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동 풍수학회 간산일지
글쓴이- 방원주
■ 일 시 : 2014년 4월 12일 (토) ~ 13일 (일), 1박2일
■ 장 소 : 광주(충장사), 강진(다산초당, 영랑생가, 청자도요지), 보성(녹차밭)
당초에는 지난 3월 29일 출발 예정이었으나 월말이라 사업하신 회원님들의 편의를 위해 한차례 일정을 연기하여 드디어 오늘 출발 하게 되었습니다.
일정을 연기하는 과정에서 참석예정이시던 많은 회원님들이 개인일정이 중복되어 못가시게 되고 단촐한 인원만이 참여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8시 10분 학회를 출발한 승합차가 부평IC를 진입하여 외곽순환고속도로 장수IC ~ 월곳IC ~ 제2서해안고속도로 ~ 서평택JC ~ 서해안고속도로 ~ 당진JC 에서 당진~대전간 고속도로 예산휴게소에 11:00 도착하여 화장실만 본 후 다시 이동 합니다. 공주JC에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 호남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여산휴게소에 도착한 시간이 12:00 . 여산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 합니다. 다들 이동간 차안에서 막걸리, 쑥떡 등을 드셔서 아직 식사 생각이 없으시다 하십니다. 그래서 우동에 싸 간 김밥으로 점심식사를 해결 하였습니다. 여산 휴게소에서 우동, 김밥으로 점심식사 식사후 약40분의 휴식을 취한뒤, 12:40 분 여산휴게소를 출발하여 광주 무등산 자락에 있는 임진왜란 의병장 김덕령장군을 모신 충장사에 도착한 시간이 13:40 광주의 상징인 김덕령 장군에 대해 간략히 살펴 보기로 합니다. 다음은 한국의 풍수지리에 나오는 원문 내용을 인용 합니다.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 1567~1596 자는 경수, 시호는 충장공)은 1568년 (선조 원년) 12월 29일 광주시 충효동(옛 석저촌)에서 아버지 김붕섭(金鵬燮)과 어머니 남평반씨 사이에서 6남매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1587년 종조부 김윤제와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월 형 덕홍(德弘)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수백의 군사를 이끌고 고경명과 함께 전주까지 진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형의 당부에 의해 곧 바로 귀가하여 노모를 봉양하였다. 그 후 형 덕홍은 의병장 조헌(趙憲)이 이끈 금산(錦山)싸움에서 전사하였으며 이듬해 8월에는 노모마저 세상을 떠났다. 장군은 아우 덕보(德普)에게 집안을 맡긴 다음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 현감 이귀 등의 천거로 선조로부터 형조좌랑(刑曹佐郞)의 벼슬에 임명되었다. 1596년 7월 충청도 홍산(鴻山, 지금의 夫餘)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전라도 운봉까지 진군하였으나, 이몽학이 관군에 패하여 참수당하자 환군하였다. 동년 8월 장군을 시기하는 이시언(李時言간)과 김응서(金應瑞) 등이 장군을 이몽학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모략으로 투옥되어 20여일간에 걸친 6차의 형문(刑問)과 수백회에 달하는 혹독한 고문으로 정강이 뼈가 부러지고 몸의 피부는 완전히 벗겨진 끝에 9월 15일 29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1778년 정조 12년 충장공(忠壯公)의 시호(諡號)가 내려지고 장군이 태어난 마을 석저촌(石底村)을 충효의 고울이라하여 충효리(忠孝里, 지금의 忠孝洞)로 바꾸도록 하였다. 1975년 2월 장군의 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국가와 후손들이 무등산에 충장사를 세우고, 그를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광주 중심지의 상징도로인 충장로 입구부터 광주일고를 지나 경열로에 연결되는 도로를 충장로로 부르고 장군의 나라 사랑의 정신을 추모하고 있다. 김덕령 장군의 묘소 다음은 한국문화진흥원의 한국의 풍수에 나오는 자료를 원문 그대로 인용 합니다. 충장공 김덕령 묘소의 주산을 살펴보면 무등산(1186.8m)에서 출맥하여 기복과 과협으로 꼬막재를 넘어 충효동의 561m봉우리를 기봉한 후 다시 과협으로 배재를 넘어 446m의 봉우리를 힘차게 기봉하였다. 이 봉우리가 김덕령 묘소의 주산이다. 이곳은 유혈의 혈장을 갖춘 곳이므로 주변으로부터 노출되어 있어 장풍이 중요한 곳이다. 