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 탐방기2
부산항에서 쓰시마(對馬島)까지 49.5Km, 고속 페리로 1시간 남짓이면 도착한다. 쓰시마에서 큐슈의 하카다까지는 145Km로서 3배나 더 먼 거리다.
가장 가까운 외국이면서도 역사적으로 항상 귀찮고 괴로운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곳이 쓰시마다. 제주도의 3분의 1크기에 인구는 38,000명밖에
안 된다. 평지가 섬 면적의 3%밖에 되지 않아서 항상 외부에서
식량을 조달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오랫동안 외구 해적의 소굴이었다.
서흥군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여몽항쟁지를 찾아보는 것을 끝으로 1년
넘게 준비중인 조사보고서 “서흥김씨 유형문화유적”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금요일 저녁에 부산역 부근에 모인 4인의 종원은 모두
사연을 안고 왔다. 리더인 윤호(70세)는 이틀 전에 도진 허리통증 때문에 부산 병원에서 진통제 주사를 맞아야 했고,
성용(70세)은 청주에 일보러 갔다가 부산으로
내려오느라 고생했다. 올해 79세인 노장 병국 전 대종회 사무총장은 올해 이번 여행 일정을 소화하면서 힘이 부치는 모습이 역력하다. 나(61세)는 생업에
지장이 있었기도 했지만, 금주 토요일이 조부님 제사날인 것을 깜빡했기에 난감한 처지였다. 종형제가 모두 내 집에 모여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제사를 주관할 내가 빠지게 되었으니 언어도단. 그러나 어쩌랴, 이미 2개월
전에 날을 잡아서 여행 비용을 모두 지불했고, 함께 여행하고 싶은 일행들의 기대에 부풀어 있는 이 사태를. 아내와 동생에게 제사 부탁을 하고 떠난 여행길이다.
대마도 항구에서 미리 예약한 輕車경차를 대여하여 신라 재상 박재상 순구 유적을 보러 나섰다. 서기 400년 전후 신라는 왜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중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으로 국토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 때 태자가 왜국로 갔는데 정해진 날짜에 돌아오지 않자 내물왕이 박재상을
왜국으로 보냈다. 박재상은 대마도에서 왜군과 싸운 끝에 태자를 무사히 귀국시키고 순국하였다.
대마도의 좁고 깊은 숲길이 단풍에 곱게 물들어 가고 있다. 네 사람을
태운 경차는 언덕을 오를 때마다 힘이 부쳐 속도가 떨어진다. 그런데도 대마도에서 운행되는 차량은의90% 이상이 경차인 듯하다. 인상적이다.
대마도의 중심지는 남서쪽 끝에 위치한 이즈하라嚴院이고, 여기에 대부분의 유적이 집중되어 있다. 대마도는 소(宗氏) 가문이 800년 이상 통치해 왔다. 소씨는 조선과 일본과의 중간 지점에 있는 대마도에서 외교상 양국간 안테나 역할을 하면서 생존과 번영의 길을
모색하였다. 대마도는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조선 출병 거점지가 되기도 했었고, 전쟁 후에는 전쟁 후유증을 치료하고 양국 사이를 중재하느라고 나름의 역할이 컸다. 17세기에
일본 제2의 은 생산지가 되자 큰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소씨 조상의 묘역과 齋室재실을 조성해 놓은 곳이 万松院만송원이다. 불교식으로 소씨 조상의 위패를 모신 불교식 재실과
도요토미 쇼군 가문의 위패를 모신 별실이 따로 있다. 일본에서는 천황이 이름만 있었고 실체가 부실했기 때문에 이곳에는 재실마저
마련하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인들이 이름밖에 남아있지 않은 천황을 떠받들며 하느님 모시듯 하는 것은 겨우 150년동안 만들어진 일본 특유의 허구의 코스프레일 뿐. 사리탑 형식으로 모셔진 누대의 소씨 조상들의 무덤이 숲 속에 잘 정비되어 있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정원으로서의 조형미도 아주 뛰어나다. 일본 3대
묘역의 하나로서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1931년 고종의 서녀庶女 덕혜옹주가 대마도주의 아들과
결혼을 했다. 조선의 황녀가 우리나라 면장 꼴인 대마도주 아들에게 시집 보내진 사실을 기념하는 비가
세워져 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이들 부부는 이혼했고 정신병을 앓던 덕혜 옹주는 일찍 죽었다. 비극의 현장을 보며 숙연한 마음으로 묵념했다.
