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에는 왕비와 세자 책봉에 관련된 문서나, 송덕문(頌德: 공덕을 기리어 지은 글) 등 귀한 문서는 옥으로 된 문서인 옥책에 글자를 새겨 썼다. 이 밖에도 물고기, 새 등을 정교하게 조각한 옥제 장신구 등이 많이 만들어졌다. 옥은 왕과 신하들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찰에서도 사용했다. 강화도 전등사, 선원사에는 고려시대 옥등(玉燈) 유물이 전한다. 옥으로 된 그릇에 기름을 넣고 불을 켜면 불이 꺼지지 않았다는 가평군 현등사 창건 연기설화도 전해지고 있다. 옥으로 만든 것은 이외에도 옥술잔(玉斝), 옥향로, 옥향합, 옥피리, 옥등롱(玉燈籠)이 있었다.
고려시대 환구단(圜丘壇)에서 사방신(四方神)에게 제사를 지낼 때 올린 폐물은 청규(靑圭), 적황(赤瑝), 황종(黃琮), 백호(白琥)등 옥제품이었다. 옥은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기도 했다. 이때 임금은 면류관의 좌우에 옥을 꾀어 9줄의 술을 단 규류(九旒)를 머리에 쓰고, 면복(冕服)이란 옷을 입었다. 임금은 옥반지를 비롯한 옥을 몸에 한껏 착용하고 제사에 참석했다. 이처럼 고려 시대에는 왕실과 귀족, 승려들의 사치에 옥이 널리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옥
언제부터 우리 조상들이 황금을 보물로 여겼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늦어도 삼국시대 초기부터는 황금이 보물로 알려진 듯하다. 금이 발견되기 전까지 최고의 보석이었던 옥은 차츰 귀금속에게 최고의 자리를 내어주지만, 여전히 보석으로서 사랑받았다. 조선시대에도 옥은 귀한 것으로 여겨져, 왕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玉璽), 왕의 앉는 의자를 옥좌(玉座)라고 부르는 등 권위와 신분을 상징하였다. 또한 왕과 왕비가 착용하는 장신구에는 옥으로 만든 것이 많았다. 조선시대 왕의 장례 때는 예외 없이 옥이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죽은 임금의 입에 옥을 물게 했다.
[동의보감]에서는 옥을 갈아서 복용하면 체내 노폐물을 배출시켜 주고, 장수하게 되며, 폐장 기능을 윤활하게 해주면서도 소화계통에 효과가 있고, 특히 가슴이 답답할 때 좋다는 등 옥을 대단한 약재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옥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 임신한 왕비들은 늘 옥을 가까이 했었다.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서울의 수공업장인 경공장(京工匠)으로서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옥을 다루는 기술자(玉匠)의 정원을 10명, 구슬장인(珠匠) 2명이라고 규정했다. 옥규, 옥책, 옥보(玉寶), 석경(石磬), 옥반지, 옥관자(玉貫子) 등 옥의 수요가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경기도 남양, 함경도 단천 등 주요 옥산지 30여 곳이 등장한다.
하지만 조선은 옥을 활발하게 생산하지는 못했다. 조선은 사치를 배척하여, 옥기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었다. 철물, 소와 말, 금, 은, 구슬, 옥, 보석, 염초, 군사물품 등 금지한 물건을 몰래 매매한 자는 교수형에 처한다고 [경국대전]에서 정하고 있음을 보아 옥의 거래는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옥은 평민들이 사용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조선 사회에서는 부자가 되어도, 신분이 낮으면 함부로 사치를 할 수 없었다.
옥 생산이 활발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금, 은과 더불어 옥이 명나라가 조선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던 공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금은의 경우 국내 소비보다 명나라에 유출이 많아지자, 이것이 민폐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은 금광, 은광을 폐광시키고 생산을 중지하기도 했었다. 옥도 마찬가지였다. 조일전쟁(임진왜란, 1592∼1597)시기에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군들과 관리들은 조선에서의 옥 채굴에 관심을 기울여, 전쟁 중에도 옥을 캐내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여러 이유를 내세워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옥을 캐어 얻은 경제적 이익보다, 나라와 백성의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조선 옥의 최대 소비처는 중국이었지만, 조선은 중국과 정상적인 무역거래로 이익을 얻어낼 능력이 없었다. 옥 생산량이 늘면 조공품의 양만 늘어나게 되므로, 금광 등과 마찬가지로 개발을 억제해 저들의 요구를 줄이는 것이 차라리 낳았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옥의 채굴을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극히 제한적으로만 생산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처럼 다양한 옥기 공예품들이 만들어지지는 못했다.
