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간행된 개혁 신앙 강좌 5권의 저자 야콥 캄파위스(Jacob Kamphuis) 교수는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의 목사로서 그 교회의 신학교에서 교회사와 교의학을 가르치다가 은퇴하였고, 우리가 잘 아는 고재수(N.H. Gootjes), 허순길, 유해무 교수의 지도 교수이다. 또한 1975년과 1991년에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어서 한국과 한국 장로교회에 대하여서 비교적 잘 아시는 분이다.
『개혁 그리스도인과 신앙고백의 특징』에는 네 편의 번역 글과 한 편의 대담기가 실렸다. 다섯 꼭지의 글은 글을 쓴 계기를 따라서 셋으로 묶을 수 있다. 첫째는 1975년의 한국 여행, 둘째는 ‘개혁교회들의 국제회의’(ICRC), 셋째는 네덜란드에서 공부하는 한국 유학생이다.
개혁 신자의 눈에 비친 한국과 한국 장로교회
첫 번째 글은 1975년에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의 주간지인 「개혁」에 기고한 여행기를 번역한 것이다. 이 글에서 캄파위스 교수는 ‘어린 교회’와 ‘오래된 교회’로 쉽게 구분하는 것을 비판한다. 역사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모두 주님께서 말씀과 성신으로 불러 모으시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이다. 비록 각 교회가 그 ‘하나의 교회’에 가입한 시기는 다르지만, 모두 한 교회에 속하였기 때문에 ‘어린 교회’와 ‘오래된 교회’로 구분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얼른 보면, 그렇게 강조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행간을 자세히 읽으면 격려와 권고의 뜻이 담겨 있다. 모든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므로, ‘어린 교회’라고 하면서 다른 나라의 ‘오래된 교회’를 의지하지 말고 주님만을 의지하여서 ‘독립’할 것을 완곡하게 권면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성경적 지혜와 통찰력은 불교도에 대한 평가에서도 잘 나타난다. 시주하러 온 중을 만났을 때나 해인사를 방문하였을 때 받은 인상을 개혁 신앙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다른 나라의 문화재 앞에서 동양 사상에 심취한 네덜란드의 사상가나 시인을 자유롭게 인용하며 비판하는 인문학적 소양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고, 성숙한 개혁 신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캄파위스 교수는 한국 장로교회에서 예배나 성찬을 거행하는 모습도 성경적인 눈으로 예리하게 관찰하고, 특히 통성 기도하는 것이 이교적인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도 다룬다. 물론 브루스 헌트(B. Hunt) 선교사의 설명을 길게 인용하여서 동정적으로 이해하지만,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다.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의 역사를 잘 아는 성경 선생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읽는 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개혁 신앙고백서의 특징과 ‘개혁교회들의 국제회의’(ICRC)
둘째와 셋째 글은 ‘개혁교회들의 국제회의’(ICRC)와 관련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몇 가지 특징”은 1985년의 제1차 ICRC 모임을 앞두고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의 교인들을 상대로 쓴 글이다. 대륙의 개혁교회 교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대하여서 잘 모르고, 자기 교회 안에서 겪은 ‘언약’과 ‘교회관’ 등에 대한 신학 논쟁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자체를 문제가 있는 것처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캄파위스 교수는 네덜란드 교회사를 더듬으면서 다른 교회와 다른 신앙고백서에 대하여서 넓은 마음을 갖도록 가르친다. 외국의 교회들이 아르미니우스파의 문제와 씨름하던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돕기 위하여서 1618-19년에 열린 도르트 회의에 참석하였는데, 그 교회들의 신앙고백서는 다 달랐지만 그들은 믿음 안에서 통일되어 있었다. 주님께서 참된 믿음으로 하나가 되도록 부르셨지만, 각 교회가 처한 상황이 달라서 신앙고백서가 달랐다. 그러나 신앙고백서가 다른 것은 오히려 교회의 부요함이고, 함께 모이는 데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개혁 신앙고백서는 다양하면서도 핵심적인 데서 통일이 되어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신령한 통일은 외적인 통일을 강조하는 로마 교회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저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잉글랜드 국교회의 성직 계서제(聖職階序制)를 개혁하고 나온 점에서 개혁적이라고 지적하고,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신앙고백 발전사 가운데 가장 풍성하고 완숙한 열매의 하나로 칭송을 받아온 것”이라고 한다.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더 철저하게 살펴볼 것이 있지만, 그것은 도르트 신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임을 언급한다. 저자는 신앙고백서와 교회를 그 시대의 상황에서 동정적으로 이해하고 성경 말씀의 인도를 받으면서 나아갈 것을 가르친다.