그러나 그 용맥 최상단에 부친인 습득공 김붕섭 내외의 묘가 자리잡고 있는 데 너무 높아 좌우의 청룡·백호가 혈보다 낮아 바람에 심하게 노출되어 있다. 그 아래에 김덕령의 고조부모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김덕령 장군 고조모의 묘를 형국에 비유하자면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갈마음수 형국으로 보기도 한다. 갈마음수의 형국의 혈 앞에는 마땅히 물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물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재 유물관 앞 넓은 공간에 작은 저수지가 있었는데 충장사를 건립하면서 저수지를 메워 버렸다고 한다. 고조부모의 묘가 있었을 당시에 저수지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이에 풍수발복에 대한 이야기는 명당이 고조모 묘로 인해 훌륭한 자손이 태어났지만 부모 묘로 인해 발복이 반감되었다고 전한다. 이 용맥을 살펴보면 시각적으로는 辛戌룡으로 보이나, 통맥을 적용하여 살펴보면 庚兌룡으로 오다가 亥룡으로 꺽어졌다가 다시 庚兌룡으로 坐入首 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조성되어 있는 묘소 뒤에서 바라볼 때 묘소를 기준하여 좌측 상단이 혈처로 보인다. 그곳에서 酉좌로 놓아야 파구도 갑묘파로 길파가 된다. 그러나 현재 고조부모 묘소는 辛坐로 되어있으며, 辛坐에 甲卯破는 파구가 황천살이므로 흉파가 된다. 그리고 충장공 김덕령 묘소의 오른쪽으로 여러 기의 묘소가 조성도어 있는데 이들 묘들은 일단 맥이 흐르지 않는 계곡처이기 때문에 혈이 형성되기 어렵다. 김덕령 묘소는 용맥이 내려오다 끝난 지점에 자리잡고 있어 땅의 생기는 상당히 약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조부모 묘소와 김덕령 묘소는 좌·우의 청룡·백호가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한 높이로 잘 환포하고 있어 장풍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충장사(忠壯祠) 충장사(忠壯祠) 문화해설사로 부터 해설을 듣고 있습니다. 김덕령 장군의 묘소가 포함된 선영 辛坐乙向 묘소 전면 유물전시관 묘소 탐방을 마치고 묘소옆 숲에서 막걸리 한잔으로 음복 합니다. 충장사 탐방을 마치고 15시30분에 충장사를 출발하여 인근에 있는 담양 소쇄원에 잠시 들릅니다. 충장사에서 소쇄원까지는 약5~10분 소요 되었습니다. 담양 소쇄원 소쇄원 안내도 소쇄원 입구 소쇄원 입구 (매표소) 소쇄원 입구에서 기념사진만 찍고 왔습니다 소쇄원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정원으로 이미 젊은이들 사이에는 아는사람은 다 압니다. 그러나 우린, 그냥 가자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매표소 입구에서 사진만 찍고 그냥 왔습니다. 이제 다음 행선지인 보성차밭으로 떠납니다. (현재시각이 16:15분) 무등산을 동남으로 끼고 돌아 화순읍을 거쳐 29번 국도를 타고 보성 녹차밭에 17:30 에 도착 합니다. 뒤로 보이는 건물이 예전에는 녹차 전시관이었고 판매도 하였으며 녹차밭에 직접 들어가서 사진도 찍고 잎도 따 보고 하였는데 옛 흔적은 하나도 없어 졌네요. 다른곳에 홍보관이 새로 생겼습니다. 녹차밭에 가자할땐 언제고 녹차밭에 도착하니 뭐가 그리 바쁜지 다음 행선지로 빨리 가자고 합니다. 녹차판매장에 들러 공짜로 녹차 한잔씩을 얻어 먹고 사탕 몇봉지 사서 차 값을 대신하고 장흥으로 저녁먹으러 합니다. (18:00) 장흥의 '정남진 토요 한우시장'이 KBS 예능프로그램 1박2일 촬영후 최근 성황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는길은 험난(?) 하였습니다. 네비에 정남진이라고 쳤더니 정말 한반도 정남쪽의 정남진 바닷가에 도착하였는데 놀랍게도 한우는 커녕 사람구경도 하기 힘든 조용한 바닷가 마을 이었습니다. 당황스럽기 그지 없네요. 네비게이션에 다시 입력했더니 여기서 28KM 떨어진곳, 으악~ 장흥읍에 도착한 시간이 문닫기 직전 아슬아슬한 7시 30분입니다. 1층의 식육점(정육점)에서 고기를 산 후 2층의 식당에서 구워먹는 시스템입니다. 400g 등심 1팩이 대략 28,00~33,000원 정도, 등급은 거의 1등급이네요. 3번째 등급인거 다 아시죠? 마블링이 별로 없습니다. 정육식당 시스템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정읍 산외면의 한우마을 고기보다 비싸다고 하였더니 주인 아주머니 하신 말씀이 정읍 산외는 거세한 소 이고 장흥은 한우라고 하신다. 고기맛은 사실 별로 였다. (워낙 마블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마블링 적은 고기는 별로라고 인식) 한우고기, 키조개, 버섯 이렇게 삼합으로 쌈을 싸서 먹는게 별미 입니다. 