옥과 우리 역사
지나친 사치는 배척해야 하지만, 적당한 소비는 경제를 성장시킨다. 사치품의 존재는 인간으로 하여금 잘 살아보려는 의지를 키우게 하며, 국가로 하여금 부를 축적하고 팽창을 촉진하며 물질문명을 발전시키는 이유가 된다. 황금이 전해지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가장 널리 사랑했던 보석인 옥은 일부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사치품이었다. 삼국, 고려시대에는 옥이 황금과 더불어 왕실과 귀족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며 많은 옥기가 만들어졌다. 반면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치를 배척하고, 옥 채굴을 소극적으로 함에 따라 물질문명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자극제가 되지 못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참고문헌: 신대현 저, [옥기공예- 옥과 옥기를 통해 본 동양의 정신문화], 혜안, 2007; 장 카스타레드 저, 이소영 옮김, [사치와 문명], 뜨인돌 2011; 베이징대학교 중국전통문화연구중심 저, 장연ㆍ김호림 옮김, [중국문명대시야] 1, 김영사, 2007; 이해련 외 지음, [중국동북지역고고학연구현황과 문제점], 동북아연구재단, 2008. |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다만, 옥의 티가 조금 있는 것 같습니다. ^^
첫째는 섭라에서 생산되는 珂에 대한 것인데, 珂는 옥이라는 뜻도 있지만 "큰 조개"라는 뜻도 있습니다. 제대로 된 번역이라면 그 부분을 자개라든가 전복 정도로 의역을 하거나 설명을 하는 게 맞습니다. 爾雅翼에 "貝大者珂,皮黃黑,骨白,可飾馬具。一名馬珂螺"라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설명의 내용으로 봐서는 전복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입니다.
둘째는 瑟瑟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瑟瑟은 금보다 더 중요한 보석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고대 중국의 다른 문헌에서도 마찬가지로 취급되고 있는데, 瑟瑟이 바로 곤륜옥=화씨옥을 의미합
고선지가 서역 정벌을 했을 때 챙긴 전리품 중에서도 瑟瑟이 가장 먼저 나오고, 삼국사기에 보면 당나라에 조공을 하는 물건 중에 瑟瑟을 금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을 하며, 진골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은 瑟瑟을 착용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가장 고귀한 보석으로 취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전부터 화씨옥으로 성을 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瑟瑟을 최고의 보석으로 취급을 한데다가, 먼 서역 지방(지금의 신강위그루자치구)에서 온 고가의 물건이기 때문에 진골이 아니면 착용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보석이 바로 瑟瑟입니다.
섭라의 珂는 본래 '옥이름 가'입니다. 그것이 전복이란 의미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옥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가가 전복이라고 할 경우라면, 그것이 과연 고구려에서 다시 거두어서 다시 북위에게 보낼 수 있을까요?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슬슬 보통은 에머랄드가 아닌가 하지만, 이것을 굳이 이 글에 넣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치품 전반을 다루는 글이 아니니까요. 님의 지적가운데 '옥"이 매끄러움이 중요하다는 말은 책으로 펴낼 때에 반영하겠습니다. '가'문제도 주석으로 달아놓겠습니다. 고마운 지적입니다. 다만 슬슬에 대해서는 그때에도 언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글의 속성을 이해하셨으면 합니다.
옥은 퇴적암에 속하는 암석입니다. 그러나 화학적으로 단일 조성이 아니기 때문에 지질학에서 정의하는 광물은 아닙니다. 아주 미세한 입자(그래서 매끄러운 것임)가 퇴적되는 깊은 바다와 같은 환경에서 만들어지는 암석인데, 곤륜산맥 지역은 예전에 깊은 바다였다가 태평양 판에 의한 조산운동에 의해 생긴 산맥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옥이 산출되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산맥이나 곤륜산맥에서 조개 껍질이나 붉은 산호석 등이 출토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화산암 지형에서는 그처럼 미세한 입자로 이루어 진 옥돌이 나올 수 없습니다. 제주도 중에 깊은 바다에 기원을 둔 퇴적암이 있다면 옥돌이 나올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제주도의 지질학적 특성을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따라서 珂는 전복과 같은 종류의 조개로 보는 게 타당합니다.
瑟瑟이 곤륜옥을 뜻한다는 것은 중국에서는 상식에 속한다고 할 정도로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CCTV에서 瑟瑟之路를 주제로 다큐멘터리도 만든 적이 있습니다. (김용만 선생이 신라사 또는 서역교류사 전공이 아니라서 瑟瑟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것은 이해를 합니다만) 국내 학자들이 연구를 게을리 한 덕분에 瑟瑟이 곤륜옥이라는 상식을 모르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신라 시대에 옥석을 귀하게 여겨졌다는 내용을 쓰면서 瑟瑟이 빠져있어서 옥의 티라고 한 것입니다.
' 가'를 전복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슬슬지로' 다큐는 보지 않았으니, 곤륜옥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네 학문 수준에 대해서 함부로 평가하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슬슬에 대해서는 김진구, 슬슬의 연구, 복식문화연구, 2-2, 1994년 논문이 있습니다. 슬슬은 에머랄드, 사파이어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옥'은 정의하기에 따라서 온갖 종류의 구슬, 유리, 진주도 옥에 들어가고, 사파이어도 碧珠라고 해서 옥에 포함시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30매 정도 글에서 광의의 옥을 다룰 수는 없습니다. 유리, 야명주 등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내용이 빠졌다고, 옥의 티가 될 수는 없습니다.
