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가르의 사정
가르단의 죽음. 그것이 준가르 국가의 세력을 끝내는 결과가 된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가르단 시절이 오이라트 준가르의 최정점이었던 시간도 아닙니다. 우리는 가르단과 대치했던 또 다른 준가르 지도자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체왕 랍탄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시대에 준가르는 정점에 가까워졌습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의 몽골사 연구는 주로 현몽골국(외몽)과 내몽골 지역에 관련된 논문과 서적이 주류이며, 1990년에 한국과 몽골이 수교하면서 '원조비사학회'가 한국몽골학회로 개칭되면서 역사, 언어, 민속, 경제, 교육, 식문화, 복식 등 여러 방면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고, 연구 성과는 학회지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오이라트 몽골 관련한 논문은 거의 드물어, 연구의 편중 상태가 심하며, 따라서 오이라트 몽골에 관한 연구로는 중국을 비롯한 러시아와 일본 연구자들이 학계에 영향력을 가지는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오카다 히데히로, 미야와키 준코, 수기야마 마사아키 등이 관련 연구의 성과를 내놓았고, 중국 또한 많은 연구자들이 오이라트 몽골사와 청, 몽골 관계를 밝히고 있습니다. 또 러시아 역사가들도 연구 성과를 내고 있는데, 여기서 민족주의적 시각이 우리에게 주는 이데올로기적 혼란과 일종의 편협함이 드러납니다.
중국 역사가들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며, 준가르족을 분열주의자로 묘사하는 한편, 체왕 랍탄을 몽골이 포함된 '우리 민족' 에 대한, 러시아의 팽창주의 야욕을 저지한 인물로 고평하고, 러시아 역사가들은 체왕 랍탄을 만주의 팽창을 저지해내는 인물로 봅니다.
또, 체왕 랍탄과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체왕 랍탄 제위 기간(1697 ─ 1727), 청조와 근 20년 화평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체왕 랍탄은 비록 한 자리를 차지했지만 청조와는 대항할 뜻이 없었고, 체왕 랍탄은 라장한이 서장의 인심을 얻지 못하자 서장을 탈취하고 달라이 라마를 장악하여 몽골 각부를 호령하고자 하였다." 는 견해와, 서장을 탈취하고 달라이 라마를 끼고 전몽골을 호령하여, 최후에는 청조와의 결전을 벌인다는 대 청조 강경론적인, 좀 더 발전된 견해, 일찍부터 서장을 장악하려 하였으며, 달라이 라마를 끼고 몽골을 호령하여 하였으나 청조의 위력에 눌려 적당한 구실을 찾던 중에, 라장한의 일을 구실로 삼아 서장을 장악하여, 불교를 구실로 전몽골을 장악하려 했다는 식의 견해가 보이고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관련된 이야기로 이런 내용들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체왕 랍탄은 가르단과 대항하여 청조와 협력했고 1697년 가르단이 죽자 자신의 나라를 확고하게 장악했습니다.
그는 칭기스칸 가문의 후예가 아니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정통성 있는 준가르의 '칸'이라고 부르지는 못했습니다. 대신에 그는 달라이 라마에게서 데니 조릭투 홍타이지 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러시아인들은 그를 '콘타이샤' 라고 불렀습니다. 체왕 랍탄은 본래 청나라보다 서방의 카자흐족을 더 신경쓰고 있었습니다. 가르단이 패배했고 청나라의 강희 황제는 엄청나게 많은 초지를 얻었는데, 이를 반환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가뜩이나 운신의 폭이 좁아진 상태에서 카자흐족이 준가르가 서방으로 진출하는것을 막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 준가르 보다도 더 서방에 있던 카자흐족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된 상태에서, 체왕 랍탄은 자신의 영토에 대한 권리, 다른 부족들이 그 영토에 가까이 다가올 접근권, 그리고 서로간의 교역료의 유지 등에 대해 골몰하면서, 마치 유목 정복자라기보다는, 여러 영토에 둘러쌓인 정착된 영토의 국가 지도자처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중국과 러시아 국경은 함부로 넘나들 수 없었습니다.
체왕 랍탄은 러시아인 포로, 투르키스탄 포로, 심지어 스웨덴 포로까지 이용해서 농업과 수공업, 무기의 발달을 꾀하면서, 저 멀리 떠나있는 동족인 토구트의 아유키 칸에게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도 보였습니다. 예전의 포스팅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토쿠트는 과거 오이라트 네 부족 중 하나였다가, 분쟁이 생기자 볼가강 유역으로 떠나, 준가르 보다 더 서쪽에 위치하는 부족입니다. 이 시기 러시아, 준가르, 청나라는 다시 한번 복잡 미묘하게 얽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장 청나라는 가르단 원정 이후에 큰 원정을 벌이기는 무리인 상황.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대북부전쟁에 군비를 대는데 혈안인 상황, 그런데 준가르 땅에서 금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준가르와 러시아는 서로 협력을 하려는듯한 제스처를 보여주고, 청나라는 러시아를 설득하여 준가르에 도움을 주지 못하게 하려는 등, 복잡 미묘한 정세가 흐릅니다.
