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미학과 생태교육
생태에서 자연으로
자연학의 범위에 생물학과 생태학을 넣을 수 있겠다.
2차 대전 이후 인류가 환경위기에 직면하면서 생태에 관심이 많아졌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에 환경위기에 대한 경종이 울리고, 68혁명 이후엔 마르크스주의를 넘어 생태와 여성의 새로운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며 생태학이 자리를 잡고, 생태운동이 시작되고, 생태정치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내가 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자연과학은 물리, 화학, 지구화학, 생물 등 영역별 분과 중심으로 가르쳐졌지만, 대안학교에서 교사를 할 때는 그런 분과학문보다 생태 중심의 과학으로 통합해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왜 생태일까? 그것은 앞에서 말한 환경위기 때문이다.
생명을 가진 개체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환경 안에서 적응하며 안정적 관계 맥락을 형성함으로써 생명은 지속하게 된다. 그런데 현대사회가 되면서 환경이 심하게 파괴되면서 인류의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며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도 점차 대상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지금 대안진영 안에서는 생태가 대세다.
우리가 생태학이 가진 기본 프레임인 인과와 맥락을 중심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지만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으로 바라보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적 인식과 동기도 결국 인간중심의 이성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거리의 비둘기를 더럽다고 표현하고, 곰팡이와 바이러스에 대해 극도의 불안을 가지고 있는 점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성보다 중요한 것이 정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때문에 생태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라, 생태가 가진 프레임을 넘어서자는 의미에서 자연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의 문제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생태는 20세기 현대문명의 특수성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지만 자연은 언제나 시대를 초월해 인류의 환경으로서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조상과 인디언과 원시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가슴의 인간을 위해
물론 인간이 항상 이성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양인들이 근대인을 규정할 때 합리적 인간을 중시했는데, 이때의 합리성의 기준은 도덕이 아니라 이기심이었다. 우리 식대로 표현하자면 제 뱃속 잇속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것이다. 그것이 이기적 쾌락을 채우기 위해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위하는 것인데 자본가야 말로 그 원형이 되는 인간이다. 그들은 항상 최대행복을 위해 최소비용을 들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런 경제인이 바로 서양의 보편인이다. 하지만 뭔가 빠지지 않았는가? 바로 가슴이다. 머리와 배로만 살 수는 없지 없는가? 그런 삶에 무슨 가치가 있고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때문에 가슴의 감각과 도덕이 필요한 것이다. 서양이라고 이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프랑스혁명에 묘사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사랑이 그것이다. 정치란 가슴에서 비롯된 정의를 실현하는 사회적 실천이다. 분명 경제인과 구분이 된다. 문제는 인간을 통합적으로 보지 않고 이렇게 경제인과 정치인으로 분리한 것 자체에 있지만, 아무튼 서양이라고 도덕과 가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생태를 논의할 때 지나치게 이성중심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것을 경계하는 이유는 바로 가슴의 역할을 강조하고 오히려 이성이 가슴에 의해 컨트롤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의 중심을 가슴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 이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직관과 양심에 신뢰일 뿐 아니라 그에 의한 판단과 행위야말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도 바로 가슴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교육이 가장 소홀히 했던 것도 사실 가슴이 아니었던가? 나는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슴이 각성하고 가슴에 의해 판단하고 행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슴에 의한 각성이 전혀 다른 실존과 정체성이라는 것은 가슴이 깨어나기 전에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누구나 가슴이 뛰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가슴을 못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명확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에 반해 조상들과 아메리카 인디언 그리고 원시인들의 문화를 보면 전반적으로 가슴이 활동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사랑에 의해 나타나는 섬세함의 표현으로 드러나고, 존경에서 비롯된 예의와 겸손에서 드러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어떤 원시부족을 막론하고 가슴에서 비롯된 섬세함과 겸손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고도의 인격과 기품을 느끼곤 하였다.
동서양은 물론 모든 민족이 섬세한 자수와 세밀화, 문양 등이 발달했던 것이나 종교문화가 발달했던 것은 인류의 이러한 보편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의 원인으로 나는 자연을 꼽게 된다.
자연은 어떻게 가슴에 관여하는가
자연은 어떻게 가슴에 관여하는가? 그것을 나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 진선미(眞善美)를 일체로 파악하는 유영모 선생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감각과 정서에 밀접히 관계되어 있고, 주체를 둘러싼 외부환경을 통해 그것이 촉발된다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름답다’는 말을 언제 무엇에 대해 사용하는지 떠오려보기만 해도 자명하다.
