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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 서산,태안,홍성 답사자료원안
== 서산시 ==
= 서산의 역사와 유래
서산은 삼한시대에 마한에 속하였으며, 현재 지곡면 일대에 마한의 소국이었던 「치리국국」이란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백제시대에는 「기군」, 통일신라 경덕왕 14년(755)에는 「부성군」, 고려 충열왕 10년(1284)에 처음으로 「서산」이라 불려오다가 충열왕 34년(1308)에 「서주목」으로 승격되었으며, 다시 충선왕 2년(1310)에 「서령부」로 개칭되었다.
= 서산시는 대규모의 간척사업과 대산 임해공업지역 등 서해안 개발의 붐을 타고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산 테크노벨리 등 대규모 산업단지 조성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석유화학 산업과 더불어 자동차산업의 메카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또한 서산 대산항 건설과 당진-대전간 고속도로 대산 연장이 가시화됨에 따라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이 기대되는 등 서해안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 1989년 1월 : 서산시, 서산군, 태안군으로 분리(서산읍 시 승격)
1995년 1월 : 서산시, 서산군 통합(법률 제4774호)
+ 인구 ; 177,265명 [2018년 8월 31일 기준] + 행정구역 ; 1읍 9면 5동
*** 보원사지
시대 ; 백제
지정종목/번호 : 사적 제316호(1987.7.18.)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상왕산 보원마을에 있는 절터이다. 옛 보원사의 창건연대와 소멸시기는 기록된 문헌이 없어 정확히 알수는 없다. 예부터 전하는 이야기와 출토된 유물로 보아 백제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법인국사보승탑비에 승려 1,000여 명이 머물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매우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당간지주(보물 제103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 법인국사 보승비(보물 제106호) 등 많은 문화재가 남아 있다.이곳에서 서산(瑞山)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까지는 가까운 거리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볼 때 이 지역은 한국불상의 선구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보원사지 석조
시대 ; 통일신라시대~고려초기
지정번호 ; 보물 102호(1963.1.28.)
보원사지 석조는 현재 남아있는 석조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방형의 석조 안쪽과 위쪽만 정밀하게 다듬고 바깥쪽은 거친 다듬자국이 남아 있는데 혹시 땅에 붙여두고 사용했는지도 알 수 없다.석조의 바닥에 직경 약 8cm 정도의 원형 배수구를 만들어 물을 빼낼 수 있도록 하였고 아래로 내려 갈수록 벽이 두꺼워져 중후한 느낌을 주고 있다. 석조의 크기는 전체 길이 348cm(안쪽길이309cm) ,폭 175cm(안폭 137cm), 높이 65cm로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다. 조각의 수법이 간결하고 소박하여 웅장한 느낌을 주는 것으로 신라말~고려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석조이다.
** 보원사지 당간지주
시대 ; 통일신라시대~고려초기
지정종목/번호 ; 보물 103호(1962.12.21.)
화강석으로 만든 2개의 돌기둥을 92cm의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보게 하여 세웠다. 지금은 지주와 지주 사이에 세워져 있어야 될 당간은 없어지고 지주만 남아 있다. 두 개의 지주 높이는 각각 420cm이고 폭은 37cm이다.지주의 형태는 4면에 넓은 홈을 얕게 파서 테두리를 도드라지게 하고 지주의 상단부 바깥 끝 부분을 둥글게 다듬어 거대한 크기에도 부드럽게 보이도록 조각하였으며 삼국시대 이래 기본 형식을 따른 작품이다.양 지주의 아랫부분에는 구멍을 파서 당간을 고정시킬 수 있도록 했고 두 지주의 바닥에 2단의 괴임을 둔 원형 간대석을 놓고 당간을 세울 수 있도록 원형 홈을 파서 당간을 꽂도록 하였다.
** 보원사지 5층석탑
시대 ; 통일신라~고려초기
지정번호 ; 보물 104호(1963.1.21.)
보원사(普願寺)터 서쪽의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석탑이다.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1959년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절터에는 이 탑 외에도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당시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이다. 아래 기단 옆면에는 사자상을 새기고 윗기단 옆면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을 2구씩 새겼다. 8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탑신에서는 1층 몸돌 각 면에 문짝 모양을 새겼으며, 지붕돌은 얇고 넓은 편으로 온화한 체감률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이 넓어진 것은 백제계 석탑 양식을 모방한 것으로 옛 백제지역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로 머리장식의 무게중심을 고정하는 쇠꼬챙이가 높이 솟아 있다.이 탑은 세부조각이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으나 장중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고려 전기의 우수한 석탑이다.
** 보원사지 법인국사 보승탑
시대 ; 고려 경종
지정번호 ; 보물 105호(1963.1.28.)
법인국사보승탑은 보승탑비와 함께 금당지 후편에 나란히 서 있는 팔각원당식의 부도이다.
기단부가 땅속에 묻혔던 것을 1962년도에법 조사하여 기단부의 구조가 밝혀졌다.
이 부도는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8각형의 기단부와 탑신부를 형성하고 그 위에 상륜부를 세운 형식의 부도이다. 기단부는 상ㆍ중ㆍ하대로 구성하였으며 하대석에는 안상(眼象)을 음각하고 그 안에 사자상을 양각했고, 위 중대석 괴임돌에는 눈, 코, 입, 비늘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용을 구름과 연꽃사이에 조각했다.
** 보원사지 법인국사 보승비
시대고려 경종
지정번호 ; 보물 106호(1963.1.28.)
비받침인 귀부(龜趺)는 거북모양이나 머리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의 모습으로, 목은 앞으로 빼고 콧수염은 뒤로 돌아 있으며 눈은 크게 튀어 나와 있다. 위에는 3단 받침을 하고 비를 얹었으며 비머리는 네 귀퉁이에서 안쪽을 바라보는 용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법인국사(法印國師)는 광종 25년(974)에 국사(國師)가 되었고 이듬해에 입적하였으며, 비는 경종 3년(978)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거대하고 웅장하나 조각기법이 형식에 치우친 감이 있다.
** 보원사지 출토 고려시대 철조여래좌상 [ 高 麗 時 代 鐵 造 如 來 坐 像]
시대 ; 고려/고려 전기
보원사지 출토 고려시대 철조여래좌상은 보원사지에서 1918년 3월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겼고, 반출 직후 경복궁 근정전(景 福 宮 勤 政 殿) 회랑에 봉안되었다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불교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다.고려 때인 11세기에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普 願 寺 法 印 國 師 寶 乘 塔 碑)에 950년(광종 1) 법인국사(法 印 國 師)가 발원해 석가 삼존 금상을 봉안한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조성하였던 본존불이라는 견해에 따라 조성 연대를 광종 원년인 95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다만 그때에는 금상(金 像)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철불에 금박을 입혔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57㎝, 무릎 너비 217㎝의 거대한 철조 불좌상으로, 경기도 광주의 대철불 좌상보다 약간 작은 상이지만 당당하고 우람한 모습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몸체에 비해 머리 부분이 훨씬 커진 비례를 보여 주고 있어서 얼굴이 보다 강조되고 있다.낮고 넓적한 육계(肉 髻)와 나발(螺 髮)의 머리카락을 가진 머리와 함께 직사각형의 대형 얼굴에 약간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얼굴은 가늘고 긴 눈에 좁은 콧날, 입꼬리는 아래를 향해 약간 처지게 표현되었으며, 목에는 삼도(三 道)가 뚜렷하다. 법의(法 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右 肩 偏 袒)이며, 옷 주름이 굵게 묘사되어 있다. 두 손은 모두 없어졌지만 오른쪽 손목의 위치로 보아 수인(手 印)은 항마촉지인(降 魔 觸 地 印)을 결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원사지 출토 고려시대 철조여래좌상은 큰 규모에 비해, 전체적으로 조형미는 떨어진다. 몸체에 비해 불두가 큰데다가 목이 굵고 어깨는 좁아서 안정감이 떨어진다. 장신의 상체와 아랫배가 불룩한 점은 나말 여초(羅 末 麗 初)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으며, 특히 우견편단한 얇은 대의가 넓은 폭으로 주름 잡혔고, 선들도 도식적으로 묘사된 것 등은 고려 시대 철불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강원도 원주에서 출토된 철불 3구와 비교할 때 얼굴 모습, 왼쪽 어깨에서 한 번 접혀져 있는 우견편단, 왼팔이 접히는 곳에 표현된 리본 형태의 옷 주름, 항마촉지인의 수인 등에서 거의 동일한 수법을 보이고 있어 서로 관련된 조각가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보원사지 출토 고려시대 철조여래좌상은 추상화되어 가는 네모꼴의 얼굴과 납작한 머리 형태 및 직선을 이루고 있는 눈과 입 등 그 형태에서 고려 시대에 들어 지방화하고 개성화해 가는 철불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더불어 보원사 법인국사 보승탑비에 기록된 949년(정종 4) 작 석가 삼존상의 본존상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밝혀진다면, 정확한 연대를 가지고서 고려 초기 철불의 특징 및 형식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 아라메 길
‘아라메’는 바다의 순우리말인 ‘아라’와 산의 우리말인 ‘메’를 합쳐서 만들어진 말로 청정한 바다와 수려한 숲길을 골고루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2010년 2월 서산 아라메길 종합 추진 계획을 확정하고 3월 서산 아라메길 제1구간 1차 조성 사업을 완료하였다. 2010년 4월 아라메길 중장기 개발을 충남발전연구원과 용역 체결하였다. 2010년 5월 유래 및 전설 안내판, 조형물 등의 설치를 완료하였다. 2010년 7월 10일 제1구간 개통식 및 걷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2010년 7월부터 12월까지 제1구간 지선 코스[유기방 가옥~서산 보원사지~개심사 입구~개심사~오학리 입구~해미향교~서산 해미읍성] 정비를 완료하였다. 2011년 1월부터 4월까지 제1구간[유기방 가옥~서산 보원사지~개심사 입구~개심사~오학리 입구~밤나무단지 입구~오학리 굴다리~해미읍성 북문~서산 해미읍성] 지선 코스 정비를 완료하였다.
