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잠을 깼는데 추적추적 비오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열고 보니 달빛이 훤하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가만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랫목에 앉아있는 뚱뚱한 단지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아랫목은 일년 내내 술단지 마님이 지키고 있었다. 발을 뻗으면 딱딱한 배로 힘주어 공격하니 후퇴할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요란한 소리로 신분을 알리던 뚱보마님이 조용히 잠 들었다. 어머님은 성냥불을 켜서 단지안에 넣어 보시고는 불이 꺼지지 않으니 술이 다 되었다고 했다. 술 하다 내가먼저 취한다고 투덜거리며 단지를 아버지의 첩인양 멱살을 잡고 끌어냈다. 그 자리엔 다른 단지를 앉혀놓고 어머니와 나는 술을 걸렀다. 그 막걸리는 부침개와 함께 아버님과 머슴이 일하는 들로 새참이 되어 뛰었다.
술이 얼얼이 취한 머슴들은 배를 벌겋게 내 놓고 그늘에서 자고 있었다. 어떤날은 해가 지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댁농사는 항상 꼴찌를 면하지 못했다. 가을에는 머슴 둘 세경주고 비료값 제하면 온 식구가 뼈빠지게 농사지어도 소리만 요란할 뿐 빚만 늘어갔다.
그 무렵 앞집 할머니가 조그만 주전자에 무엇인가 가지고 왔다.“우리딸이 서울서 가지고 온겨 먹어봐, 처음 먹으믄 맛이 괴상하지만 피로하질 않고 취하지도 않어, 농사일엔 제격이여 이걸 새참으로 주면 어떻겄소?, 게으른 머슴들을 못자게 하는 아주 멋들어진 처방이여 내말대로 혀봐 괜찮을 겨.
다음날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콩을 한 말이고 장에가신 어머니, 동서식품에서 나온 맥심커피와 프리마 백설표설탕을 사 오셨다. 어머니 이게 뭐예요? “점방사람들 한테 물어봤더니 커피라더라 저 뭣이냐 위국에서 들여온 아주 기가맥힌 차라더라 술 대신 먹으믄 좋다더라” 어머님은 이제 그 지긋지긋한 술 담그기를 과감히 벗어버리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앞집 할머니 말대로 왕초보 바리스타는 물을 끓여서 대충 감으로 양푼에다 커피 한 국자 설탕 한 국자 프림 한 국자를 넣고 저었다. 맛을 보았다. 씁쓸하고 털털하고 뭔가 이상하다. 다시 설탕 한 국자를 넣고 먹어본다. 달달한게 촌사람 맛이다. 달아서 좋지만 뭔가 부족한듯 하다. 다시 프림 더 넣고 커피 더 넣고 그러니 너무 진해 다시 물 더 넣고, 양푼에 출렁출렁 바다같다. 계속 맛을보니 이젠 무슨 맛인지 알수가 없다. 어머님 잔소리가 쏟아진다. “그놈의 커핀가 계핀가 타느라고 해진다 해져”
부침개와 함께 균형이 맞지 않는 커피를 한 주전자 담고 들로 뛰었다. 아버님께선 어리벙한 두 남자와 논둑에 앉으셨다. 아버님이 막걸리 잔에다 한잔 따르신다. ”이번에는 술 빛깔이 좀 다르네요?“ 이건 요즘 유행하는 술이라네, 읍내에 나가면 이것 한잔이 꽤 비싸다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시댁은 검은 빛깔의 보리술이 들길로 향했고 머슴들도 커피맛에 차츰 길들여지면서 매 식후로 커피는 숭늉과 같이 마시게 되었다. 그런데 머슴들 한결같은 소리가 “이상하네 워찌 술이 취하지를 않지”? 둘이서 숙덕 거렸다. 모를 심거나 벼를 베거나 고추를 심거나 큰 일을 할때는 한 주전자 씩 막걸리를 사다 먹으며 뚱뚱한 단지는 더 이상 아랫목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이 어설픈 바리스타의 커피 기술은 그날 기분에 따라서 어떤때는 달고 맛있다가 어떤때는 쓰기만 하다가 또 어떤때는 프림을 많이 타서 뿌옇게 우유에 가깝게 되다가 번덕스러운 사람의 얼굴이다.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커피 한잔과 마주 앉았다. 어느 나라에서 온 것인지 무심했던 커피의 생산지가 궁금해진다.
마침 커피재배국이 방연된다. 파란 커피 열매가 껍질을 벗기고 여러공정을 거처서 세계각국으로 수출되어 많은 외화를 벌어들인다. 제일 많이 생산되는 곳은 브라질이란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파푸아뉴기니 애티오피아 탄자니아등 50여개국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1895년 고종황제께서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으로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대중화 된 것은 독일인 손탁이 정동구락부에서 커피를 팔면서 1920년대에 명동 충무로 종로에 커피점이 생겨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오색 단풍이 온 산천을 물들이는 가을, 동창의 아들 결혼식에 초대되어 서울에 왔다. 식이 끝나고 나올무렵, 한 친구가 종이컵의 커피를 한 잔씩 돌린다. 그것도 스무명이 넘는 사람 수대로 말이다. 나는 야, 너 정말 대단 하구나, 언제 커피를 준비해서 친구들 이렇게 대접하니?나 같으면 절대 못할 일이다.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그러자 그 친구“나 대단한 일 한것 아니야 자판기에서 그냥 빼온 거야”한다 세상에 커피 타주는 기계도 다 있다냐 참 살기 좋은 세상이다 싶었다.