청나라쪽에서 움직인 사람은 만주인 투리선(圖理琛) 입니다. 그는 토쿠트의 아유키 칸에게 사절로 떠났고, 자신의 경험을 이역록(異域錄)이라는 여행기로 적었습니다. 또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벨(John Bell)이 차르의 사절로서, 투리선과는 정 반대이 위치에서 중앙 유라시아를 가로질렀습니다. 다음은 이 사람에 대한 영어판 위키피디아의 항목입니다.(
http://en.wikipedia.org/wiki/John_Bell_(traveller)) 마지막으로 러시아인 이반 운코프스키(Ivan Unkovsky)rk 1722년에서 1724년 사이 체왕 랍탄의 본거지에 사절로 방문했습니다.
러시아인, 만주인. 그리고 러시아 차르의 외국인 신하로서, 이 세 사람은 서로 다른 목적과 서로 다른 시각을 보여줍니다. 이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자면,
존 벨의 목적 ─ 그의 주요 목적은 중국의 군사적 역량 및, 중국과 상업적으로 교류할 전망을 살피는것
그리고 투리선의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중국 변경에 있던 아유키 칸의 조카 아랍주르를 토쿠트 족이 있는 볼가 강으로 순조롭게 돌려보내면서, 아유키 칸을 만나 준가르 국가에 대항하는 청나라와의 연합에 대한 운을 넌지시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러시아 영토 근방을 지나며 러시아의 상업적, 전략적 자원을 염탐하고, 혹시 러시아 차르가 초청했을 경우를 대비했습니다. 그는 존 벨을 만나 베이징까지 호위도 했습니다.
앨런비 님의 글에서. 칼믹이 토쿠트입니다. 대략 이 정도 위치의 차이가 있습니다.
투리선의 목적이 토구트와 손을 잡아 준가르를 견제하는데 있다면, 운코프스키의 목적은 역으로 준가르와 손을 잡고 청나라를 견제하는일에 골몰했습니다. 이는 당연하게도, 청나라의 목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의 관점을 모두 살펴보는 일은 물론 대단히 흥미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 글에서 그 이야기를 모두 열거할 필요는 없겠고, 가르단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 이 짦은 평화 기간동안 러시아, 청제국, 준가르, 그리고 더 나아가면 토구트까지 상당히 빈번하고 서로 왕래를 하였다는 정도만 살펴보아도 될 듯합니다. 다만 운코프스키의 체왕 랍탄과의 만남은 이야기해볼만 합니다.
1722년 11월, 모스크바를 떠난지 거의 10개월 만에 운코프스키는 체왕 랍탄의 진영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체왕 랍탄의 신하인 자이상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콘타이샤(체왕 랍탄)께 금광석 탐사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하라는 명을 (차르에게) 받았습니다. 만약 금이나 은 탐사에 성공한다면, 제가 콘타이샤께 자세히 말씀드렸듯이 당신들이 얻는 이익은 클 것입니다."
자이상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콘타이샤께서 청하시기를, (토구트의)아유키 칸이 그랬던 것처럼 (준가르)몽골은 그대 황제(표트르)의 관대한 보살핌 아래 항복하겠소. 우리는 이를 기쁘게 여길 것이며, 단지 중국의 칸에 대항하는 군대 2만만 요청하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소."
복잡한 외교적 수사라고는 전혀 없는 이 대화에서, 준가르는 분명하게 러시아에 항복(신속하는 의미)하겠다는 이야기를 했고, 대신에 군사 원조를 요구했습니다. 운코프스키는 이에 대해 적당히 어물쩡거리는 말로 약속을 회피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은 강희제라는 유라시아의 거인이 쓰러진 시기였고, 강희제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체왕 랍탄은 러시아에 항복하겠다는 본래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점과는 관계없이 체왕 랍탄은 운코프스키에게 여러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중국은 자기들보다 강하고 용감한 이들은 없다고 자랑하고, 모든 민족이 중국에 조공을 바친다고 하던데."