전체 코스는 유기방 가옥에서 해미읍성까지 총 길이 20.2㎞로 2시간 30분, 3시간 30분, 3시간 50분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2시간 30분 코스는 총 길이 8㎞로 보원사 절터를 돌아보는 길이며, 3시간 30분 코스는 총 길이 12.1㎞로 강댕이 미륵불을 돌아보는 길이다. 마지막 3시간 50분 코스는 총 길이 13㎞로 서산 마애삼존불상 입구에서 해미읍성 동헌 앞까지 돌아보는 길이다.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시대 ; 백제후기
지정번호 ; 국보 제84호 (1962.12.20.)
소재지 ; 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길 65-13
조성시기 : 서기 600년경
크기 : 본존불 280cm, 미륵보살 166cm, 제화갈라 170cm
옛이야기 :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 발견에 관한 일화“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 분있는디유.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지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하고 놀리니까본마누라가 장돌을 쥐어박을라고 벼르고 있구만유. 근데 이 산신령 양반이 가운데 서 계심시러 본마누라가 돌을 던지지도 못하고 있지유“
1959년,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 발견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 홍사준 박사가현장조사 중, 지나가던 한 나무꾼에게 들은 이야기예요. 나무꾼에게는 암벽중앙의본존불이 산신령으로 보였고, 본존불 우측의 보살은 본마누라, 좌측의 다리를 꼬고 턱을 괴고 앉은 반가사유는 작은 마누라로 보였던 것이지요. 나무꾼의 생각이 참 재미있네요.“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 후기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히 아름다운 미소를 뛰고있어요. 오랜세월 수풀에 파묻혀 잠들어 있다가 1958년에 발견되었고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빛의 각도에 따라 미소가 오묘하게 변하는데 아침 햇빛에 비취는 얼굴이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죠. 백제인만의 세련된 기술로 부드럽게 조각되었고, 80도로 기울어진 채 조각되어 있어 비 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게 한 점은 과학적으로 우수하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 바위 벽에 새겨진 세 분의 부처님은 벙글벙글 미소를 머금고 있어요. 서산마애삼존불상의 미소는 꾸밈이 없고, 밝고 너그러워서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기도 해요.
가운데 있는 부처님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얇고 넓은 코, 도톰한 입술 등 전체적으로 둥글둥글하고 자비로운 모습이에요. 왼쪽에 있는 부처님은 두 손을 모아 무언가를 쥐고 있고, 도톰한 볼과 작은 눈에는 천진한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지요. 왼쪽에 있는 부처님은 앉아서 한쪽 다리를 올리고, 오른쪽 손가락을 볼에 대고 아이처럼 귀엽게 웃고 있어요.
+ 신기한 점은 빛에 따라서 부처님의 표정이 달라진다는 점이에요. 햇볕이 들지 않을 때에는 근엄한 표정이어서 선뜻 다가가기 힘들 정도예요. 하지만 햇볕이 비추면 어느새 환한 웃음으로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편안하게 해 주지요. 그래서 신비의 미소라고 불리기도 해요.
++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는 백제의 분위기를 가장 거리낌 없이 표현하여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운산면 일대 사람들에겐 잘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이 일반에도 알려지게 된 것은 1959년이다. 당시 부여박물관의 홍사준 관장은 보원사지의 유물을 조사하러 이 마을에 와 있었다. 주민들에게서 서산마애불에 대한 얘기를 들은 그는 국보고적보존위원회의 김상기, 이홍직에게 보고했고, 그 후 현장 조사와 연구를 거쳐 1962년 국보 제84호 서산마애삼존불상으로 지정되었다.세 부처는 가운데에 있는 것이 본존인 석가여래입상이고, 그 왼쪽이 제화갈라보살, 오른쪽에 미륵보살이라고 본다. 그러나 당시에 성행했던 신앙에 따르면 석가세존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이 협시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석가여래불의 옷맵시에서는 중국풍이 연상되기도 하지만, 크게 뜬 눈과 활짝 웃는 미소는 고전적인 양식이면서도 틀림없는 백제의 미소라 할 수 있다. 그 미소가 ‘신비한 미소’라고 불리는 것은 부처의 표정이 빛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양쪽의 협시 보살들도 얼굴 가득 웃음을 띤 여자다운 모습이라서 ‘살짝 토라진 본부인에 의기양양해진 첩 부처’라는 장난스러운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분명한 것은 누구나 편안하게 만드는 너그러운 이런 웃음이 고구려의 미소를 백제화한 한국 불상의 독특한 형태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이다.그 건너편에 있는 바위가 인암(印 巖)이다. 사면이 돌로 되어 있고 이끼가 끼어 있는 이 바위는 석가모니의 인장을 속에 숨겨놓았다고 한다. 예전에 해미고을 원님이 이 인장을 꺼내기 위하여 석공을 시켜 바위를 떨어내려고 했는데, 별안간 구름이 일며 천둥번개가 내려치고 소나기가 퍼부으며 큰 산이 흔들리고 움직여서 가까운 거리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원님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이 바위는 귀신이 돌봐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할 수 없이 일을 중지했다고 한다. 근처에 있던 무릉대(武 陵 臺)는 민간에 전하기를, 석가모니를 장사 지낸 곳이라고 한다.서산마애삼존불이나 태안마애삼존불 또는 보원사지 등의 불교 유적이 서산 일대에 산재한 이유는 6세기 말엽 백제의 정치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 무렵 백제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고구려와 사이가 좋았던 시절에는 육로를 통해 중국과도 교역을 하고 있었으나,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 정책을 펴고 신라에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에는 중국으로 가는 길을 바다에서밖에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당진과 태안 지역이 중국의 산둥반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었기 때문에 서산 일대가 교역항이 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로 가는 길이 태안에서 서산을 거쳐 예산의 가야산으로 이르는 길이므로 그들의 안녕과 평안을 비는 큰 절, 즉 보원사나 개심사 같은 절과 서산마애삼존불, 태안의 마애삼존불 또는 화전리의 사면석불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 제화갈라보살 [提 華 褐 羅 菩 薩]
아득한 과거 석가모니부처님이 수행자이던 시절에 장래에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수기를 준, 정광여래의 화신이다.
++ 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서방정토의극락세계에머물면서불법(佛法)을설한다는대승불교의부처. 산스크리트어
미타(彌陀), 미타불(彌陀佛), 아미타(阿彌陀), 타불(陀佛)
** 비로자나불
서산마애여래삼존불로 가는 길 한쪽에는 조용히 앉아 있는 석조비로자나불과 석등이 있었으나 2005년 3뤌 행방불명되고 현재는 석등 받침만남아 있어 무심히 지나치기 쉽다
+ 모든 부처님의 진신(眞 身:육신이 아닌 진리의 모습)인 법신불(法 身 佛).
이 부처님은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광명(光 明)의 부처이다.
범어 바이로차나(vairocana)를 음역하여 비로자나라고 한다.
*** 강댕이 미륵불
주소 ; 서산시 운산면 용현2리(아랫강댕이)
이 강댕이 미륵불은 현재의 고풍저수지 상단부 안에 있었던 것을 저수지로 축조하
면서 수몰되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이다.
