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사실 합격 수기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은 합격하자마자 했었고 올해 봄, 우연히 연락이 닿았던 정서샘께도 수기를 남기겠다는 말을 했었는데 자꾸 깜박깜박하는 치매 증상과 폭설처럼 쏟아지는 과제들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요. 오랜만에 로그인한 다음 메일에 만창5기 학생의 결혼 소식(저보다 어림)을 보고 놀라 저도 모르게 카페에 들어오게 되었고 바로 밑에 올라온 수기에 힘을 얻어 늦은 수기를 남기게 되었어요.
저는 만창5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닥쳤던 개인적인 사정들로 수업을 끝까지 듣지는 못했고 재빠르게 사귈 수 있었던 몇 명의 아이들과 정서선생님의 격려 문자만을 간직한 채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사년이 지나고... 헉 사년이라니 ㅋㅋ 암튼 다시 마음이 바뀌어서...
이제 진짜 얘기 시작할게요.
실기 준비 시간과 방법에 대해서 적어보자면
실기 준비하기 전 저의 스펙(?)
- 소설, 시, 콩트 안 써봤음
- 한국작가: 공지영, 박완서, 정이현 / 외국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 / 너무도 대중적인 독서 취향.
- ‘나는 꼭 소설을 써야만해. 내 글은 특별해.’ 근거 없는 자신감
이렇게 세 가지가 다였는데요. 중요한 건 그때가 11월 중순이었습니다. 시험까지는 잘 쳐줘서 두 달 남은 그런 타이밍이었죠. 저는 이 타이밍에 과외나 학원에 들어가기가 좀 힘들었어요. 기존부터 해오던 학생들이 있고 학원과 과외에도 자리가 없었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기도 했어요. 그때 들었던 게 2달 수업하고 최대가 250? 이 정도였던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어찌어찌해서 배움 받을 곳을 찾아 수업을 받았습니다. 제가 낼 수 있는 수준의 레슨비에 온라인으로만 수업 가능(일을 그만두지 못했었어요.) 모든 조건이 일치했던 그 수업을 2달간 열심히 들었습니다. 1달은 기초적인 이론과 콩트를 쓰는 법, 우리가 써야 할 글의 종류 이런 것들을 배웠고 나머지 시간에는 콩트를 직접 쓰고 고치고 이런 식으로 두 달을 바쁘게 보냈습니다.
구체적으로 정리하자면
일주일마다 최소 한 권의 책을 읽었고 (장편이거나 단편이거나 한국 소설로 한 권)
일주일마다 단편 소설 하나를 분석했고 (묘사, 문장 마음에 드는 부분 찾기. 주제 생각하기)
시험을 5주 앞두고부터 하루에 한 편씩은 콩트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일주일에 최소 한 편, 많게는 세 편정도 콩트를 썼습니다. a4용지 한 장 정도를 말하는 거예요.
제가 합격하는 것에 이 두 달이 얼마나 큰 작용을 했을까요.
제가 합격한 가장 큰 이유는 아주 오래전부터 소설을 쓰고 싶어 했던 마음과 이번에 떨어져도 계속 도전해 언젠간 붙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말이 쉽지 저도 이렇게 긍정적이지 못하긴 했어요. 하지만 걱정많이 한다고 붙여주는 건 아니니까요.
예전에 정서샘께서 해주신 말이 있어요. 햇빛 좋은 주말 오후 혼자 어두운 방구석에 쳐 박혀 방바닥을 긁는 시간들이 다른 일을 하시는 분들에겐 의미 없는 시간일지도 모르지만,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우리들에게는 설사 그 시간에 단 한자도 쓰지 못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내 글에 빛이 되 줄 의미 있는 시간인거라고요. 다들 최소한 저만큼은(저는 불타오르는 미친 열정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 수많은 이유 중 한 가지 때문에 이번에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공채를 기다릴 필요가 없잖아요. 나이 제한 따위는 더더욱 없잖아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공모전과 신춘문예를 생각해보세요. ㅋㅋ 그때 쓸 작품 미리 써 논다고 생각하면 시간을 저축하고 있는 거죠 뭐.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과제로 내야 할 글도 엄청나니 미리 써 논다는 생각으로 ㅋㅋ 제가 합리화를 좀 잘하긴 합니다. 하지만 아예 근거 없는 말은 아니잖아요. 시간과 나이 제한이 없다는 건 매일 새벽을 하얗게 지새우며 어둠과 대화하는 글 쓰는 이들의 특권이...겠죠? 어쨌든 전 그렇게 생각해요.