"저는 칸께서 제 말을 그르다고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저희황제께서는 저에게 칸에게 드리라고 많은 것들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들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조공입니까 아니면 다른 무엇입니까? 칸께서는 차르가 칸의 은혜에 대한 답례로 에물을 드린 것이지, 조공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중국의 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고 싶습니다. 다른 민족들은 예물(podarki)를 보낸 것이지, 조공(dan')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대가 보기에는, 튀르크의 술탄이 강한가, 아니면 중국의 칸이 강한가?"
"우리는 튀르크인들이 중국인들보다 강하며, 중국인들의 군사행동은 형편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칸께 모든 민족들 가운데는 믿어서는 안 될 근거 없는 보고를 올리는 나쁜 인물들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러시아 사신은 중국, 즉 청나라의 군사력을 헐뜯는데 열중했는데, 이리하여 자신들의 영향력을 넒히려는 의도였습니다. 한편, 체왕 랍탄은 아마도 러시아가 중국을 그다지 강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만족했을 수 있고, 그래서 그는 러시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단독으로 중국과 맞서도 괜찮겠다는 자신감을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티베트의 사정
라장한
과거, 티베트 라마들을 후원헀던 사람 중에 호쇼트의 구시 칸이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라싸의 달라이 라마 5세와 청나라 순치제의 만남을 중간에 돕기도 했는데, 라장한은 바로 그 구시 칸의 손자입니다. 그는 청나라의 지지를 등에 엎고 라싸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넒히려고 시도했습니다. 청나라가 이 인물을 도운 이유는, 물론 티베트를 몽골 지도자들끼리의 분열의 장으로 만들어, 자신들은 그 뒤에서 이득을 누리려고 하는 제국주의적 책략 때문입니다.
티베트의 제파 샹게 가초가 5세의 죽음을 숨기고 가르단과 연대하는 행동을 취한 이야기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한 바가 있습니다. 가르단이 결국 패배하고, 강희가 이를 강하게 비난하자, 제파는 공식적으로 달라이 라마 6세를 세우고 자신이 숙이고 들어가는 식으로 황제의 노여움을 식히려 했습니다. 그 달라이 라마의 사람됨은, 그 평가를 내린 사람이 티베트 불교에 눈꼽만큼이라도 호의적일 이유가 전혀 없는 예수회 선교사 이폴리토 데시데리(Ippolito Desideri)라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온갖 악에 물들어 완전히 타락했으며, 술과 여자 그리고 연애시를 쓰는데 빠졌다." 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라장한이, 강희의 지지를 등에 엎고 1705년 라싸로 침공, 제파를 죽이고 직접 티베트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강희는 제파가 세운 '가짜(라고 청나라가 비난한)' 달라이 라마 6세를 베이징으로 보내라고 명령했는데, 그 청년은 가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라장한이 암살했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달라이 라마가 세워졌고, 당연한 소리지만 라장한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티베트 사람들은 코코노르에서 태어났다는 다른 아이가 진짜 달라이 라마라고 여겼습니다. 라장한은 역시 당연스럽게도 그 아이가 진정한 활불이라는 증거는 없다고 하며 라싸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청나라 역시 이 소년의 '보호'를 명목으로 그를 억류했습니다. 이런 달라이 라마를 둘로썬 정치놀음은 현대도 크게 다를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체왕 랍탄이 라장한이 장악하고 있는 티베트 문제에 갑자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1715년, 체왕 랍탄은 청나라와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이전의 태도를 버리고, 하미를 공격함으로서 청나라에게 압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이 공격은 청군과 하미의 무슬림 벡이 놀라운 성공을 거두오, 200명의 병력으로 2천여명의 체왕 랍탄의 군대를 몰아내었지만, 근본적인 위협을 없애려면 가르단때와 마찬가지로 워정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체왕 랍탄의 병력은 들리는 이야기로는 5만이나 되었고, 청나라군 3만을 그 지역에 보내는데만 해도 3, 4백만 냥이라는 거금이 예상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강희는 자신이 너무 늙었다는것을 깨달았습니다. 글씨를 쓰지 못할 정도로 손을 떨었고, 의사결정을 방해받을 정도로 졸도에 시달렸습니다. 차오모드로 당당하게 진군하여 가르단과 승패를 겨루고자 했던 그 젊은 날은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청군은 가르단 원정을 능가하는 대규모 보급 작전을 실현해야 했습니다. 하미는 과거 싸움이 있었던 울란 부통에서 1천 2백여 킬로미터를 가야했고, 가장 가까운 군사 보급기지에서 500km를 더 진군해야 했으며, 보다 근본적인 싸움을 하려면 다시 하미에서 500km가 있는 우루무치로, 그리고 이리와 그 멀리 떨어져 있는 알타이 산맥까지 청군을 진군시켜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4황자 윤진의 측근인 연갱요가 큰 성과를 보이며 총독으로 승진하는등 승승 장구했습니다. 과거의 경우에 만주족 장수가 나가 싸우고 한인 관리가 보급을 했지만, 이제는 만주족이건 한인이건 전투면 전투, 보급이면 보급 등 각종 업무를 요구받고 자신의 능력을 극단적으로 발휘해야만 했습니다. 많은 관료들이 원정의 비용과 위험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강희는 이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의 눈에도 보급의 어려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여력이 점점 더 서쪽으로 향하면서, 청이라는 공룡은 점점 더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그 경계는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본래 머나먼 벽지였던 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지' 나 다름없는 곳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서쪽 변방' 은 더욱 더 먼 곳을 이루는 말이 되었습니다. 청군은 심지어 투르판, 우르무치 주변까지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청나라의 이 '서방 진출'은, 그야말로 개척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군사들이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 요새를 세우고, 추방당한 범죄자들이 땅을 개간하고.
