의 두 기둥을 교육의 축으로 삼고 있었다. 이 곳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프로이센 제국과 독일
전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4) 무엇으로 갱신하는가?
갱신의 도구는 무엇인가? 경건주의는 신비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갱신은 신비적 성령 운동으로 되는가? 경건주의는 또 종종 도덕적 운동으로 취급되었다. 갱신은 윤리 도덕적인 실천으로
되는가?
경건주의는 무엇보다도 강하게 성경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운동이다. 스페너는 『경건한 요청』의 본론 세 번째 덩어리에서
교회를 갱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면서 첫 번째로 하나님 말씀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1])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곳에서 점화된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스페너는 자신을 신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신비주의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없이 직접 하나님께 가려는 시도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거부했다. 하나님 말씀이
언제나 필수적이다. 스페너의 갱신 계획은 성령을 통한 갱신이다.[1]) 성령의 역사는 기록된 말씀과 분리되지 않는다. 단순한 도덕적 윤리성도
이런 점에서 갱신의 도구가 될 수 없다.
믿음에 근거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윤리만이 갱신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다. 종교개혁이
성경을 재발견했다면. 성경을 모든 평신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인쇄하여 나누어주고 또 읽도록 격려한 것은 경건주의였다.[1]) 그러나 성경을 영의
활동과 실천적 행동과 결합하여 역동적으로 이해했다. 반면, 오히려 정통주의 안에서 형성된 축자영감설이 성경의 역동적 이해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경건주의 운동에서 설교의 갱신에 강한 관심이 있던 것도 여기에 연결된다. 스페너가 교회 갱신의 여섯 가지 방안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이 설교의 갱신이었다. 스페너에 따르면 강단은 자신의 학식이나 유능함을 뽐내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전하는
곳이며 이를 통하여 회중의 삶 전체가 변하게 하는 곳이다.[1])
5) 어디에서 갱신이 일어나는가?
갱신은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며 시작되는가? 급진적 경건주의자들은 기성 교회를 포기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배타적인 모임을 만들었다. ‘교회 밖의 작은
교회’(Ecclesiola ex ecclesia)를 만든 것이다. 반면 교회적 경건주의자들은 교회를 갱신하기 위해 제도적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지도 아래 운영되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이른바 ‘경건 모임’(Collegium pietatis)이라고 일컫는 모임이었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였던 것이다.[1]) 이 두 형태의 작은 모임 또는 경건 모임은 그 성격과 지향하는 것에서 매우 다르다. 교회 밖의 작은 교회는 배타성을
띠고 내부자들만이 참여하는 닫힌 모임을 지향한다. 반면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포괄성을 가지고 외부자들에게 개방된 열린 모임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 두 형태의 경건 모임 구조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발적인 작은 모임의 역동성을 그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경건주의적 교회론의 중심이 있다. 이 특징은 또 중세와는 구별되는 근대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중세의 교회는 공적인 모임이며 제도적인 조직이다.
자신의 자유 의사에 따라 소속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555년 이후에 기독교 안에 있는 종파의 복수성이
법적으로 인정되면서 신앙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사항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신앙은 공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되었고, 주어진 것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되었다. 작은 모임은 이러 근대적인 특징에 걸 맞는 것이었다. 개인의 신앙 체험과 확신을 확인하고 강화할 수 있는 마당도
이런 모임에서야 가능했다. 제도적인 교회 안에 작은 모임이 정착하게 된 것은 교회사적으로 경건주의에서 처음이었다.[1]) 스페너는 이런 모임에
갱신을 걸었다.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인답게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작은 단위로 모아 먼저 양육하여 이들의 신앙이
성숙하고 삶이 변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 그러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이들의 본을 보고 따를 수 있게
된다. 『경건한 요청』의 서문에서 스페너는 갱신의 전체 구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 성장에 필요한 것을
기꺼이 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를 (목회자들: 역자)헌신합시다. 목회자 각자가 개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이러한 사람을 먼저 양육하고,
이들의 구원의 분량이 점점 성장하여 나중에는 이들의 본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도록 일합시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잃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써 점점 가까이 이끌 수 있게 되고 결국에는 그들도 구원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믿음 성장에 관심이 있는 이런 사람들을 먼저 돕고 이들의 믿음 성장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한다는 것, 나의 모든 제안은 거의 전적으로
이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되어서 그래서 기초가 놓이면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쏟는 노력이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1])
지금까지 살핀 경건주의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경건주의는 거듭남과 영적
각성을 근거하여 갱신을 추진하고 온전한 성화를 지향한 성결운동이다. 2.경건주의는 경험적 신앙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삶의 변화와 실천을
강조하여 선교를 지향하는 평신도 운동이다. 3. 경건주의는 경건 모임(교회 안의 또는 교회 밖의 작은 모임)을 근거하여 신앙의 역동성을
중시한 작은 모임 운동이다. 4.경건주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밝혀지는 성경을 근거하여 설교와 신학 갱신을 지향한 하나님 말씀
운동이다.