조성연대는 고려말 ~ 조선초로 추정되는데 높이216cm, 어깨의 폭은 65cm, 두께는
25cm이고,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오른팔을 위로 올려 가슴에 붙이고 왼팔은
구부려 배위에 대어 서산지방의 다른 미륵과 같은 형식이다.
중생이 진심으로 기도하고 간절히 희구하는 바에 따라 그들의 생각이나 행위 경계에 따라 때를 놓치지 않고 때를 기다리지 않고, 어느 곳, 어느 때나 알맞게 행동하고 설법하며, 여러 가지 상이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원에서 이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 寂 光 殿) 또는 대광명전(大 光 明 殿)이라고 한다. 이러한 전각의 명칭이 붙여질 경우에도 보통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노사나불(盧 舍 那 佛)과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게 된다.
또 비로전(毘 盧 殿) 또는 화엄전(華 嚴 殿)이라고 할 때에는 보통 비로자나불만을 봉안하는 것을 상례로 삼고 있다. 법당 안의 비로자나불상은 보통 지권인(智 拳 印)을 하고 결가부좌한 자세로 앉아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서해로 통행하는 중국 사신 등이 오가는 통로에 세워졋다고도 하고 또는 보원사를 수호하는 비보장승이었다고도 한다
*** 개심사
시대 ; 백제 의자왕 지정번호 ; 전통사찰 제38호(1983.2.28.)
소재지 ; 서산시 운산면 개심사로 321-86
개심사는 운산면 신창리에 위치한 충남 4대 사찰중의 하나로써 백제 의자왕 14년인 65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에 처능대사에 의하여 중수되었다고 전하고 있다.대웅전의 기단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 6년(1475)에 산불로 소실된 것을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보물 제143호인 대웅전은 창건당시의 기단 위에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한 다포식과 주심포식을 절충한 건축양식으로 그 작법이 미려하여 건축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사찰을 중심으로 우거진 숲과 기암괴석 그리고 석가탄신일을 전후하여 만개 하는 벚꽃은 주위 경치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사찰 주변이 온통 벚꽃으로 만발해 마치 속세의 시름을 잊은 선경에 와 있는 듯한 감동 마저 느끼게 한다.
** 대웅전
시대 ; 조선 성종
지정번호 ; 보물 143호 (1963.1.21.)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654)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전한다.1941년 대웅전 해체 수리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건물은 고쳐 지을 당시의 모습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개심사 대웅전은 앞면 3칸ㆍ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이 건물은 건물의 뼈대를 이루는 기본적인 구성이 조선 전기의 대표적 주심포양식 건물인 강진 무위사 극락전(국보 제13호)과 대비가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 개심사 명부전
지정종목 ; 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충남문화재자료 제194호(1984년 05월 17일)
명부전의 건립연대는, 조선시대인 1889년(고종 26)에 죽포(竹 圃) 김설제(金 說 濟)가 작성한 개심사중창수리기에 1646년(인조 24)에 신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개심사의 가람배치는 북쪽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당우를 놓고 그 전방에 누각 건물을 배치하였다. 명부전은 개심사 경내에서 오른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웅전과 안양루를 잇는 남북 자오선(子 午 線)의 주축이 되는 일반적 가람배치 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건물의 기단은 다듬은 돌로 가지런히 쌓았고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에 단층, 익공계(翼 工 系)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건물 내부의 가구(架 構)는 무고주 5량으로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이 넓은 편이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평주에 걸친 대들보 위에 익공형 화반(花 盤)을 얹고 화반 위에 장혀와 중도리를 놓은 다음 종량(宗 樑)을 걸치고 그 가운데 키가 큰 화반을 놓아 마루 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 개심사 심검당[開 心 寺 尋 劍 堂]
시대 ; 조선
지정종목/번호 ; 충남문화재자료 제358호(1997년 12월 23일)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때 혜감국사(慧 鑑 國 師)가 창건하여 개원사(開 元 寺)라 하였다. 1350년에 처능대사(處 能 大 師)가 중창하고 개심사라 하였으며, 1475년에 중창하였다. 그뒤 1740년의 중수를 거쳐 1955년에 전면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당우(堂 宇)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과 심검당, 무량수각, 안양루, 팔상전, 객실, 요사채 등이 있다. 개심사의 가람배치는 북쪽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당우를 놓고 그 전방에 누각 건물을 배치하였다. 심검당의 건축양식은 화강석재를 견치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주두(柱 頭) 위에 공포를 짜올린 주심포계 양식이다. 가구(架 構)는 5량이고 초제공 밑 주두 아래로 운각(雲 刻)을 한 보아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익공계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심검당의 평면배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건물의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5칸의 덧집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건물 전체 면적은 111.4㎡인데 심검당이 63.2㎡, 덧집이 48.2㎡이다.
** 개심사 제석·범천도·팔금강·사위보살도
시대 ; 조선시대
지정번호 ; 보물 제1766호 (2012.04.25.)
크기 ;〈제석도〉 가로 83cm, 세로 161 cm
〈범천도〉 가로 84.8 cm, 세로 172 cm
18세기에 제작된 불교의식용 불화(제석도·범천도·팔금강도·사위보살도) 14점
영산재와 수륙재 등의 불교의식을 행할 때 사찰 주위를 장식·수호·결계(방해가 될 만한 것을 일정 구역 안에 들이지 않는 일)하기 위하여 괘불도와 함께 사찰 야외에 걸어두는 불화이다. <제석도> 1점, <범천도> 1점, <팔금강도> 8점, <사위보살도> 4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1772년(영조 48) ‘개심사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4호)’과 함께 제작되었다. <팔금강도> 중 하나인 ‘제6정제재금강’의 화면 아래에 ‘1772년 괘불도를 조성할 때 옹호신중(擁 護 神 衆; 불법을 옹호·수호하는 신중)으로 제석·범천·팔대금강·사위보살을 함께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원에 대한 기록은 적혀 있지 않으나 <영사회괘불탱>을 그린 유성(有 誠) 일파가 이 불화들도 함께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14점 모두 종이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가장자리에 굵은 선으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각 존상들을 화면에 꽉 차도록 1명씩 그려 넣었다. 각 그림 위쪽에는 존상의 명칭이 적혀 있다.
<제석도>는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을, <범천도>는 색계(色 界)의 첫째 하늘인 초선천의 왕인 범천을 그린 그림이다. 불법의 수호신인 제석천과 범천 모두 크고 화려한 보관을 쓰고 원형의 두광을 갖추었으며 두 손을 합장하고 서 있다. 소매는 풍성하게 늘어졌고, 천의 자락은 역동적으로 흘러내렸다. 복장과 자세는 둘 다 동일하지만 범천의 경우 미간에 세로 형태로 눈이 하나 더 있다.
<팔금강도>는 ‘제1청제재금강’, ‘제2벽동금강’, ‘제3화수구금강’, ‘제4백정수금강’, ‘제5적성금강’, ‘제6정제재금강’, ‘제7자현신금강’, ‘제8대신력금강’으로 구성되었다. 모두 눈을 부릅뜬 험악한 얼굴과 근육질 신체를 지니고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각각 백색·적갈색·흑색 등 다양한 피부색을 지녔으며 철퇴, 장검, 용, 금강저, 바위 등의 지물을 들고 있다.
<사위보살도>는 ‘제1금강권보살’, ‘제2금강색보살’, ‘제3금강애보살’, ‘제4금강어보살’로 구성되었다. 모두 녹색 두광을 갖추고 풍성한 소매의 옷을 입었다. 두 손 모아 합장한 채 서 있는 모습으로, 두 보살은 좌향, 다른 두 보살은 우향하여 서로 대칭을 이룬다. <제석도>, <범천도>와 유사한 형상이다.
전체적으로 선이 거칠고 채색·음영 표현이 형식적이고 조화롭지 않지만 같은 시기에 조성된 괘불도와 옹호신중 불화가 함께 전해지는 드문 사례여서 의식용 불화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된다.
** 개심사 영산회 괘불탱
시대 ; 조선 영조
지정번호 ; 보물 1264호(1997.8.8.)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 그림이다.조선 영조 48년(1772)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에서 매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시대 ; 고려후기 지정번호 ; 보물 제1619호(2009.10.20.)