3장, “교회와 관용에 관하여”는 1993년에 열린 ICRC에서 발표한 글이다. 짧은 글이지만, 관용에 대한 생각의 변화를 정치사적으로 검토한 후에 다시 교회사적으로 살펴보고, ‘관용과 불관용’으로 대립시키는 것을 반대하면서 ‘참된 관용과 거짓된 관용’으로 나눈다. 캄파위스 교수는 현대의 다원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관용’이 사실은 참된 교회에 대한 ‘불관용’임을 지적하면서 교회가 핍박을 받을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저자는 또한 개혁 교회 안에서도 근대 사조(思潮)의 영향을 받아서 ‘체계’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다른 입장을 취하는 사람에 대하여서 ‘불관용’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지적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을 지적한다. 우상과 죄에 대하여서 불관용하지만, 죄인을 용서하고 받아 주시는 것이 ‘참된 관용’이라고 가르친다.
‘관용’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살펴보는 것은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교회들이 ICRC에서 만났을 때 서로에게 관용하고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2장의 결론에 나오는 말이 3장의 결론도 될 것이다. “이제 ICRC와 같은 데서 교회들이 서로 만났을 때, 서로를 비판해 놓고 뒤돌아서서 각각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대신에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면서 서로를 ‘섬길’ 기회들이 있으면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개혁 그리스도인의 특징과 한국 교회
네 번째 글과 다섯 번째 글은 네덜란드에서 한국의 유학생을 대상으로 행한 강연과 대담이다. 따라서 네덜란드 교회의 역사에 대하여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고, 부분적으로는 전문적이어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인내심이 있는 독자는 말랑말랑한 것만 먹는 사람이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개혁파 그리스도인의 특징”에서는 개혁파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에서부터 차근차근 가르친다. ‘오직 성경’은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라는 종교개혁의 고백인데, 이것은 성경 이외의 다른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 성경’으로 이어진다.
성경만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것은, 첫째, ‘신자의 삶’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우리는 개혁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성취를 하고 특히 지적인 체계를 갖춘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캄파위스 목사님은 ‘오직 성경’의 원칙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를 깨닫고 그분의 자비를 의지하는 사람이 개혁 신자라고 한다. ‘오직 성경’은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신자의 생활에 적용되어서 죄와 구원의 은혜를 깨닫게 하는 원칙이다. 신자는 오직 말씀으로 새롭게 함을 얻고 전체 성경을 배우면서 그의 모든 삶에서도 거룩함을 나타낸다.
둘째, ‘오직 성경’은 ‘교회의 삶’에도 적용된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기 때문에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이다. 오직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전체로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체로 전하는 교회가 바로 개혁교회이다. 백화점에 많은 가게가 있는 것처럼, 개혁교회는 ‘은혜’를 파는 많은 가게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전하는 그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개혁교회이다. 여기에서도 ‘오직 성경’은 ‘전체 성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저자는 ‘교회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말씀과 성신으로 불러 모으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한다.
오직 그리스도의 권위만을 높이고 전파하는 교회는 사람을 높이지 않는다. 개혁교회는 이전의 교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말씀의 인도를 받아서 전진한다. 칼빈이나 바빙크나 스킬더와 같은 사람에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계속 받아 더 나아간다.