모두들 배불러서 많이들 못 드십니다. 1등급 소고기 (1++이 제일 좋은거 다 아시죠? 그 다음이 1+, 그리고 1등급, 결국 3등급이죠) 거나하게 취해서 숙소까지 탐진강 다리위를 걸어서 건넙니다. 다리 아래 탐진강가에 조성된 휴식처에서 야간 사진 건너편의 장흥읍의 정남진 토요 한우 시장 아침 6시에 기상하여 8시에 식사하고 8시25분 장흥을 뒤로 하고 강진으로 출발 합니다. 약20여분을 달려 강진 영랑생가에 도착 합니다. 영랑 김윤식에 대하여 잠시 살펴 봅니다.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휘문의숙에 진학하였다. 수학중 기미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감추어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동년 4월 4일 강진장날 만세운동을 기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적을 두었으며 용아 박용철 선생과 친교를 맺었다. 1921년 일시 귀국하고, 1922년 다시 일본에 건너가 청산학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수학중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시문학 창작활동을 하였다. 1931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선생 등과 『시문학』 동인으로 시작활동에 참여하여 동년 3월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 등 4행 소곡 6편을 발표하였고, 1935년에 『영랑시집』을 발간하였다. 1950년 6·25동란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은신하였으며 9·28수복작전 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아 동년 9월 29일 서울 자택에서 4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대표시로는 '모란이 피기 까지는', '오메 단풍들겠네', '내마음을 아실 이' 등이 있습니다. 아침까지 비가 부슬부슬 옵니다. 영랑생가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사의재 (정약용선생의 강진 유배 초기 거주지인 주막집) 모란(목단)입니다. 기념관 영랑생가를 탐방하고 이제 이고장 출신인 이광호 선생댁을 방문하러 성전면 금당리로 향합니다. 강진에서는 1금당(성전면 금당리) 2항촌(도암면 항촌리)이란 말이 있습니다. 마을의 세(勢)를 말 합니다. 이광호 선생 생가 (이광호 선생은 역사속의 인물이 아니고 우리학회 회원 이십니다) 이광호 선생은 역사속의 인물이 아니고 우리학회 회원 이십니다) 집앞의 금당못 (이광호 선생 조부께서 인력으로 파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제 이번 여행의 테마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인 '다산초당'으로 이동 합니다. (10:20) 10여분을 달려 다산초당 유물전시관에 도착 하였더니 이곳 해설사로 활동중인 다산 연구가 윤동옥씨(방원주 회원 친구)가 반가이 맞아 줍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하여 살펴 봅니다. 정약용의 일생은 크게 성장ㆍ수학기(1762~1783년), 사환기(仕宦期, 1783~1899년), 유배기(1801~1818년), 귀향기(1818~1836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다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1762년 자신이 태어난 마재에서의 유ㆍ소년 시절과 1776년(정조 4년) 상경하여 증광생원시에 합격한 1783년(정조 7년)까지의 시기다.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馬峴里)1)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현재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다. 그의 탄생지인 마재는 천마가 비동하는 듯한 철마산(鐵馬山)을 등지고, 남한강과 북한강ㆍ초천강(苕天江)이 합류하는 풍치 좋은 경승지다. 그 강산의 풍경이 매우 아름다워 그의 시문에는 향토미가 자주 반영되었다. 그의 가계는 근기남인 중 시파(時派)2)에 속했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은 일찍부터 벼슬하여 지방 수령을 역임하다가 1762년(영조 38년)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왔다. 