집에와서 남편한테 이야기를 했다. 여보 요즘은 커피 타주는 기계가 다 있어요, “뭐 커피 타주는 기계가 있다고”? 예식장에 가니 기계가 커피를 공짜로 타 주더라구요, 원하는 만큼 누르면 계속 나오더라구 참 이상하지, “이 사람 어디서 주워들은 모양인데 누에는 뽕잎을 먹어야 살지 갈잎을 먹으면 병드는 법이여 그런공짜 바라고 이상한 망상에 들뜨지 말고 정신 차려요”졸지에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어느날 백화점에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백화점 바로 옆에 산다면서 자기집에 가자고 했다. 마지못해 따라나선 길, 으리으리한 집안에 고품스런 장식품과 도지기들, 그림과 글씨, 친구의 살아온 길이 눈에 들어온다. 학창 시절에도 그져 말없이 정갈한 성격의 친구, 털털하지도 그렇다고 깐깐하지도 않은 모가없는 현모양처의 스타일이었다. 나 처럼 몸부리고 살지 않았다는 것이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친구는 “나 이렇게 살아, 너는 잘 살고 있지?”야 나는 할말이 없다. 촌에서 농사짓다 온 내가 무슨수로 잘 살겠니? 너 보니 정말 부럽다. 나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아마 이렇게 살지 못할거야, 이야기 하는 도중,
방안가득 퍼지는 향기가 말랑말랑 코끝을 간지린다. 말간 선홍색 빛깔의 한잔을 권했다. 이게 뭐니? “헤이즐럿 커피야 나는 순한 맛이 좋더라 그래서 언제 부턴가 원두를 갈아서 여가지에 내려 내 마음대로 조절해 마시는 거야 괜찮지?” 응 그래 너무 좋다야,
이런 커피도 다 있니, 나 전번에 창균이 아들 결혼식에 갔었는데 순식이가 예식장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커피라는데 그것도 맛 있더라,
“아 그건 자판기 커피야 요즘 거리에나 큰 건물엔 다 자판기가 있어, 일종의 장사속이지,한 잔에 3, 400원 할거야 그런데 예식장에선 써비스 차원에서 무료로 주는거지, 그런커피 우리집에도 있어 나는 사람을 좋아하니 여러 개층의 식성에 맞추어 커피도 다양하게 갖추어 놨지 맛 볼레?“ 그래 한번 구경하자,
친구는 막대기 처럼 길죽한 봉지를 가로로 싹뚝 잘라서 커피 잔에다 넣고 끓는물을 부어 조그만 스푼으로 저어서 준다. 야, 이맛이야, 순식이가 주던 바로 그 커피 맛이야, “이게 더 맛있니”? 그래 나는 이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아직은 사람들이 믹스커피를 더 좋아하더라 이건 마트나 백화점에 가면 100개씩 든 큰 봉지로 팔어 그거 사다 물만 부어 마시면 되, 아주 편해”그래 맞어 아무런 기술없는 나에겐 안성맞춤이야.
그날로 당장 마트에서 커피믹스를 샀다. 술을 좋아하던 남편도 마셔보고는 희한하다며 순식간에 커피 매니아가 되었다. 하루에 네 다섯잔 씩 마시니 100개들이 커피가 떨어지지 않는다. 대신 술은 어쩌다 한잔씩 모임 있을때만 마신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다.
가끔 동창회나 동문회에 가면 커피 전문점에 들린다. 친구들 모두 각자 다른커피를 시켜 서로 바꾸어서 맛을 보기도 한다. 이름도 생소한 이루 헤아릴수도 없이 종류가 많다.
하지만 기본맛은 역시 커피다. 그 어떤것을 섞어도 기본틀을 무시해선 결코 좋은 커피라 할수 없다. 잡곡밥이 아무리 좋다해도 쌀이 들어가지 않고는 안 되는것 처럼 말이다.
나는 등산 갈 때나 야외 나갈 때, 식사 후 커피믹스를 필수로 챙긴다. 92세의 시어머님은 매 끼니마다 꼭 커피믹스 한 잔씩을 드신다. 그리고 고기를 드시고 소화가 안 될때나 더부룩할 때 처방전은 역시 커피다.
요즘은 대학에 바리스타 과가 있어 전문 직업인으로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또 학원도 생겨났다. TV를 보면 커피에 우유나 생크림 여러가지 재료로 하트나 나뭇잎 모양등 여러 가지 문양으로 멋을내어 연인과 함께 한 시간이 더욱더 보람되게 만든다. 나도 젊었더라면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