12세기 말~13세기 초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서산 개심사의 아미타불상이다. 불상 밑면 봉함판(복장물을 넣기 위하여 뚫은 구멍을 막은 판) 안쪽에서 발견한 묵서(墨 書; 먹으로 쓴 글씨)에 불상의 중수 관련 기록이 적혀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이 불상은 1280년(고려 충렬왕 6) 11월 보수되었다. 승재색(僧 齋 色; 고려 충렬왕 무렵 설치되어 경전 간행, 사찰 중수, 불상 개금 및 보수, 불교의식 주관 등을 맡은 관청으로 추정)이 불사를 주관하고, 내시이자 흥위위(고려시대 중앙군 중 한 군단) 장사(長 史) 직위를 가진 송씨 성의 인물 등이 보수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불상이 조성되고 50~100년이 지나 개금(改 金; 금칠을 다시 하는 것) 등의 보수를 하는 만큼 조성시기는 대략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사이일 것으로 보이며 이런 추정에 의해 국내의 현존하는 예배 대상 목조 불상 중 가장 오래됐을 가능성이 높다.
단정하고 중후한 느낌을 주는 아미타여래좌상으로, 알맞은 신체 비례를 지니고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콧대가 높은 이국적인 얼굴이다. 머리에는 정상계주(머리 정수리 부분의 구슬장식)와 중간계주(머리 중간 부분의 구슬장식)가 있고 목에는 세 줄의 주름, 즉 삼도(三 道)가 뚜렷하다. 어깨에서 팔을 타고 내려오는 세밀한 옷 주름과 그 아래로 자리 잡은 ‘Ω’ 모양의 주름이 눈에 띄며, 가슴에는 대의 안에 입은 내의와 ‘八’자 형태 매듭이 표현되어 있다. 결가부좌한 다리를 덮은 대의자락은 여러 번 접혀 발목 위에 얹혀 있다.
1274년 중수된 ‘서울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649호)’을 비롯하여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980호)’,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보물 제1544호)’ 등 고려 후기의 불상들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이 불상들 중 가장 생동감 넘치는 조각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조각적 완성도가 매우 높다.
** 개심사 오방오제위도 및 사직사자도
시대 ; 조선시대 지정번호 ; 보물 제1765호(2012.04.25.)
개심사 오방오제위도와 사직사자도는 1676년에 화승 일호(一浩)가 단독으로 그린 것으로, 사찰에서 의식을 행할 때 도량장엄용으로 조성한 불화이다. 현존하는 도량장엄용 불화 가운데에서 조성연대가 가장 올라가는 작품으로 가치가 높다.
* * * 해미읍성
시대 : 조선 세종
지정번호 : 사적 제116호 (1963.1.21.)
소재지 : 충남 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
성곽 총길이 1800m, 높이 5m, 면적 19만4천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 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뒤 1651년(효종 2)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군사전략상 중심지였다. 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었으며, 영장(營 將)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 增 東 國 輿 地 勝 覽)』에는 당시 절도사영이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자리하였는데,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3,172척이고, 높이는 15척이며, 우물 3곳과 군창(軍 倉)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해미읍지(海 美 邑 誌)』에는 성벽의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 城)이 380첩(堞)이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甕 城)이 2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문은 3칸인데 무지개 모양의 문인 홍예(虹 霓)와 2층의 다락을 두었다고 하였고, 동문과 서문은 3칸이지만 북문은 없다고 하였으며, 우물이 6곳으로 성 밖에는 호(壕)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병마절도사영과 해미읍성은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순신(李 舜 臣)이 1579년(선조 12)에 충청병마절도사영에서 훈련원봉사(訓 鍊 院 奉 事)로 근무한 적이 있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2㎞ 정도인데, 남문인 진남문(鎭 南 門)과 함께 동문·서문이 있다. 성 안에는 동헌(東 軒)·어사(御 舍)·교련청(敎 鍊 廳)·작청(作 廳)·사령청(使 令 廳) 등의 관아(官 衙) 건물이 분포해 있다.
옛이야기 : 또 다른 이름? 탱자성!해미읍성의 또 다른 명칭 ‘탱자성’ 에 대해 들어보셨나요?적군의 접근을 어렵게 하기위해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성 주변에 둘러심었기 때문에 탱자성이라고 불리웠답니다, 무성한 초록잎과 가시, 주황빛의 열매, 무척 아름다웠을 것 같은데요, 오시면, 그 시절 복원된 탱자나무를 보실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부실공사 방지법??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서 보존이 아주 잘 된 성곽 중 하나예요.해미읍성 성벽에는 청주, 공주 등 각각의 고을명이 새겨져있는데요, 이는 해미읍성 축성 당시, 각 고을별로 정해진 구간을 맡도록 함으로써 혹시 성벽이 무너질 경우, 그 구간의 고을이 책임을 지도록 했습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성벽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1417년(조선 태종 18년)부터 1491년(성종 22년)까지 축성된 해미읍성은 보존이 잘 된 우리나라 3대 읍성 중 하나예요.조선초기, 충청병마절도사가 근무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으로 1579년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병사 영의 군관으로 부임해 10개월간 근무한 곳이기도 합니다.조선후기, 천주교인들을 처형했던 장소인 호야나무가 아직도 묵묵하게 서 있다.“
+ 해미읍성은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의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읍성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 성 안에 자리하였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연차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곧 1974년에는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였고,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 지역을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客 舍)터가 확인되었고, 현재의 아문(衙 門)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터가 발견되었으며, 관아를 둘러쌌던 돌담의 자취도 확인되었다.
** 해미읍성 회화나무
지정번호 : 충남 기념물 제172호(2008.04.10.)
해미읍성 안에 있는 수령 약 300년으로 추정되는 회화나무 . 이 나무 뒤에는 천주교 신자를 가두어두었던 감옥이 있었는데, 1790~1880년 사이 이곳 옥사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들을 이 나무의 동쪽으로 뻗어 있던 가지에 매달아 고문하였다고 한다. 동쪽 가지는 1940년대에, 가운데 줄기는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부러졌으나 여러 차례 외과 수술을 시행하고 토양을 개량하여 보호, 관리하고 있다.
+ 해미읍성에 있는 호야나무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나무에 목매달려 죽었어요. 또 나무에 사람을 매달고 활로 쏴 죽이거나 돌을 던져 죽였다고도 해요. 지금도 호야나무 가지에는 그때 사람들을 묶어 두었던 밧줄 자국이 남아 있어요.
++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 절도사의 치소를둔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하던 곳이다. 내포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병인 대박해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海 美 邑 城 西 門-殉 敎 地]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
정분문(靜 氛 門)이라 불렸던 서산 해미읍성(瑞 山 海 美 邑 城) 서문은 순교자들의 생사를 가르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성안의 옥에 수감된 천주교인들 가운데 형이 확정된 사람은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처형되었다. 그러니 서문 밖 일대는 ‘사학죄인(邪 學 罪 人)’들의 공식 처형장인 셈이었다. 매질이나 교수 혹은 참수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하였고, 곡식을 타작하듯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처형하던 돌다리도 있었다.
천주교 박해 당시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장소였다. 순교의 피로 얼룩진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 일대는 세대가 지나면서 순교자의 열정을 기념하는 성지로 변화되었다. 1956년 유물 보존을 위해 서산성당으로 옮겨 갔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을 1986년 8월 29일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면서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가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 1989년 6월 24일 세워진 ‘순교 현양비’에는 당시 서산 해미성당 주임 신부 윤종관 가별[세례명: 가브리엘]이 짓고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순교지의 순교 내력이 담겨 있다.
+ 약 240㎡ 면적의 기념지 안에 순교 현양비와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순교 현양비의 상부는 십자가 모양으로 다듬어졌고, 기단에는 ‘서문 밖 순교 성지’라는 가로 글씨와 순교 내력이 적힌 비문이 새겨져 있다.
+ 현황 – 2011년 현재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의 소유자는 천주교 대전교구이며, 관리자는 해미순교성지이다.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에 지방도 647호선이 있는데, 지방도 647호선 상에는 본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 의의와 평가 – 나라의 명을 거슬러 배교(背 敎)를 거부한 사학죄인에게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은 운명의 기로(岐 路)와도 같았다. 해가 지는 서쪽은 부정한 것을 버리고 삿된 것을 막는 곳이었다고 한다. 서문 밖이 사학죄인의 처형지가 된 것도 이런 연유였을 것이다. 정분문이라 하였던 서문의 이름처럼 지금은 한적한 소도시의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진리에 몸 바친 백성들의 핏빛 절규가 서린 역설의 장소이기도 하다.
*** 여숫골 순교성지 [-殉 敎 聖 地]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천주교 성지.
+ 성지(聖 地)는 엄밀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활동, 죽음 그리고 부활이 이루어진 팔레스티나(Palestina)를 가리키는 용어
+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행위와 관련한 순교지나 그 밖의 순례지는 성역(聖 域) 혹은 성지(聖 址)로 구별
+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 순교 자 103위를 시성(諡 聖)
+ 성지는 약 2만 8400㎡의 부지에 기념 공원 형태
+ 2003년 6월 17일 완공된 700석 규모의 대성당과 200석 규모의 소성당
+ 순교자의 무덤을 형상화한 원형 모양의 기념관 – 내부에는 순교 기록화와 조각이 설치되어 있으며, 해미순교성지에서 발굴된 순교자 유해도 안치
+ 천주교 진둠벙 순교지와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 순교자 무덤 등 순교 유적 및 유물 이 보존되어 있다.