본론
실기
밝은 방, 열린 창문, 노랫소리?? 이게 맞나요? 아마 맞을 거예요.
현장에서 창작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모험 같았고 워낙 글을 느리게 쓰는 스타일이어서요. 그래서 저는 총 다섯 편의 콩트를 준비해갔는데요. 문장이나 묘사 같은 건 어떻게 했는지 잘 생각이 안나니 스토리를 어떻게 변형시켰는지에 대해서 봐주세요.
원글
식빵모양으로 생긴 언덕에 앉아서 누군갈 기다리는 눈먼 여자가 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여자는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근처에 사는 벙어리 청년도 그 여자 소문을 듣게 되고 그곳을 지나던 밤 여자에게 다가간다. 호기심 반, 여자를 무너뜨리고 싶은 마음 반 정도의 심리를 갖고 있다. 여자를 보고 누군갈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청년은 여자의 몸을 뒤지고 여자를 겁탈하려는데 여자는 냄새를 맡는다. 여자가 기다리는 자의 냄새이다. 청년에게서는 식빵 냄새가 난다. 청년은 빵집마다 빵을 배달해주는 트럭 일을 하고 있다. 소리 지를 줄 알았던 여자가 아빠를 부르자 청년은 자신도 모르게 도망가 버린다. 얼마 후, 청년은 여자를 또 찾아온다. 청년이 여자를 겁탈하려했던 게 소문이 나 트럭 일에서도 해고당한 상태이다. 잃을 것 없는 청년은 식칼을 들고 여자가 있는 곳을 향해 언덕을 오른다. 청년이 여자에게 다가가 여자를 쓰러트리려는 순간 여자는 청년의 모든 냄새를 마셔버리려는 것처럼 청년을 꼭 끌어안는다. 절대 놔주지 않는다. 청년은 칼을 떨어트린다.
변형
언덕-> 어두운 방 (청년이 나타나면서부터 밝은 방으로 변해요. 아비의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죠. 여기서 제가 포인트를 준건 여자가 장님임에도 불구하고 느낀 밝은 빛입니다.)
언덕-> 열린 창문 (여자는 일부러 창문을 열어 놓고 있어요. 아비를 기다리기 때문이죠. 청년은 그 열린 창문으로 여자를 처음 보게 됩니다.)
식빵냄새-> 노랫소리 (여자의 아비가 즐겨 부르던 노래를 청년이 부릅니다. 그 뒤에서부터는 앞의 내용과 같아요.
제가 잡은 주제는 그리움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자와 돌아오지 않는 자. 남겨진 자는 그가 돌아올 거라는 한 줄기 희망을 찾으며 늙어가는 거예요. 하지만 떠난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않죠. 돌아와 봤자 내가 기다리던 그 사람일 수는 없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변하니까.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면접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면접 후기라고 치면 쫙 뜨는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두 준비하려했으나 너무 많았으므로 큼직한 것 몇 가지만 준비한 뒤 면접을 보러 갔습니다. 실기보다 만만하게 본 건 사실이에요. 필기에서는 떨어져도 면접에서는 합격했던 저이기에... ㅋㅋ 하지만 예대 면접은 제가 경험했던 면접과는 달랐습니다.