하지만, 변방의 청나라 장수들이 패기만만하게 서쪽으로 진군하려는 계획을 더 세울때, 청나라 조정의 관심은 코코노르, 그리고 티베트로 갑자기 이동했습니다. 체왕 랍탄이 그야말로 놀라운 작전을 전개한 것입니다.
1717년, 체왕 랍탄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지휘관, 체링 돈둡(tsering dhondup)에게 엄청난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1만명(6000명?)의 병사를 얻은 체링 돈둡은, "극도로 메마른 지역을 통과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길을 따라" 엄청나게 어려운 행군을 한 끝에 라싸에 도착해서, 라장한은 포달랍 궁에 몰아넣었습니다. 그 위업이 얼마나 대단한지, 예수회 선교사 이폴리토 데시데리는 체링 돈둡을 심지어 알렉산드로스 3세에 비견하면서, 열정적이고, 용감하고, 자부심 넘치고, 과감하고, 호전적인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청나라의 사의덕은 "체왕 랍탄의 장군이 야르칸트와 카시가르에서 3천의 병려을 이끌고 티베트로 들어왔는데, 거대한 설산 세 개를 지나 1년에 1만리르 행군했다. 병사들은 개고기를 먹었고 지원군이나 식량 보급도 없었다. 한 명이 말 한마리만 데리고 서부 티베트로 들어가 라장한을 공격했다." 했습니다. 사의덕은 이 엄청난 행동에 두려움을 느끼고, 또 준가르 군대의 충성심에 경탄하면서 보고했습니다.
늙고 병들고 지친 강희는, 그러나 기가 죽지 않았습니다. 라장한은 자신이 죽으면 티베트에서 전체 황교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며 필사적으로 구원을 요청했고, 강희는 만주족 장수 어룬터에게 한죽과 무슬름으로 구성된 7천의 병력을 데리고 진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였습니다. 청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포달랍 궁은 함락되어 도시는 약탈당했고, 준가르에 반대하던 라마들은 학살당했으며, 라장한도 끌려나와 죽었고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도 사로잡혔습니다. 어룬터의 군대로 말하자면, 준가르 부대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모두 전멸했고, 어룬터도 죽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군사작전에 티베트는 혼란에 빠졌고, 청군은 전멸한 상황. 14황자 윤제가 무원대장군에 임명되어, 서북쪽에서 티베트로 공격해 들어가는 임무를 맡은것이 바로 이 시점의 일이었습니다. 윤제는, 아마 이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절호의 기회라는 사실을, 아마 몰랐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첫댓글 진짜 이때 오스만하고 청중에 누가 더 쎘는지 모르겠네. 지금이야 상대도 안되지만 그런데 네르친스크때보면 만약 오스만이었으면 스타노보이산맥같이 북경 근처까지 러시아가 있도록 놔두지 않고 훨씬 멀리 쫓아내지 않았을까? 물론 청도 실력이 딸려서라기보다는 준가르하고 싸움때문에 러시아하고 싸우기를 꺼려서 타협한거지만.
이시기 오스만이라면 쉴레이만 대제 치세 끝나고 내리막이라 청이 더 쎌것 같네요.
오스만은 청에 비하면 기본적인 인구수도 2~3배 정도 차이날껄요 오스만이 전성기때 6000만 수준이고 청이 2억은 넘었던걸로 기억하니 ㅋ
총체적인 국력은 청이 우세하겠지만, 화포나 전략전술쪽은 오스만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뭐, 오스만도 이미 서구에 뒤쳐질 무렵이긴 하니 확답은 못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