5. 한국 교회와 연관된 질문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믿음은
좋은데 생활은 엉망’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수적 세력은 큰데 거기에 걸 맞는 삶의 실천이 부족하다. 한국 교회에는 한 세대 전과 비교할 때
신학적 수준은 발전했고 신학적 지식과 저작은 풍성해졌다. 설교가 넘치고 신앙 서적이 홍수다. 신앙에 관련된 세미나가 도처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는 어떤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행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독교의 본질을 삶의
변화에서 보고 실천적 변화를 추구한 경건주의 운동의 강조점이 한국 교회에 필요할 것이다.
대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권이 부정적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핵심이다. 이기적인 개교회(성장)주의가 거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이미 형성된 교권의
구조를 꿰뚫어보는 전문 교계 정치꾼이 하나님의 백성인 회중의 통전성을 해치고 있다.
대교회 위주의 목회 정책과 세력 불리기 식의
교단 확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속적 민주주의의 대중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작은 모임을 통하여 평신도 개개인의 역동성과 책임성을 강조한 경건주의의
관점은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 깊이 고찰해야 할 주제다.
이른바 영성이 유행이다. 신학적 비평을 거칠 겨를도 없이 카톨릭의 영성
프로그램이 안방까지 들어와 있다. 목회 현장에서 너도나도 외치는 영성이 이젠 의미 없는 단어가 되어버린 듯하다. 동방 교회와 카톨릭, 오순절
운동과 하나님의 정의를 강조하는 집단 등 거의 모든 기독교 집단이 한결같이 영성을 말하지만 표현만 같지 내용은 영성이란 단어가 유행하기 전에
각자가 주장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야말로 개신교 영성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종교개혁자들이 말했고 100여 년 후에 변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와 사회 갱신을 위해 노력했던 경건주의가 또 강조했던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기’가 기독교 영성의 핵심 아닌가? 하나님 말씀이 이
시대의 해답 아닌가?
6. 맺는 말
경건주의는 1600년대에 유럽에서 일어난 교회와 신앙 갱신
운동으로서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난 개신교 각성 운동 가운데 가장 크고 깊게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운동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의 원인이 대부분 경건주의 개념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보았다. 이것과 연관하여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의
흐름과 배경을 살폈다.
경건주의는 크게 보아 중세에서 근대의 계몽주의에 이르는 포물선에 위치한 운동이며 작게는 종교개혁,
정통주의에서 계몽주의에 이르는 흐름에 위치함을 확인했다. 여기에 근거해서 그 본질상 갱신운동인 경건주의의 본질을 온전한 성화를 지향한 성결
운동, 선교를 지향한 평신도 운동, 신앙의 역동성을 중시한 작은 모임 운동, 설교와 신학 갱신을 지향한 하나님 말씀운동으로 규명했다.
한국교회의 갱신이 시급한 때다. 교회가 사회 개혁을 겨우 뒤따라가는 꼴이 되어서는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 경건주의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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