면접은 혼자 봤구요. 교수님들이 쭉 앉아계시는데 어찌나 멀리 있으시던지. 양쪽 시력 0.8인 저는 교수님들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질문도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떨었냐면... 면접 때 말한 모든 건 다 사실이 아니었어요. 좋아하는 작가도 작품도 쓰고 싶은 글도. 왜 저런 대답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말을 했으니까요.
1. 좋아하는 작가 다섯 명 말해보세요.
정이현, 김연수, 조경란, 에밀 아자르, 한강작가님을 좋아합니다.
(전 실제로 한강 작가님을 좋아하지만 웬만하면 면접관은 안 말하는 게 좋아요. 너무도 아부 같아서 서로 민망합니다.)
2. 작품 다섯 가지요.
너는 모른다, 풍선을 샀어, 채식주의자, 자기 앞의 생
(계획대로라면 김연수의 모두에게 복된 새해를 말해야 하는데 너무 떨리고 생각도 안 나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했습니다. 근데 아무도 안 웃으시더군요.)
3. 조경란 작가가 왜 좋아요.
묘사를 잘해서 좋고 조경란 작가의 글을 읽으면 이미지들이 바로 연상돼서 좋다.
(사실 그녀의 작품 곳곳의 철학 얘기와 은근히 감성적인 부분이 좋았지만 뭐 어쨌든 좀 이상한 대답이죠. 저건)
4. 가장 기억에 남는 묘사 구절을 말해보세요.
(완전 패닉) 마침 전날 밤 싸이월드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던 정이현 작가의 소설 몇 구절이 생각나서 말했습니다. 정이현 작가 꺼 말하면 안 되냐고. 그니까 남자 교수님이 약간 싫어하시면서 아 왜 조경란을 물었는데 정이현을 말해... 이러시는데 한강 교수님이 말해보라고 해주셨어요.
5. 어떤 소설을 쓰고 싶어요.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싶다. 시대의 흐름에 맞추거나 조금 더 앞서나가서 여성을 바라보고 그런 여성을 중심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하고 끝났습니다.
결론
서울예대 문창과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등 떠 밀려 온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거에요. 아, 어쩌면 이건 서울예대의 특징일 수도 있겠네요. 짱 멋있지 않나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우리는 모두 그런 주체성 가득한 사람인 거니까요.
아 너무 급마무리이지만 이해해주세요. 너무 지쳤어요... 이런 열정으로 소설을 써야할텐데... ㅎㅎ
어쨌든 모두들 건필하시길 바랄게요. 진심으로요.
그리고 선생님.
입학하기 전까지만해도 가끔 이곳에 와서 선생님이 남기신 글을 읽었어요. 사실 저는 만창이라 하기에도 애매하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제가 너무 오랫동안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고 ㅎㅎ 앞에 썼듯이 그 당시에는 개인적인 일 때문에 예대 진학을 포기했었는데, 정말 그 때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고 저에겐 중요한 문제였는데. 사실 지금은 그 일이 생각나지 않아요. 집안일이었겠죠. 그런데 그 이상으로는 생각이 안 나요. 그런 일 따위는 저에게 이제 큰 일이 아니게 돼버려서 그런 것 같아요.
아 겨우 이 게시글 하나 남기는데 몇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어요. 낮에 시작한거같은데 밤이 되다니. 쓰다가 가만히있다가 쓰다가 멍때리다가 ㅋㅋ 시간 보내는 거 하나는 최고로 잘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루종일 문장 한 개를 쓴 적도 있어요 -_- 이틀동안 앉아서 한 문단도 못 쓰기도 했어요. 으으.ㅋㅋ
하지만 이 시간들이 빠르게 지나간 만큼 지금 느끼는 모든 것들은 또 아무것도 아닌 게 되겠죠. 지금 죽을 것 같은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되려면 그때는 더 죽을 것 같은 일이 생겨야 되는 걸까요. 익숙해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는 것 같아서요. 다만 모든 일이 커지고 있을 뿐. 눈덩이는 녹지 않고 굴러굴러 점점 커져만 가요. ㅎㅎ 저는 매일매일 냉소적으로 변해가고 있슴다.