셋째, ‘오직 성경’은 ‘소명의 삶’으로 연결된다. 말씀의 권위를 유일하고 전체적인 것으로 높이는 것은 가정과 교육과 정치의 생활에서도 나타난다. 그곳에서 말씀으로 소명을 깨닫고 그것을 행하면서 살아간다. ‘오직 성경’을 강조하면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개혁 교인은 가정과 교육과 공적인 생활에서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이것이 개혁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마지막 장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 개혁 신앙의 특징, 직분론, 핍박 등의 주제를 다룬 대담기이다.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역사를 살피면서 자유주의와 배교에 떨어진 기존 교회로부터 ‘분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으로 ‘복귀하는 것’임을 지적하고, 개혁 신앙의 특징은 ‘체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파하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체계에 대한 비판은 3장과 4장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19세기에 개혁 신앙을 ‘체계’로 이해한 폐해가 무척 컸기 때문이다. 캄파위스 교수는 ‘체계’ 대신에 ‘언약의 교제’를 성경적으로 강조하여 가르친다. 장로교의 전통에서는 ‘언약’을 ‘예정’과 비슷하게 이해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언약’이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진다. 그러나 ‘언약’이라는 말이 나올 때 ‘언약의 교제’라는 뜻으로 읽으면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개혁 신앙 강좌 5권은 야콥 캄파위스 교수의 1975년의 한국 여행기로 시작한다. 30년이 지난 다음에 그의 아들 베른트 캄파위스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였다. 아들 캄파위스 교수는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서 같은 신학 대학에서 같은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한 세대의 과업이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진 것이다.
베른트 캄파위스 교수는 2005년 9월 25일에 대전 성은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성약출판사도 방문하였다. 그때 받은 인상을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의 주간지 「개혁」에 실었다(2005년 11월 26일자).
나는 대전에 있는 독립개신교회(IRC)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였다. 독립개신교회는 한국에서 ‘개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일한 교회이다. 그 교회는 고(故) 김홍전 박사에 의하여서 설립되었고, 네 교회로 구성되어 있다.……
독립개신교회는 매우 활발한 교회이다. 언약에 대한 사상에 근거하여서 힘써서 자녀들을 가르치되 교회적으로 가르친다. 그 점에서 그들은 우리와 매우 가깝다. 서울에는 그 교회의 출판사가 있는데, 우리 교회의 책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개혁 신앙 강좌 시리즈를 뜻함. 필자 주). 직원 두어 사람과 영어로 잠깐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들은 ‘분리’, ‘애통’, ‘해방’이라는 화란어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독립개신교회는 우리 교회의 복사판이 아니다. 예배는 ‘오르디나리움’[ordinarium. ‘영광송-성삼위-경배송’과 같이 순서(order)를 따르는 예배식]에 기초하고 있고 아름다운 찬송가를 사용한다. 그 찬송가는 신학자일 뿐 아니라 음악가인 김홍전 박사가 혼자서 작사하고 작곡한 것이다. 곡조는 창작한 것이지만 우리의 시편 멜로디와 비슷한 분위기이다. 뿐만 아니라 김헌수 목사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제네바 시편 찬송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부르고 있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설교를 그의 회중에 도입하였다.
나는 이 교회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나는 거기에서 개혁 신앙고백서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함을 보았다.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와 달리 이 교회에는 온 가족이 함께 예배를 드려 어린아이들이 많이 참석하였고, 그 사실이 교회를 더욱 활기차게 만들었다.
야콥 캄파위스 교수는 독립개신교회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우리의 길을 가다가 그분을 만났다. 캄파위스 교수가 서문에서 표현한 것처럼, 우리는 성신의 교제 가운데서 만났고,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분은 「성약출판소식」을 위한 대담에도 응하였고 자기의 책을 한국어로 출간하는 것도 기쁘게 허락하였다.
한 세대가 지난 2005년에 그의 아들인 베른트 캄파위스 교수가 한국을 방문하고 보고서도 썼다. 거기에서 우리는 ‘신앙고백의 다양성과 믿음의 통일성’, ‘언약의 교제 안에서 누리는 참된 관용과 교제’가 책 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생활에서 맛보는 것임을 발견한다. 금년 10월에 독립개신교회는 ICRC에 방문 대표를 파견하여서 교회의 하나 됨과 참된 관용과 자유를 누렸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주님께서 친히 모으시고 다스리시는 한 교회에 들어왔고 그 실체를 맛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실체를 맛보는 사람으로서는 또한 이 책을 탐독(耽讀)해야 하지 않겠는가?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KCRC에 대해서 양무리마을이 경고해 왔는데, 저와 동일한 견해를 갖고 있어서 다행이군요. 퍼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