+ 조산리 생매장터 순교지 순교탑,
1866년(조선 고종 3) 병인박해(丙 寅 迫 害) 이후 1882년(고종 19) 사이에 진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자리개질 등으로 처형하였는데,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전한다. 해미천 옆에 생매장당한 이름 없는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6m의 '해미순교탑'이 건립되어 있다.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 여숫골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 [-無 名 生 埋 葬 殉 敎 者 墓]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천주교 무명 순교자들의 합장묘.
해미천이 지나는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일부와 조산리 일대는 천주교 박해기 천주교도들의 생매장 처형지로 알려져 왔다. 1935년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진 발굴 작업에서는 상당수의 유골이 발견되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순교하여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천주교 당국에 의해 수습·보존되다가, 자신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의 현장에 다시 안장되어 있다.
+ 일명 여숫골로 알려진 조산리 생매장 터는 1935년 범바로 신부가 주도한 유해 발굴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발굴된 유해는 그해 4월 2일에 현 서산성당의 전신인 상홍리성당 뒤편의 백씨·임씨 선산 최상단에 안장되었다. 1955년 서산성당 신균식 신부와 백낙근 상홍리 공소 회장은 순교자 묘 주변에 십자가 순교탑과 ‘병인년해미순교자묘’ 비를 건립하였다. 1965년에는 백낙근과 재서독(在 西 獨) 광부 및 간호사들의 후원으로 상홍리 순교자 묘역을 정비하였다. 이후 해미성지의 성역화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천주교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 주관으로 1995년 9월 20일에 순교 터이자 유해 발굴 장소인 여숫골에 묘지를 조성하고 이장하였다.
+ 형태 – 여숫골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는 1975년에 건립된 해미순교탑 전면에 있다. 둥근 모양의 분묘는 아랫부분에 화강암으로 둘레석을 둘렀고, 주변 바닥은 화강석을 깔아 놓았다. 일반적으로 분묘 앞에 상석(床 石)이 있지만, 이 묘에는 상석이 없고 대신에 미사를 드리는 제단이 분묘 뒤쪽에 마련되어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있고, 앞쪽의 양옆으로 한 쌍의 문관석이 설치되어 있다.
+ 금석문
묘비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천주교 박해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선열들의 유해 일부를 1935년 4월 20일, 해미에서 발굴하여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모셨다가, 이제 순교자 유해를 교회적 차원에서 관리하며 성지 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다시 이곳 현 위치에 옮겨 모시다. 1995년 9월 20일 천주교 대전교구장 경갑룡[요셉]’ 비문 중 1935년 4월 20일은 4월 2일의 오기(誤 記)로 보인다.
+ 현황 – 천주교 당국은 여숫골 생매장 터에서 발굴하여 상홍리에 안장했던 유해를 1995년 다시 여숫골로 이장하기 위하여 파묘하였다. 이때 수습한 유해는 현재 세 곳으로 나누어 보존되고 있다. 형태가 분명한 50여 편의 유골과 200여 개의 치아 등은 보존 처리를 하여 여숫골 해미성지 내 순교기념전시관 유해 참배실에 안치되어 있다. 다음으로 유해가 부식되어 섞인 진토는 십자가 등의 부장품과 함께 다시 상홍리 묘지에 안장하였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유골들은 무명 순교자 묘 속에 안장되어 있다.
+ 의의와 평가 – 해미성지는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보다 무명 순교자가 더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집단적으로 생매장된 순교자 유해가 확인된 유일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와 그들이 안장된 무덤은 병인박해기 가장 처참했던 내포 및 해미 지역의 순교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 [海 美 邑 城 刑 場-]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의 돌다리.
서산 해미읍성(瑞 山 海 美 邑 城)의 서문 밖에는 성안에서부터 흐르는 개천이 있었고, 여기에 커다란 돌다리가 가로놓여 있었다.
이 다리를 통하여 사람들은 편리하게 수로를 건너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 박해기의 순교자에게 돌다리는 지상에서 천상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통로로 여겨졌을 것이다. 다리를 건너서 서쪽 들판의 여숫골 처형지로 끌려가기도 하였고, 때로는 다리 자체가 처형을 위한 형구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이 돌다리는 천주교 신자들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던 형구이기도 하였다.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도록 만든 처형 방법 중 하나는 ‘자리개형’이었다. 집행자들이 사형수의 사지를 붙잡고 넓적한 돌다리 위에 내리쳐서 숨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 모양이 마치 곡식 단을 내리치며 타작하는 자리개질과 비슷하다고 하여 사람들은 이 돌다리를 ‘자리개돌’이라 불렀다. 이렇게 수많은 순교자의 피를 머금은 까닭에 자리개돌은 지금도 빗물에 젖으면 붉은빛을 띤다고 한다.
+ 위치 – 본래 읍성에서 서문 밖으로 이어지는 수로[서산시 해미면 남문2로 143번지]에 놓여 있었다. 1956년 3월 서산성당 신부 신균식과 신자들, 그리고 신부 오기선이 처형 도구였던 자리개돌을 찾아내 동년 6월 14일 서산성당으로 옮겨 보존하였다. 1985년 서산 해미성당 설립 이후 ‘해미순교선열현양협의회’가 발족되는 등 서산시 해미의 성역화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1986년 8월 29일 자리개돌을 읍성 서문 밖의 본래 자리로 환원하였다. 2009년 도로가 신설되면서 그해 1월 8일에 다시 자리개돌을 해미순교성지로 옮겼다.
+ 형태 – 면적은 약 6㎡이다. 가공되지 않은 넓적한 모양의 자연석으로 길이 4.2m에 폭은 1.5m이며, 두께는 0.3m의 화강암 재질이다. 돌다리 상판에는 십자표와 함께 ‘순교 기념물’이라고 새겨져 있다.
+ 현황 – 2011년 현재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의 소유자는 천주교 대전교구이며, 관리자는 천주교 해미순교성지(海 美 殉 敎 聖 地)이다. 서산 동문동 성당과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에 각각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 의의와 평가 – 서산 해미읍성 서문 밖 돌다리에는 ‘자리개돌’이라는 이름이 마치 고유 명사처럼 붙어 있다. 지나는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던 평범한 돌다리가 참혹한 형구가 되어 남아 있는 것이다. 말 없는 무기물에 지나지 않는 돌덩이에 투영된 순교의 역사는 오늘날의 순례자들에게 삶과 신앙의 의미를 성찰하도록 이끌어 준다.
* 여숫골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 [-無 名 生 埋 葬 殉 敎 者 墓]
여숫골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는 서산시 해미면의 해미성지 내에 있다.
해미천이 지나는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일부와 조산리 일대는 천주교 박해기 천주교도들의 생매장 처형지로 알려져 왔다. 1935년 목격자의 증언을 토대로 이루어진 발굴 작업에서는 상당수의 유골이 발견되어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순교하여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천주교 당국에 의해 수습·보존되다가, 자신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의 현장에 다시 안장되어 있다.
+ 일명 여숫골로 알려진 조산리 생매장 터는 1935년 범바로 신부가 주도한 유해 발굴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발굴된 유해는 그해 4월 2일에 현 서산성당의 전신인 상홍리성당 뒤편의 백씨·임씨 선산 최상단에 안장되었다. 1955년 서산성당 신균식 신부와 백낙근 상홍리 공소 회장은 순교자 묘 주변에 십자가 순교탑과 ‘병인년해미순교자묘’ 비를 건립하였다. 1965년에는 백낙근과 재서독(在 西 獨) 광부 및 간호사들의 후원으로 상홍리 순교자 묘역을 정비하였다. 이후 해미성지의 성역화 사업이 본격화되면서 천주교 대전교구장 경갑룡 주교 주관으로 1995년 9월 20일에 순교 터이자 유해 발굴 장소인 여숫골에 묘지를 조성하고 이장하였다.
+ 형태 – 여숫골 무명 생매장 순교자 묘는 1975년에 건립된 해미순교탑 전면에 있다. 둥근 모양의 분묘는 아랫부분에 화강암으로 둘레석을 둘렀고, 주변 바닥은 화강석을 깔아 놓았다. 일반적으로 분묘 앞에 상석(床 石)이 있지만, 이 묘에는 상석이 없고 대신에 미사를 드리는 제단이 분묘 뒤쪽에 마련되어 있다. 묘 앞에는 묘비가 있고, 앞쪽의 양옆으로 한 쌍의 문관석이 설치되어 있다.