쓰는 글마다 짓밟히고 자존심은 매일 무너지고 다가오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은 커져가지만 ㅎㅎ 그래도 수업은 재밌어요. 학교가 아니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도 주절거리지 못했다면 아마 전 4차원으로 떠났을것같아요.
선생님은 언제쯤 이 글을 읽으실까요.
ㅎㅎ 그때가 언제이건간에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이 아프시면 카페는 아예 안 들어오실 것 같은 예감이... 혹시 비형이세요? ㅋㅋㅋ 아 궁금해졌어요!
아무튼 선생님
점점 추워지는데 몸조심하시고 아프지 마세요.
늘 감사하구요. 그만큼 열심히 쓰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가 더 많을 것이므로 방바닥이라도 긁겠슴니다 ㅎㅎ
잘 지내세요
그럼 모두 안녕히~~ 오르브와 :)
첫댓글 두 달에 250만원 하는 데는 대체 어떤 곳일까......문득 궁금. ^^ 렉트가 만창에 머문 기간은 채 한 달이 안 되었지? 근데도 그 아슬아슬했던 표정이며 방황의 아우라가 아직도 생생하다. 천상 작가체질인데, 무사 안착해서 정말 다행이고 늦었지만 축하한다 녀석아.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할께. 뭔가 해낼거야. 그리고, 나 비형 맞아.. 어떻게 알았데? ^^ 카페에 월 말과 월초에 걸쳐 3-4일 정도는 늘 들어와. 이젠 앓는다고 안 올 수 있는 처지가 아냐. ㅡㅡ;; 마침 늦지 않게 이 글을 읽게 된 것도 너무 다행스럽다.
그치만 내가 뭘 해 준게 너무 없어서... 그럼에도 후배들을 위해 길고 자세한 후기를 남겨주다니...너의 감사를 받을 자격이 내게 영 없는 것 같다. 외려 내가 고마울 뿐이야. 너희들은 왜 이렇게 다 착한거냐... 난 왜 이렇게 기분 내키는 대로 숨었다가 나타났다가...결국 네들 필요할 땐 영 만나지지 않는 이기적 인간인거냐... 또 자학이 스멀스멀... ㅍㅎ 그래서 난 이제 수업을 안 한단다. 3년째다. 근데 너희들은 그 3년 사이에도 이렇게 나타나 글을 남긴다. 아....너희들은 왜 이렇게 다 착한거냐?
잘 읽었습니다. 합격 축하드리고.. 좋은 글 많이 쓰셨으면 하네요.
정서쌤 말씀이 제게도 깊은 울림을 주는군요.
다시 한 번 축하합니다. ^^
와 쓰신 내용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오네요!
장편소설로 완성하시면 좋을 것 같기도ㅋㅋㅋ
만약에 장편소설로 만들어 출간하신다면 정말로 꼭 사서 읽고 싶을 정도로 재밌는 내용이네요
착한 렉트님. 평생 작가로 사실 것 같은 삘! 축하합니다. ^^
아 문예창작학과! 그 전에는 습작 한번도 안 해보고 두달동안의 습작으로 일궈낸 실기작품이라구요? 반성하겠습니다
합격수기 감사해요!
무엇보다 그냥 작품이 너무 와닿는 군요 ..... 감사합니다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힘이 되는 수기에요. 글 안 지워주셨으면 좋겠어요..ㅋㅋ 합격 축하드려요!
헐... 11년도에 제가 댓글을 달았었네요. 고등학교 때.. 서울예대 1차붙고 면접 준비하면서 이 글을 본 것으로 기억해요. 면접에서 떨어졌었네요.
5년이 지난 지금, 그동안 서울예대에 계속 지원했고 이번에 1차 붙어서 면접 준비 중 검색을 통해 또 보게 되었네요. 신기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