김용만 선생의 글을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김진구 뿐만 아니라 김영재(瑟瑟.鈿考, 복식31호, 1997년)의 논문도 읽어 보았고, 瑟瑟이란 키워드가 들어간 논문은 다 찾아서 읽어 보았습니다. 슬슬을 왜 에메랄드 또는 사파이어라고 보는지도 잘 이해를 하고 있으며, 주장의 타당성 여부와 한계((Laufer 주장의 답습)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논문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어서 고대 서적을 뒤졌고, 송막기문에서 瑟瑟이 곤륜옥을 의미한다는 확증을 잡았습니다. 논문으로 한번 써 볼까하고 자료를 보충하다가, 나중에서야 중국에서는 상식적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라서 논문으로 쓸 가치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섭라의 珂가 전복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다른 조개를 의미하는지는 현 시점에서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요즘처럼 생물종을 엄격하게 구분했는지도 의문이고요.
다만, 珂을 "제주에서 나오는 옥"이라고 주장하려면 그에 맞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하는 글이나 이런 토론 사이트에 쓰는 글에서야 별 문제가 아니라고 보지만, 혹시 나중에 논문을 쓰거나 책을 쓰면서 그런 주장을 하려면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될 겁니다.
'가'가 옥이 아니라, 전복이라는 주장보다는 '섬라'가 제주도가 아닐 가능성이 더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섬라'에 대한 주석은 네이버 측에서 추가로 달아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섬라에 대한 내용이라서, 그냥 넘어갔지만, '섬라'가 어딘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섬라'가 제주도가 아닐 가능성도 큽니다. 이 문제는 주석으로 달아놓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북위에 준 옥은 교역품이 아니라 진상품, 즉 조공품 입니다. 사료에 엄연히 나와있는 것인데 굳이 자의적인 조작을 가해야 하는지... 이것도 중화의식에 의한 왜곡이라고 하면 뭐 할 말은 없습니다만
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세종(世宗)이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동당(東堂)으로 불러들여 만나니, [예]실불은 나아가 말하였다. “저희 나라는 정성을 대국에 잇대고, 여러 대에 걸쳐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바치는 데 어김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흰 마노[珂]는 섭라(涉羅)에서 나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기는 바 되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습니다. 두 가지 물건이 왕의 창고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세종이 말하였다. “고구려는 세세토록 상국(上國)의 도움을 입어, 해외에서 제멋대로 다스려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하였는데, 작은 술그릇이 비는 것은 큰 술병의 수치이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이전에 조공이 어그러진 것은 책임이 고구려 왕에게 있는 것이다. 경은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힘써 다해서 해로운 무리들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두 읍[부여·섭라]으로 하여금 옛 터를 되찾아서 토산물을 빠짐없이 일정히 조공하게 하라.” - 삼국사기 19권 (출처:네이트 한국학)
굳이 원문과 다르게 전하고자 한다면 주석이라도 달아놔야 하는거 아닙니까?
조공 문제에 대해서는 참 여러번 다루어진 문제인데 말이죠. 6대 고조 효문제-7대 세종 선무제 때의 북위가 고구려와 어떤 관계였는지 카페에 올라온 글들은 참 많습니다. 물론 카페에 올라온 옛 글들을 반드시 미리 읽고 토론에 임하란 법은 없다지만, 이런 지적은 너무 진부하다 싶어서 말입니다.
가령 누군가가 예전에 쓴 내용이기도 하지만, 기록에 유연이 북연에 조공했다고 해서 유연이 진짜로 북연 (따위에게) 조공했다고 보는 경우 없고, 버마가 1회성으로 청나라에 보낸 교류 사신을 갖고 버마가 청의 조공국이라고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해당 역사에 무지한 겁니다. 유목민사나 버마사를 모른다고 밖에는.
기록에 있다고 몽땅 다 그대로 옮기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료만을 보고 그대로 옮긴다면, 굳이 역사 연구가 필요없겠지요. 한문 해석가만 필요할테지요. 당시 상황을 살펴본다면 조공품, 진상품이란 말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무역품 정도가 가장 적확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이 문제는 나의 오랜 지론인 만큼, 굳이 주석을 달 필요조차 없다고 봅니다.
한가지 사족을 더 달자면, "옥은 찬란한 빛깔과 은은한 광채를 내는 특유의 아름다움 때문에"라고 했는데, 옥의 기본적인 특성은 "매끄러움"입니다. 옥은 흰색, 푸른색, 노란색, 묵색 등 다양한 색이 존재하지만, 옥을 옥답게 하는 것은 "매끄러움"입니다, 매끄럽지 않은 돌은 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옥은 세립자로 구성된 돌로서 광물학적으로 단일 광물이 아닙니다. 사람의 피부로 느끼는 매끄러음이 가히 상상 이상인 돌을 가리켜 옥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