+ 묘비에는
‘무명 생매장 순교자들의 묘’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 천주교 박해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증거한 순교 선열들의 유해 일부를 1935년 4월 20일, 해미에서 발굴하여 서산 상홍리 공소 뒷산 백씨 문중 묘역에 모셨다가, 이제 순교자 유해를 교회적 차원에서 관리하며 성지 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다시 이곳 현 위치에 옮겨 모시다.
1995년 9월 20일 천주교 대전교구장 경갑룡[요셉]’
비문 중 1935년 4월 20일은 4월 2일의 오기(誤 記)로 보인다.
+ 현황 - 천주교 당국은 여숫골 생매장 터에서 발굴하여 상홍리에 안장했던 유해를 1995년 다시 여숫골로 이장하기 위하여 파묘하였다. 이때 수습한 유해는 현재 세 곳으로 나누어 보존되고 있다. 형태가 분명한 50여 편의 유골과 200여 개의 치아 등은 보존 처리를 하여 여숫골 해미성지 내 순교기념전시관 유해 참배실에 안치되어 있다. 다음으로 유해가 부식되어 섞인 진토는 십자가 등의 부장품과 함께 다시 상홍리 묘지에 안장하였으며, 나머지 대부분의 유골들은 무명 순교자 묘 속에 안장되어 있다.
+ 의의와 평가
해미성지는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보다 무명 순교자가 더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동시에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집단적으로 생매장된 순교자 유해가 확인된 유일한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서 발굴된 유해와 그들이 안장된 무덤은 병인박해기 가장 처참했던 내포 및 해미 지역의 순교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 해미 진둠벙 순교지[-殉 敎 址]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
서산시 해미면 조산리의 여숫골 일대에는 해미천과 인접하여 들판으로 이어지는 늪이 많았다. 늪지대에는 움푹 패어 물이 고인 커다란 웅덩이가 있었는데, 진둠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둠벙’은 물이 고인 웅덩이를 가리키는 충청도 지방의 사투리이다.
진둠벙은 박해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처형 방법의 하나인 익사 및 수장이 행해지던 곳으로, 해미순교성지(海 美 殉 敎 聖 地)의 주요 순교 터 가운데 하나이다. + 여숫골에는 둠벙’ 곧 ‘웅덩이’가 있었는데, 배교(背 敎)를 거절하여 끌려온 사학죄인에게 여숫골의 둠벙은 공포를 자아내는 또 하나의 장소였다. 형졸들은 죄인들을 커다란 둠벙 속에 그대로 밀어 넣었다고 한다. 양팔이 꽁꽁 묶여 허우적거릴 기회조차 얻지 못한 교인들은 둠벙 속에 그대로 수장되었다. 사학죄인들이 빠져 죽던 이 둠벙을 그래서 사람들은 ‘죄인둠벙’이라 불렀다. 오늘날 ‘죄인둠벙’은 그 말이 줄어 ‘진둠벙’이라 불리게 되었다.
+ 총면적은 약 500㎡이며, 길이는 25m, 폭은 11m, 둘레는 약 90m이다. 수목 조경과 함께 연못 형태의 웅덩이가 있고, 순교자를 형상화한 인물상 및 성모상이 설치되어 있다.
+ 현황 – 2011년 현재 진둠벙 순교지의 소유자는 천주교 대전교구이며, 관리자는 해미순교성지이다. 해미순교성지의 중요한 순교 터로서 순례자들의 기도처가 되고 있다. 1935년 4월 1일 서산성당 신부 범바로의 주도로 유해가 발굴된 바 있다. 본래 진둠벙은 크게 물이 고인 웅덩이였는데, 1987년 6월 서산 해미성당의 주관으로 둠벙의 모양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석축을 쌓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 의의와 평가 – 여숫골에 조성된 해미순교성지는 한국 최대의 무명 순교 성지로 공인된 곳이다. 해미순교성지의 성당과 순교 성지 기념관 그리고 순교탑 등이 순교 성지로서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면, 진둠벙은 생매장 순교 터와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과 함께 가장 참혹한 순교의 기억을 간직한 현장으로서의 생동감을 제공한다. 이는 구체적인 순교 현장 진둠벙을 많은 순례자들 찾고 묵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태안군 ==
태안군은 충청남도의 도청이 위치한 홍성으로부터 서북쪽으로 48.32K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로부터 141.89Km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 인구 : 6만 3484명(2015년 현재)
+ 행정구역 ; 2개 읍, 6개 면, 186개 행정리(65개 법정리)
+ 1950년 6·25전쟁 때 북의 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에 내려와 간척사업을 벌이고 인 삼 재배 등을 하며 정착하게 되었다.
+ 1989년 1월 1일에는 태안읍·안면읍 등 2개 읍, 6개 면이 서산군에서 분군(分郡) 되어 태안군이 설치되었다.
+ 안면읍 승언리에는 안면도의 모감주나무 군락(천연기념물 제138호)·
+ 근흥면의 난도 일원에는 태안 난도 괭이갈매기 번식지(천연기념물 제334호)
+ 원북면 신두리에는 신두리사구(천연기념물 제431호)
*** 태안 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종별 : 국보 307호(지정일2004.08.31.)
시대 : 삼국시대
소재지 ;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원이로 78-132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 소재 백화산 정상부근의 바위에 새겨진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높이 向左佛 身高 255cm, 向右佛 身高 240cm, 중앙보살 181cm)은 1966년 2월28일 보물432호로 지정·관리되어 오다 2004. 8. 31 국보 제307호로 지정된 것으로 우리나라 마애불상의 초기 예로 부채꼴 바위 면에 사각형 감실을 마련하여 중앙에 보살상을 두고 좌우에 불상을 배치해 놓음으로써, 1구의 불상과 2구의 보살상으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삼존불상과 달리 2구의 불입상과 1구의 보살입상이 한 조를 이루는 특이한 삼존불상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에 본존불을 배치하고 좌우에 협시보살을 배치하는 일반적인 삼존배치와 달리 중앙에 보살, 좌우에 불상을 배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더욱이 좌우의 불상은 크고 중앙의 보살은 상대적으로 작아 일보살·이여래라고 하는 파격적인 배치와 함께 특이한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좌우의 불상은 기본적인 형태가 같은데, 다만 오른쪽 불상의 얼굴이 뚜렷하고 좀더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두 손의 인상(印相)이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한 모습이 약간 다를 뿐이다
2구의 불입상은 양감 풍부한 얼굴에 크게 번지는 미소, 넓게 벌어진 당당한 어깨와 장대한 체구, U자형 주름과 y형 내의가 보이는 착의법, 도톰한 듯 날카로운 대좌의 연꽃무늬 등 세부적으로는 거의 동일한 양식 특징을 보인다.좌우 두 불상 사이에 끼여 있는 듯 뒤로 물러나 작게 새겨진 보살입상은 높은 관에 아무런 무늬도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장식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타원형으로 길고 통통한 얼굴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원만상이다. 어깨를 덮어 내린 천의는 길게 내려와 무릎 부분에서 X자형으로 교차하며 묵중하게 처리되었으며 배 앞에 모은 두 손은 오른손을 위로 하여 보주를 감싸 쥔 이른바 봉보주인(捧寶珠印)을 나타내고 있다.+ 불신의 하반부가 노출되어 백제시대의 연화대좌가 확인됨으로써 그 도상적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중국과의 교류상 요충지에 자리함으로써 6세기 중반 경 중국 북제양식 불상과의 영향 관계 파악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국보 제84호)에 선행하는 조형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불상이란 점에서 국보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
*** 안면송림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독개길 176 안면송림
하늘을 찌를듯이 곧게 자란 천혜의 적송 군락은 궁궐을 짓고 배를 만드는 재료로 쓰였을 정도로 우수하며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안면읍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진 승언리 소나무 숲은 603번 지방도로 바로 옆 서향 구릉지에 넓게 퍼져 있는데, 아름답게 하늘로 뻗은 날씬한 자태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안면도에는 이러한 소나무 숲이 약 3500ha 펼쳐져 있다. 이렇게 조상들이 애지중지 지켜온 이 소나무 숲은 앞으로도 지켜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사실이 새로이 밝혀졌다. 산림 유전한 분야의 학자들이 이 숲을 분석해 보았더니 다양한 유전변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요컨대 안면도의 소나무 숲은 눈에 보이는 쭉쭉 곧은 모양 뿐만 아니라 세포나 종자 속에 있는 유전정보까지 갖춘 귀중한 숲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산림청에서는 이 소나무 숲 근처에서는 시업행위나 벌채행위를 제한하게 하는 한편, 되도록이면 현상태로 보전하기 위해서 1988년 유전자 보존림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소나무 유전자 보존림은 전국에 5개가 있으며 총면적이 2128ha인데, 안면도 유전자 보존림의 면적은 15ha에 달한다.