바로 이 해에 정약용이 출생했으므로 그의 아명을 귀농(歸農)이라 했다. 본관은 나주 또는 압해(押海)이고, 이름은 용(鏞)으로 생략하여 부르기도 했다. 자는 미용(美鏞)이고, 호는 사암(俟庵), 여유당(與猶堂), 열초(洌樵), 죽옹(竹翁), 탁옹(蘀翁) 등 많았지만 다산(茶山)이 가장 보편적으로 쓰였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의 명문으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후손이며, 그림으로 이름을 떨친 윤두서(尹斗緖)의 손녀이다. 제2기라 할 사환기 중 1783년 22세로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 1789년 28세로 대과에 합격하기까지의 전반기는 역시 수학기라 생각된다. 당시 성균관 유생인 그의 뛰어난 학식과 재주를 아끼던 정조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식견과 포부를 폈다. 1789년(정조 13년) 이후 1800년(정조 24년)까지 10여 년은 정약용의 전성기였다.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에 선발되어 젊은 문신으로서 학문의 깊이를 더 했고, 과학기술 등 신문명에 관심을 가진 북학파와 지적 공감대를 가짐으로써 국리 민복을 위한 사업에 자신의 과학 지식과 재능을 발휘했다. 한강에 배다리를 설계ㆍ가설하고, 수원성 축조에 성제설(城製說)을 제안하여 거중기를 창제ㆍ실용화함으로써 비용을 절감했다. 농촌의 비참한 실정을 시로 표현하고 탐관오리를 색출ㆍ처단하면서 진보적인 농촌 경제 개혁안을 구상하게 된 것이다. 그는 반대파의 공작에 걸려 지방 수령으로 나가 있을 때도 지방 행정의 치적을 올렸다. 제3기인 1801년 40세부터 1818년 57세까지의 유배기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참담한 시절이었지만, 그 고통의 세월을 학문의 대성기로 전환하는 위대성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우문정치(右文政治)를 표방하고 청요직을 재건하여 노론청류(老論淸流)를 중심으로 탕평 정책을 추진, 남인과 소론도 정권에 참여시켰던 정조가 1800년 승하하자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고 정적을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 1801년 순조가 즉위하던 해의 신유사옥이다. 순조가 어리다는 이유로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많은 시파계 인물을 제거했는데, 이때 남인 중의 상당수 인사가 천주학을 신봉한다는 이유로 숙청당했다. 겨우 죽음만 모면한 채 경상도 장기에 유배되었다가 곧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처음 7년은 읍내의 주막에서 보내다가 만덕사 옆에 있는 처사 윤박(尹博)의 정자로 옮겨 다산정(茶山亭)이라 이름하고 학문에 열중했다. 정약용의 대부분 업적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고,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이상적 개혁안을 제시한 것도 이 시기였다. 그 지방 학생들의 교육에도 열의를 보여서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는 틈틈이 많은 제자를 양성했고, 지방 문화 창달에도 기여했다.
사후 1661년 현종 2년 장군이 돌아가신지 65년 만에 그 억울함이 밝혀져 관직이 복고되었으며 1668년 현종 9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고 1678년 숙종 4년 벽진서원(碧津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789년 정조 13년 장군의 의정부 좌찬성에 가증(加增)되었다.
주산에서 횡룡한 룡이 위이굴곡으로 행룡하다가 개장천심을 하여 불거져나온 용맥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고조모 묘소도 정혈처에 자리잡지 못하고 다소 빗겨진 곳에 조성되어 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고향인 강진에서 대한청년단을 이끌었고, 1948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였다. 1945년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7개월간 일했다.
현재 보전되어 있는 영랑 생가는 그 후 몇 차례 전매되어 일부 원형이 변경되었으나 1985년 12월에 강진군에서 이를 매입하여 원형을 복원하고 이의 유지, 관리를 맡고 있다.