이즈하라 변두리 작은 계곡 언덕에 있는 3칸짜리 사찰 修善寺수선사를 찾았다. 勉庵면암 崔益鉉(1833~1906) 순국기념비가 외롭게 서 있다. <大韓人 崔益鉉先生 殉國之碑>
면암은 화서학파의 거두 유인석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하였고,
사헌부,사간원 양사를 거쳐 이조정랑을 역임한 정통 관료였다. 당시의 지배세력은 유교적 질서를 회복함으로써 서구 오랑캐의 도전을 물리칠 수 있다는 신념, 즉 尊王攘夷의 정신에 마무르고 있었다. 조선의 지도자들이 세계사의 흐름을 무시하고 주관적 판단으로 대세를 그르친 결과 나라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어쨋거나 최익현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상소문을 올리고, 직접 의병을
조직해 외세에 항거하면서 치열한 선비 정신을 보여 주었다. 1950년 을사늑약과 함께 일본이 조선의
치안권을 강탈하였다. 최익현은 전북 태인에서 유림 40명과
함께 의병을 조직하여 일제의 침략에 맞섰으나 일제는 최익현을 체포하여 쓰시마로 데려갔다. 최익현은 일본에서
나는 음식으로 몸을 부지하는 것이 부끄럽다고 하며 단식을 하다가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시대정신을 대표한 유학자 매천 황현을 기리는 매천사는 전남 구례에 있다. 매천은 난세를 사는 지식인의 부끄러움을 죽음으로 보여주고자 아편을 술에 타서 마시고 자결했다. 자식들에게 남긴 비장한 유서!
<나에게는 자결할 강한 의지가 없다. 그러나 나라에서 선비를 길러온 지 오백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국난을 당해 죽는 자가 없다면
어찌 통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지키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들어 버린다면 참으로 통쾌함을 느끼리라. 그러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 말아라.>
14세에 과거에 급제했던 천재 문인이며
뛰어난 외교관이었던 명미당 이건창은 갑신정변 이후 관직을 내려 놓고 고향인 강화도에서 지내다 젊은 나이에 죽었다. 5대조였던 개성부유수 이시원
형제는 병자호란 때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되자 부끄러움의 증거로 남겠다고 하면서 강화 성루에서 분신.자결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이건창의 숙부와 종형제들은 가산을 모두 팔아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모두 散化산화되고 말았다.
1905년 쓰시마 해협과 독도 근처에서 러시아 함대가 일본 전함에 침몰된 이후로 일본의 조선 지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오늘날 아베 수상이 앞장 서서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부활시키고 있다. 박근혜 정부가 앞장 서서 한국과 군사정보교환조약을 졸속으로 체결한다고
한다. 뒤이어 한미일 군사동맹이 체결될 것이다. 그 이후에 일본은 마음 놓고 한반도에 군사력을 들이 밀수 있게 된다. 면암 최익현이 단식하면서 숨져간 이즈하라 골짜기에서 조국의 하늘에 드리운 먹구름을 보면서 긴 한숨을 내쉰다.
조선통신사들이 묵었던 객관 또한 이즈하라의 대표 유적지다. 조선
통신사는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 준동을 자제토록 일본 조정에 요청하기 위해서 파견되었고, 임란 후에는 전쟁포로와
약탈된 보물을 찾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이후에 일본 정국이 도꾸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쇼군將軍
체제로 안정되자, 쇼군 막부의 초청을 받아 쇼군교체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 명분으로 12차례 다녀왔었다. 300명에서 500명이나 되는 관리,기술자,학자,예술가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6개월에서 1년간씩 시모노세끼부터 동경까지
휘돌아 오는 과정에서 양국간 문명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 기간에 통로가 된 일본의 각 지방 번들은
큰 희생을 치루는 폐단이 있었다. 200여년 이어진 통신사의 역사는 오늘의 한일 관계에서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을 까?
1박2일의
스쳐간 시간 속에 쓰시마 유적지에서 많이 배웠다. 대마도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으며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방향을 깊이 생각했었다.
첫댓글 대마도 탐방기를 그림 그리듯 써 놓았네요. 한 곳 흠을 빼면 참으로 훌륭한 글 솜씨입니다.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