*** 꽃지해변(할미·할아비바위)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읍 승언리 산29-100
수려한 할미, 할아비 바위를 배경으로 붉은 태양이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가며 빚어내는 황홀한 저녁놀 풍경은 서해안 최고의 낙조임에 틀림이 없다.
*** 간월암
소재지 ;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1길 119-29
간월암은 부석면 간월도리에 위치한 작은 암자로 조선 초 무학대사가 창건하였으며 송만공 대사가 중건하였다고 전해진다. 다른 암자와는 달리 간조시에는 육지와 연결되고 만조시는 섬이 되는 신비로운 암자로 만조시에는 물 위에 떠 있는 암자처럼 느껴진다. 간월도에서 생산되는 굴의 풍년을 기원하는 굴부르기군왕제가 매년 정월 보름날 만조시에 간월도리 어리굴젓 기념탑 앞에서 있는데, 이 행사는 부정한 행동을 하지 않은 청결한 아낙네들이 소복(흰옷)을 입고 마을 입구에서 춤을 추며 출발하여 굴탑 앞에 도착하면 제물을 차려 놓고 굴 풍년 기원제를 지내며 채취한 굴은 관광객에게 시식도 시켜준다
간월암 앞마당에는 200년 된 사철나무가 있다. + 옛이야기 : 예산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에 해산을 앞둔 한 여인이 살았어요.사난한 형편으로 서산 장에서 어리굴젓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그녀는 어느 날 장으로 나가던 중, 인지면 목장 근처에서 갑자기 산통을 느겼답니다. 할수없이 근처 숲에서 아기를 낳게 된 여인은 갓 태어난 아기를 나뭇잎으로 잘 덮어놓고 서산장으로 나갔습니다. 어리굴젓 장사를 마치고 걱정되는 마음으로 서둘러 숲에 돌아온 여인은 아기 근처에 있던 학 한 마리를 발견했어요.학이 아기를 해칠까봐 여인이 얼른 아기에게 뛰어가는 순간, 학은 ‘무학~’이라 소리내어 울며 하늘높이 날아갔답니다. 다행히 아기는 무사했고, 여인은 곧, 학이 자기 깃털로 아기를 따뜻하게 품어준 사실을 알게되었어요.아기를 돌봐준 학이 너무 고마워 아기 이름을 ‘무학’이락 지었습니다.훗날 이 아기는 조선 태조 이성계를 도와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던 무학대사가 되었답니다.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무학대사 활동기간으로 미루어보아, 간월암이 600여 년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요.무학대사가 수도 중에 ‘달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간월암(看月庵)이라 불리운답니다.수도를 마친 무학대사가 떠나기전 앞마당에 떡갈나무를 꽂아두며 “이 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라”고 말했다는데,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본인이 어렸을 때 그 나무가 살아있는 것을 보았고, 때문에 나무가 죽은 것이 얼마 안됐다는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 홍성군 ==
+ 충남서해안의 중심지, 교통의 요충지로 동북쪽에는 예산군, 서북쪽은 서산시, 동쪽에는 청양군, 남쪽에 보령시가 접하고, 국도 21호선이 남.북으로, 29호선은 동.서로 뻗어있고 지방도(609,614호선) 및 장항선 철도가 통과함.
+ 서해안 고속도로 2002년 개통:I.C 2개소 설치(은하.갈산)
+ 충절의 위인 배출지 – 최영, 성삼문, 김좌진, 한용운, 김복한, 홍주의병 등
+ 행정구역 ; 3읍 8면 150개 법정리
+ 인구 ; 101,192명 (2018.09.30.현재)
*** 만해 한용운(1879~1944) 생가 * 卍海祠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이며 시인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작성하였으며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한용운 선생은 1879년 8월 29일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부친 한응준과 모친 온양방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청주이며 어릴 때 이름은 유천裕天, 자는 정옥貞玉,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卍(萬)海입니다.
집안은 양반의 기품과 의기를 지닌 선비의 가문으로, 한용운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9세에 문리를 통달하여 신동이라 칭송이 자자하였습니다. 26세에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하였습니다. 경학에 힘쓴 결과 1910년 32세의 나이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였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침체된 한국 불교의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불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논리정연하게 기술하였다.
1911년 일본이 이른바 한일불교동맹을 내세우며 한국 불교를 사실상 일본에 귀속시키려하자 선생은 이에 격렬히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총독부의 조선사찰령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고, 만주의 독립지사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하였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귀국 후 언론 활동을 통하여 3·1운동을 주도하였고,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의 「공약 3장」을 추가 보완하였습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 을 발간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주도하였으며, 신간회의 서울 지회장으로서 학생 의거와 민족 운동을 지원하였습니다.
한용운 선생은 민족독립·불교유신·자유문학의 3대 사상가로서 절의節義의 행적을 남기고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저서로 님의 침묵, 조선불교유신론,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습니다.
*** 백야 김좌진 장군 생가지
청산리전투의 영웅 김좌진(1889~1930) 장군이 태어나 성장하였던 곳입니다.
김좌진 장군은 1889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입니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하고 영민하였으며, 김광호·김동익·김복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민족수호 정신을 함양하였습니다. 18세 때에는 이미 호명학교湖明學敎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좌진 장군은 1910년대 대표적인 국내 비밀결사 단체였던 대한광복회에 가담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일제의 탄압으로 조직이 와해된 이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항일투쟁을 준비하였습니다. 1918년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으며,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사령관으로 추대되어 독립전쟁을 전개하였습니다. 마침내 1920년 10월 청산리 일대에서 약 10일간 9차례 일본군을 격퇴하여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1925년에는 김혁, 최호,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으며, 1929년에는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재만 동포의 교육과 민생 안정에 주력하면서 동시에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1930년 1월 24일 북만주 중동철도선 산시역 부근 정미소에서 동지였던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생가지는 1991년부터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터만 남아 있던 생가를 복원하고 백야 김좌진 장군 전시관을 조성하였습니다. 또한 김좌진 장군의 사당인 백야사白冶祠를 건립하여 김좌진 장군 전승기념 백야축제가 열리는 10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 홍성 백야사 [洪 城 白 冶 祠]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 있는 사우(祠 宇)로 김좌진(金 佐 鎭) 장군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사당은 1991년에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일대를 김좌진장군 생가지로 성역화하는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되었다. 건물은 한식목조와가로 총 24.37평의 규모이다.
재실과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된다. 재실은 김좌진 장군이 와룡천(臥 龍 川)에서 무예를 연마했다는 의미로 와룡재(臥 龍 齋)라고 지었고, 외삼문과 내삼문은 화룡현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하여 각각 화룡문(和 龍 門), 청산문(靑 山 門)이라고 지었다.
** 김좌진장군기념비
종별 ; 충남 문화재자료 167호
지정일 ;1984.05.17.
주소 ;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7-4
김좌진(1889~1930) 장군은 홍성에서 태어나 15세에 집안의 노비를 풀어주고, 그들에게 농사지어 먹고 살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으며, 1907년 고향에 돌아와 호명학교를 세우고 90여 칸의 자기집을 학교건물로 쓰게 했다. 광복단에 들어가 항일투쟁을 하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3.1 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 후 북로군정서의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고,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등 항일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 한다는 레닌 정부의 선언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건너 갈 때, 함께 우수리강을 건넜다가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하여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 사관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력하였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하여 중앙 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 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어 계속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고려 공산당 소속의 박상실(朴尙實)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홍주읍성의 남문지(南門址) 바로 서쪽에 위치하는 김좌진장군비는 항일 운동과 독립 운동에 일생을 바친 그의 치적을 기린 비로서 1949년 대한청년단 홍성군단의 성금으로 건립하였다.
** 청산리 대첩 [靑 山 里 大 捷]
1920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의 2,500명 독립군이 만주의 청산리에서 5만 명의 일본군을 대파한 전투. 북로 군정서군은 1920년 8월 일본 영사관에 침입하여 일본군 제14사단, 제13사단, 제21사단이 북로 군정서군을 토벌한다는 계획을 알아냈다. 2,500명의 북로 군정서군은 청산리의 백운평 골짜기에 매복하여 일본군 3개 사단 5만 명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일본군 3,300명을 죽였다.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보복으로 만주 지역에서 민간인을 포함하여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는데, 이를 간도 참변이라고 한다.