정약용이 농민을 위한 정치ㆍ경제 개혁안을 구상ㆍ발표한 것은 33세 때 암행어사로서 경기도 각 지방을 순찰하면서 농촌의 참상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1797년 36세 때 황해도 곡산부사로 나가 있을 때는 지방 수령 2년 만에 민정, 재정, 형정 제 방면에 크게 치적을 올렸고, 왕권 강화와 국정 쇄신이라는 그의 기본 경세 사상을 지방 행정에 구현하려고 애썼다. 그의 강직한 성격은 백성의 사랑과 칭송을 받았지만, 조정에서는 시기와 견제의 대상이었다. 정조대 남인 시파의 중추적 존재였던 채제공(蔡濟恭), 이가환(李家煥)을 계승할 핵심 인물로서 그가 부상하자 노론 벽파의 견제가 생겨난 것이다. 금정(金井)찰방과 곡산부사로 나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이 당시 교인이 아니었지만, 그의 형인 정약종(丁若鍾)과 친척인 이승훈(李承薰), 황사영(黃嗣永) 등이 모두 천주교인이었고, 노론 벽파의 시파 타도라는 정치 구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시기에는 사대부로서 실천의 기회인 벼슬길은 막혔지만, 인근의 학자들과 당색을 초월한 교유를 하면서 강진에서 미처 못다 한 학문 연구를 마무리지었다. 향리에서의 생활 중 한두 차례 벼슬의 기회가 있었지만 사퇴했고, 『상서 尙書』 중심의 경학 연구에 치중했다.
정약용은 1836년(현종 2년) 2월 22일 오전 8시경 마재 본가에서 운명했다. 그 날은 부인 풍산 홍씨와의 회혼일로서 자손과 친척들이 모여있을 때였다. 4월 1일, 본가 뒤편 산자락 자좌오향(子坐午向)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다산연구가 윤동옥씨의 해설
유물전시관에서의 해설을 듣고 다산초당으로 향합니다
초당으로 오르는길에 다산의 제자 묘 (귤동마을의 해남윤씨 후손들의 선조)
다산초당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묻혔다 합니다.
다산초당 현판 (추사 김정희 글씨)
천일각
강진만의 조망이 좋다, 다산 시절엔 없던것으로 1975년 강진군이 조성한 것이다.
윤동옥씨의 해설은 한편의 전기를 읽는것과 같았다.
많은 감동을 느꼈다. (개인 마다 다르겠지만...)
감사의 표현으로 학회교재인 '생활과 풍수지리" 한권을 증정 한다.
이 길은 선생께서 백련사 혜장선사를 만나러 가던 길 이다.
(백련사로 넘어 가는길)
백련사 (과거 해남 대흥사의 큰절)
다산초당에서 숲길로 약500여미터를 걸으면 백련사가 나옵니다.
강진만을 배경으로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탐방을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강진읍으로 출발 합니다.
강진의 명물 짱뚱어탕을 먹으로 갑니다.
강진에서는 유일한 오랜전통의 맛집인데, 뭔가 좀 처음부터 삐걱 거리네요.
주인 할머니의 투박한 전라도식 손님 대응 때문에 문제가 생긴것입니다.
특별히 악의가 있는것 같지는 않은것 같은데 평소 일상적인 말투가 익숙치 못한 우리의 신경을 살짝 건드립니다.
안내한 나로써는 무척이나 당황스럽네요. (다음에는 손님 데리고 오지 말아야지)
짱뚱어탕 식당 (왜 동해회관인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점심을 먹고 당초 일정은 땅끝 관광과 해남 고산 윤선도 종택을 방문할 예정 이었는데 강진 청자도요지 탐방으로 일정을 급 수정 하여 도요지가 있는 마량으로 향합니다. (14:25)
강진 청자 도요지
청자 도요지 주차장에서 마지막 남은 막걸리 처리 합니다.
이렇게 2014년 정기간산은 마무리 합니다.
16:35분 강진 청자 도요지를 출발하였습니다.
버스 전용차선을 탈 요량으로 서해안 고속도로를 마다하고 호남고속도를 진입하여 신나게 오지만
어쩐일인지 전용차로가 오히려 더 밀리네요.
신갈까지 전용차로 혜택은 전혀 보지 못하고 인천 극동풍수지리학회에 밤 10:45에 도착 하였습니다.
차가 밀리지 않은것이 못내 억울하네요.
그냥 서해안고속도로 타고 왔으면 1시간은 더 빨리 왔을텐데...
누구야? 전용차선 타야 한다고 잘난체 한 사람...
첫댓글 소중하고 보람찬 간산 공부 되셨군요.
하지만 소쇄원도 둘러보시지요 1박2일에 촬영장도 있답니다.
저의 고향이 이랍니다.
마치 제가 동행이라도 한것처럼 상세한 여행일지였습니다.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정말 의미있는 간산이었습니다.
간산일지 기록해주신 방원주 선생님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잘 간직하도록 하겠습니다.