예쁜 꽃에 대해, 아름드리 소나무에 대해, 웅장한 산에 대해, 멋진 여성에 대해, 혹은 옷에 대해, 시에 대해, 음악에 대해, 건물에 대해, 풍경에 대해, 곤충에 대해, 동물에 대해, 물건에 대해, 마음에 대해 ... 아름다움이 무제한적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영국이 철학자 버크는 우리가 그 자체로 느끼는 쾌감의 아름다움과 위험과 무한에서 느끼는 숭고미를 나누고 있다. 칸트가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무한한 우주에 대한 신비에 대해 숭고함을 체험하고, 더불어 가슴에 숨 쉬는 도덕률을 자각하고 찬양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스의 비극이나 쉴러의 비극이나 숭고함과 도덕성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전예술이 숭고미를 추구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통해 그리고자 했던 것도 결국 숭고미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바로 버트가 앞서 말한 또 다른 쾌감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다. 우리는 고양이나 나비나 꽃을 아름답다고 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서 사랑을 느낀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본 칸트나 해변의 바다에서 노는 아이를 떠올린 뉴톤처럼, 거대한 산이나 빙하, 바다, 광야, 어둠 등이 우리에게 숭고미를 느끼게 한다면 작고 섬세한 것들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앞에서는 존경을 느끼고, 뒤에서는 사랑을 느낀다. 아마도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을 대하면서 인간은 두렵고 떨리는 외경을 경험하였을 것이고, 자연에 대한 무한한 존경, 숭배의 감정이 종교로 발달하였을 것이다. 한편 귀엽고 섬세한 자연물의 아름다움에서 소중한 마음과 사랑을 느꼈을 것이다. 자연 안에서 이러한 것을 발견하고 미적 체험을 하면서 사람의 도덕과 직관이 계발된다. 때문에 쉴러는 ‘인간은 아름다움 통해 자유에 도달한다’고 말할 수 있었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자연이 가슴을 깨우고 존경과 사랑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무엇에 대해? 바로 자연과 타인이다. 존경과 사랑이야말로 도덕인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의 선(善)은 아름다움인 미(美)에서 나오고, 미(美)는 진리(眞)인 자연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과 미는 문명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인에 훨씬 더 도덕적이고 미적일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 안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체험할 가능성이 많지만, 우리는 인공적인 사회 안에서 성장하기 때문에 자연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 체험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나의 개인적 체험과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나의 경험으로는 버크의 구분과 달리 아름다움과 숭고미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일치한다.
유년기의 어느 날 시골 뒷곁에서 놀다가 이끼밭에서 우산이끼, 솔이끼 등 이끼군락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적이 있다. 마치 내가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 산과 숲을 내려보듯 이끼들을 보는 것이 거대한 숲을 보는 것 같았다. 이끼 하나하나가 나무로 보였다. 초록색의 섬세한 것들이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하게 느껴졌다. 버크 식으로 말하면 나는 그 때 자연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체험했던 것이다.
한편 산과 바다에 가면 자연의 웅장함을 느끼곤 했는데, 특히 태풍이 비껴가던 날 오른 지리산 반야봉의 강렬함은 흡사 영원과 마주하듯 나를 숭고한 감정으로 가득 채웠다. 바람과 운무가 자욱한 그곳에 단단한 바위와 키 작은 식물들이 성전처럼 신성하게 느껴졌다. 그 후 히말라야의 빙하와 봉우리들은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사람을 고양시켰다. 물론 나는 전문산악인이 아니지만 고산의 매력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벅차다는 덴 전적으로 공감한다. 밤하늘과 바다에서 숭고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지금 나는 화엄벌에 있다. 며칠 전 막 장마철이 끝났다. 숲에는 온갖 버섯들이 나왔다. 내가 오솔길에서 만난 것만도 족히 20~30종류가 넘는다. 그런데 버섯 하나하나를 유심히 보면 그것의 기능과 섬세함일 일치하며 아름답게 느껴진다. 더불어 내가 알지 못하는 무한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잠자리의 날개와 눈을 보라. 메뚜기의 눈이며 거미를 보라. 산에 핀 어느 꽃 한 송이 아름답지 않은 없고, 신비롭지 않은 게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작아도 숭고한 순간을 살고 있다. 벌판에서 주운 까마귀, 황조롱이, 꿩의 깃털들은 그 하나만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독수리깃털에서 무한한 자유와 용기와 힘을 느꼈던 것은 당연하다. 나뭇잎 하나도 제각기 다르고 아름답다. 생강나무의 부드러운 선과 질감은 어떤가? 오리나뭇잎의 출렁이는 모양과 물푸레나뭇잎의 살랑임은 어떤가? 바위에 앉은 지의류들은 어떤가? 하지만 가장 경이로운 것은 역시 아침마다 풀잎에 맺히는 이슬이다. 물방울 하나가 그냥 물방울 하나가 아니다. 화엄벌과 천성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산이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에 들어와 있는 것을 느낀다. 산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것은 내가 섬세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그냥 오래 보면 보는 것을 닮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새 둘은 연결되어 하나가 되기도 한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환경과 개체는 분리불가능하다. 쉼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개체는 서식지 환경과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론 완벽한 적응이 환경자체를 잊게 하기도 한다. 잊음 아마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적응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적응이 한편 습관과 타성으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새로운 경험은 강렬하지만 습관이 될수록 강렬도는 떨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계절이 쉼 없이 바뀌고, 자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하고 다차원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깨어있기만 하다면 새로움을 거듭 경험할 여지도 있다. 하지만 타성의 위험도 언제나 따르는 법이다. 맹목이 형성되는 법이다. 때문에 우리는 관계를 풍성하게 해나가고 거듭 새롭게 자연을 만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연에 대한 놀람과 매료를 통해 내 가슴이 정화되고 깨어나고, 나 자신의 정체성과 세계관이 깊이 영향 받고 있음을 느낀다. 나는 그것을 우리가 잃어버린 사랑과 존경이라고 느낀다.
생태교육
때문에 나는 생태나 생물에 대한 교육을 매우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보다는 자연에 대한 체험과 계기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숲해설사나 안내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해롭다고 생각한다. 오직 중요한 것은 숲에 들어서는 이의 마음이다. 다만 자연 안에서 뛰어놀며 자연 안에서 아름다움을 많이 경험하고 감탄하고 그래서 자연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아니어도 무슨 상관인가? 봄여름가을겨울 밤낮 없이 자연이 우리에게 친구를 보내고 선생을 보내는데 마음이 있다면 이들을 몰라볼 수 없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연에 반응하고 놀라고 황홀해진다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우리도 전염되어 행복감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될 것이다. 아니 참된 인간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느꼈던 불안이란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연이 가슴에 스며들 때 우리 생명이 거듭나고, 도덕적 각성이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어찌 억지로 할 수 있겠는가? 오직 마음이다. 자연 앞에서 우리 또한 자연스럽게 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