*** 홍성 홍주읍성(홍주아문/여하정/안회당/조양문)
종별 ; 사적 231호 (지정일 1972.10.14.)
주소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충청도 4목 가운데 하나인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과 1896년 홍주목사 이승우가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며 홍주목사들이 정사를 구상하며 휴식을 취하였던 곳으로 정각은 6각형의 수상정인 여하정이 있다. 홍성군청 안뜰에는 보우국사가 왕사가 된 것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와 홍주관아의 외삼문인 홍주아문이 있다
홍주성은 백제의 주류성에 비정되고 있으나 초축년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고려시대까지도 홍주성 수 개축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홍주읍성의 둘레가 533보2척(1보는 6척), 성내에 샘이 하나 있는데 여름이나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의 정비와 중앙집권체제의 표현이라 할 지방행정구역의 개편과 왕실의 대행자라는 명분에 힘입어 각 관읍의 위엄도 동시에 갖추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각 관읍의 읍성은 새로운 규모와 격식을 갖춘 성을 새로이 쌓게 되었는데 그 일환으로 문종 원년(1451)에 새롭게 수축한 홍주읍성의 규모는 성주 4,856척, 높이 11척, 여장이 608, 성내에 우물이 2, 작은 개울 1, 해자는 시설하지 않았으며, 본래보다 물려 쌓았다고 했다. 그 후 수축은 현종대에 한계수에 의하여 중수되고 순조 24년(1824)에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에 의해 수리되었는데 그런 사실을 수성기적비가 전한다. 또 고종 7년(1870) 목사 한응필이 조양문을 짓고 경의문, 망화문과 관영을 경영하였다. 문종대에 이 성에 문이 4개가 있었으나 남문에는 문루가 없었던 것이 특징이다. 현재의 조양문은 고종 7년(1870)에 한응필의 개수로부터 비롯되나 1955년 새로이 수축, 단장한 것이다. 또 홍주 아문은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나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는 출입문이다. 홍주읍성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읍터로서 크게 변동이 없었다는 점과 내포평야를 끼고 있어 시대적으로 많은 사연을 갖는다는 점, 조선 초 새로운 축성법에 의한 축성물이 현존한다는 점에서 보존의 가치와 축성법 연구에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산성은 주위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많은 구간이 전면 훼철되고 810m의 구간만이 남아있고, 성내에 있던 관아의 건물이 36동에 이르렀으나, 그 중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東軒]), 여하정(余何亭)등 4동의 건물만이 현존하고 있다.
** 홍주아문 [洪 州 衙 門] * 느티나무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번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아문.
지정종목 ; 사적 제231호(1972년 10월 14일)
시대 ; 조선시대 종류 ; 성문
홍성 홍주읍성에 속한 아문으로,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다. 안회당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시대 목조건물이다.
1870년 한응필 목사가 5칸을 수리 보수한 한식 와가(瓦 家)로 12평 9홉의 아담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대원군이 사액(賜 額)한 홍주아문의 글씨는 6.25를 전후해서 없어졌다. 지금의 홍주아문 글씨를 누가 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홍주군청 앞에 있어서 홍주의 간판 구실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 안회당 [洪 城 安 懷 堂]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조선시대 홍주군의 동헌(東 軒).
전체 22칸 규모의 목조와가(木 造 瓦 家)건물로 1678년(숙종 4)에 홍주군의 정사당(政 事 堂)으로 건립하였다.
홍주목사와 홍주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는 사무실로 사용되었으며 1870년(고종 7)년에 동헌을 개축하고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안회당(安 懷 堂)이라는 편액(扁 額)을 하사받았다. 안회당이라는 이름은 논어(論 語)의 ‘노자안지(老 者 安 之) 소자회지(少 者 懷 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노인들과 젊은 사람 모두를 위해 정사를 펼치겠다는 의미이다. 현판은 광복 이후 분실되어 1991년에 안회당을 부분 중수하면서 현판과 당기(堂 記)를 새로 조각하였다.
** 여하정[洪 城 余 何 亭]
충청남도 홍성군에 있는 정각(亭 閣).
조선시대 홍주군의 동헌(東 軒)으로 사용된 안회당(安 懷 堂)의 뒤뜰에 있다.
1896년(고종 33)에 홍주목사 이승우(李 勝 宇)가 건립하였다.
정각은 3평5합5작 규모의 목조와즙(木 造 瓦 葺) 건물로 못 위에 떠 있는 수상정(水 上 亭)이다. 정면에는 필서가(筆 書 家) 김병수(金 炳 秀)가 쓴 여하정(余 何 亭) 현판이 걸려 있다. 정각의 평면 형태는 6각형이고, 6각 기둥에는 시액(詩 額) 12현판(懸 板)이 붙어 있다.
** 홍주성역사관 * 병오항일의병기념비 * 洪化門
홍주성역사관은 홍성의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고 전통을 계승하며 과거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자 조성되었습니다.
지역의 전통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역사에 바탕을 둔 미래지향적인 시설로 구성되었습니다.
** 조양문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 27 (홍성읍)
문화재지정 ; 사적 제231호(1972.10.14 지정)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이며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며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이었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하였는데, 동학운동(1894) 때는 수백 명의 동학군이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 홍주의사총
문화재지정 : 국가사적 제431호(2001.8.17.지정)
면적 : 40,166㎡ 시설물 : 분묘 1기, 창의문, 창의사, 진충문
대한제국 시기 홍성군 지역에서 있었던 의병활동 중 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수백 의병들의 유해를 모신 묘소입니다.
1905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각지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났는데, 홍성 지역에서는 이조참판 민종식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민종식은 1906년 고종 황제의 명을 받아 의병을 이끌고 남포와 보령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병기를 탈취하였으며, 5월 19일 마침내 홍주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포 공격이 본격화되면서 5월 31일 폭격으로 조양문이 무너지고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군은 민간인과 의병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많은 의병들의 시체가 홍성천과 남산 부근에 방치되었습니다. 이에 광복 이후 의병들의 유해를 남산에 안치하고 ‘병오항일기념비’를 세우며 추모제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1949년 현재의 홍주의사총이 있는 구릉에서 또 다른 유골들을 발견하면서, 이 유골들이 옛 홍주의병의 유해임을 확인하고 현 위치에 새로이 의사총을 조성하였습니다.사당인 창의사에 900의사義士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어 구백의총九百義塚이라 했던 것을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매년 5월 30일 순국의사 추모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18-9 서산,태안,홍성 답사 일정
== 2018.10.23.(화요일)
* 마산박물관출발(06;30) – 보원사지 = 3시간 57분 / 321.7K
* 보원사지 – 용현리마애여래삼존불 = 9분 / 1.6k ⇒
11;00 ~ 11;40
* 용현리마애여래삼존불 – 개심사 23분 / 13.1k ** 강댕이미륵불
11;50 ~ 12;30 - 해미읍성 22분 / 14.8k
* 개심사 – 해미읍성 = 16분 / 8.8k
* 해미읍성 – 여숫골순교성지 = 2분 / 1.0k
13;00 ~ 점심식사(30) = 해미읍성 전통주막 ~ 14;10
* 여숫골순교성지 –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 41분 / 32.4k
14;15 ~ 15;00
* 태안동문리마애삼존불입상 – 안면해수욕장 = 42분 / 28.1k
15;45 ~ 16;15
* 안면해수욕장 – 꽃지(할미,할아비바위) = 10분 / 6.0k 380분/412.7k
17;00 ~ 17;20 ** 17: 30 = 꽃지도착 **
** 저녁식사 = 딴뚝식당 ****** 숙박 = 알바트로스 펜션 **
== 2018.10.24.(수요일)
* 아침식사 = 딴뚝식당 * 꽃지출발(08;30) – 서산 간월암 = 36분 / 29.4k
* 간월암 – 만해생가 = 24분 / 19.5k
09;10 ~ 10;00
* 만해생가 – 백야생가 = 11분 / 6.8k
10;30 ~ 11;10
* 백야생가 – 홍주읍성 = 16분 / 12.5k ** 백야제
11;25 ~ 12;30
* 홍주읍성 – 조양문 = 1분 / 300m
12;50 ~ 점심식사(30) = 내 당 식 당 ~ 14;20
* 조양문 – 홍주의사총 = 3분 / 1.3k
14;25 ~ 14;35
* 홍주의사총 – 마산박물관 = 3시간 46분 / 308.5K 317분/378.1k
14;40 ~15;00 ** 19:00 = 박물관도착 **
마산문화유산답사회
님의 침묵
만해 한 용 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